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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2장
3. 경솔한 천자
간사한 정장공
이야기는 세월을 거슬러 아직도 천하의 주인이 주왕실이었던 때로 돌아간다.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주평왕 말년의 일이다. 그때, 주평왕과 정(鄭)나라 사이에 인질을 교환하는 해괴한 일이 생겼다. 왕(王)과 신하(臣下)가 서로의 아들을 인질로 붙잡아 둔다는 것은 명분상으로 왕과 제후, 임금과 신하의 구분이 없어지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일은 이렇게 발단이 된다.
어느 날 괵공 기부(忌父)가 낙양의 조정에 왔다. 주평왕은 그와 담소를 했다. 담소 도중에 두 사람은 신분을 떠나 뜻이 상통했다. 주평왕이 기부에게 말했다.
"경(卿)이 조정에 와서 정무(政務)를 맡아 주면 어떻겠소?"
기부가 의아해서 물었다.
"정백(鄭佰)이 있지 않사옵니까?"
주평왕은 다소 얼굴을 찌푸렸다.
"정백은 부자(父子) 2대에 걸쳐 정무를 보아왔소. 그런데 요즘은 이름만 걸어 두었을 뿐 실(實)이 없소."
기부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금방 눈치를 채고 아뢰었다.
"정백이 조정에 잘 오지 못하는 것은 본국에 일이 생겨서 일 것입니다. 그러니 없던 일로 하시옵소서."
이 일이 세작(細作)을 통해 정장공에게 전해졌다. 정장공은 벌써 군위에 오른 후 동생인 태숙의 반란을 겪는 등 국내적으로 해결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모친 강씨와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원래가 심지가 굳은 인물로 오래 전부터 세작을 주나라에 파견해 두어 왕실을 감시하고 정보를 빼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장공은 보고를 받자 즉시 정나라를 떠나 조정으로 갔다. 곧 왕을 뵈온 후 서슴없이 아뢰었다.
"성은(聖恩)을 입사와 부자 2대에 걸쳐 정무를 보았습니다. 그간 별다른 공(功)도 없이 벼슬만 한 듯싶습니다. 원컨대 경사의 벼슬에서 내려앉아 본국의 국내 일이나 열심히 전념할까 합니다. 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평왕은 약간 당황했다. 그래서 말이 헛나왔다.
"괵공에게 부탁했던 그 일 때문에 그러는가?
정장공이 어떤 인물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친동생과 모친의 음모도 노련하게 마무리하는 간계(奸計)를 갖고 있는 일대 효웅이 아닌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괵공 기부야말로 능히 왕을 보좌할 만한 왕좌지재(王佐之才)입니다. 이치로 봐서도 신(臣)이 물러나야 좋을 듯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신의 허물을 탓할 것이옵니다. 헤아리소서."
주평왕은 정장공을 붙잡아 둘 묘책이 없었다. 그래서 또 불쑥 했다는 말이 왕도에 맞지 않는 엉뚱한 얘기가 되고 말았다.
"정 그렇듯이 짐을 믿지 못하겠거든 태자(太子)를 인질로 보낼 것이니 다른 말 마시오."
주평왕은 그길로 태자 호(弧)를 정나라로 보냈다. 이것이 인질교환의 계기가 되었다.문제는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주평왕이 죽게 되면서 생겨났다. 태자 호는 유배지 같은 정나라 땅에서 부왕(父王)의 붕어를 들었다. 그는 매우 애통해 했다. 원래 효자였던 태자는 부왕의 병중에 시탕(侍湯) 한번 못하고 종신(終身)도 못했다는 한(恨)이 골수에 사무쳤다. 주나라로 돌아온 태자 호는 너무 슬퍼하다가 그만 병이 났다. 그러고는 왕위(王位)에 올라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王命 詐稱
이에 태자 호의 아들 임(林)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주환왕인 것이다. 등극한 주환왕은 부친의 죽음에 정장공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가만히 있었지만 속으로는 정장공을 크게 미워했다. 그래서 정장공을 호칭할 때도 '오생(寤生), 그 천한 자(者)'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다 주환왕이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정장공은 어린 주환왕을 깔보고 주나라 경내에 들어와 곡식을 수확해 가기도 했었다. 그 일로 주환왕의 분노는 극에 달했었다. 또한 정장공이 노나라, 제나라와 연합하여 송(宋)나라를 징벌했을 때였다. 그는 주환왕의 허락도 안 받고 제멋대로 봉천토죄(奉天討罪)의 깃발을 내걸었던 것이다. 즉 천자의 뜻을 받들어 죄를 묻는다는 기치를 내건 것이었다. 주환왕이 또한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정오생(鄭寤生) 이 천한 자가 어찌 이렇듯 짐을 속이고 능멸할 수 있단 말인가! 내 그 놈을 응징하지 않고는 이 분을 풀 수가 없도다."
주환왕은 즉시 정나라 토벌군을 일으켰다. 그러자 괵공이 간했다.
"군대를 일으키면 천위(天威)에 손상이 갈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마땅히 좋은 말로 하조(下詔)하시고 마시옵소서."
주환왕은 듣지 않았다.
"그 천한 놈이 짐을 속인 것이 이번 한 번이 아니잖느냐. 그 놈은 예전부터 왕실을 업수이 여겨 많은 죄를 지었노라. 마땅히 응징해야 하겠느니라."
이렇게 되어 채, 진, 위 삼국 군대가 출동하고 주환왕은 친히 중군(中軍)이 되어 정나라로 진격했다.
한편 정장공은 주환왕이 삼국 군대까지 거느리고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대부(大夫)들과 함께 상의했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모두들 말이 없었다. 워낙 큰일이기도 했지만 주나라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정경(正卿) 벼슬에 있는 제족(祭足)이 아뢰었다.
"천자께서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오신다니 그 동안 우리 나라가 잘못한 일이 없더라도 우선 사죄(謝罪)부터 하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제족의 말을 듣고 있던 정장공이 불끈 화를 냈다.
"과인에게 항복하란 말인가! 이번에 천자에게 꺾이면 아마 정나라는 장차 이름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에는 대부 자원(子元)이 아뢰었다.
"신하로서 왕과 싸우는 일은 자칫 명분을 잃기 십상입니다. 또 일이란 속히 결말을 내야지 언제까지 느릿느릿 시일만 끌 수도 없습니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 계책이란 무엇인가?"
자원이 다시 차근차근 아뢰었다.
"왕은 채, 위 두 나라 군대를 우군(右軍)으로 거느리고, 진나라 군대를 좌군으로 삼고, 왕 스스로 중군이 되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군대도 삼대(三隊)로 나누어 대응하는데 채, 위 두 나라와는 화해하고, 진나라는 공격하여 무찌르고, 왕의 중군과는 대치하면 됩니다."
정장공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반드시 이긴다는 이유라도 있느냐?"
자원이 대답했다.
"진나라는 이번에 임금을 죽이고 새로 임금이 섰습니다. 아직 백성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져 있지 않습니다. 공격하면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력으로 공격하여 기세를 쉽게 꺾고 무찌르자는 것입니다. 채, 위나라는 특별히 우리 정나라와 원한이 없습니다. 적당히 대응하다가 진나라의 패배가 전해지면 전의(戰意)를 잃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 연후에 상황에 따라 대응하면 별로 차질이 없을 듯합니다."
그제야 정장공이 빙그레 웃었다.
"좋도다, 자원이여! 적의 형세를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구나."
정장공은 명령을 내렸다.
"대부 만백(曼伯)은 일군(一軍)을 거느리고 나아가 채, 위 두 나라 군대와 대응하는데 진퇴에 유의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제족은 일군(一軍)을 거느리고 나아가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시오. 과인은 고거미, 원번, 하숙영, 축담 등 장수와 함께 직접 왕을 상대하겠소."
이리하여 정군(鄭軍)은 삼대(三隊)로 행군하여 국경지대 가까이 가서 영채를 세웠다.주환왕은 정나라 국경 근처까지 와서 정장공이 영채를 세우고 대항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왕은 앞장 서서 나아갔다. 정장공이 나타나기만 하면 크게 꾸짖어 기세부터 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장공은 영채 속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주환왕은 더욱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모두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정나라 군사는 싸움에 응하지 않고 영채만 지킬 뿐이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었다. 왕군(王軍)은 배도 고프고 지루했다. 그때 정나라 영채에서 큰 깃발이 오르더니 동시에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북소리는 온통 사방에 가득 울렸다. 그와 동시에 영채의 3개 문이 활짝 열리고 정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이라고 하지만 3대의 진격이 각각 달랐다. 우군(右軍) 쪽 채, 위 두 나라를 공격하는 군사들은 병차들과 나란히 질서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중군(中軍) 쪽 주환왕을 공격하는 군사들은 약 100보 전방에서 사열하듯이 대오를 갖추고 한바탕 무력 시위를 했다. 그런데 좌군(左軍) 쪽 진나라를 공격하는 군사들은 병차를 휘몰아 풍우(風雨)처럼 내달았다. 진나라 군사는 싸움이 시작된 지 일각도 채 안 되어 우왕좌왕 도망치기 시작했다. 진군(陳軍)은 달아나면서 도리어 왕병(王兵)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권했다. 채, 위 두 나라 병사들은 싸울 의사도 별로 없던 차에 진군이 크게 패하여 도망치자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좌군(在軍)이 무너졌다!"
"우군(右軍)이 후퇴했다!"
군사들이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외쳐댔다. 주환왕은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멀리 좌우를 살펴보았다. 양쪽 모두 무너지고 있었다. 주환왕은 중군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속히 후퇴하라!"
주환왕은 어가(御駕)를 뒤로 돌리게 했다. 이때 정나라 장수 축담이 후퇴하는 어가를 보았다. 그는 활을 반달처럼 잡아당겨 어가를 직접 겨냥했다. 화살은 그대로 날아가 주환왕의 왼쪽 어깨에 꽂혔다. 다행히 주환왕은 어의(御衣) 속에다 두툼하게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화살은 깊이 박히지 않았다. 한편 활을 쏜 축담은 병차를 몰아 달아나는 주환왕의 어가를 뒤쫓았다. 어가와 병차의 거리는 점차 좁혀졌다. 이제 손을 뻗으면 곧 어가가 사로잡힐 판이었다. 그때, 정나라 진지에서 후퇴하라는 금(金)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축담은 더 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 이 덕분에 주환왕은 사로잡히지 않고 달아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