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10장 교만해지는 제환공
1. 수지 동맹
주혜왕의 밀서(1/2)
초나라와 우호를 맺고 남방 원정에서 돌아온 제환공은 곧 사자를 보내어 주왕실에 고하게 했다. 그 때 명을 받아 주왕실에 사자로 간 사람은 대사행(大司行) 습붕이었다. 습붕이 누구인가? 관중이 그를 평하여 진퇴 주선(進退 周旋)하는 예의와 언변(言辯)의 강유(剛柔)가 뛰어나다고 칭찬한 그 사람이다. 습붕은 남방 원정의 경과를 주혜왕에게 자세히 고하면서, 조정의 분위기가 예전과 다름을 느끼며 열심히 주위를 살폈다.
"우리 제후께서 초나라가 앞으로 왕실에 조례하고 복종하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회군했습니다."
주혜왕은 간단히 사례하고 잔치를 벌여 습붕을 대접했다. 습붕은 앞서 초나라의 대부 굴완이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으므로 주혜왕의 반가움이 덜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잔치 자리에 태자가 보이지 않자 습붕이 청했다.
"이왕 조정에 온 김에 태자를 뵙고 갔으면 더할나위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그러자 주혜왕의 얼굴에 매우 불쾌한 기색이 얼핏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고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시신(侍臣)에게 분부하는 것이었다.
"차자(次子) 대(帶)와 태자 정(鄭)을 함께 나오라고 하거라."
습붕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후 둘째아들 대가 앞서 나오고 그 뒤를 따라 태자 정이 나왔다. 그들의 태도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주혜왕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약간 난처해 하는 기색이었다. 잔치가 끝나자 습붕은 수행원 중에서 눈치 빠른 몇 명을 골라 여론을 살펴보라고 시중에 내보냈다. 그들이 돌아와 여론을 전하는데 습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습붕은 주를 떠나 본국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래서 습붕은 눈치 빠른 수행원 하나를 따로 불러 당분간 주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시중의 백성들 여론을 살피도록 하는데 특히 단단히 일러두었다.
"주왕실에 관한 것은 물론이고 특히 태자에 관해서 어떤 일이 있는지 자세히 알아보거라."
습붕이 돌아와 제환공에게 아뢰었다.
"앞서 굴완이 약속한 그대로 공물을 바치고, 왕께서는 이를 종묘에 고한 후 제사 지낸 고기(昨)는 초에 하사했다 합니다."
제환공이 기뻐하며 물었다.
"왕께서 크게 기뻐하셨는가?"
습붕이 달리 대답했다.
"앞으로 주왕실에 후계를 둘러싼 내분이 있어 심히 어지러울 것 같습니다."
"무슨 조짐이라도 있었는가?"
습붕이 계속해서 말했다.
"원래 주왕의 큰아들 이름이 정(鄭)이온데, 먼젓번 왕후(王后) 강씨(姜氏) 소생으로 이미 태자가 되어 동궁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강후(姜后)가 죽은 후, 차비(次妃) 진규가 총애를 받아 왕후에 올라 아들을 낳아 이름을 대라 합니다. 그런데 대는 부왕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 태숙(太叔)이라 부릅니다. 들리는 말로 장차 태자 정을 폐하고 대를 태자로 세울 것이라는 소문입니다. 신이 이번에 조정에 가서 왕의 신색을 살피니 매우 당황한 기색이라, 반드시 왕은 딴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주왕실에는 반드시 태자 정을 둘러싸고 적서(嫡庶) 분란이 일어날 것이오니 주공은 맹주로서 이에 대한 대책을 미리 강구하지 않으면 아니될 줄로 아옵니다."
제환공은 곧 관중을 불러 이 일을 자세히 보고하게 하고, 함께 상의하니 관중이 대답했다.
"신에게 주왕실을 안정시킬 계책이 있습니다."
"중부(仲父)는 어떤 계책이 있단 말이오?"
관중이 아뢰었다.
"장차 태자가 위태로운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자의 당(黨)이 외롭기 때문입니다. 주공께선 왕께 상표(上表)하시되 그 표문에 이렇게 쓰십시오.
- 바라옵건대 천하의 모든 제후가 태자를 뵙고자 원하오니, 태자께선 열국의 제후와 한번 만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리하여 태자가 일단 모든 나라 제후와 만나기만 하면 서로의 신분이 정해지게 되오니 주왕이 아무리 태자를 폐하려 해도 쉽사리 안 될 것입니다."
제환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중부의 훌륭하신 생각이오."
제환공은 이듬해 5월 다같이 주나라 태자(周太子)를 위해 수지(首止) 땅에서 회합하자는 격문을 열국 제후에게 보내고 습붕을 다시 주나라로 보내니, 주에 당도한 습붕은 주혜왕에게 표문을 바치고 아뢰었다.
"천하의 모든 제후가 명년에 수지 땅에서 태자를 한번 뵙기를 원하옵니다. 이는 모든 제후가 왕실을 받들고 존중하는 뜻에서 그런 것이오니 윤허하소서."
주혜왕은 태자 정을 보내고 싶지 않았으나, 제나라의 세력이 워낙 강대하고 또 그 명분이 바르고 이치가 맞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주혜왕은 속으로 매우 불쾌하고 싫었지만 습붕의 청을 허락하고 말았다. 주혜왕의 허락을 받은 습붕은 곧 주나라를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봄이었다. 제환공은 먼저 진경중을 수지 땅으로 보냈다. 진경중은 수지 땅에 이르러 곧 조그만 별궁을 짓고 태자의 옥가가 왕림할 때를 준비했다. 5월이 되었다. 제(齊), 송(宋), 노(魯), 진(陳), 위(衛), 정(鄭), 허(許), 조(曹) 이상 8개국 제후들이 수지 땅으로 행차하였다. 동시에 태자 정도 수지 땅에 이르러 행궁(行宮) 앞에서 옥가를 멈췄다. 제환공은 모든 제후를 거느리고 나가 태자 정을 마치 천자의 행차처럼 영접했다. 태자 정은 거듭거듭 겸손해 하면서 모든 제후와 동렬에 서서 회견하려 했다. 제환공이 엎드려 아뢰었다.
"신들은 한갓 반실(潘室)에 있는 몸입니다. 태자를 뵈옵는 것이 바로 왕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어찌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제야 태자 정은 제환공의 뜻을 헤아려 알고 칭사했다.
"여러 군후는 편히 앉으시오."
그날 밤이었다. 태자 정은 사람을 보내어 제환공을 행궁으로 모시도록 청했다. 그리고 이복 동생인 태숙 대(太叔 帶)가 현재의 왕후와 한패가 되어 자기의 태자 자리를 뺏으려고 갖은 죄를 다 쓴다는 걸 절절하게 호소했다. 제환공이 말했다.
"이 소백(小白)이 열국의 제후와 함께 연명하고 다함께 태자를 장래, 천자로 추대(推戴)하겠습니다. 그리하시면 태자 위(位)는 반석처럼 굳어집니다. 그러니 태자께서는 조금도 근심하지 마소서."
태자 정은 제환공에게 거듭하여 칭사했다. 한편 태자 정이 행궁(行宮)에 머무는 동안 모든 제후는 감히 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관사에 있으면서 태자와 그 수행인을 위해 차례로 술과 음식을 바쳤다. 그리고 태자 정을 모시고 있는 보초병들에게까지 잘 대접했다. 태자 정은 너무 오랫동안 있게 되면 모든 나라 제후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하고 돌아가려 했다. 제환공이 태자 정에게 아뢰었다.
"신들이 태자께 이 곳에 오래 머무실 것을 청하는 그 본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제후들이 태자를 사랑하고 추대하기 때문에 서로 차마 작별을 못하고 있다는 걸 왕께 알리는 동시에 태숙 대나 왕후의 옳지 못한 계책을 미리 막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한참 더운 6월입니다.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신들이 낙양으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옥가를 배웅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제환공은 태자를 위해 모든 제후와 8월에 동맹을 맺기로 정했다. 한편 주혜왕은 태자 정이 수지 땅에서 오래도록 머물며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주혜왕은 제환공이 장차 태자 정을 추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우울했다. 더구나 혜후와 숙대는 밤낮으로 주혜왕에게 태자 정을 폐하고 대를 세우라고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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