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1장
작은 행복
1. 영상 땅의 一老一少
벼슬보다 한 뼘의 밭을 일구며 땅은 넓게 트이고 하늘은 드높다. 중원이라 일컫는 저 거대한 대지의 한가운데 강이 굽이쳐 흐르고 군데군데 늪과 숲이 흩어져 있다. 지금은 안휘성의 풍치 수려한 곳으로 변해 버린 영상(穎上) 땅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5백 년 전, 춘추 시대엔 잡초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습지대였다. 다만 굽이쳐 흐르는 강물의 안쪽으로 파고들어간 야트막한 구릉지와 드문드문 솟은 산줄기의 아래쪽에 십여 채씩의 초막들이 새로운 간척지를 끼고 몇 개의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옛부터 농작물과 어패(魚貝)를 좋아한 인근 지역 백성들에게는 그런 대로 풍요로운 대지였고, 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생명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이 곳이 처음부터 풍요로운 터전은 아니었다.
40여 년 사이, 이 부근은 크게 변모했다. 많은 늪이 매립되었고 강둑이 세워졌다. 또한 굽이치는 강물을 따라 오고가는 장사꾼이나 뱃사공의 왕래도 많아졌다. 생활은 점차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새로운 풍물도 선보였다. 그래도 당시 중원에 비한다면 생활 수준은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는 주평왕 50년 여름, 가난하지만 새로운 변화가 밀려오는 이 곳에 칠순이 넘은 농부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인간의 수명이 짧고 노화가 빨랐던 그 당시로서는 오늘날의 1백 세 정도에 해당했다고 볼 수 있는 상당히 연로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백발의 노인은 좌붕(左朋)이라고 했다. 그는 매일같이 노구를 이끌고 밭일을 나섰다. 언덕을 까내고 흙을 퍼서 늪을 메우고, 거기다 새로 농작물을 가꾸고 밭을 일구는 일이었다. 「땀 흘려 일해 한 뼘의 땅이라도 밭을 만든다.」이것이 노인의 신조였다. 그래서 일족(一族) 가운데 농사일을 싫어하거나 하면, 딱 잘라 말하고 내쫓았다.
"땅을 일구고 농작물을 가꾸기가 싫으면 얼씬거리지 말고 아예 이 곳을 떠나거라."
벌써 40여 년을 지켜온 그의 고집이었다. 노인의 땅에 대한 집념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부친의 유언이기도 했다. 노인의 부친은 주(周)나라에서 하대부(下大夫) 벼슬을 한 좌유(左儒)다. 좌유라 하면, 바로 주선왕(周宣王) 때 산뽕나무 활과 쑥대 전통을 팔러 온 시골 아낙을 붙잡아 참형에 처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 후손이 어찌 제나라와 송나라의 접경 지대, 그 누구도 돌보지 않는 황량한 곳에 흘러들어 밭을 일구고, 강물을 퍼 올리며 살게 되었는가. 이야기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주선왕 말년의 일이다.
그 해에 큰 제사가 있었다. 왕은 종묘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날 밤 왕은 깜빡 선잠이 든 새에 흉몽을 꾸었다. 소스라쳐 일어난 왕은 기분이 몹시 울적했다. 왕은 내색하지 않고 제사를 마쳤다. 그리고 궁으로 돌아오자 곧 태사 백양부를 불렀다. 백양부가 들어오자 왕은 어젯밤 종묘에서 꾼 흉몽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백양부는 아직도 산뽕나무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에 연관 된 요녀(妖女)가 죽지 않아 이를 경계하라는 귀신의 증거라고 했다. 왕은 요녀가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말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이 요녀를 잡아죽이라고 분부했던 상대부 두백을 불렀다. 3년 전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데 대하여 두백을 크게 문책할 생각이었다. 왕이 강경하게 두백에게 물었다.
"그 계집아이 소식은 아직도 없느냐?"
두백이 별 생각없이 아뢰었다.
"그 때 산뽕나무 활과 쑥대 전통을 가진 시골 아낙을 죽였고 그 이후에는 별다른 징후가 없습니다. 요녀는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어찌 또다시 묻나이까?"
왕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또다시 왜 묻느냐고? 너는 어찌 3년씩이나 맡은 바 직분을 소홀히 하고 보고하지 않았으면서 말대답만 하느냐? 이런 불충한 신하를 어디에 쓰겠느냐!"
기분이 상한 왕은 크게 꾸짖더니, 좌우의 무사들에게 호령했다.
"저 자를 끌어내어 참하거라. 불충한 자의 목을 백성들에게 널리 보여 줘야겠다."
졸지에 겪는 임금의 진노인지라 조당의 신하들이 모두 어쩔 줄 몰라했다.
"왕명을 거두소서!"
그때 큰소리로 외치며 무사들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대부 좌유였다. 좌유가 부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왕에게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요 임금은 9년 홍수에도 임금의 자리를 잃지 않았으며, 7년 가뭄에도 누구 하나 탕(湯) 임금의 자리를 빼앗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천재 지변에도 아무런 탈이 없었거늘, 어찌 요사한 계집아이 하나를 이렇듯 두려워하시나이까. 왕께서 두백을 죽이시면 백성들이 오히려 요사한 기운을 믿게 되고, 자칫 왕실조차 업신여길까 두려워집니다. 바라옵건대 두백을 용서하시고 없었던 일로 해주시옵소서."
원래 두백과 좌유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이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주선왕은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너는 친구를 위해 왕의 명령을 가로막고 거역하는 것이 아니더냐! 물러나거라."
"아닙니다. 마땅히 왕의 허물을 간하는 것이 충(忠)이고, 옳지 못한 명령으로 친구가 위험한 것을 막아야 의(義)입니다. 왕께서 두백을 죽이시면 천하가 모두 왕을 밝지 못했다고 비웃을 것이며, 왕의 밝지 못함을 간하여 막지 못했다고 해서 신의 불충을 탓할 것입니다."
왕은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어찌 지체하느냐. 짐이 두백을 죽이는 일은 한갓 짚을 베는 거나 다름없도다. 무슨 잔소리가 그리 길더란 말이냐!"
끝내 왕은 명령을 거두어 들이지 않았다. 무사들은 두백을 끌고 나가 참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좌유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유언한 후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자결했다.
"이제 머잖아 나라의 기운이 흩어지고 말리라. 나는 이를 경계하여 왕에게 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두백의 뒤를 이어 내 목숨을 던져 마지막으로 왕에게 충성하고 친구의 의리를 천하에 세우겠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모두 짐을 꾸려 먼 남쪽 땅으로 가거라. 그 곳에서 사람 살기가 그리 좋지 못한 강변에 자리잡아 새로운 땅을 개척하거라. 결코 벼슬을 탐하지 말고 한 뼘의 땅이라도 일구고 작물을 길러 살아가거라."
그래서 좌유의 아들 붕(朋)은 식솔들을 이끌고 주나라를 떠나 남쪽으로 향하다가 늪이 많고 아직도 황무지와 숲이 흩어진 이 곳 영상 땅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크게 될 인물
그날도 어김없이 노인은 밭일에 나섰다. 일곱여덟 살쯤 된 어린 소년과 함께였다. 날씨가 좋았고, 세상은 그야말로 평온했다. 무엇보다도 몇 년간에 걸쳐 해마다 사람들을 떨게 했던 전쟁과 징병 모집 이야기가 금년에는 전혀 없었다.
'작년과는 전혀 딴판인데.......'
작년의 늦은 봄에는 이 곳 영상 부락에까지 밀려온 전쟁의 발소리로 온 마을이 떨었었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전전긍긍하다가 병졸로 뽑혀가기도 하고 다행히 징병에서 면제되었더라도 언제 다시 병졸로 끌려 갈지 모르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노인은 들판을 걸으면서 어린 손자 녀석의 고사리 같은 손을 꼬옥 쥐었다.
"이오(夷吾)야, 걷기에 힘이 들지 않니?" 여덟 살 소년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아뇨, 할아버지.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은데요."
"허허, 녀석."
노인의 표정에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없이 대견스럽다는 듯 함빡 웃음이 넘쳐났다. 이 소년은 기실 노인의 외손자다. 노인의 사위는 관씨(管氏) 성을 가진 사내였는데 소년이 젖먹이였을 때 집을 떠났다.
"어차피 나중에 병졸로 끌려갈 바에야 낮은 벼슬 자리라도 얻어야 할 게 아닌가."
소년의 아비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훌쩍 가출한 것이다. 사람들은 노인과 뜻이 맞지 않은 탓이라고 하기도 했다. 사실 노인은 농사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위의 가출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땀흘려 일하기 싫으면 이 곳을 떠나라.」노인의 신조는 한결 같았다. 그러나 손자 녀석은 볼수록 마음에 쏙 들고 어딘가 달랐다. 생김생김이 복스러운 등근 얼굴에 원만한 모습이면서도 눈빛을 보면 마치 찌를 듯 내쏘는 것이 있었다.
'이 녀석의 자질에는 빛나는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다.'
노인은 하나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세월을 막연히 기다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제적이고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운(運)을 믿고 몸을 맡기기보다는 한 번의 삽질이 더욱 값어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노인이었음에도 손자와 함께 있다 보면 예감 비슷한 것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앞으로 크게 될 자질이 있다.'
마치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릴 때 이번 농사는 큰 수확을 얻을 것 같다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농부의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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