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9장 초나라로 쳐들어가다
2. 제환공의 환상
애강의 죽음
어느 날이었다. 관중의 부중에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노래를 부르며 관중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공자 반이 시해되고, 민공도 암살됐으니
당시에 그 흉칙한 칼 휘두른 게 누구냐
노나라 난이 모두 구중 궁궐에서 생겼으니
하필이면 제나라 여자들만 데려왔느냐
관중이 노래를 듣고 보니 심상치가 않았다. 서둘러 낯선 이를 모셔들이니, 그 사람이 관중에게 물었다.
"내가 부른 노래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직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그대를 중부라 부르며, 어진 이로 모시는 것은 알고 있으시오?"
관중은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묵묵 부답으로 있는데 낯선 사람이 말했다.
"나는 원래 주나라에서 농사짓는 시골뜨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관정승을 찾아온 것은 결코 벼슬을 원하거나 무슨 공명심 때문이 아닙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에 어진 이가 있으면 좋지 못한 풍속도 고쳐진다고 합디다. 하물며 군후의 위명은 천하를 진동하고, 어진 정승이라 나라마다 본받으려는 중부가 계신 제나라에서는 딸을 어찌 교육시키길래 나라마다 분란을 일으킵니까. 그걸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관중은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말했다.
"노나라의 환공부터 시작해서 지난 민공까지 군후들이 제 명에 죽지 못하고 비명에 가거나, 아직 춘추 정정한데 죽은 것은 제나라 딸들인 문강과 애강의 잘못이 매우 큽니다. 지금 애강은 주나라에 와 있습니다. 주나라 사람들은 애강의 행실을 주나라 딸들이 배울까 봐서 전전긍긍합니다. 관정승께서는 좋을 대로 하십시오. 아무튼 이 말씀을 직접 전해 드리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관중은 기분이 몹시 울적했다. 그 때 손님에게 마실 차를 준비해서 나왔던 청이 눈치를 챘다.
"여자는 출가하면 남편을 따를 뿐, 시집가서 저지른 죄를 친정에서 처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애강을 노나라로 보내어 그쪽에서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관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옳구려."
관중은 곧 궁으로 들어가 제환공에게 아뢰었다.
"지금 애강이 주나라에 피신해 있다 합니다. 우리가 그냥 방관만 했다면 노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우리 제나라를 원망할 것이며 자칫하면 두 나라 사이에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밀리에 애강을 노나라에 보내십시오."
제환공은 곧 주나라로 수작을 보냈다. 주나라에 당도한 수작은 애강을 찾아가서 아뢰었다.
"출가하시면 죽어도 시집에서 죽는다 하지 않습니까. 어서 노나라로 돌아가사이다."
애강은 노나라로 돌아가려고 수작을 따라나섰다. 애강이 제나라 땅 이(夷)란 고을을 지날 때였다. 해가 저물어서 그녀는 관사에 들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수작이 애강에게 정중히 권했다.
"부인께서 공자 반과 노민공을 죽였다는 것은 이제 노나라, 제나라 사람은 물론이고 주나라에까지도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부인이 노나라에 돌아가시면 무슨 면목으로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태묘를 대하시렵니까. 그리고 공자 경부와의 관계도 세상이 다 압니다. 그러니 부인께서는 차라리 손수 목숨을 끊으시어 지금까지의 허물을 덮어 버리는 것이 나을 듯싶소이다."
애강은 이 말을 듣자, 문을 걸어 잠그고 구슬피 통곡했다. 애강의 울음소리가 밤새 사방으로 들렸다. 새벽녘이 되어 울음소리가 멈췄다. 수작은 얼마 동안을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애강은 방 한가운데 대들보에다 허리띠를 걸어 목을 매고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날이 밝자 수작은 즉시 이(夷)지방의 관장(官長)을 불러 애강을 염하고 입관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급히 말을 달려 노나라에 가서 애강의 죽음을 노희공에게 알렸다. 노희공은 비록 서모의 관계였지만 마치 모친을 대하듯 예를 갖춰 후히 장사지냈다.
제환공의 병
이제 제환공은 홀가분해졌다. 그래서 다시 예전처럼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시거나 또는 사냥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제환공은 큰 못가 언덕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제환공과 신하들은 일제히 수레와 말을 달리며 어지러이 달아나는 짐승들을 쐈다. 한참 재미나는 판이었다. 그런데 제환공은 문득 수레를 멈추고 저편 한 곳만 바라볼 뿐 넋을 잃은 듯 말이 없었다. 제환공의 얼굴엔 무서워하는 기색이 완연히 떠올랐다. 수작이 그러고 있는 제환공 곁으로 가서 물었다.
"주공은 눈을 부릅뜨고 뭘 그렇게 보십니까?"
제환공이 그제야 돌아보았다.
"과인은 지금 막 귀신을 보았도다. 그 모양이 심히 괴상해서 참으로 무서웠노라. 한참 만에 없어졌으니 상서롭지 못한 징조나 아닌지 모르겠도다."
수작이 대답했다.
"귀신은 음물(陰物)인데 어찌 태양이 중천에 있는 백주에 나타날 리 있겠습니까?"
"지난날에 우리 선군이 고분(姑芬) 땅에서 큰 돼지 같은 괴물을 보신 것도 또한 대낮이 아니었던가! 너는 잔말 말고 나를 위해 속히 가서 관중을 모셔 오너라."
수작이 불만인 듯이 대꾸했다.
"관정승이 성인이 아니어든 어찌 귀신의 일까지 세세히 알겠습니까?"
"중부께서는 지난 날에 능히 유아(兪兒)도 아셨거늘 어찌 성인이 아니란 말이냐."
"그 땐 주공께서 먼저 유아에 관한 모양을 자세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관중이 주공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럴싸하게 말을 꾸며댄 것입니다. 오늘은 주공께서 다만 귀신만 보았노라 말씀하시고 그 모양일랑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고도 관중의 대답이 주공께서 보신 바와 똑같다면, 그는 틀림없는 성인입니다."
"그럼 그러기로 하마."
제환공은 대답하고 즉시 어가를 몰아 궁으로 돌아갔다. 궁으로 돌아가서도 제환공은 역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날 밤 마침내 제환공은 병으로 드러누웠다. 꼭 병 증세가 학질 비슷했다. 이튿날 관중과 모든 대부들은 주공을 문병하려고 모여들었다. 제환공이 관중을 가까이 불렀다.
"과인이 어제 사냥하다가 귀신을 본 뒤로 불안하고 무서워서 말도 잘 못하겠소. 그러니 중부는 그 귀신 모양을 말해 보오."
관중은 능히 대답을 못했다. 수작이 곁에서 웃으며 말했다.
"신은 애초부터 중부가 대답 못할 줄 알았습니다."
제환공의 병은 날이 갈수록 더 심했다. 이에 관중은 주공의 병을 근심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성문에 걸었다.
- 누구든지 능히 주공이 보신 그 귀신의 형상을 말하는 자 있으면 내가 받는 녹 3분의 1을 주겠다.
어느 날 관중의 집 문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삿갓을 깊숙이 쓰고 조각조각 누빈 옷을 입고서 관중을 만나 보겠다고 청했다. 그를 본 관중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정중히 읍하고 방 안으로 영접해 들이니 그 사람이 관중에게 묻는 것이었다.
"군후께옵서 지금 병중이십니까?"
"그렇소."
"그럼 군후께서는 백주에 귀신을 보시고 병환이 난 것이 아닙니까?"
"그러하오."
"군후께선 큰 못 속에서 나타난 귀신을 보셨다고 하지 않으시던가요?"
"그렇소. 그대는 그 귀신의 모양을 자세히 말할 수 있겠소?"
"청하옵건대, 군후를 뵈옵고 말씀 드리게 해주십시오."
그 사람을 데리고 관중은 궁으로 들어가서, 먼저 관중이 침실로 들어가 제환공을 뵈니, 제환공은 요와 이불을 두껍게 쌓고 그 위에 앉아 있는데 양편에선 두 부인이 연신 등을 문지르고 있었고 또 다른 두 부인은 그의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수작은 탕약을 바치고 제환공이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관중이 아뢰었다.
"주공의 병환을 능히 말하겠다는 사람이 있기로 신이 데리고 왔습니다. 한번 불러 보시겠습니까?"
"어서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시오."
관중이 나가 그 사람을 데려오니 제환공은 그의 차림새를 보고는 대단히 불쾌해 했다.
"그대가 귀신의 모양을 알아맞힌다는 사람인가?"
"주공께옵서 자기 자신을 병중으로 몰아넣고 계실 뿐, 귀신이 어찌 주공을 해치겠사옵니까?"
제환공의 말에 그 자는 태연히 말했다. 제환공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귀신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있습니다. 물에는 망상이란 청면 홍신(靑面 紅身)의 귀신이 있고, 언덕에는 개처럼 생긴 뿔을 가진 귀신이 있으며, 산에는 말을 잘하는 인면 수신(人面 獸身)의 귀신이, 들에는 방황(彷徨)이란 귀신이, 못에는 위사(委蛇)란 귀신이 있사옵니다."
"그러면 위사란 귀신이 어떤 것인가 자세히 그 모양을 과인에게 말해 보라."
"위사란 그 크기가 수레바퀴통만 하고, 길이는 수레를 뒤집어 서로 맞춘 원문 길이만 하고, 옷은 자색이고, 관은 붉은 것을 쓰고 있습니다. 이 위사는 수레가 달리는 소릴 가장 싫어해, 수레가 달리는 소릴 들으면 머리를 쳐들고 일어서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그 모양이 괴상하고 대단히 무서워 바로 보지 못하며, 만일 이 괴물을 똑바로 본 사람은 반드시 천하의 패권을 잡는다고 하옵니다."
이 말을 듣자, 제환공은 크게 웃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일어섰다.
"내가 본 것이 바로 그것이오!"
즉시 제환공은 정신이 상쾌해지고, 아픈 증상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가뿐해졌다. 제환공이 만면에 희색을 띠고 물었다.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신의 이름은 황자(皇子)이며, 제나라 서쪽 시골에 사는 농부입니다."
"그대는 앞으로 벼슬하여 과인을 도와 주오."
제환공은 마침내 황자에게 대부(大夫) 벼슬을 줬다. 그러나 황자가 굳이 사양했다.
"주공은 항상 주왕실(周王室)에 대한 충성을 잊지 마시고, 사방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원을 편안케 하고, 백성을 사랑하사 저 같은 신하로 하여금 태평 시대의 백성이 되게 하는 동시에 농사 짓는 것이나 방해당하지 않게 해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벼슬을 원하지 않습니다."
"고고(孤高)한 선비로다."
이에 제환공은 황자에게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곤,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 시골집을 수리해 주게 하고, 동시에 관중에게도 많은 상을 내렸다. 수작이 불평했다.
"중부가 능히 말하지 못하고 황자(皇子)가 알아맞혔는데 어찌 중부에게도 많은 상을 내리시나이까?"
"과인이 듣건대,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혼암(昏暗)한 짓이며, 대중(大衆)에게 맡기는 걸 밝은 사람이라고 하더라. 만일 중부가 없었다면 과인은 황자의 말을 듣지 못했으리라."
마침내 수작은 제환공의 큰 도량에 감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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