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1장
작은 행복
2. 초막에 불 밝히고
영웅신 '예'에 얽힌 비극
좌붕 노인이 어린 손자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밭일에 함께 다녀온 며칠 후부터였다. '가르칠 바에야 빠를수록 좋다.' 그날 밤,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데 일노일소(一老一少)는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하늘을 바라다 보았다. "오랜 옛날 예라고 하는 아주 뛰어난 인물이 하늘나라에 살고 있었다......." ㅡ예는 신화에서 요나라 때 활의 명수로 나오고, 하나라 때는 임금인 대강(大康)을 추방했다는 기록이 사기에 나오는데, 아무튼, 예라고 하면 활의 명수인 영웅이었으나 하늘의 노여움을 받아 지상으로 쫓겨나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끝내는 제자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의 인물로 전해진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천제(天帝)에게 아들이 열 명 있었다. 그들은 모두 태양이었다. 그 어머니 희화(羲和)는 여섯 마리의 용(龍)이 끄는 마차에 매일 아들을 한 명씩 태우고 하늘을 달리게 했다. 마차에 타는 순서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열 개의 태양은 열흘 만에 한 번씩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하늘을 비추다가 하늘나라 집으로 돌아갔다. 인간들 쪽에서 보면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언제나 하나지만 사실은 열 개의 태양이 열흘 만에 한 번씩 교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이들 태양의 형제들은 열 명이 모두 함께 놀아 보고 싶어졌다.
"내일은 우리 모두 함께 나가 놀자. 엄마에게는 말하지 말고....... 괜히 말했다가는 잔소리밖에 더 듣겠니?"
이렇게 해서 그 다음날 열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하늘에서 빛나게 되었다. 열 개의 태양이 나타났다! 이러니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온통 불지옥처럼 뜨거워져 야단법석이 되었다. 강물과 호수는 물 한 방울없이 모조리 말라 붙었고 들과 산은 불타올랐다. 세상은 그야말로 아비 규환의 생지옥, 뜨거운 불덩어리 천지로 변하고 말았다. 그 때 지상(地上)의 요황제는 하늘에 있는 임금 천제(天帝)에게 빌어 구원을 청했다. 하늘나라 임금은 요황제가 구원을 애타게 갈망하는 호소를 들었다. 그래서 하늘나라 영웅인 예를 불러 곧 지상으로 내려가 인간을 도와 주도록 분부했다.
"지금 인간들은 열 개의 태양때문에 타 죽고, 뜨겁다고 야단이다. 그러니 지상으로 내려가 녀석들을 흔내서 인간들을 구원해 주도록 하여라."
예는 활의 명수에다가 용맹스런 영웅이었다. 그리고 고지식했다. 그는 열 개의 화살을 전통에 넣고 아내 항아(嫦娥)와 함께 지상으로 갔다. '약한 인간을 괴롭히는 녀석들에게 정말로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다.' 예는 지상에 내려오자 자신있는 활솜씨로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쏘기 시작했다. 태양은 화살에 맞아 차례차례 떨어졌다. 요황제는 놀랐다. 열 개의 태양도 곤란하지만 태양이 한 개도 없다면 이것 역시 인간이 살 수가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요황제는 부하를 시켜 예에게서 화살 하나를 몰래 훔쳐 오도록 시켰다. 결국 예가 아홉 개의 화살로 태양을 쏘아 떨어트렸기 때문에 하늘에는 하나의 태양만 남게 되었다. 예가 인간을 구원한 것이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또 다른 야단이 벌어졌다. 하늘나라 임금의 아들 아홉 명이 죽은 것이다. 하늘나라 임금은 매우 화가 났다.
"얘 이놈! 그래도 내 아들들인데 적당히 혼을 내서 쫓아버릴 일이지....... 그렇게 죽일 까닭은 없지 않았느냐! 이노-옴!"
진노한 하늘나라 임금은 예의 신적(神籍)을 박탈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없게 하였다. 예와 항아는 지상의 인간처럼 살게 되었다. 이제는 불사(不死)의 권리도 잃게 되었다.
"당신은 바보 천치예요. 적당히 해서 임금의 아들을 쫓아 버릴 일이지....... 이젠 어떻게 할 거예요?"
항아는 걸핏하면 신경질을 부리면서 고지식한 남편을 들볶아댔다. 예는 자신의 잘못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할말을 잃고 그저 죽은 듯이 지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소식을 구했다. 얼마 후 예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곤륜산(崑崙山)에 서왕모(西王母)라는 신(神)이 있는데 그가 불사약(不死藥)을 갖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곤륜산은 신비의 산으로 그 곳까지 가는 길은 험하기도 하려니와 깊은 계곡과 활화산(活火山) 등이 있어 보통 사람으로는 도저히 가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실수없이 잘할 테다.' 예는 곤륜산으로 떠났다. 신적(神籍)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보통 인간과는 다르다. 한때는 하늘나라에서도 용맹으로 손꼽히는 영웅신이 아니었던가. 그는 험한 산과 뜨거운 화산을 지나 힘들이지 않고 곤륜산으로 찾아가 서왕모를 만났다. 서왕모는 사연을 듣고 두말 하지 않고 예에게 불사(不死)의 영약을 꺼내 놓았다. 그런데 서왕모가 갖고 있는 것은 마지막 두 알뿐이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마지막 두 알이오. 길일(吉日)을 택하여 부부가 한 알씩 먹도록 하세요. 한 알만 먹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요. 두 알을 먹으면 천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약이 없으니."
예는 서왕모에게 거듭 사례하고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서왕모가 하던 이야기를 그대로 아내에게 전해 주었다.
"이제 하늘나라로 다시 올라가는 건 포기해야겠지만 우리도 죽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소. 인간이 사는 이 지상에서지만 말이오."
예는 이제야 아내에게 진 빚을 갚게 되었다는 반가운 심정으로 영약을 꺼내 아내에게 주었다. 항아는 불사약을 잘 챙겨 두었다. 그날 밤, 항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불쌍한 처지가 된 것은 모두 고지식한 남편 때문이다. 난 정말로 그를 따라 지상으로 내려온 잘못 뿐이다. 나만큼은 절대로 억울하다. 그런데.......'
한 알을 먹으면 불노불사(不老不死)이지만 두 알을 모두 먹으면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부부 중 다른 한 명은 지상에 남아야겠지.......' 항아는 영약 두 알을 꺼내 들고 잠든 남편의 얼굴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편은 남편이고, 난 원래 천상에 살았으니까 그 곳으로 돌아가야지.' 결심이 서자 항아는 혹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두 알을 한꺼번에 입 속에 넣어 버렸다. 과연 그녀의 몸은 점점 가벼워져 깃털처럼 떠오르더니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도중에 항아는 생각했다. '혹시 남편을 혼자 두고 나만 올라왔다고 손가락질 받을지도 몰라. 잠시 피해 있다가 가야지.' 그녀는 달에서 잠시 동안 피해 있기로 했다. 그래서 월궁(月宮)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때 그녀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키가 점차 작아지고, 목은 어깨 속으로 점점 기어들어가고, 배와 허리가 부풀어오르고, 눈이 튀어나오고, 팔 다리가 옆구리에 괴상하게 붙어 버리는 것이었다. ㅡ으악! 항아는 마침내 달나라에서 한 마리 두꺼비 형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영약을 먹는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의 아내인 항아의 이름이 달의 별명처럼 되었다. 어찌되었든 불쌍한 것은 예였다. 그는 천상에 올라가는 것은 고사하고, 영원히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소망마저도 이루지 못했다. 아니 아내에게서 철저히 배신까지 당하고 말았다. 더구나 그의 죽음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예를 살해한 자는 봉몽(逢蒙)>이라는 말이 있다. 봉몽이란 자는 예의 부하이고 제자이기도 했다. 예는 그에게 활쏘는 비결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아내에게서 배신당하고 불사(不死)의 희망마저 잃고 낙담해 있던 예에게 접근하여 위로해 주는 척하고 신임을 얻은 후 제자가 되어 활쏘기를 배웠다. 그런데 활쏘기의 비결을 배우고 나자 봉몽의 생각은 싹 달라졌다. '예만 없어진다면...... 나는 천하 제일이 된다.' 여기서 봉몽은 예를 죽일 결심을 했다. 활로 쏘아 죽이려다 실패한 그는 끝내 복숭아 나무로 만든 곤봉으로 예를 때려 죽였다.
이 신화에서 우리는 인간 세상에 널려 있는 많은 것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주어진 임무의 수행 방식, 남녀의 사랑과 갈등, 욕망과 선의, 죽음에 대한 공포, 경쟁 관계의 삭막함, 그리고 신의와 배신이라는 것. 좌붕 노인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오 소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예라고 하는 분이 너무 불쌍해요." ㅡ불쌍한 영웅 예. 어린 소년의 가슴 깊이 박힌 영웅신 '예'는 평생 동안 그의 행동 양식과 상황 적응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불안한 손님
좌붕 노인은 집안에서는 손자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서당의 훈장님이었지만, 들판에 나서면 여전히 철저한 자연의 개척자요, 농사꾼으로 돌아갔다. '내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욱 쉴 틈이 없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벌써 8월도 그믐이 가까워지는데도 날씨가 무더웠다. 농사꾼에게는 이것이 고마운 일이다. 덕택으로 온갖 작물의 수확이 좋아진다. 내리쬐는 태양은 등을 태우고, 땅에서 되솟아오르는 무더운 열기는 온 몸을 땀으로 젖게 했다. 좌붕 노인의 얼굴은 벌겋게 익었고, 땀방울은 수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아버지, 좀 쉬었다 하세요."
나무 그늘에서 놀던 소년이 큰소리로 외쳤다.
"오냐, 오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노인의 밭갈이는 계속되었다. 일기가 좋은 여름일수록 작물만 잘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잡초도 잘 자라서 그것을 알뜰히 뽑아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작물의 성장이 크게 달라진다. 좌붕 노인은 한참이나 잡초를 뽑은 후에야 손자 녀석이 기다리는 그늘로 가서 앉았다. 소년은 어느새 만들었는지 작은 활을 당겨 목표로 하는 나뭇가지를 쏘아 맞추고 있었다. 열 가운데 다섯이나 여섯은 명중했다. '대단한 솜씨인걸.......' 노인은 내색하지 않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좌붕 노인의 눈빛 속에는 대견함과 감탄이 담겨져 있었다. 좌붕 노인과 소년이 귀가길에 오른 것은 뜨거운 태양이 넓게 트인 지평선 쪽으로 저물어가는 무렵이었다. 주변 들판에는 이미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노인은 오늘도 이 부락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일한 것이다.
마음은 더 일하고 싶었지만 몸은 고달팠다. 밭을 일군다는 일이 일흔 살 노인으로서는 중노동인 것이다. 하지만 손자 녀석과 손을 잡고 들판을 걸어오는 좌붕 노인의 표정에는 피곤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옷은 더러워지고 얼굴은 땀에 젖어 있으나 즐겁게 일한 후에 나타나는 뿌듯함과 함께 온화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집 앞에 거의 이르렀을 때 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졌다. 자기 집에 평상시와 다른 변화가 왔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집 옆쪽 공터에 처음 보는 낯선 말 한 필이 매어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웬 말이 있지?'
좌붕 노인은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이 말을 못 본 지도 벌써 몇십 년이 넘었다. 말이 이 곳에 매어져 있다는 것은 말 타는 신분의 사람이 이 곳에 왔다는 것인데 좌붕 노인으로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무슨 일일까?' 노인은 의아해 했다. 병졸들을 모으는 징병관일까? 그럴 리가 없다. 병졸을 데려 가려고 왔다면 부락의 일을 보고 있는 촌장에게로 갈 일이다. 더욱이 올해는 전쟁의 소문조차 들리지 않고 있다. 좌붕 노인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자기 집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손자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침 석양이 물들고 주위의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으나 집이 가까워짐에 따라 말의 몰골이 확실히 보였다. '형편없는 말이로군.'좌붕 노인은 그 말의 몰골을 보자 다소 기분이 풀어졌다. 말갈기는 반쯤 빠져 있고 털도 매끄럽지 못했다. 상당히 늙은 말로 괴로운 듯이 목을 늘어뜨리고 있으며 안장을 비롯한 장구(裝具)도 낡아빠져 병정이나 벼슬아치가 탈 것이 결코 못 되었다. '떠돌이 장사꾼인가?' 간혹 약초를 캐러 오는 약장수들이 근처를 지나는 일이 있었다. 강 건너편 신로봉(神露峰)에 오르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이 마을로 내려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타고 왔다면 애초부터 산길을 타고 올 리도 없고 잘못 길을 든 것이 아니잖은가. 좌붕 노인이 늙고 초라한 말을 곁눈질하면서 자기집 문 앞에 당도했다. 때마침 집 안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좌붕 노인은 천천히 문 안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이 방자하게 웃고 떠드는 자가 누구인가.
"아버님이 돌아오셨어요." 부엌에서 일하던 며느리가 뛰어나오면서 외치자, 방 안에서 웃음소리가 멈추고 방문이 열리면서 여러 명이 우르르 마당으로 내려섰다.
"사돈 어른,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어라!' 좌붕 노인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생면부지의 사내로부터 사돈 어른이란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전에 보았을 때는 젖먹이었는데......." 사내는 노인 옆에 서 있는 이오 소년을 보고 큰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두 손을 벌려 보였다. 이 사내가 전에 보았던 소년의 크기를 가리키는 것이겠지. "아- 하." 그제서야 좌붕 노인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렇습니다. 접니다. 의형(義兄)과 함께 떠났던 그 사람입니다." 사내는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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