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2장 -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서른세번째 이야기 - 전생의 약속
반제라는 나라에 우달나라는 왕이 있었다. 그 나라는 매우 풍요로워 백성들은 왕의 선정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우달나왕은 이만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첫째 부인의 이름은 월명이었다. 우달나왕은 특히 월명부인을 몹시 사랑하여 때때로 잔치를 베풀어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는 그녀의 춤을 바라보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녀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를 달고 춤을 추면 마치 천녀가 하강한 듯해서 뭇 사람들이 넋을 잃고 지켜보곤 했다. 평소 왕은 관상을 잘 보았는데, 어느 날 월명부인의 관상을 보자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기껏해야 육 개월 정도 살 운명이었던 것이다. 왕은 사랑하는 사람이 곧 죽으리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 월명부인을 보지 않고 애써 피하려 했다. 그녀는 갑자기 변한 왕의 태도를 의아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으나 왕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끈질기게 묻자 왕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의 관상을 보니 죽을 날이 멀지 않았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것이 가슴 아파 애써 피하려 했던 것이오."
"대왕이시여, 생명 있는 자가 죽게 되는 것은 우주의 원리인데 어찌 가슴 아파 하시는 것입니까? 대왕께서 저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죽기 전에 제가 출가수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부인이 출가수도하면 비록 도를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그 공덕으로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게 될 것이오. 천상에 태어나게 되면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고 약속하시오. 그러면 출가를 허락하리다."
월명부인은 우달나왕과 약속을 했다. 그러고는 곧 출가수행에 들어갔다. 일국의 왕비가 욕심을 버리고 출가했다는 소식을 듣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공덕을 칭송했다. 그러나 월명부인은 그것이 수행생활에 도리어 방해가 됨을 알고 그들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수행을 게속했다. 그러기를 육 개월 만에 그녀는 아나함과(아나함과는 소승 4과 중의 제3과로 아나함이란 욕계에서 죽어 색계, 무색계에 나고는 번뇌가 없어져서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를 얻을 수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수명을 마치고 색계(색계는 정묘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로 사선을 닦은 사람이 사후 태어나는 천계이다)의 하늘에 태어났다. 그녀는 우달나왕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왕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때 왕은 여러 가지 욕망에 빠져 진리의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 끝에 무서운 나찰(나찰은 악귀를 일컫는 말로서 남자 나찰은 추하고 여자 나찰은 아름답게 생겼으며 언제나 사람의 혈육을 먹는다고 한다)로 변신하에 왕의 침상 곁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때 잠에서 깬 왕은 나찰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자 나찰이 말했다.
"네 아무리 수많은 백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네 목숨은 이제 내 손안에 있다. 죽음이 임박했으니 무슨 인연으로 살아 남겠는가?"
"나는 특별한 인연은 없고 그저 과거에 지은 선업으로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바이오."
"그러한 인연만이 의지할 만한 것이고, 다른 이치는 없노라."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무슨 신이길래 나를 이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오?"
"대왕이시여, 저는 원래 월명입니다. 전생에 왕과 했던 약속 때문에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무서운 나찰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어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소? 본래의 월명부인 모습을 다시 보여준다면 믿겠소."
그러자 나찰은 곧 생전의 아름다운 월명부인의 모습으로 변해 왕의 옆에 섰다. 왕은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월명부인을 껴안으려고 했다. 그녀는 왕이 아직 애욕을 버리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몸을 허공으로 띄운 다음 말했다.
"대왕이시여, 육신은 무상한 것으로 눈 깜짝 할 사이도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마치 아침 이슬이 해가 뜨면 사라지고 마는 것과 같이 덧없는 것인데, 어찌 대왕께서는 육신을 탐하는 것입니까? 젊음과 건강함도 늙음으로 인해 멸하고, 모든 감각기능이 둔해져 눈이 있어도 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잘 듣지 못하게 됩니다. 또 형상이 무너지고 살이 썩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 마치 술을 빚고 난 후 그 찌꺼기가 아무 쓸모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의 육신도 이젠 늙었으니 즐길 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아직 육신이 살아 있다고 해도 항상 죽음의 그림자는 같이 있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어머니 탯속에서 죽는 이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죽는 이도 있습니다. 또 젊어서 요절하는 이도 있고, 늙어서 죽는 이도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은 약하고 위태로운 것으로 죽음이라는 도둑이 항상 따르는 이상 잠시라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건만 대왕께서는 아직도 제 몸을 탐하시는 것입니까? 수많은 궁녀와 여러가지 욕망, 나라와 재물 그리고 처자식 모두가 '나'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죽은 후에도 '나'를 따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 몸도 예외일 수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들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생사의 바다를 전전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본래 지혜로운 분이신데 어찌 출가수도할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우달나왕은 월명부인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수도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월명부인은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떠나갔다.
"출가수도하시려면 반드시 좋은 스승을 만나 진리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세요.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밤낮없이 잘 받들어 행하시기 바랍니다."
다음날 아침 우달나왕은 마침내 출가를 단행했다. 그러다가 마가다국에 이르러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아라한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왕사성에 들어가 음식을 구걸한 다음 숲속으로 돌아와 먹고 있었다. 그때 병사왕이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원래 왕으로 얼마나 큰 부귀영화를 누렸었는가? 그런데 이제 거지꼴로 걸식을 하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만약 지금이라도 수행을 포기하면 그대에게 이 나라의 절반을 통치하게 하리라."
"나는 출가하기 전에 큰 나라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버렸는데, 이제 어찌 작은 것을 다시 취할 마음이 있겠는가?"
"그대가 왕이었을 때에는 아름다운 접시에 담긴 산해진미를 먹었을텐데 이제 질그릇 발우에 남이 먹다 남긴 밥을 먹으려 하니 어찌 목에 넘어가겠는가? 또 외출할 때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호위했을 텐데 지금은 혼자 돌아다니려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리고 궁전에 있으면 수많은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그녀들의 재롱을 즐기며 편히 잤겠거늘 지금은 홀로 풀위에 드러누워 잠을 자야 하니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나는 지금의 상태로도 만족하며 더 이상의 쾌락을 탐하지 않소."
"그대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오."
"정말 불쌍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그대는 아직도 여러 가지 욕망에 쫓겨 자유롭지 못하나 나는 이제 모든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소?"
병사왕은 우달나왕의 말을 듣고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불설잡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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