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3장
흔들리는 세상
2. 제족의 농간
송나라의 계책
한편, 정나라에서는 정장공이 죽고, 세자 홀이 군위에 올랐다. 그가 정소공(鄭昭公)이다. 그런데 정소공은 제족에 의해 쫓겨나고, 공자 돌이 군위에 오르니 그가 정여공(鄭廬公)이다. 그리고 이 정여공도 제족(祭足)의 배신에 의해 또 쫓겨났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임금을 갈아치우는 제족의 농간이 극에 이르렀다고 비난했다. 어떤 이는 그렇게 한 데에는 제족조차 어쩔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을 변명해 주기도 하지만. 아무튼 관중의 예측처럼 그는 간사한 꾀가 많아 몇 번이고 주공을 갈아치우는 몹쓸 짓을 번갈아 하게 되는데 그 전말은 이랬다.
정소공은 즉위하자, 여러 대부들을 각국에 사절로 보내어 정나라의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했다. 주환왕이 정나라를 치다가 패한 후 정나라에 대한 열국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제족은 송나라에 사절로 갔다. 그가 특히 송나라로 간 이유는 정소공의 동생 공자 돌이 송나라에 가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자 돌의 생모(生母)는 송나라 옹씨(雍氏) 집안 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옹길이라고 했다. 그런데 옹씨 집안은 송나라의 궁중과 사사로운 인연이 매우 깊었다. 그래서 송장공(宋狀公)은 옹씨 일가(一家)를 마치 자신의 일가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옹씨는 성격도 활달하고 출중한 외손(外孫) 공자 돌이 어떻게 하든 정나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틈이 나면 송장공에게 부탁했다.
"우리 공자 돌이 정나라로 갈 수 있도록 힘써 주시옵소서."
그럴 때마다 송장공은 대답했다.
"언제고 기회만 생기면 잊지 않고 주선하마."
바로 그런 때에 정나라에서 제족이 친선을 맺고자 사신으로 송나라에 당도했다. 송장공은 제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홀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기회가 왔다. 공자 돌이 정나라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는 제족에게 달렸다."
송장공은 심복을 불러 은밀히 계책을 일러 줬다. 그리고 태재(太宰) 화독(華督)에게 차후 일을 지시했다. 제족은 멋도 모르고 궁으로 들어가 송장공에게 예(禮)를 바쳤다. 예가 끝났을 때였다.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불문곡직하고 제족을 붙들어 묶었다. 제족이 큰소리로 외쳤다.
"외신(外臣)이 귀국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할말이 있으면 군부(軍部)에 가서 하여라."
송장공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를 던지고는 내전(內殿)으로 들어가 버렸다. 즉시 제족은 군부로 끌려갔다. 제족은 꼼짝 못하고 중죄인이 수금되는 군부에 잡힌 신세가 되었다.
화독의 회유
해는 지고 밤이 되었다. 그제야 태재 화독이 군부에 와서 주안상을 차리게 하고 제족을 모셔 들이게 한 후 술을 권했다. 제족이 술잔을 받지 않고 물었다.
"우리 주공은 귀국과 좀더 우호 친선하려고 나를 사신으로서 보낸 것이오. 아직 아무런 허물도 없거늘 어찌 이런 처사를 하시는 게요. 혹 우리 정나라와 풀지 못할 원한이라도 있는 것이오? 아니면 사신으로 온 내게 불찰이 있는 것이오? 속시원히 알고나 이런 대접을 받읍시다."
제족이 언성을 높여 따지고 들자, 화독은 일부러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송나라와 정나라가 풀지 못한 구원이 있을 까닭이 없고, 또한 그대처럼 영특한 대부가 불찰이 어디 있겠소. 그런 이유는 결코 아니오."
"그럼 왜 이러는 것이오?"
화독은 술 한잔을 쭉 마시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대도 잘 아다시피 지금 귀국의 공자 돌이 우리 송나라에 와 있소이다. 그가 누구요? 우리 송나라에서 보면 옹길의 아들이니 바로 옹씨 외손(外孫)이고 우리 주공께는 친척이나 다름이 없소이다. 또한 그대의 나라에서 보면 분명한 선군의 아들인 정나라 공자가 아니겠소. 이제 그대는 공자 돌을 모시고 귀국하시오. 그리고 군위에 오르게 하시오. 그것이 그대가 할 일이오."
제족은 기가 찬 듯 어이가 없어 화독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희 선군께서는 세자에게 군위를 이어 왔소. 그런데 갑자기 공자 돌을 군위에 세우라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그대는 다른 말은 하지 마시오. 우리의 뜻대로 따를 것인지 아닌지만 정하시오. 따를 수 없다면 그대의 목을 참(斬)하고 다른 방도를 찾아야겠소. 나와 그대가 이렇게 마주앉는 것도 오늘 이 시각이 마지막이오."
화독은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험악한 얼굴이 되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제족은 와락 겁이 났다. 그래서 화독의 옷자락을 부리나케 붙잡으며 힘없이 응낙했다.
"말씀대로 따르겠소."
화독은 여전히 화등잔만 하게 눈알을 부라리며 다시 한번 자신의 뜻을 말했다.
"우리 뜻을 따르겠다면 여기서 맹세하시오."
제족이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맹세했다.
"공자 돌을 정나라 군위에 올려 세우지 못하거든 천지신명이시여 이 제족을 벌하소서."
그제서야 화독은 머리를 끄덕이며 소리없이 웃고는 제족을 크게 대접하는 것이었다. 화독은 제족을 대접하고 군부에서 나와 곧 송장공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보고했다.
"주공의 뜻대로 잘 되었습니다."
이튿날이 되었다. 송장공은 태재 화독, 제족, 공자 돌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먼저 공자 돌에게 말했다.
"과인은 그대가 정나라 군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싶소. 그래서 오늘 정경 제족과 함께 이렇듯 자리를 함께 한 것이오."
그러자 공자 돌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하며 맹세하듯이 다짐했다.
"돌은 신세가 불행하여 이렇듯 외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데 군후(君侯)께옵서 고국으로 돌아가 조상의 종묘(宗廟)를 모시게 해 주신다니 그 은덕을 어찌 이 짧은 혀로 다할 수 있겠나이까? 이 일이 성취되면 정나라의 큰성(城) 셋과 횐 구슬 백 쌍과 황금 만 일(萬鎰), 해마다 추수한 좋은 곡식 삼만 종(種)을 바쳐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송장공은 공자 돌의 말을 짐짓 모른 체했다. 그러자 태재 화독이 거들었다.
"앞으로 이 일이 성공하거든 정나라 정사(政事)는 모두 제족에게 맡기시게나."
화독은 말을 거들고 나서 준비한 서약서를 꺼내 공자 돌과 제족이 함께 서명하게 했다.
"이것은 모두 우리 스스로가 다짐하고 믿는 신의의 징표요. 노여워하지 마시길 바라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자 돌은 군위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제족은 위협에 굴복하여 모두 해괴한 서약서에 서명했다. 이렇게 해 놓고 나서 송장공은 슬며시 이야기를 바꿔 혼담 이야기를 꺼냈다.
"과인이 듣기에 제족에게는 미혼인 여식(女息)이 있다 들었소. 공자 돌의 외사촌 옹규(雍糾)와 통혼(通婚)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번에 아예 옹규를 데리고 정나라로 돌아가 혼례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게 해주시오."
제족은 그저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였다. 마침내 공자 돌과 옹규는 평복을 입고, 장사꾼처럼 가장하고서 제족의 수레 뒤를 따라 정나라로 갔다.
정여공의 탈출
제족은 귀국한 후 공자 돌과 옹규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병이 나서 거동을 못했다고 소문을 냈다. 그리고 궁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자 정나라 대부들이 모여 그의 부중으로 문병을 갔다. 제족은 대부들을 자기 방으로 안내케 했다.
"아니...... 병환중이라 들었는데 벌써 쾌차하신 것입니까? 참 다행한 일입니다."
제족이 의관을 갖추고 앉아 있으니 대부들은 놀랍고, 축하하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족은 안색을 크게 찌푸리며 대답했다.
"병은 몸에 생긴 게 아니라오. 나라의 일 때문이오. 선군(先君)께서 공자 돌을 송나라로 보낼 때 송후(宋侯)와 은밀히 약조한 바가 있다고 하오. 그래서 이제 송후는 병차 6백 승을 일으켜 우리 나라를 쳐서라도 공자 돌을 군위에 세우겠다고 합니다. 이러니 내가 병이 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있겠소이까."
대부들은 크게 놀랐다. 성급하게 뭐라 할 때가 아니다 싶어 모두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앉아 있었다. 제족이 대부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말했다.
"송병(宋兵)의 침공을 막는 길은 단 한 가지, 지금의 주공을 폐하고 공자 돌을 모시는 길 외엔 없소. 지금 우리 집에 송나라에서 공자 돌이 와 계시오. 어찌들 하시겠소? 이렇게 모두 모였으니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합시다."
제족의 말이 끝나자 눈치 빠른 고거미가 사태의 진행을 재빨리 알아챘다. '제족은 이미 공자 돌을 군위에 올릴 결심이구나.' 고거미는 이런 일에 어떻게 처신해야 자신에게 득(得)이 될지 알고 있었다. '앞장서야만 생색을 낼 수 있고, 나중에 논공행상할 때 벼슬자리 얻는 데도 좋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습니다. 이제 새 주공을 모셔 새로운 정나라를 계획하는 것은 사직의 큰 복입니다. 어서 새 주공을 뵈옵고 싶습니다."
고거미가 앞장 서서 분위기를 유도했다. 다른 대부들은 제족과 고거미가 이미 사전에 묵계를 하고 자리를 마련했나 싶어 얼떨결에 찬동하고 만다.
"고거미의 말씀이 합당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대부들이 모두 굽신거렸다.
제족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 방을 나가더니 공자 돌을 데리고 들어와 윗자리에 모셨다.그리고 고거미와 함께 주공에게 하듯 먼저 나붓이 절했다. 대부들은 일이 이쯤되니 어찌할 것인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시에 섬돌 아래로 내려가 모두 꿇어 엎드려 새 주공을 맞이하듯 예의를 차렸다.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제족은 이미 준비한 두루마리 천을 꺼내 새로운 주공을 모시기로 했다는 내용 아래 자기 이름을 쓰고 대부들에게도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게 했다. 그리고 그 연명부를 궁에 있는 정소공에게 보냈다. 그런데 연명부에는 아무도 모르는 제족의 비밀 장계(狀啓)가 끼어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번에 송나라에 가서 그들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이 충성을 바쳐 죽는다고 하더라도 주공께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을 알고 그들의 요구에 일단 승낙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부들과 함께 일단은 공자 돌을 새 주공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주공께서는 이런 대세를 따르시어 잠시 군위를 떠나 있으시옵소서. 신이 기회를 보아 복위시켜 드리겠습니다. 이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말을 어기는 자에게 천벌을 내려 다스리소서.
정소공은 연명부와 제족의 비밀 장계를 읽고 난 후 자신이 외로운 처지임을 알았다. 군사를 모아 한바탕 승부를 걸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이미 모든 대부들이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그는 내궁으로 들어가 비(妃)와 부둥켜안고 울더니 그날 밤에 간단한 행장을 꾸려 위나라를 향해 도망쳤다. 이렇게 해서 공자 돌이 군위에 오르니 정여공(鄭屬公)이다. 그 뒤 제족은 정나라 정사를 도맡아 결재했고, 옹규는 제족의 딸과 결혼하면서 정나라 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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