관자요록
제11장 재편되는 북방
4. 민심은 떠나건만...
여희의 발악
여희가 병들어 누워 있는 진헌공 앞에 앉아 눈물을 찔끔거리며 말했다.
"상감은 전처의 자식 복이 없어 엄청난 꼴을 당하셨고 그래서 친척들까지 추방하고 첩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셨습니다. 만일 상감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첩은 여자 몸이며 해제는 아직 어리니 만일 다른 공자들이 타국의 힘을 빌어 쳐들어온다면 첩은 누굴 믿고 살아야겠습니까."
진헌공이 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인은 너무 근심마오. 태부 순식이 있으니. 그는 충신이라. 원래 충신은 두 가지 마음을 품지 않소. 내 어린 세자를 그에게 부탁하겠소."
다시 진헌공은 순식을 불렀다.
"과인이 듣건대 선비의 근본은 충(忠)과 신(信)이라 하니, 무엇을 충과 신이라고 하오?"
순식이 대답했다.
"전력을 다하여 주인을 섬기는 것을 충이라 하며, 죽을지언정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을 신이라고 합니다."
"과인은 어린 세자를 태부에게 부탁하오. 태부는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마오."
순식이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 목숨을 걸고 신하된 자로서 충성을 바치지 않으리이까."
진헌공도 추연히 눈물을 흘렸다. 이 때 여희의 흐느껴 우는 소리도 장막 뒤에서 일어났다. 수일이 지난 뒤 진헌공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여희는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원래부터 심성이 강한지라 재빨리 헤아려 해제의 손을 잡고 나아가 어린 아들을 순식의 앞으로 보냈다. 이 때 해제의 나이가 겨우 11살이었다. 순식은 주공의 유명대로 해제를 상주로 모셨다. 모든 신하들은 자기 위치에 각기 자리를 잡고 임금의 죽음을 조상하는데 그 울음소리가 공허했다. 여희는 진헌공의 유명대로 순식에게 상경 벼슬을 내리고, 양오, 동관오에게 좌우 사마의 벼슬을 가하는 동시,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국내를 순행하게 하는 한편 장차 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시켰다. 그리고 모든 일은 일단 순식의 결재를 받아 실행하도록 분부했다. 그리고 다음 해를 새 군주의 원년으로 삼고, 모든 나라 제후에게 부고를 보냈다.
해제의 죽음
순식이 공자 해제를 상주로 세우고 발상하자, 모든 신하들은 궁 안으로 들어가서 곡했다. 그런데 노대신 호돌만은 병들었다 핑계하고 자리에 누워 궁중에 가지 않았다. 이극이 비정부에게 물었다.
"해제가 군위에 오르면 망명중인 두 공자는 장차 어찌 되는 것이오?"
비정부가 대답했다.
"워낙 이 일은 순식의 생각 여하에 매여 있소. 그러니 우리 함께 가서 순식의 속마음을 알아봅시다."
이극과 비정부는 한 수레에 같이 타고 순식의 부중으로 갔다. 순식은 마침 부중에 있어 그들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했다. 이극이 곧바로 물었다.
"주상은 세상을 떠나셨고, 중이, 이오 두 공자는 타국에 있고, 그대는 지금 이 나라 대신이 되었소. 이제 장자인 중이를 모셔다가 군위에 모시지 않고 첩의 소생을 세우면 어느 누가 복종하겠소. 또 두 공자의 일당은 여희 모자 때문에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소. 이제 주상께서 세상을 버렸으므로 그들은 반드시 귀국하여 군위에 오를 계책을 세울 것이오. 마침내 진, 책 두 나라가 밖에서 두 공자를 후원하고 백성들이 국내에서 응한다면 그 대는 장차 어찌하려오?"
순식이 대답했다.
"나는 선군의 부탁을 받고 해제의 스승이 되었던 것이오. 나는 그 외의 것은 모르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끝까지 나를 반대한다면 나야 별수 없이 죽음으로써 선군의 은혜에 보답할 결심이오."
비정부가 순식의 말을 듣고 딱하다는 듯이 곁에서 충고했다.
"그래서 목숨을 바치면 뭘 하오. 나라를 위해서라도 생각을 돌리도록 하시오."
비정부는 강경하게 주장했다. 그러자 순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이미 충(忠)과 신(信)을 선군께 맹세했소. 비록 죽는 것이 아무런 이익도 없을지언정 어찌 선군과 언약한 맹세를 저버릴 수야 있겠소."
두 사람은 거듭거듭 권했으나 순식의 결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설득하는 일을 포기하고 순식의 부중을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서 이극이 비정부에게 말했다.
"나와 순식은 오랫동안 교류하여 서로를 잘 아는 터이므로 이해로써 거듭 충고했건만 그렇듯 고집을 부리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비정부가 말했다.
"그는 해제를 섬기고 우리는 중이를 섬기니, 피차 결심이 각각 다를 뿐이오. 일이 이쯤 된 바에야 세상에 해서 못할 일이 또 어디 있겠소."
비정부와 이극은 무엇인지 심각한 표정으로 비밀히 서로 속삭였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심복 부하인 역사 한 사람을 불러들여 뭔가 지시를 내렸다. 이튿날 그 역사는 변장하고 시위 졸개들 속에 끼어 궁중으로 들어갔다. 시위 졸개로 가장한 역사는 날카로운 단검을 숨기고 댓돌 아래서 잔심부름을 하며 바로 빈청 위에 있는 어린 상주인 해제를 노렸다. 어린 해제가 곡을 하려고 짚방석 위로 엎드렸을 때였다. 역사는 순간 나는 듯이 빈청으로 뛰어 올라가며 품에서 비수를 뽑아 들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었다. 어린 해제는 역사의 칼을 등에 맞고 곡소리 대신 죽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역사는 해제의 등에 찌른 칼을 뽑아 다시 뒷덜미를 찍었다. 쓰러진 해제는 짚방석 위에 피투성이가 되어 고꾸라졌다. 이를 본 시신(侍臣)이 그제서야 무기를 들고 역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한갓 시신의 서툰 솜씨로 어찌 역사를 당적할 수 있으랴. 시신은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역사의 칼에 맞아 죽었다. 상막 안은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 때 순식은 이미 곡을 마치고 궁을 나가려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 황망히 빈청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리고 피투성이 해제의 시체를 쓰다듬으면서 그야말로 대성 통곡했다.
"내 선군의 부탁을 받고 능히 세자를 보호하지 못했으니 이는 다 나의 죄로다."
순식은 일어나 죽기를 결심하고 대궐 기등에다 자기 머리를 짓찧었다. 이를 본 양오가 급히 달려들어 순식을 말렸다. 한편 여희는 슬그머니 음욕이 동하는지라 우시를 데리고 뒷방 밀실로 가서 한바탕 재미를 보고 옷도 아직 안 입었을 때였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달려나오는데, 머리에 피를 흘리며 사람들에게 부축되어 오는 순식과 마주쳤다. 순식이 울면서 외쳤다.
"세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선군의 유명을 못 지켰으니 부인 뵐 면목이 없소."
여희는 금세 어찌된 상황인지를 알아챘다. 여희가 말했다.
"임금의 널이 아직 궁중에 계시는데 대부는 어찌 자기만 생각하시오. 해제는 비록 죽었지만 아직 탁자가 있으니 대부는 그를 돕도록 하오."
이날 순식은 상막을 잘 호위하지 못했다 해서 졸개 수십 명을 죽이고, 즉시 백관과 함께 회의를 열어 탁자를 군위에 올려 모셨다. 이 때 군위에 오른 탁자의 나이가 겨우 아홉 살이었다. 해제를 죽이게 한 이극과 비정부는 시치미를 떼고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의가 열리자 양오가 주장했다.
"이번에 세자가 살해당한 것은 이극과 비정부 두 사람의 간계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세자의 원수부터 갚아야 합니다. 그들만이 이 회의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죄상은 명백합니다. 청컨대 병사를 거느리고 그 두 사람부터 쳐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순식이 대답했다.
"그 두 사람은 우리 진나라 노대신이며 그들의 당은 뿌리를 깊이 박고 있소. 그러니 우리가 섣불리 그들을 쳤다가 이기지 못하면 낭패요. 우리도 모르는 체 내색 말고 내버려 두어 그들을 안심시킨 뒤에 천천히 기회를 보아 일을 도모합시다. 우선 상례부터 마치고 개원하여 새 임금의 군위부터 바로잡고, 그리고 밖으로 이웃 나라들과 친선 우호를 맺고 안으로 그들의 당을 분산시킨 연후에 기회를 보아 일을 시작해야 하오."
양오는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동관오에게 은밀히 말했다.
"순식은 충성은 대단하지만 꾀가 없는 사람이오. 먼저 할 일과 뒤에 할 일을 분별하지 못하니 앞으로 모든 걸 걸고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이극은 우시의 말을 듣고 신생의 일에 대해서도 모른 척하겠다는 겁쟁이입니다. 그러니 이극을 없애 버리기는 매우 쉬운 일일 것이오. 그러고 나면 비정부 따위야 저절로 시들어 버릴 것이오."
동관오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극을 없애 버릴 수 있을까요?"
"장사 지낼 날이 멀지 않았으니 무장병을 그날 동문 밖에 매복시켰다가 이극이 상여를 전송하러 나오거든 그 때 갑자기 덤벼들어 처치해 버리면 이극쯤이야 한 사람의 힘으로도 넉넉하오."
"음, 그렇다면 내게 좋은 수가 있소. 내가 데리고 있는 자로서 도안이란 인물이 있소. 그 인물은 능히 삼천 근의 무게를 등에 지고 땅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달음박질을 할 수 있는 천하 장사요. 그 인물에게 좋은 벼슬 한 자리를 주기로 약속하면 능히 부릴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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