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2장 -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서른일곱번째 이야기 - 천상 사람들은 눈 깜박이는 것이 더디다
부처님이 비사리의 중각 강당에 계실 때의 이야기다. 그 나라에는 탐욕에 눈이 멀어 남의 물건을 감쪽같이 훔치는 도둑이 살고 있었다. 그곳 백성들은 깊은 불심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자가 도둑이라는 사실을 모두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승방에 좋은 구리 항아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동료들과 함께 몰래 숨어들었다. 그러나 구리 항아리는 끝내 훔치지 못하고 비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천상 사람들은 눈 깜박이는 것이 매우 더디고, 인간들은 눈 깜박이는 것이 매우 빠르다."
그 도둑은 이 말은 마음 깊이 새기며 승방을 빠져나왔다. 그후 다른 나라에서 온 상인이 귀중한 마니보주를 국왕에게 상납하였다. 구슬을 받은 왕은 곧 사람을 보내 그것을 탑머리에 걸어두게 했다. 도둑은 이 소식을 듣고 그 구슬을 훔쳐 숨겨두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왕은 크게 화를 내었다.
"그 구슬을 훔쳐간 자를 내게 알린다면 내 후한 상을 내리리라."
그러나 상당한 시일이 흘러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왕은 뾰족한 대책이 없어 그저 도둑을 원망하고만 있었다. 그때 한 슬기로운 신하가 왕에게 진언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매우 풍요로워 도둑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이 도둑질을 생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구슬도 바로 그 자가 훔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잡아들여 다그친다 해도 실토하지 않을 게 분명하니 왕께서는 계책을 꾸며 그 진실을 알아내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계책이 좋겠소?"
"몰래 사람을 보내 그 자를 초대하여 모두 함께 술을 권해 취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 궁궐로 옮겨놓고 술이 깨기 전에 궁궐을 화려하게 꾸미고선 기녀들로 하여금 노래와 춤을 곁들이게 합니다. 그러다가 그 자가 음악 소리에 놀라 일어나면 기녀를 시켜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당신이 세상에 있을 때 탑에 걸려있던 구슬을 훔친 인연으로 이 도리천(도리천은 욕계 6천의 제2천으로 수미산 꼭대기에 있다. 이 하늘에는 제석천이 살고 있다고 한다)에 다시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당신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니 사실대로 말씀해보세요.'
이렇게 하면 그 자가 술김에 사실대로 말하지 않겠습니까?"
왕은 슬기로운 신하의 계책대로 일을 꾸몄다. 그 도둑은 술에 취한 채 기녀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지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두렵고, 거짓말을 한다면 천녀들이 못살게 굴 텐데...'
그때 그 자는 지난날 승방에 구리 항아리를 훔치러 들어갔다가 비구들에게서 엿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가만히 천녀들이 눈 깜박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더니 그 속도가 빨랐다. 도둑은 이 천녀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끝내 훔쳤다는 자백을 하지 않았다. 왕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 자는 죄가 없음을 인정받고 목숨을 부지한 채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에 슬기로운 신하는 다른 계책을 꾸며 그를 잡아들이자고 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친히 그를 불러 대신의 자리를 주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창고에 있는 물건들을 몰래 조사한 다음 그에게 창고 관리를 맡기십시오. 차후에 대왕께서는 그 자에게 부드러운 말로 이렇게 격려하십시오. '이제 경처럼 친한 이가 없으니 아무쪼록 창고를 잘 지켜 잃어버리는 물건이 없도록 하시오.' 그 말을 들으면 그 자는 분명 기뻐할 것입니다. 그때 대왕께서는 다시 이렇게 묻도록 하십시오. '일전에 탑머리에 마니보주를 걸어둔 일이 있었는데, 경은 아는 바가 없는가?' 이렇게 하시면 그 자는 분명히 사실대로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는 대왕이 자기를 신임해서 모든 보물을 다 맡겼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왕은 그 신하의 말대로 했다. 그랬더니 과연 그 도둑은 사실을 실토했다.
"제가 바로 그 구슬을 훔친 놈입니다만, 지금껏 두려워서 감히 내놓지 못했습니다."
"경은 일전에 내가 궁전에서 연극을 꾸며 기녀들로 하여금 자네가 도둑인지 묻게 하였을 때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는가?"
"지난날 제가 승방에 구리 항아리를 훔치러 들어갔다가 비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천상 사람들은 눈 깜박이는 것이 매우 더디고, 인간들은 눈 깜박이는 것이 매우 빠르다.' 그때 그 말이 떠올라 천녀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슬을 다시 얻게 된 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 도둑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껏 맡겼던 일도 그대로 계속하도록 했다.
"국왕이시여, 원컨대 제 죄를 용서하사 출가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경은 지금 높은 지위에 있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출가하려고 하는가?"
"제가 예전에 비구들이 말한 바를 잠깐 들은 덕분에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많은 경전을 듣고 익히고 수행하여 진정한 삶에 눈뜨고 싶습니다. 그래서 출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도둑은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한 덕으로 아라한과를 얻게 되었다.
<찬집백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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