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3장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자리:인
공자는 단지 참된 것만을 보았고 말했을 뿐이다. 인이란 예를 따르고자 하는 (일단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노련함을 객관적으로 쌓았다면) 사람의 결정 사항이기 때문에, 어떻게 인하게 되는지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단계적인 분석이 없다. 사람이 정말로 인하고자 한다면 인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오직 결정하는 하나의 길밖에 없으며 그 길이란 결심을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그 밖의 다른 개념들, 예를 들면 <생각함>, <느낌>, <마음 자세를 가짐> 또는 <욕구함>과 같은 (서양에서는 우리들이 심리적인 문제로 보는) 개념들에 대해서도 적절하다고 본다. 그러한 각각의 개념의 경우, 어떤 공개되어 분석될 만한 과정이 없다. 사람은 다만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거나, 생각하거나, 요구하거나 그러지 않거나 할 뿐인 것이다. 이들 모두는 그런 관점에서 인 개념과 논리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다. 자전거는 타는 <방법>이 있다. 즉 어떤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기대고 한다. 그리고 자전거가 구르는 동안 그러한 동작을 게속하는 것이 자전거를 타는 방법이다. 그러나 요구하거나 생각하는 데는 (특정한) <방법>이 없다. 특정 조치의 타당성을 논리에서 찾을 수 있거나 고귀한 동기에서 무엇인가 행위하게 하는 (특정) 방도는 없다. 최종적으로 분석을 한 다음에, 사람은 그렇게 하기도 하고 (또는 하지 않기도 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다. 따라서 (예를 따라 인답게) 행위하는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자기를 계발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들여야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어떤 의미로는 결국 인하는 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길 즉 방법은 필요한 것이지만 충분한 수단은 아니다. 인은 <어려운 일을 한 뒤에> 온다. 즉 예에 의해 요구되는 행위의 솜씨를 몸에 익힌 뒤에 오는 것이다. 인간들이 상호 교제하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개명된 솜씨들을 모두 다 익숙하게 배우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비상한 능력보다는 인내를 요구한다. 그렇다고 인내하는 방법도, 인하는 방법도 (특정적 규정적으로)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배움을 계속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은 인내하는냐 인내하지 않느냐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예 안에서 자기 존엄성을 찾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똑같은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행동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인한가 그렇지 못한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인되기는 쉽다. 단적으로 인하게 행동하라! 적절히 예식을 올리는 제반 솜씨를 터득하고 난 사람은, <마치 중요한 손님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중요한 제사를 모시는 것처럼>, 요컨대 타인들도 자신과 근본적으로 같은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그들을 대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는 (특정한) 다른 방법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지만, 인은 원하기만 하면 즉시 가까이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행위의 패턴은 공개되어 있다는 행위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때때로 피할 수 없는 장애가 있어서, 그것이 그 행위 패턴을 훼방함으로써 그 행위를 무산시켜 버릴 수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행위자의 타인에 대한 지향, 즉 그가 자기 행위에 부여하는 방향의 맥락에서 우리가 행위를 생각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일종의 무오류성, 즉 밖으로 드러난 행위의 최종 결과가 어떠하냐 하는 것과 뚜렷이 구분되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피아니스트는 연주를 통해 어떤 화음을 표현하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외적인 장애란 (표현하려는) 의도함이 아니라, 그런 (표현) 행위의 성공만을 막는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위도함에는 아무런 장애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의도하는 것뿐이다. 같은 논리로, 어떤 행위가 (객관적인) 장애 때문에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 어떤 행위에서도 타인에 대한 일종의 관심이나 배려를 볼 수 있다. 인은 관심이나 배려의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인이라는 관심, 배려에는, <사람이 인하고자 하면>, 거기에는 어떤 장애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원하면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예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인에 대해서는 꼭 들어맞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의 행위란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다시금 신묘하고 경이로우며 역설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안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행위를 참되게 관심을 기울인 (또는 배려를 한) 행동으로 만들어 내는 (고정적으로 확정된) 방도는 없다.
이상의 언명들은 주로 인의 시각, 즉 개인적인 시각이 지닌 직접성과 무 오류성의 측면을 끌어 내고, 또한 이런 측면을 탈 신비화함으로써, 이런 개인적인 시각이 얼마나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친근한 것인가를 상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몇 개의 언급을 통해 바로 개인적인 인의 측면이-개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만-<외적>인 또는 공적인 행위로서 갖는 자연스러움과 고유한 성질을 적절하게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공자가 다양한 공적인 시각에서 바로 공적인 이 속세의 문제를 검토했다는 사실을 재강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마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공자는 행위의 모범 사례인 예식의 사회적인 역사, 즉 전통적으로서의 예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역할, 즉 예에 의해 규정된 역할들을 수행하는 행위-<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 등등-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끝으로 그는 사람들이 주위의 타인들을 향한 또는 그들과 함께 하는 개인적인 행위-인, 상호 존중, 충성, 믿음-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그러면 공자는 개인적인 행위가 어떻게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는가? 예를 따르는 행동은 단순한 기계적 작동, 즉 공식에 매인 행동 수행이 아니다. 예에 따르는 행위는 많건 적건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행위 수행에 융합성이 있는 미묘하고 이지적인 행위이다.
여기서 공자가 애호하던 음악을 모델로 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민감하고 지적인 음악의 연주를, 지루하고 바보같은 음악 연주에서 우리는 신뢰와 융합성 또는 아마도 주저, 갈등, <거짓>, <감상적 작풍>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연주라는 그 현장 안에서 이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따로 연주자의 심리 상태나 인물됨을 조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느끼는) 그것은 <거기에> 공개적으로 놓여 있는 것이다. 느낄 수 있는 그것이 연주라는 장 안에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그 연주를 베토벤 3번으로도 (즉 작곡자의 관점으로), <공개 음악회>로도 (예의 관점으로), 또는 <후기 모차르트 작품>으로도 (스타일의 관점에서) 보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 연주를 일차적으로 이 특정한 사람의 연주로 (그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이 사람이 어떻게 행위를 하는가를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사람이 주위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을 그와 함께 예에 참여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타인들을 자신과 같은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대해 주었는지가 밝혀진다면, 그 행위는 인으로도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행위 패턴이 어쩔 수 없이 엉망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마이 피아니스트가 연주에서 나타내려고 했지만 결국은 나타내지 못한 화음을 들을 스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행위가 시도했던 방향, 목표, 즉 그 행위 중에 나타낸 관심이나 배려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행한 그의 행위를 봄으로써 이러한 모든 것을 아는 것인지, 결코 그 사람의 두뇌나 내심의 정신 영역을 탐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음악 연주에서 거짓을 감지할 수 있듯이, 우리는 겉으로 예처럼 보이는 행동이지만 사실은 보다 복잡하면서도 위선적인 행위의 요소가 있는 경우에 그런 거짓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런 거짓은 예에 의해 규제받지 않는 방식으로 타인을 희생시킴으로써 행위자 자신의 중요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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