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4. 주왕의 위엄을 앞세우고 승전가를 부르다
영척의 변설 솜씨
그 곳에는 이미 진선공과 조장공이 와 있었다. 곧 주나라에서 대부 선멸이 이끄는 왕군(王軍)이 당도했다. 그들은 서로 회견하고 장차 송나라 칠 일을 상의했다. 그 때 영척이 앞으로 나서며 의견을 내놓았다.
"주공께서 천자의 명을 받들어 이제 모든 나라 제후를 규합했으니 위세로써 이길 생각은 마시고 덕으로써 이기도록 하십시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볼 때 굳이 군사를 진격시킬 것이 아니라 신이 재주는 없사오나 송나라에 가서 좋은 말로 타일러 일을 성취시키겠습니다."
제환공은 영척의 의견을 받아들여 크게 기뻐하며 명령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은 일단 진격을 멈추고 각기 영채를 세워 명령이 있을 때까지 병사들을 단속하여라."
영척은 조그만 수레를 타고 약간의 수행원만을 거느린 채 송나라 도성으로 갔다. 한편 송후는 영척이란 자가 와서 자신을 청했다는 전갈을 받고 대숙피에게 물었다.
"영척이란 자가 과인을 보자 하는데 그의 신분이 과연 어떤 인물인가?"
대숙피가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그는 소를 치던 시골 목자였다고 합니다. 이번에 제후가 새로 등용해서 벼슬을 주었다고 합니다. 달리 관중의 애첩이 천거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반드시 뛰어난 변설 솜씨가 있을 듯합니다. 그는 우리를 세 치 혀로 설복하려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을 주공께서 듣고 계십시오. 만일에 그가 변설로 주공을 유혹하려 한다면 제가 허리띠를 흔들어 신호하겠습니다. 그 때 주공께서는 좌우 무사들에게 명하시어 그를 포박하게 하십시오. 그리하시면 제후의 계책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송후는 대숙피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고 일단 영척을 불러 만나보기로 했다. 이윽고 영척이 들어오는데 큰 옷에 띠를 두르고 앙연히 들어와 송후에게 읍했다. 송후는 답례조차 없이 단정히 앉아 영척의 행동거지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영척이 갑자기 길이 탄식했다.
"위태롭도다 송나라여, 정말 위태롭도다."
송후가 깜짝 놀라 물었다.
"과인의 작위가 상공에 이르렀고, 백성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편안히 잠자는데 어찌 우리 송나라를 위태롭다고 하는가?"
"군후께서는 옛 주공(周公)과 비하여 어느 쪽이 더 어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공은 성인(聖人)이시라. 과인이 어찌 주공과 맞대 비할 수 있겠느냐."
"그 옛날 주공이 살아계셨을 때 주나라는 가장 강성했습 니다. 천하는 태평하고 사방의 오랑캐도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공께서는 인재를 높이 알고 어진 선비를 잃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아직 천하는 매우 혼란스럽고 군웅들이 제각기 힘을 다투어 자랑하는데, 군후께서는 2대나 그 임금을 시살한 이 송나라를 계승하고 옛 주공의 법을 본받고자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선비 앞에 몸을 낮추시어 오히려 선비들이 군후의 조당에 모이지 않을까 두려워하셔야 할 것이어늘 자기를 자랑하고 크게 높이어 어진 사람을 멀리할 뿐 아니라 이런 나그네마저 멸시하시니 비록 충언(忠言)이 있을지라도 어찌 군후에게 진정을 다해 말하리오! 이러고도 사직이 위태롭지 않은 나라를 저는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송후는 화들짝 놀라, 부지중에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인이 군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군자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소이다. 너무 책망마시오."
이 때 대숙피는 송후가 영척의 말에 빠져드는 걸 보고서 연신 허리띠를 흔들어 신호했다. 그러나 송후는 대숙피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선생이 장차 과인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오?"
영척이 대답했다.
"천자께서 권세를 잃으심에 따라 모든 열국 제후의 마음도 산란해져 임금과 신하 사이에 한계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즈음엔 임금을 죽이고 군위를 뺏는 일이 연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제후께서 이러한 무질서와 혼란을 보시다 못해 왕명을 받고 천자를 위해 열국의 모든 제후와 동맹하셨으니, 그 때 군후께서도 회에 참석하시어 비로소 송나라 군위를 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군후는 즉시 회에서 이탈하고 또 동맹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천자께서 군후의 처사에 진노하사 특히 왕신을 보내시고 제후에게 명하여 송나라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군후는 지난날 이미 북행 땅에서 왕명을 배반했으며, 또 장차 왕군과 제 . 조 . 진 연합군에 항거하게 되었은즉 아직 싸우진 않았으나 이미 승부의 결말은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송후가 기가 죽어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의 의견은 어떠하시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군후는 폐백을 아끼지 마시고 제후와 회견하시고 동맹하십시오. 그러면 위로 주나라 신하로서의 예의를 잃지 않을 것이며, 아래로는 가히 제후와 기쁨을 나눌 수 있으니 단 한 명의 군사를 사용하지 않고도 송나라를 안정되게 할 수 있습니다."
송후의 굴복
송후는 미심쩍어 걱정했다.
"과인이 실수하여 회를 끝까지 안 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제 왕명을 받아 제후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어찌 우리의 폐백을 받고 물러갈 리 있으리오."
"우리 제후는 관인 대도하사 사람의 허물을 생각하지 않으시며, 지나간 일을 끝까지 미워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그때 노나라가 맹회에 오지 않았건만 그 뒤 가(柯) 땅에서 제 . 노 양국이 동맹을 맺게 되자 제후는 지난날 빼앗았던 문양의 땅까지 노나라에 돌려줬습니다. 이에 비하면 군후는 북행의 맹회때 참석까지 하셨는데 어찌하여 제후가 폐백조차 안 받겠습니까."
"무엇으로 폐백을 삼으면 좋겠소?"
"한 다발의 포(脯)로 폐백하십시오. 반드시 귀물(貴物)을 보낼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송후는 몹시 기뻐하고, 사자로 하여금 제군에게 가서 강화를 청하도록 했다. 대숙피도 영척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물러나갔다. 이에 송나라 사자는 제환공에게 가서 백옥 열 쌍과 황금 천 일을 내놓으며 말했다.
"지난 일을 잊어버리시고 동맹하십시오."
제환공이 대답했다.
"천자의 분부로 하는 일인데 어떻게 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오. 이는 반드시 왕신이 천자께 가서 모든 것을 고한 후라야만 결정할 수 있소."
제환공은 송나라가 바친 금과 옥을 선멸에게 주어 주왕실의 천자께 전하도록 했다. 선멸이 제환공에게 속삭였다.
"진정 군후께서 송나라를 용서하신다면 그대로 천자께 가서 아뢰겠습니다."
제환공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송나라 사자를 불러 이렇게 분부했다.
"그럼 송후가 직접 주천자에게 가서 수례(修禮)를 바치고 왕에게 이번 과오를 씻어 주십사 하고 청하시오. 연후에 맹회할 기일을 통지하겠소."
송나라 사자는 은혜에 감사하며 공손히 절을 하고 돌아갔다. 한편 왕군을 이끌고 온 대부 선멸은 제환공이 항시 왕실을 앞세우는데 흡족하여 역시 제환공에게 크게 감사한 후 낙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진 . 조 두 나라 군후도 제환공과 우호를 돈독히 하고 각각 본국으로 돌아갔다. 제나라 군사들은 이렇게 하여 마침내 승전가를 부르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제환공도 몹시 기뻤다. 화살 한 대 안 쏘고 송나라의 항복을 받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또한 새로이 얻은 대부 영척이 뛰어난지라 더욱 귀국길이 즐거웠다. 그런데 정작 영척을 천거하여 큰공을 세운 정승 관중은 그다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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