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2장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
<'어찌할까 어찌할까' 하고 끊임없이 반문하지 않는 사람이면, 나도 그 사람을 어찌할 수 없을 뿐이다>
이 문장의 언급만을 따로 떼어 우리 서양인의 경향대로 읽는다면 이것은 선택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볼 필요가 없다. <어찌해야 할까?>-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그것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식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거기에는 동등하게 가치 있는 선택사항들이라는 관념이 함축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실천해야 할 하나의 올바른 것만이 전제되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반문의 실제 내용은,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올바른가? 그것은 도인가?> 하는 것이 된다. 좀더 일반적인 말로 하자면, 이런 것은 선택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나 행동을 객관적으로 옳거나 옳지 않다고 확정 지으려는 시도라고 사료된다. 그것은 바로 도덕적인 일이다. 즉 어떤 행위를 적절히 분류하여 예에 맞게끔 그 틀 안에 자리매김 해주는 일이다.
<논어>에는 <현혹된> 혹은 <착각> 또는 <의심>에 빠져있는 마음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문제에 관해서 공자가 언급한 두 문단이 있다. 그에 대해 웨일리(A.Waley)는 그의 <논어>(The Analects of Confucius)에서 두 가지 마음이 있을 때 어느 하나로 결정하는 것에 관한 문제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비록 웨일리가 선택 혹은 결정이라고 번역했지만, 이런 관념에 대한 공자 자신의 세심한 논의를 놓고 보면, 오히려 웨일리의 번역은 공자 철학 사상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두 구절 모두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서 (주저하고) 의심하는 마음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욕구나 행위 면에서 수미일관되지 못하는 사람에 의미를 둔 것이다. <논어> 원문의 내용을 쉽게 풀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아마도 가까운' 어떤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지만 때로 화가 날 때는 그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맹목적인 흥분으로 실상 그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와 같은 갈등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택이나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일관되지 못한 성향들을 구별 혹은 변별해 내는 일이다. 더욱이 각 구절에서, 우리가 그 성향들 각각을 변별해 내기만 한다면 어떤 성향이 바른 것인지는 너무나 자명하여 의심할 수 없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해야 할 일은 선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식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 핵심적인 용어인 혹은 여기에서는 <현혹된, 또는 예와 맞지 않는 성향이나 경향에 잘못 이끌려진>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엇을 할까 선택을 할 때 가지게 되는 의심이 아닌 것이다.
선택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흥미있는 구절이 <논어>에 있다. 어떤 다른 구절보다도 더욱 이 구절은 도덕 규범 내에서의 충돌, 우리식으로 정의하자면, 개인(당사자)의 선택에 의해서 해결을 볼 수밖에 없는 충돌의 문제가 발생된 상황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친 <정직한> 궁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궁은 자기 아버지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이 사실을 말한 제후(즉 섭공)는 자기 백성 궁의 정직함에 대해 공자에게 뽐내듯이 말했지만 공자는-자기 나라의 정직한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숨겨 주었다고 말하면서-그에게 재치 있게 반대했다. 이 구절은 두 가지의 대립, 충돌하는 도덕 요구들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해결하는 데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 서양인들은 대부분 이 경우 '법을 존중하는 것은 옳다. 자신의 부모를 보호하는 것도 옳다. 두 가지가 다 깊은 의무라는' 지식을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으나, 이들 두 가지 깊은 의무가 서로 충돌할 때는 우리가 (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선택의 논의를 어쩔 수 없이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어쩔 수 없는 필요성 안에서 비극, 책임소재, 죄책감, 회한 등 각종의 씨앗을 낳는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란-우리(서양인)들에게는 지극히 자명할 수 있지만-공자로서는 전혀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다. 매사를 불가피한 선택의 문제로 보는 우리(서구인들) 시각의 자명성은 바로 공자의 그런 관점의 부재를 우리들에게는 그만큼 더 황당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실재하는 몇 개의 대안들 중에서 하나를 참되게 선택하는 일이 공자에게서는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적어도 그런 선택이 근본적인 도덕적 과제라는 점이 결코 공자에게는 분명하게 인식될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 좋은 증거를 우리는 댈 수 없다. 공자는 단지 이런 문제를 바라보는 그 자신의 생각만을 선언했을 뿐이다. (자연스럽게) 예에 따르는 관습을 지키는 일이 의미 있다고 말함으로써 재치 있게 이 문제를 넘어갔다. 여기에는 결정의 문제로 생각해 볼만한 어떠한 것도 없다. 다만 그 제후 쪽(즉 섭공)의 지식의 결핍, 단순한 도덕 판단의 잘못만이 생각되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즉 명백하게 선택의 제시로 볼 수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공자는 뚜렷하게 아무것도 주목하지 못했으며, <논어> 전체에서 오직 한 번 이런 경우가 언급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주장은 입증된 셈이다. 사실 공자 당시-극히 예외적인 일대 혼란과 변력 시기-의 중국인들의 실제적인 일상 생활에서는 그러한 (선택의 기로에 처한) 상황이 많았으리라고 사료된다. 더욱이 우리가 도덕가로서의 공자의 크기와 그의 임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감안한다면, 공자가 이와 같은 (구체적인) 경우에서도 내면의 도덕 충돌이라는 문제를 인식하거나 거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자의 관심사나 생각들이나 배려들이 요컨대 그의 도덕과 지성의 전체 방향이 (우리들 서양의 그것과는) 다른 방향에 서 있다고 가정하지 않고서는 해명될 길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