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11장 재편되는 북방
3. 신생, 메마른 나무처럼 꺾이고
이극의 우유 부단
우시가 돌아간 후 이극은 공연히 답답하고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우울했다. 그는 술상을 치우게 하고 우시가 부르던 노래를 곰곰이 되씹었다. 그러다가 바로 서재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극은 다시 뜰에 나가서 불안스레 거닐었다. 이날, 이극은 저녁밥도 먹지 않았다. 등불을 밝히고 자리에 누웠으나 이리저리 돌아눕기만 힐 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도 생각하고 저리도 생각했다. 우시는 주공과 여희에게서 안팎으로 몹시 총애를 받고 있는 자다. 신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우시는 궁성을 자기 집 문턱 넘듯 드나드는 자다. 그가 굳이 자기 부중을 찾아와서 들려준 노래에 깊은 이유가 있을 것은 뻔하다. 그런데 우시는 막연히 암시했을 뿐 구체적인 말은 아니하고 가 버렸다. 이극은 날이 새면 당장 우시에게 달려가서 자세한 걸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자정이 되었다. 이극은 새벽까지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초조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아랫사람을 불렀다.
"네 우시 집에 비밀히 가서 급한 일이 있으니 잠시 다녀가라고 전갈하고 데려오너라."
분부를 받은 사람은 우시 집에 가서 전갈했다. 우시는 그 전갈을 받고 소리없이 웃었다. 부르는 까닭을 짐작했던 것이다. 우시는 급히 의관을 갖추고 심부름 온 사람의 뒤를 따라 이극의 집으로 갔다. 이극의 집에 간 우시는 바로 이극의 침소로 안내되었다. 이극이 우시를 침상 앞에 앉히고 물었다.
"낮에 그대가 말한 완목과 마른 나무에 관한 설명은 대강 짐작하겠으나 혹 곡옥에 있는 세자 신생과 깊이 연관된 일이 아니냐? 네 반드시 들은 바가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자세히 내게 말하여라."
"예, 오래 전부터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다만 대부가 바로 신생의 스승뻘이신지라, 감히 바로 말씀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극이 말했다.
"만일 앞으로 내게 언짢은 일이 닥쳐올 것이라면 미리 알려 주게. 그래야 화를 면하지 않겠나. 그래야만 자네가 진정 나를 생각해 주는 걸세. 우리 사이에 무슨 말인들 못할 것이 있으리오."
우시가 이극이 누워 있는 베개 가까이까지 머리를 숙이고서 속삭였다.
"주공께선 오래전부터 여희를 정실부인으로 삼고 세자 신생을 죽인 뒤 해제를 그 자리에 세우려 확실한 계책을 짜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렇게 못하도록 말릴 수 있을까?"
우시가 고개를 흔들었다.
"여희가 주공의 맘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은 대부께서도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또 양오와 동관오도 주공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여희는 내궁에서 주장하고 양오와 동관오가 외궁에서 주장하는데 누가 그들의 계책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극이 주저하면서 말했다.
"주공 편이 되어 세자를 죽인다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세자를 도와 주공께 반항한다는 것도 나로서는 감당 못할 일이다. 그러니 어느 편에도 들지 말고 중립을 취하면 가히 화를 면할 수 있을지......."
우시가 그제서야 웃으며 대답했다.
"대부께서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취하면 별고 없을 것입니다."
우시가 물러간 뒤에도 이극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아침에 이극은 가깝게 지내는 대부 비정부의 집으로 갔다. 이극이 좌우 사람들을 내보내도록 청하고 비정부에게 말했다.
"큰일났소이다."
비정부가 반문했다.
"왜 무슨 소문이라도 들으셨소?"
이극이 털어놓았다.
"지난 밤에 우시가 우리 집에 와서 이런 말을 합디다. 주공께서 오래전부터 여희를 정실 부인으로 삼고 세자 신생을 죽인 후, 여희의 소생인 해제를 세자로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구려."
비정부가 물었다.
"그래 대부께선 뭐라고 대답하셨소?"
"나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하였소이다."
비정부가 탄식했다.
"하아, 이거 큰일났구려. 대부의 대답은 타오르는 불 속에 가랑잎을 넣은 격이오. 내가 대부를 위해서 계책을 한 가지 말씀해 드리지요. 대부는 앞으로 여희 일파의 음모가 마땅치 않다는 태도를 취하십시오. 그들이 대부의 마땅해 하지 않는 태도를 보면 속이 뜨끔해서 세자를 죽이려는 계책을 급히 서두르지는 못할 것이오. 그 기회를 잃지 말고 대부는 세자를 도우려는 동지를 많이 모아 당을 세우십시오. 그러면 세자 신생의 지위가 튼튼해질 것입니다. 그 때를 당하여 주공께 사리를 잘 말씀드리고 주공의 마음을 바로잡도록 해야 합니다. 아직도 일이 어떻게 될지 확실하게 결정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대부가 중립을 취하면 세자는 더욱 외로워질 것이고, 여희의 무리들은 기승을 부릴 것이 틀림이 없소이다. 그러고 나면 변란이 일어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소."
이 말을 듣고 그제서야 사태를 헤아리게 된 이극은 발을 굴리며 안타까워했다.
"애석하구나! 내 좀더 일찍이 대부를 찾아와 상의 못한 것이 후회돼오."
이극은 비정부의 집을 나와 수레를 타고 돌아갔다. 그는 수레를 타고 돌아가다가 실족한 듯이 일부러 수레에서 길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튿날 그는 발을 다쳐서 꼼짝 못한다 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그 뒤로 이극은 부상 때문이라고 핑계대면서 궁중 조회조차 나가지 않았다. 여희는 우시가 지난날 이극의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보고하는 걸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날 밤에 여희가 진헌공에게 말했다.
"세자가 곡옥에 가 있는 지도 오래 되었는데 어찌해서 불러들이지 않습니까. 첩이 외로이 떠나 있는 세자 신생을 보고자 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첩은 세자에게 서모로서 덕을 베풀고 싶습니다."
진헌공은 여희의 말대로 세자 신생을 소환했다. 신생은 부름을 받자 지체하지 않고 즉시 곡옥을 떠나 강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인 진헌공께 재배하고 내궁으로 들어가서 여희에게도 깍듯이 인사했다. 이에 여희는 잔치까지 베풀고 신생을 극진히 대접했다. 세자 신생을 대하는 여희의 태도는 마치 친동기를 대하듯 반가운 상이었다. 이튿낱 신생은 다시 내궁에 들어가서 전날의 잔치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여희는 이날도 신생을 내궁에 머물게 하고 점심까지 대접해서 보냈다. 그런데 그날 밤 진헌공과 잠자리에 든 여희는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첩은 세자의 맘을 돌려세우고자 도성으로 불러오도록 했고 또 예의로써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세자는 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매우 난잡하게 대하고 무례하게 행동하지 뭐여요."
진헌공이 물었다.
"어떻게 무례하단 말인가?"
여희가 뽀로통해서 말했다.
"소첩이 오늘 세자에게 점심 대접을 했습니다. 세자는 술을 청해서 마시고 얼근히 취하더니 첩을 희롱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이제 형편없이 늙었소. 새어머니는 제게 딴생각이 없으신지요.' 소첩은 대로하여 세자의 수작을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세자가 말하기를 '지난날 우리 할아버지는 늙자 자기 아내 강씨를 우리 아버지에게 내줬습니다. 그 강씨가 바로 나의 할머니뻘인 동시에 친어머님이지요. 이제 나의 아버지도 늙었으니 반드시 물려줄 것이 있을 것인즉, 그것을 맡을 사람은 내가 아니면 또 누가 있겠소?' 하고 가까이 덤벼들며 첩의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첩은 이를 뿌리치고 겨우 욕을 면했습니다. 만일 상감께서 첩을 믿을 수 없으시다면 첩이 시험삼아 내일 낮에 세자와 함께 궁원에서 놀겠으니 그 때 상감은 대 위에 숨어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세자의 수작을 보고 나면 상감께서 반드시 첩의 말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음, 그래! 그럼 내일 어디 보기로 하자."
진헌공은 신음하듯 대답했다. 날이 밝자, 여희는 신생을 불러들여 함께 궁원을 거닐었다. 이미 여희는 기름 대신 머리에다 꿀을 발라 곱게 단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그걸 알리오. 꿀냄새를 맡고 벌과 나비들이 여희의 머리에 분분히 모여들었다. 여희가 천연덕스레 신생에게 말했다.
"세자는 나를 위해 이 벌과 나비들을 멀리 쫓아버릴 수 있겠소?"
신생은 멋도 모르고 여희의 뒤를 따라가며 소매로 열심히 여희의 머리에 모여드는 벌과 나비를 쫓았다. 이 때 진헌공은 멀리 대 위에 숨어 서서 궁원의 신생과 여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신생의 소행은 분명히 해괴망측했다. 이 날, 대로한 진헌공은 즉시 신생을 잡아들여 죽이려고 했다. 여희가 진헌공 앞에 무릎을 꿇고 고했다.
"첩이 세자를 불러오게 했는데 죽이신다면 이는 첩이 세자를 죽이는 것이 됩니다. 또한 궁중에서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잠시 고정하소서."
드디어 진헌공은 신생에게 곡옥으로 돌아가라는 추상 같은 분부를 내렸다. 그리고 진헌공은 떠나간 신생의 뒤를 이어 감시할 밀사를 곡옥으로 보내며 분부했다.
"네 곡옥에 가서 어떻게든 세자 신생의 죄목을 한 가지라도 찾아 즉시 보고하여라."
이런 일이 있은 지 수일 뒤, 진헌공은 지방으로 사냥을 갔다. 임금이 없는 동안에 궁중에서 여희와 우시는 한바탕 운우 지락(雲雨之樂)을 즐기고 나서 비밀히 상의하고 다시 심복 부하를 불러 지시했다.
"너는 곡옥에 가서 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전갈하여라. 즉 '주공의 꿈에 세자의 친어머님인 제강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가 배고파 견딜 수 없으니 제사라도 지내주오 하고 현몽하였은즉 세자는 속히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는 분부를 받들고 왔소이다.' 하고 전하여라."
그 당시 신생의 생모 제강의 사당은 따로 곡옥 땅에 있었다. 사자의 전갈을 받고 곡옥의 신생은 제물을 갖추고 곧 제강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는 전례에 따라 사람을 시켜 제사 지낸 고기를 아버지인 진헌공에게 보냈다. 이 때까지 지방으로 사냥 간 진헌공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신생이 보낸 육포는 궁중에서 엿새를 묵었다. 그제야 진헌공이 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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