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10장 교만해지는 제환공
1. 수지 동맹
주혜왕의 밀서(2/2)
어느 날 주혜왕이 태재 공에게 말했다.
"제후(齊侯)가 비록 초를 쳤다고 하지만 그래 제가 초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이번에 초가 바친 공물과 효순하는 태도를 보니 도리어 초나라가 제보다 나면 낫지 조금도 못한 바 없었다. 요즘 제가 모든 제후를 거느리고 태자를 떠받들고 있는 건 또 무슨 뜻인가. 그들은 도대체 짐을 어쩌자는 것인가. 태재는 수고스럽지만 짐의 밀서를 정백에게 전하라. 초와 정이 단결해서 왕실을 섬기면 짐도 그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혜왕의 엉뚱한 말을 듣고 태재 공은 크게 당황하여 반대하는 뜻을 아뢰었다.
"초가 이번에 폐백을 바치고 왕실에 그만큼 효순하게 된 것은 다 제의 힘이었습니다. 왕은 어찌하사 오래도록 친해 온 제후와 등을 돌리고 하필이면 멀고 먼 남쪽 오랑캐와 가까이 하려 하십니까?"
주혜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정백이 제후(齊侯)와 갈라서야 모든 제후(諸侯)도 각기 흩어질 것이다. 모든 제후가 오래 모여 있는 동안에 제후가 그들과 함께 무슨 짓을 꾸밀지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짐은 이미 뜻을 확실히 결정하였노라."
태재 공은 왕의 결심이 단호한 걸 알고 매우 난감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혜왕이 결심했다는 데야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주혜왕은 일봉(一封) 밀서를 태재 공에게 내줬다. 그 밀서는 굳게 봉해 있었다. 태재 공은 그 밀서 속에 무슨 말이 씌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왕의 분부대로 심복 한 사람을 시켜 그 밀서를 수지 땅의 정문공에게 보냈다. 한편 맹회를 기다리던 정문공은 어느 날 밤에 은밀하게 전해 온 주혜왕의 밀서를 한 통 받았다.
- 태자 정이 부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사로이 무리를 모으는지라, 도저히 장래에 왕위를 잇게 할 수 없도다. 짐의 뜻은 차자 대에게 있으니 정백은 제를 버리고 초와 함께 손를 잡아 짐을 도와 주기 바라노라.
정문공은 밀서를 읽어보고 매우 기뻐서 모든 대부들에게 자랑하여 말했다.
"우리 윗대 어른인 무공(武公), 장공(莊公)은 대대로 왕의 경사로서 모든 제후의 영수격이었소. 그런 것이 중간에 세도가 끊어졌으나, 과인의 선군 여공께선 지금의 천자를 왕위에 올리었소. 그런데 이제야 왕명이 과인에게만 내렸으니 이젠 권도를 잡게 되었소. 모든 대부는 장차 정나라의 융성을 기원하고 과인을 축복해 주오."
이에 대부 공숙이 간했다.
"우리 정나라를 위해 제나라는 군사를 초나라까지 동원시켰습니다. 이제 와서 제를 버리고 초를 섬긴다면 이는 배은망덕입니다. 더구나 태자 정을 돕는 것은 천하 대의인데 주공께선 홀로 다른 생각을 갖지 마소서"
이에 정문공이 단호히 말했다.
"왕을 버리고 어찌 태자를 도우란 말인가? 더구나 주왕의 뜻은 태자에게 있지 않은데 과인보고 왕명과 달리 누구를 공경하란 말인가?"
공숙이 거듭해서 간했다.
"주의 종묘 제사를 맡는 것은 오직 적자와 장자라야 됩니다. 지난날 유왕이 백복(伯服)을 사랑하고, 환왕(桓王)이 극을 사랑하고, 장왕(莊王)이 퇴를 사랑하다가 결국 어찌 됐는가는 주공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결국 인심만 잃고 생명까지 잃었을 뿐 아무 공적도 남기지 못했는데, 주공께선 대의를 버리고 옛날 사람들이 저지른 허물을 다시 되풀이하시렵니까? 그리하시면 반드시 크게 후회하실 날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 때 간특한 신후가 음흉스레 앞으로 나가 정문공의 눈치를 살피며 아뢰었다.
"천자의 명을 감히 누가 거역할 수 있습니까? 제나라를 따른다면 이는 왕명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장 이 곳을 떠나면 모든 제후도 의심이 생겨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태자 정을 위한 동맹은 맺어지지 않습니다. 태자 정(鄭)을 밖에서 돕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태숙도 안으로 무리를 가지고 있으니 두 왕자 중에 누가 이겨 왕위에 오르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는 이 시기에 어느 한쪽 편을 들기보다 일단 본국으로 돌아가 앞으로의 정세를 관망하시는 게 좋을까 합니다."
정문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이었다. 신후의 말을 듣기로 마음을 정한 정문공은 갑자기 국내에 일이 생겼다고 핑계한 후, 제환공에게 하직 인사도 안하고 훌쩍 수지 땅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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