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6장 포숙아, 관중을 추천하다
5. 천하 절색 식부인
육권의 직간
이렇듯 간곡히 여러 가지로 간했으나 초문왕은 육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육권이 초문왕의 소매를 잡고 칼을 뽑아 왕을 겨누면서 단호하게 다시 아뢰었다.
"신은 차라리 왕과 함께 죽을지언정 살아서 왕이 모든 나라로부터 지탄받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그제야 초문왕이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과인은 그대 말을 듣겠노라. 칼을 거두어라."
이리하여 채애공은 겨우 죽음을 면했다. 육권이 다시 초문 왕에게 아뢰었다.
"왕께서 다행히 신의 말을 들으사 채후를 죽이지 않으시니 이는 우리 초나라의 복입니다. 그러나 신이 왕을 협박한 죄는 만사(萬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신을 죽여 주십시오."
"경의 충성에는 저 빛나는 태양도 무색할 지경이다. 짐이 어찌 경을 처벌할 수 있으리오."
"왕께선 비록 신을 용서해 주셨지만 신이 어찌 이 불충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육권은 말을 하며 칼을 뽑아 들더니 자기 발을 내리쳤다. 그러고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신하된 자로서 왕에게 무례한 자는 나의 꼴을 보아라."
초문왕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좌우에 명하여 육권의 끊어진 발을 소중히 보관하도록 했다. 이로써 초문왕은 충신의 간언(諫言)을 듣지 아니한 자신의 허물을 크게 뉘우쳤다.그 후 육권의 상처는 아물었으나 그는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초문왕은 육권을 대혼(성문을 지키는 두령의 벼슬)으로 삼고 존칭하여 대백(大伯)이라 하였다.
채애공의 복수
초문왕은 마침내 채애공을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전송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 자리에는 많은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쟁이라는 악기를 탄주(彈奏)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용모는 무리 중 단연 뛰어났다. 초문왕도 채애공이 호색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은근히 그 여자를 가리키며 채애공의 속마음을 떠 보았다.
"저 여인은 재색이 겸비하오. 가히 군후에게 한잔 술을 바치게 하오리까?"
그 여인은 왕의 명을 받아 큰 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채애공에게 바쳤다. 채애공이 술잔을 받아 단숨에 주욱 들이마시고 나서 그 잔을 초문왕에게 바쳐 올리며 축원했다.
"만수(萬壽)하소서."
초문왕이 웃으며 채애공에게 물었다.
"군후께서는 어떻게 생긴 여인이 진정한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물은 까닭은 사실 채애공이 원한다면 그 여인을 주어 객고(客苦)를 풀게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채애공은 식후(息侯)의 속임수로 자신이 포로 신세가 되고 끝내 이렇듯 궁색한 처지에 몰린 그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미인이라고 하면 단연코 식후의 규씨 부인이지요. 이 세상 천하에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또 없을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여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지요. 천상의 선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녀가 지상에 하강했다고 생각하시면 큰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듯 미인입니까?"
초문왕은 금시 초문이었다. 그러자 채애공은 서둘러 말했다.
"그녀의 눈은 맑은 물 같고, 뺨은 마치 복숭아꽃 같지요. 동작 하나하나가 극히 사랑스럽습니다. 지상에 그런 절세 미인은 두 번 다시 없습니다."
채애공은 미사 여구에 최대의 찬사를 합쳐 감정을 넣으면서 그녀를 칭찬했다. 초문왕이 듣다가 길게 탄식했다.
"그 여인을 한번 볼 수 있었으면......."
채애공이 슬며시 권유했다.
"대왕의 위엄으로써 한 여자쯤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생각만 있으시다면 쉬운 일이지요."
이 말을 듣자 초문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서로 술잔을 권하면서 크게 취해 그날의 잔치를 파했다. 채애공은 초문왕의 마음속에 애욕의 씨앗을 심어 복수의 계기를 만들어 두고, 자신은 호랑이 굴에서 도망치듯 초나라를 떠나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갔다. 채애공의 말을 한번 들은 뒤로, 초문왕은 식부인 규씨를 수중에 넣고자 사방을 순수(巡守)한다는 명목을 내세우고 식국으로 갔다. 이에 식후는 멀리까지 나와서 초문왕을 영접하여 조당(朝堂)에다 잔칫상을 벌이고 연회를 베풀었다.
"지난날 짐은 군후의 부인을 위해서 약간 수고한 바가 있소이다. 짐이 여기까지 왔는데 군후의 부인은 어째서 짐에게 술 한 잔 권하기를 주저하시오?"
식후는 초문왕의 위력에 눌려 거역하지 못하고 즉시 내궁으로 사람을 보냈다. 이윽고 환패(環佩) 소리가 나면서 부인 규씨가 들어와 따로 담요를 펴고 초문왕에게 재배했다.그러나 초문왕은 답례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미모에 잠시 정신이 흔들렸던 것이다. 규씨가 백옥잔에 술을 가득 부어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리는데, 그 손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과연 천상(天上)의 여자로다.'
초문왕은 속으로 감탄하며 그 술잔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규씨는 그 잔을 곁에 있는 궁인에게 주어 대신 바치게 했다. 초문왕은 그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식부인 규씨는 다시 재배하고 내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때부터 초문왕은 식부인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연회가 파하고 초문왕은 하는 수 없이 관사로 돌아갔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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