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7. 주나라의 내란
숙첨의 진언
이야기는 정나라로 돌아간다. 정여공은 초문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
"과인이 이제야 근심이 없어졌도다."
숙첨이 이 말을 듣고 관중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약간 바꾸어서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타인에 의지하면 결코 자기를 떳떳하게 내세울 수 없다 합니다. 지금 우리 정나라는 제 . 초 두 강대국 사이에서 위태롭지 않으면 굴욕을 받거나 하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어찌 이런 지경만 있겠습니까. 일찍이 열국의 위에 서서 소패업을 이룬 적도 있습니다. 듣건대 이제 주나라에서 새로 왕이 세워졌고 각국이 사신을 보내어 조례하고 있다 합니다. 주공께서도 주왕실에 조공을 하시고 왕의 총애를 입으사 선대의 경사지업(卿士之業)을 이으신다면 어찌 대국의 눈치를 보겠습니까."
정여공이 크게 반기어 곧 대부 사숙(師叔)을 불러 분부했다.
"즉시 주에 가서 왕께 조례하고 오라."
사숙이 왕실에 바칠 공물을 가지고 주나라로 갔다. 그는 주나라에 갔다가 곧 돌아와서 고했다.
"왕실에 큰 변고가 생겼습니다."
정여공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사숙이 저간의 사정에서부터 듣고, 보고 온 바를 소상하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지난날 주장왕께서 살아계실 때 아끼던 첩 하나가 있었다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도희(桃姬)라 했는데 사람들은 왕도(王桃)라 하였다 합니다. 그 왕도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퇴(頹)입니다. 주장왕께서는 이 퇴를 몹시 아끼시어 대부 위국을 그의 사부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퇴는 소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친히 수백 마리의 소를 기르는데 소에게 오곡을 먹이고 무늬있는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소를 문수(紋獸)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문수들은 퇴를 따라다녔기에 뭣이든 닥치는 대로 밟고 지나가 그 피해가 굉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이것을 탓하거나 간하지 않았다 합니다. 퇴는 점차 방약무인해져서 지난번 붕어하신 주희왕조차도 막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즉위하신 주혜왕에 대해서는 자신이 아저씨뻘이란 걸 믿고 더욱 교만 방자하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주혜왕은 이를 미워하여 퇴의 일당들인 대부 위국, 변백, 자금, 축궤, 첨부 등의 봉녹을 줄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이들이 작당하여 퇴를 왕으로 받들고 주혜왕을 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혜왕을 따르는 대부들이 많아 그만 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퇴와 그 일당들은 위나라로 가서 위후와 결탁하여 왕성을 공격했다 합니다. 이번에 제가 사신으로 가보니까 주나라는 이미 퇴를 왕으로 모신 대부들이 왕성을 차지하고 주혜왕께서는 언 땅으로 피신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나라는 지금 난신의 소굴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주나라의 민심은 퇴에게 복종하지 않고 물끓듯 합니다. 주공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군사를 일으켜 망명중인 왕을 다시 환궁케 하시면 이는 만세의 공로가 될 것입니다."
정여공이 연신 머리를 끄떡였다.
"좋은 생각이다. 퇴가 믿는 것은 위나라와 약간의 자기 패거리들이다. 다섯 대부가 있다지만 그건 다 무능한 것들이다. 이제 과인이 사자를 보내어 그들을 이치로써 타이를 생각이다. 만일 그들이 왕을 다시 모셔간다면 굳이 군사를 일으킬 것까진 없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리오."
주혜왕의 망명
정여공은 사자를 언 땅으로 보내어 망명중인 주혜왕(周惠王)을 역 땅으로 모셔 왔다. 한편 퇴는 정여공의 전갈을 듣고 주저할 뿐 결정을 짓지 못했다. 다섯 대부들이 아뢰었다.
"어찌 만승의 자리에 한 번 오르신 다음에야 다시 신하의 자리로 물러설 수 있습니까. 왕을 속이는 정백(鄭伯)의 말을 곧이듣지 마십시오."
마침내 퇴는 정나라 사자를 몰아냈다. 한편 정여공은 역 땅에 가서 주혜왕께 조례했다. 주나라에 갔던 사자가 쫓겨와서 보고하는 걸 들은 정여공은 왕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서 주나라를 엄습했다. 그러나 정여공은 보기(寶器)만을 취해 가지고 역성으로 되돌아갔다. 이 때가 주혜왕 3년이었다. 그 해 겨울에 정여공은 서괵으로 사자를 보내어 왕을 복위시키기 위한 회합을 하자고 청했다. 서괵의 괵공은 정나라 청을 허락했다. 이리하여 주혜왕 4년 봄에 정 ,괵 두 나라 군후는 이(珥) 땅에서 회견했다. 그리고 4월에 정 ,괵 두 나라 군사는 왕성으로 진격했다. 정여공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왕성 남문을 공격했고 괵공은 북문을 쳤다. 한편 위국은 급히 퇴를 만나러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퇴는 바빠서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위국은 초조했다.
"사태가 몹시 급한데 어찌하면 좋은가?"
위국은 하는 수 없이 퇴의 명령이라 속이고 변백, 자금, 축궤로 하여금 성루에 올라가 쳐들어오는 군사를 막게 했다. 그리고 국서를 쓰려고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백성들은 정나라 군사들이 주혜왕을 호위하고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자 환호성을 질렀다. 백성들은 성난 파도처럼 몰려가서 다투어 성문을 열어 주혜왕을 영접했다. 그런데 위국은 사태가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집에서 국서(國書)를 쓰고 있었다. 그 국서는 위나라에 구원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그가 국서를 다 쓰기도 전에 북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아랫사람이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전 왕이 이미 성으로 들어와서 조당에 앉았습니다."
이 말을 듣자 위국은 길이 탄식하고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찌르고 죽었다. 축궤, 자금도 난군 속에서 죽었고 변백, 첨부들은 백성들에게 사로잡혔다. 다행히 퇴는 서문으로 빠져나가면서 석속(石速)에게 외쳤다.
"속히 소를 몰라!"
추병(追兵)이 나타났을 때에야 퇴는 혼자 달아났으나 마침내 사로잡혔다. 그날로 퇴는 변백, 첨부와 함께 참형을 당했다. 주혜왕은 다시 왕위에 오르자, 정나라에게 호로 이동의 땅과 보물을 하사하고 서괵공에겐 주천(酒泉) 땅과 술잔 여러 개를 하사하여 자신을 구해 준 데 대하여 사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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