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2장
선택하는 일로 상정되는 어떠한 일도 또한, (서양 방식) 대신에, 공자 방식으로도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예의 질서 안에서 언뜻 보기에 선택적인 길들을 객관적으로 분류하는 일이며, 어떤 것이 진짜 길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며, 그리고 어떤 길이 유일하고 분명한 길인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마도 가시덤불로 이어져 있는 숲을 헤쳐 나가는 일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다만 도가 존재한다-즉 우주적 크기의 자기 일관성과 자기 진실성을 확신시키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가정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 존재의 중심적인 특징으로서의 선택이라는 관념은 오직 서로 밀접하게 짜여진 관념체계의 한 요소일 뿐이다. 이런 선택 개념의 결여는 그러한 관념 체계의 나머지 관념들도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선택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주요한 관념들은 도덕적 책임, 죄책감, 응분의 징벌과 회개 등등이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어떤 일에 책임져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일을 일으킨 결정적인 원인자로 (간주되는) 그의 역할만을 언급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 하느냐 하는 문제는 복잡하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방식의 일반적인 추세는 책임 소재를 도덕적 의무에서 찾기 보다는 일의 발생 혹은 인과 관계의 문제와 연관 지어 보는 것이다. 책임에 대한 이러한 인과적 관념은 고대 중국인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누가 혹은 무엇이 어떤 특정한 사태를 발생시켰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 놓고 따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물론 그들은 그것을 <책임>이라 번역될 수 있는 주제 아래서 따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책임이라는 말의 어근적 의미는 도덕적인 것인데, 그것을 단지 인과관계와 연관지어 사용하는 것은 이미 탈도덕의 범주로 파생되어 나온 용례이기 때문이다. 물론 <책임있는>이라는 말의 어근은 <일으키다> 혹은<산출하다>가 아니라 <대응하다>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일들이 되어가는 길(과정)에 대해 누가 대응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일들이 되어가는 것에 대해 대응해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은 일들이 그렇게 진행되어 가는 데에 대해서 실제적 혹은 잠재적인 인과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들이 되어 가는 길에 대하여 인과적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이 물론 다 그 일들의 실제 진행 상황에 대하여 대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공자의 깊은 관심은 책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의 한 측면만을 반영한다. 만약 이것이 우리가 가진 책임이라는 관념이 갖고 있는 특징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부한 군소리, 즉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책임이라는 관념에 특징적인 내용을 주는 것은 <대응>이라고 하는 어근으로부터 도출된다. 여기에-내가 이 행위에 대해 대응한다. 이 행동은 나의 것이다 라는-특별히 개인적인 동참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대응 행위가 이번에는 바로 '도덕적' 책임의 관념을 죄책감, 응분의 벌 그리고 회개라는 관념들과 연결짓는다. 대응해야만 하는 사람의 그 대응의 결과는 죄를 지어 벌을 받거나. 회개하여 보속을 받을 수도 있고 혹은 공덕을 쌓아 긍지를 가지고, 상급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의 이러한 책임에 관한 논의들은 책임이란 요컨대 궁극적으로는 순수하게 인과적 관념으로 따져야 된다는 특정한 공리주의적 관점 때문에 사실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책임>이란 단지 과거의 원인들을 분석 진단하여 미래의 사태에 영향을 주기 위한 일로 여겨져야 한다. 따라서 제재 조치와 포상은 미래의 잘못에 대한 예방을 약속하는 인간(행위)의 모든 인과적 연결 고리의 어느 부분에든지 끼어들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제재 조치들이 내일의 악행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것들은 정당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재 조치들이 악행을 막지 못하거나 혹은 어떤 특수한 경우에는 악행들을 오히려 조장하게 되면 그때는 그 반대의 제재 조치가 제시되게 된다. 회개를 하는 근거나 가치는 그 회개를 통해 미래의 악행을 막을 수 있는 효과를 거두는 데에 있지, 결코 과거 행위의 도덕적 측면과의 어떤 관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죄책감 같은 것이 가지는 가치도 이러한 견해에 따른다면 그와 유사한 합리적 근거에 의해 정당화 될 것이다. 최근의 철학 토론에서는 보다 섬세하고 보다 복잡한 형태의 공리주의적 견해들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하게 발전된 형태들도 결코 (과거의) 보다 간단한 견해들에 의해 명백하게 발생되었던 그런 혼란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범법에 대한 제재와 연관하여 공자가 한 말씀을 번역자들이 <벌>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이는 조심성 없는 독자들로 하여금 공자가 그 말을 우리'서구인')들의 '도덕적인 죄책감이라는 근원적인 함축적 의미를 지닌' 벌 개념과 똑같이 이해하고 사용했다고 잘못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공자에게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히브리-가독교 전통에만 특별히 있는, 그리고 그 대부분에서 공리주의와 깊이 대조되는 이러한 견해는, 단지 (미래의 범법을 예방하려는) 벌의 효과에 의해서 형벌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징벌을 내리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벌이란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행위자에 의해 저질러진 행위에 대한 적절한 도덕적 응답이다. 또한 회개의 의미도 그 나름으로 보자면 단지 적절한 (범죄 억제) 장치, 또는 그 회개 나름대로의 심리적인 (범죄 예방적) 효과들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나쁜 행위에 대한 회개라는 점에 있다. 회개란 자신이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어떤 과거의잘못에 대한 도덕적 대응이다. 죄책감이란 이미 저질러 놓은 잘못 때문에 생겨나는 어떤 도덕적 '혹은 영적인' 속성이다.
만약 벌이 참된 도덕적 체험으로 주어지고 또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일종의 도덕적 채무를 갚는 것, 즉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결과적으로 미래에 있을 유사한 잘못이나 그 잘못에 의해 수반될 죄책감뿐만이 아니라, 또한 벌에 부수되어 나오는, 도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물리적, 신체적) 불쾌감이나 고통을 더욱더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회개가 진실하다면, 그 회개는 이전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기 혐오이며 도덕적 죄책감에 대한 인정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회개는 앞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겠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죄책감, 벌, 그리고 회개가 도덕적 품성에 그리고 도덕성과 관련된 행위에 끼치는 결괴적 효과들은 당연히 환영할 만한 것이다. 여기에도 분명히 공리적으로 효과적인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 각자의 도덕적 근거, 즉 각자에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 당사자가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벌>, <죄책감> 그리고 <회개>가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할 이전의 도덕적 잘못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도덕성보다는 (단순히 기계적 물리적인) 사회 공학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 공자가 주된 공격 목표로서 <벌>의 사용을 지목하고 그 자신의 적극적인 가르침을 그런 것과 직접 대조되는 것으로 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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