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8장 북방 토벌
5. 북벌 성취
답리가의 대패
"심복한 군사 몇 사람을 뽑아 피난갔던 백성으로 가장하고 여러 백성들 틈에 끼어서 먼저 무체성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성 안에서 불을 질러 내응하여라."
관중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순작은 남문을 치고, 연지름은 서문을 치고, 공자 개방은 동문을 치되, 북문만 그대로 남겨 두어 적군의 달아날 길을 일부러 터놓아라."
그리고 관중이 다시 지시했다.
"왕자 성부와 습붕은 두 길로 나누어 북문 밖 적당한 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답리가가 성을 버리고 도망치거든 앞을 끊고 사로잡아서 반드시 대령시켜라."
일일이 지시하고 관중은 제환공과 함께 성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하채했다. 한편 답리가는 겨우 성중의 불을 끄고 백성을 불러들이고, 황화원수에게 군마를 정돈시켰다. 이날 밤은 별들이 유난히 반짝였다. 밤중에 문득 함성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한 군사가 뛰어들어와 고했다.
"제군이 성문 밖을 에워쌉니다!"
황화원수는 제나라 군사가 다 한해(旱海)에서 죽은 줄로 알았다가 뜻밖에 제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황화원수는 급히 군민을 휘몰아 성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체성 안 여러 곳에서 불이 났다. 황화는 사람을 시켜 방화한 놈을 잡도록 했다. 물론 불을 지른 것은 낮에 백성으로 가장하고 성 안으로 들어 온 호아반과 10여 명의 제나라 군사였다. 이들은 불을 지르고 즉시 남문으로 달려가 수문병을 죽이고 성문을 열고 밖에서 기다리던 군사에게 신호하니 제군은 병차를 앞세우고 성 안으로 물밀듯 쳐들어왔다. 사세가 급한 것을 안 황화원수는 답리가를 말에 태우고, 북문 쪽에 제나라 군사가 없는 것을 보고 나서 북문을 열고 달아났다. 그들이 성을 빠져 2리쯤 갔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무수한 횃불이 어둠 속에서 춤을 추고 사방에서 징과 북소리가천지를 진동하듯 일어났다. 답리가는 정신이 아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자 성부와 습붕의 군마가 앞을 막고, 뒤에선 수작과 호아반이 성을 함몰하고 뒤쫓아오지 않는가! 황화원수는 칼을 뽑아들고 이들과 대적했으나 제나라 군사의 창에 찔려 죽고, 답리가는 왕자 성부에게 사로잡혔으며, 올률고는 병사들에게 짓밟혀 죽고 말았다. 먼동이 트니 사방은 언제 처참한 싸움이 있었냐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아침이 되고 대군의 영접을 받으며 제환공은 무체성으로 입성했다. 답리가를 대하에 꿇어앉힌 제환공은 밀로를 원조한 죄목을 꾸짖고 친히 그 목을 치니, 제나라 군사들은 답리가의 목을 북문에 높이 걸었다. 그러고 나서 제환공은 오랑캐를 훈계하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 때 융인 한 명이 들어와 고흑이 답리가와 황화원수를 꾸짖다 죽음을 당한 일을 제환공에게 말했다. 제환공은 고흑의 죽음을 탄식하고, 그 충절을 기렸다.
땅을 탐내지 않다
관중이 제환공에게 아뢰었다.
"이제 북방을 완전히 토벌하시니 주왕실에 공헌하시고, 연나라의 위급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영지, 고죽 두 나라 5백 리가 주인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이 땅은 그냥 놔두면 다시 오랑캐 땅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우리 제나라와 인접해 있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주공께서는 이 땅을 연나라에 주십시오."
제환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연장공이 소문을 듣고서 막 달려왔다. 연장공은 제군의 대승을 높이 평가하며 제환공에게 축하했다. 치하를 받고 제환공이 대답했다.
"과인이 군후의 위급을 구하고자 천리 먼길을 달려와서 다행히 오랑캐를 무찌르고 그들의 땅 5백 리를 얻었습니다. 이 땅을 군후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연장공은 깜짝 놀라 사양했다.
"아닙니다. 우리 연나라는 사직을 보존한 것만으로도 군후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찌 공까지 가로채겠습니까. 불가한 일입니다."
제환공이 다시 권했다.
"이 북방은 중원에서 먼지라 만일에 다시 오랑캐가 득세하면 모반하기 십상입니다. 군후께서는 이를 헤아려 사양하지 마시오. 이제 동쪽과 서쪽으로 길이 열렸으니 주왕실에도 공헌하시고 북방의 방패가 되시어 중원의 번영을 이끄신다면 과인도 큰 영광이 되겠소이다."
연장공은 제환공의 간곡한 당부에 더 사양하지 못하고, 오랑캐 땅 5백 리를 받았다. 제환공은 무체성에서 삼군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그리고 이번 싸움을 도운 무종국(無終國)에게 소천산(小泉山) 일대의 땅을 줬다. 이에 호아반이 먼저 배사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제환공은 군사를 5일간 쉬게 한 후 무체성을 떠났다. 다시 비이계를 건너 석벽 아래서 차량을 내리고 군마를 정돈한 후, 천천히 행진했다. 특히 영지국의 길은 가도 가도 사방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만 남았고, 도처마다 쑥대밭이 되어 버린 싸움터뿐이었다. 제환공은 이 참혹한 풍경에 울적한 심사를 참지 못하여 연장공을 돌아보고 말했다.
"오랑캐 땅 주인이 참으로 무도하여 그 재앙이 초목에까지 미쳤소. 진정으로 다스리는 사람은 그 언행과 태도를 조심하지 않을 수 없구려."
한편 포숙아는 주공이 싸움에 이기어 회군해 온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병사들을 정돈시킨 후 규자관을 떠나 서둘러 도중까지 나가서 영접했다. 제환공이 영접 나온 포숙아에게 말했다.
"이번 싸움에 군량과 병기가 부족하지 않도록 뒤에서 신속하게 보내 준 것은 다 포대부의 공이었소."
그리고 제환공은 연장공과 함께 규자관에서 작별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를 파하고 마침내 제나라 군사는 떠났다. 연장공은 제환공을 전송하려고 나라 경계까지 따라갔건만, 그래도 그는 차마 돌아서질 못했다. 마침내 연장공은 연나라 국경을 넘어 5십여 리나 제나라 안까지 따라갔다. 제환공이 연장공에게 돌아가기를 재삼 권했다.
"자고로 제후가 서로 전송하되 자기 나라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이러다간 과인이 연후께 무례한 사람이 되겠소이다."
그러더니 연후가 들어온 지점까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까지가 이제부터 연나라 땅입니다. 이는 과인이 군후에게 사과하는 뜻입니다."
제환공은 즉석에서 감사의 표시를 했다. 연장공은 울상이 되어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제환공은 한번 말한 것을 도로 거두진 않았다. 연장공은 사양을 거듭하다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그 땅을 받고, 그 곳에다 성을 쌓고 그 성 이름을 연류(燕留)라고 했다. 즉 제환공의 큰 은덕이 연나라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었다. 이리하여 연나라는 오랑캐의 정벌로 서북쪽으로 5백 리의 땅을 넓히게 되었고, 동쪽으로 제나라 땅 5십여 리를 얻어 비로소 북방의 거대한 대국이 됐다. 이 때, 열국의 모든 제후는 제나라 제환공이 연나라를 구제하고 추호도 땅을 탐하지 않았다는 걸 듣고서 다같이 감탄하고 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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