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4장
2. 노환공의 죽음
노나라에 보내진 비밀 편지
노나라에서는 아직 노환공이 죽은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 데 어느 날 밤, 한 낯선 사내가 대부 신수의 집에다 한통의 서찰을 전하고 사라졌다. 신수는 그 서찰을 본 후 파랗게 질려서 곧 모사 시백(施伯)의 부중으로 달려갔다.
"주공께 변고가 생겼소.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하오."
신수는 제나라에서 온 서찰을 시백에게 보여 주며 한시가 급하다고 다급하게 재촉했다. 시백은 서찰을 읽고 나더니 신수를 달랬다.
"서두르시면 주변이 놀랍니다. 마음 같아서는 전 백성을 무장시켜서라도 제나라로 쳐들어가고 싶소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제나라에서 공식으로 통보가 올 때까지 비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사람은 일단 몇 가지 대책을 상의한 후 동궁(東宮)으로 갔다. 마침 세자 동(同)이 있었다. 신수가 세자에게 아뢰었다.
"제나라에 가신 주공의 신상에 중대한 변고가 생겼습니다.그런 줄 아시고 대비해 두셔야겠습니다. 내일이라도 확실한 것이 드러나면 군위에 오르셔서 대책을 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세자 동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무슨 말이냐고 따져 물었다. 신수와 시백이 간신히 진정시켰다.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을 만한 곳에서 알려 왔기에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그 때 공자 경부(慶父)가 조당으로 들어오다가 이 말을 들었다. 그는 사실 노환공의 장자(長子)였다. 그러나 서출(庶出)이었다. 무용(武勇)도 뛰어났고 성품이 괄괄한 무장형(武將型)인 데다가 단순한 사내였다.
"뭐라구요? 제나라에서 주공이 변을 당하셨다구요?"
공자 경부는 펄쩍 뛰더니 기세등등하게 마구 소리쳤다.
"내게 병차 3백 속만 내주오. 내 달려가 제나라 겁쟁이놈들을 싹 쓸어 버릴 것이오."
시백이 날카롭게 제지했다.
"아직 확실치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모두가 사태를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우선 진정하십시오."
이어서 세자에게 조용히 아뢰었다.
"나라에 하루라도 군위가 비면 안 됩니다. 그러하오니 세자께서는 군위에 오른 입장으로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우선 확실한 사실은 지난 번 기나라 싸움 때 원수처럼 된 제나라 공자 팽생이란 자가 주공을 살해한 듯합니다. 물론 그 자의 뒤에는 제양공이 있겠지요. 그렇다고 지금 군대를 동원하시면 우리가 불리합니다. 우선 국서(國書)를 보내 제후의 태도를 지켜보고 팽생이란 자를 죽이도록 한 후 다시 계책을 세우십시오."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백의 말에 동의했다.
"좋도다."
다음날이 되었다. 그때서야 수행원으로 따라갔던 신하들 이 헐레벌떡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노환공의 죽음이 확실해졌다. 곧 대부들이 모여들어 회의를 열었다. 모두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신수가 나서서 대부들의 태도를 따끔하게 질책하며, 우선 국서로 제후의 책임을 묻겠다고 하니 모두 동의했다. "제나라 군후는 우리 주공의 죽음에 책임이 있소. 따라서 제후가 명확한 사인(死因)을 조사하여 밝혀야겠다는 것과 주공이 돌아가실 때 옆자리에 있었다는 팽생의 죄를 다스려달라는 요구를 할 것이오."
시백은 곧 국서의 초안을 잡아 세자에게 보이고, 대부들에게 서명하라고 일렀다.
"세자께서는 상주(喪主)의 몸이시라 제외하고 모든 대부는 이름을 적고 서명하시오. 그래서 우리 모든 노나라 대부들의 뜻을 결집시키십시다."
국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외신(外臣) 신수와 시백 등은 제후(齊侯) 전하에게 삼가 절하고 올리나이다. 우리 주공께서 천자의 명을 받들어 귀국의 혼사를 의논하시고자 떠나신 후 돌아오지 않으시니, 많은 이들이 제나라 우산 땅에서 전송 잔치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수레 안에서 변이 생긴 것이라 말합니다. 그날 수레 안에는 우리 노나라 수행원이 아니고 귀국의 공자 팽생이 함께 있었다 하는데, 이는 천하 모든 나라들에게서 자기 나라 임금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질책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참으로 면목 없는 일입니다. 제후 전하께옵서는 그날 귀국의 공자 팽생이 수행원으로서 죄가 있는지 없는지 밝혀 주십시오. 죄가 있다면 다스려 주시고 죄가 없다면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위해서라도 그를 저희 노나라로 잠시 보내 주십시오. 삼가 제후 전하의 해량이 있으시길 바라옵니다. 대부들이 서명을 끝내자 시백은 곧 사자를 시켜 제나라 제양공에게 전하도록 했다.
"서둘러 가거라. 그리고 확실히 전하거라. 사인 규명의 책임이 제나라에 있음을......."
분부를 받은 노나라 사자는 곧바로 출발하여 낮밤을 잊고 제나라로 향했다.
팽생의 폭로
한편 제양공은 사태를 대충 마무리 짓고, 팽생을 불러 상(賞)을 내린 후, 그에게 얼마 동안 변방의 장수로 나가서 요양하라고 분부할 속셈이었다. 그 때 노나라의 사신이 제궁에 당도했다. 그는 국서를 바치며 노나라 대부들의 뜻을 전했다.
"사인 규명을 해 주십시오. 제나라와 노나라 양국의 우호 친선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서를 살펴 읽으시라고 넌지시 권했다. 제양공이 국서를 펼치고 읽어 내려갔다. 그는 속이 뜨끔했다. 특히 팽생이 죄 없으면 노나라로 보내달라니....... 자칫하면 은밀한 지시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원래 말주변이 없는 팽생이고 보면 노나라의 여러 대부들 가운데 날카로운 자가 없을 리 없고 그런 노련한 자의 심문을 받아 넘길 재주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제양공은 짐짓 팽생을 불러 꾸짖는 말 몇 마디를 하고 내쫓을 요량을 했다. 그런 걸 노나라 사신에게 보여 줄 속셈도 물론 있었다. 즉시 사람을 보내 팽생을 궁으로 불렀다. 그런데 일이 잘못 되느라 제양공이 사전에 귀뜸을 해 준 심부름꾼이 팽생의 부중으로 가고 있을 때 팽생은 궁으로 오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귀뜸을 받지 못한 채 팽생이 궁으로 들어온 것이다. 팽생은 스스로 큰 공로를 자부하며 거만스럽게 조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제양공이 듬뿍 상을 내릴 것으로 짐작하여 아예 수레를 한 대 궁 밖에 대기시켜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정작 제양공 앞에 이르자 선물은 커녕 제양공이 언성을 높여 자신을 꾸짖는 것이 아닌가.
"이 바보같은 놈아. 노후께서 과도히 술에 취하셨기에 잘 모시라고 그렇듯 당부했거늘 어찌하여 제대로 시중을 들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시게 했느냐?"
팽생의 두뇌가 좀 모자란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잔뜩 칭찬과 상(賞)을 고대했는데 의외로 제양공이 꾸짖자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노나라 사자가 옆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헤아려 살필 요량이 없었다. 대개 이런 정도라면 눈치를 채고 적당히 변명하여 궁색한 자리를 모면하기 마련인데 팽생은 달랐던 것이다.
"아니, 시키는 대로 했는데 어찌 꾸짖습니까?"
팽생이 어이가 없다는 듯 오히려 제양공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제양공은 아차 싶었다. '이 어리석은 놈아. 눈치 좀 차리거라.' 그렇다고 노나라 사신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 는데 어찌 속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구. 저 놈을 끌어내 크게 혼찌검을 내주거라."
제양공은 속에도 없는 생각을 좌우 사람에게 분부했다. 그러자 팽생이 정말로 화가 났다. 포상을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혼찌검을 내리라니......
"내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혼찌검이란 말이오. 큰 상(賞)을 내리겠다더니 혼찌검이 뭡니까? 시켜 써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 내치려 한단 말입니까!"
팽생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제양공은 화도 났고 팽생이 어떤 소리를 할까 겁도 났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무엇 하는 거냐! 저 놈을 끌어내 참(斬)하지 않고......."
이 소리에 팽생이 기겁했다. 아니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하여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 나쁜 놈! 누이동생과 붙어먹고 매부를 죽인 놈아! 날보고 노환공을 죽이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고서는 이제 날죽여 입을 봉하겠다 이런 거지. 이 노옴! 내가 죽으면 그대로 곱게 죽을 것 같으냐. 귀신이 되어서라도 네 놈을 반드시 잡아 먹고 말리라. 이 더러운 색마야!."
팽생은 끌려 나가면서도 제양공과 문강의 관계를 계속 떠들었다. 제양공은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두 손바닥으로 양쪽 귀를 틀어 막았다. 보라! 모든 신하들이 웃고 있지 않은가? 팽생은 그대로 끌려가 참수를 당했고, 노나라 사자는 이를 본 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제양공은 곧 팽생의 목을 목갑에 담아 노나라로 보내고 장례용품을 수레에 실어 보냈다. 그러나 문강은 양심의 가책이 되었는지 남편의 상여를 따라가지 않고 제나라에 머물렀다. 한편 노나라 대부 신수는 세자를 모시고 교외에 나가 선군의 영구를 영접했다. 그리고 예법대로 세자가 상례를 주관하게 한 후 임금으로 모시니 그가 바로 노장공(魯莊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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