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3장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자리:인
<술이>, 7:3에서 공자는 사람으로서 미덕, 배움, 도의의 추구를 못하는 것, 그 점이 사람을 우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다시 우리는 인간의 대응 행위는 바로 객관적으로 무질서하고 혼돈된 상태에서 일어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무질서와 혼돈은 공자가 지적한 자기의 도와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틀린 행위(비행)인 것이다. <술이>, 7:18에서 공자는 자신은 배움을 추구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바라기 때문에 우를 잊고 노년이 오고 있는 것도 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다시 노년이라는 좋지 않은, 그러나 아주 객관적인 불안이 우와 나란히 있는 것이다. 공자는 그의 여러 언명들에서 내적 심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고 했다는 식의 주장이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요 논지는 결코 아니다. 만약 공자가 (내적 심리와 관련된) 그러한 기본적인 비유를 염두에 두고는 있었지만 반성을 통하여 그것을 거부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내심에 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이 자리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장의 요점은 전혀 그러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서양인)들에게는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까지 매우 친근한, 그런 내면적, 심리적인 삶의 비유가 <논어>에는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내적, 심리적 삶이 부정당하다는 가는성마저도 <논어>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가 언급된 위의 구절들에는 (내심의 주관적인 상태와 연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내가 말했을 때, 그 구절들이 내면의 심리적인 문제)를 잘 다듬는 일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배제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의미하려는 것은 그 구절들이 전혀 그런 뜻을 잘 다듬지도 않았으며 또 이해나 타당성을 돕는 면에서도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안연>, 12:4에서 우리는 <논어>가운데 가장 <심리적>으로 쓰인 우의 용레를 보게 된다. 군자는 우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그가 <내심을 들여다 볼> 때, 그는 어떠한 <병>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심>을 본다는 이미지는-우리(서양인)들에게-<내적인 삶>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보려는 것이 결코 <주관적 (심리)상태>로가 아니라, <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우리는 반드시 주목해야만 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공자는 이것은 <도덕적인 병> 또는 <정신적인 병>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공자의 주요한 업적 중의 하나는, 공자가 중국에서 자기 이전의 누구도 했던 적이 없는 방법으로, 인간 존재의 정신적, 도덕적 영역이 존재함을 알았고 그것을 가르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요점은 그가 이 정신적 영역을 조직적으로 개개인의 <내심>에 위치시켰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서구인들은 (서양의 사유 구조에 본질적인) <내심>이라는 말과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거의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공자가 이 주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를 배우는 첫번째 중요한 행보는, 비록 그 말이 쓰이는 경우가 <논어>안에 혹 있다 하더라도, (서양적 의미의) 내심이란 부재하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에 주목하는 일이다. 논의의 전개를 앞질러 말하자면, 나는 여기에서 단지 정신적인 것이란 공자에게는 공적인 것, 즉 <외면적인 것>-그러나 그 정신적인 것이 신이나 혹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나 비인간적인 괴력들에서 구현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이라는 점을 언급해 두려고 한다.
<논어>원문을 보면 공자가 적어도 세 경우에 <내적인 것>에 대해서 모호하게 언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잘 다듬어진 용어들로 행위나 처신 그리고 행위의 규칙들에 대해 줄기차게 애기하고 있다. 좀더 말하자면, <내적인>, <사적인> 것에 대한 그의 언급들은 언제나 그곳을 병통의 근원, 즉 도덕 발전의 결여의 장소로 지적하는 경우이다. 도덕 발전을 적극적으로 규정짓는 성공이란 객괸적으로 처신하는, 말하자면 상호 신뢰와 존중을 예 안에서 특수하고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우를 나타낸 일련의 구절들에서, 형제(즉 가족)없는 사람은 우하고, 앞 일을 헤아리는 사람은 우하다고 한다. 객관적인 불안감(형제 없음)과 잠재적 위험(미래의 일)이라는 주요한 두 가지 조건이 다 이 구절들에 있기 때문에 자연히 우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또 군자는 도에 대해서는 우하지만 가난 때문에 우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객관적 불안감과 불확실성의 관념이 이 구절들에 다시 적절하게 나타나 있다. 군자는 부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부에 대한 불확실성은 그의 처신에 있어서 아무런 곤란한 불안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르다. 거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기 때문에 도의 길은 쉽지 않다. 오직 성인만이 온전히 안정되고 자연스럽게 그 도를 걸어 갈 수 있다. 명백히 훨씬 뒤에 편집된 문장인 <계씨>,16:1에서는 우라는 말이 명백히 객관적으로 문제 많은 나라, 즉 군사적, 정치적인 면에서 골치 아픈 나라와 연관되는 문맥으로 쓰여졌다.
요약하면 우한 상태가 없는 것이 인한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우의 상태란 객관적으로 미해결된 골치 아픈 상황, 즉 그로부터 나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고 명백하게 예견되는 그런 상황에 연루되어 그 속에서 대처하고 있는 그 사람의 (객관적인) 상황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가 없는 것은 객관적으로 해결을 보아 체게화된 상황과 잘 융합되는 그런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는 사람의 상태이다. 무엇이 이런 상태인가? 공자의 경우, 그것은 <예에 귀의한>(복례) 사람의 상태라고 우리는 분명히 기술해 왔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란 마땅히 예에 의해 순수하게 정말로 다스려지는 사회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예란 모든 사람의 행동을 조화시키고 그들의 복지를 인간답게 확립시키는 그러한 인간적인 행위의 구조물이기 때문에, 예 속에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은 완벽하게 짜여져서 인간 존재의 잠재성을 꽃피우는 데 전적으로 기여하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음은 자명한 것이다. 만약에 인이, 한 특정인이 행위자로서 걸어가야 할 방향성에 주목하도록 하는 그런행위의 측면이라면, 예를 따르지 못하는 방향성이나 준비 태세가 그 행위자의 자세에 결여되어서 객관적으로 불안을 야기시키는 요소로 느껴 질 것은 자명한 일이며 이로 인해서 분열과 불안과 걱정이 있게 될 것이다. 요컨대 우는 참으로 인의 부재이고 인은 우의 부재이다. 우리는 이제 인이란 어렵지만 이 자리에서 소망되는 것이라는 역설을 논의해야 할 위치에 와 있으며, 그 역설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앞으로 인이 어ㄷ게 <내심의>자아와 연관된 심리적인 개념이 아닌지를 보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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