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2장 -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서른 한번째 이야기 - 판관의 양심
옛날에 두 형제가 있었는데, 형의 이름은 단야세질이었고, 아우는 시라세질이었다. 단야세질은 그 사람됨이 믿음직스럽고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항상 힘닿는 대로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치고 단야세질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 급기야 왕은 단야세질을 판관에 임명하여 모든 소송 사건을 담당하게 했다. 그런데 당시 그 나라 법은 돈을 빌리고자 할 때에는 따로 차용증을 쓰는 것이 아니라 판관 앞에서 구두로 계약을 하고 판관이 그 계약의 증인이 되었다. 그때 한 상인이 외국으로 장사를 하러 나가려던 참에 밑천이 달려 시라세질에게 돈을 빌리고자 했다. 이에 시라세질은 나이 어린 아들을 대동하고 그 상인과 함께 형이자 판관인 단야세질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형님, 제가 오늘 이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려고 하는데, 증인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상인이 외국에서 돌아와 돈을 갚기 전에 제가 죽기라도 한다면 아들이 대신 그 돈을 받게 해 주십시오."
단야세질은 계약의 증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몇 년 후 시라세질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에게서 돈을 빌린 상인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그만 폭풍우에 휘말려 선적했던 물건을 몽땅 잃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빈털터리가 되어 거지꼴로 돌아온 상인을 만난 시라세질의 아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갔던 저 상인이 불행히도 폭풍우에 모든 물건을 잃고 거지꼴이 되었는데, 지금 돈을 돌려달라고 재촉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설령 재촉한다고 해도 저 상인이 무슨 방법으로 돈을 갚겠는가? 언젠가 반드시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이렇게 해서 시라세질의 아들은 그 상인에게 위로의 말만 하고 돈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 후 그 상인은 다시 동분서주하여 밑천을 마련한 다음 해외로 나갔다. 이번에 그는 크게 성공해서 수많은 금은 보화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러나 부자가 된 상인은 금세 마음이 변했다. '지난번 시라세질의 아들이 내게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았던 것은 그 당시 그가 너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그때 내 처지를 이해해서 그랬던 것일까? 어쨌든 한번 시험해보기로 하자.' 상인은 곧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말에 올라탄 채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본 시라세질의 아들은 그 상인이 이제는 돈을 벌었으므로 옛날에 빌려주었던 돈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라세질의 아들은 상인 곁에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큰 부자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희 아버님에게서 빌려갔던 돈을 기억하시겠죠? 이제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상인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고말고."
그러나 상인은 돌려줄 원금보다 이자가 많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딴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는 곧 보배 구슬 하나를 챙겨 판관의 부인을 찾아가 말했다.
"저는 시라세질에게 약간의 돈만 빌렸을 뿐인데, 오늘날 그 아들이 이자까지 붙여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인, 이 보배구슬은 십만 냥도 더 나가는 아주 값진 것입니다. 부인이 나서서 일을 좀 처리해주십시오. 그저 판관 어르신께서 모르는 척만 하신다면..."
값진 보배 구슬에 넋을 잃은 판관의 부인은 탐욕스럽게 그것을 치마폭에 감추며 말했다.
"당신의 정성이 이러한데, 내 어찌 모르는 척하겠소. 힘써 보리다."
그날 밤 부인은 판관이 침실에 들자 상인의 부탁을 관철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서 남편에게 아양을 떨었다. 부인이 사정 이야기를 하자, 이를 들은 판관은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어떻게 그러 수 있단 말이오? 대왕께서 나를 철저히 신임하여 판관에 임명하신 것인데, 도리어 거짓말을 하라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다음날 부인은 상인이 찾아오자 보배구슬을 돌려주며 사정을 설명했다. 상인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이십만 냥의 가치를 지닌 보배 구슬을 내보이며 말했다.
"부인, 다시 한 번만 판관 어르신께 잘 말씀드려 보십시오. 일이 잘되기만 하면 삼십만 냥 어치의 보배 구슬이 저절로 생기는 것 아닙니까? 시라세질의 아들이 비록 조카라고는 하지만, 그가 돈을 돌려받는다고 해서 부인께 득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십만 냥 어치의 보배 구슬에 입이 딱 벌어진 부인은 그날 저녁 다시 단야세질에게 말했다.
"여보, 제가 어제 말씀드린 그 일은 별로 큰일도 아니잖아요? 제발 한번만 제 말씀 좀 들어주세요."
"당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판관된 자가 거짓말을 하면 앞으로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내세에는 지옥에 떨어져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러자 부인은 침대 곁에 누워 있던 어린 아들을 얼싸안고 저만치 떨어져 눈물을 흘리며 판관을 위협했다.
"제가 당신의 처로 살면서 이렇게 아들까지 낳아주었는데, 그 조그마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없단 말이에요? 만일 당신이 고집대로 하신다면, 전 이 아이를 죽이고 나서 자살해버릴 거예요."
단야세질은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렵게 얻은 외아들인데 죽이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다니... 아들이 죽기라도 한다면 대가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아내의 말을 따르면 살아서는 뭇 사람들의 신임을 얻지 못할 것이요,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질 터인데, 이 일을 어쩐다?' 단야세질은 어찌할 줄 모르고 한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급기야 부인의 청을 들어주겠노라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자 부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아들을 내려놓았다. 그 다음날 부인은 다시 방문한 상인에게 말했다.
"판관 어른께서 당신 말대로 하시겠다고 했소."
상인은 역시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춤을 덩실덩실 추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칠보로 장식한 커다란 코끼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온 시내를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본 시라세질의 아들은 이제 그 상인에게서 돈을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다가가 말했다.
"저번에 저희 아버님께 빌린 돈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언제쯤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상인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게요? 내가 돈을 빌리다니? 증인이라도 있소?"
"아버님 생전에 판관 앞에서 계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바로 판관 어르신이 증인입니다."
"기억나는 바가 없으니, 정 그렇다면 판관 어르신을 찾아가 물어보도록 합시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판관을 만나러 갔다. 시라세질의 아들이 먼저 말했다.
"이 상인이 저희 아버님께 돈을 빌렸을 때 백부님이 증인이 되셨지 않습니까? 저는 그때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야세질은 조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그런일 없다."
"백부님, 그때 그 자리에 분명히 계셔놓고 어떻게 지금 그리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혹시 뇌물이라도 받은 게 아닙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없다."
"평소 백부님이 충직한 탓에 국왕께서 판관으로 임명하셨고, 모든 백성들이 그런 백부님을 신임해왔습니다. 저는 백부님의 조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겠습니까? 백부님이 지금 커다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스스로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조카의 이야기를 들은 단야세질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판관의 옷을 벗어버렸다.
<현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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