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3 - 엄광용 엮음
천하의 멱살을 잡고 등판을 강타하다 <유경>
-"사람이 서로 싸움을 할 경우에도 멱살을 잡아쥐지 않거나 등판을 후려치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관중에 도읍을 정하시는 것은 바로 천하의 멱살을 잡고 등판을 강타하는 것이 됩니다."-
유경은 제나라 사람으로, 원래 그의 성은 누씨였다. 한나라 5년에 그는 농서의 수비병에 불과했었다. 어느 날 짐수레를 끌고 가던 누경은, 한나라 장군이 지나가자 다 헤진 양피옷을 입은 채 급히 달려가 소리쳤다.
"장군! 부디 폐하를 뵙게 해주십시오.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은 우장군이었다.
"그렇게 해주지. 그런데 옷이 너무 더럽군."
우장군은 누경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 고조를 만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사양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명주옷을 입었으면 명주옷차림 그대로 뵙고 누더기 옷을 입었으면 누더기옷차림 그대로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누경은 고집을 세워 거지차림의 양피옷을 걸친 채 고조를 만났다. 고조는 누경을 걸인으로 보고, 곧 음식을 내리게 한 후 물었다.
"그래, 짐을 만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인가?"
누경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혹시 옛날 주왕실의 융성함을 보고 낙양에 수도를 정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한나라의 수도로 낙양은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가?"
"낙양은 천하의 중심이라 제후들이 사방에서 조공을 하거나 노역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 그 거리가 알맞아, 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제왕의 노릇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 덕이 없는 사람이 그곳에 수도를 정하면 패망하기 알맞습니다."
고조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면 그대는 짐을 덕이 없는 사람으로 보는가?"
누경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주나라가 이곳에 수도를 정할 때는 제왕이 덕으로써 사람들을 모여들도록 함과 동시에, 또한 험준한 지형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한 군주가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발상에서였습니다. 따라서 주나라가 융성하던 시절에는 천하가 화합하여 오랑캐들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으며, 한 명의 수비병이 없어도 제후나 오랑캐가 주왕실을 넘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주나라가 쇠잔해지자 동서로 분열되고 천하에 입조하는 제후가 없었는데도, 주왕실에서는 그것을 제어할 능력이 모자랐습니다. 주나라가 무너진 것은 덕이 모자랐기보다는 지형이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한나라 수도로 어느 곳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주나라 시대와 지금은 사정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진나라의 통치 시대를 거치면서 제후들의 힘이 강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라의 수도는 지형적으로 견고한 곳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하신다면 혹시 산동이 어지러워지더라도 최소한 옛날 진나라의 땅만이라도 안전하게 지킬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움을 할 경우에도 멱살을 잡아쥐지 않거나 등판을 후려치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하고, 진나라의 옛 땅을 장악하시면 그것이 바로 천한의 멱살을 잡고 등판을 강타하는 것이 됩니다."
"음, 일리 있는 말이다."
누경의 말에 고조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주왕조는 이곳 낙양에 도읍하여 수백 년을 유지했는데, 진나라는 관중땅에서 겨우 2대를 지냈을 뿐입니다. 낙양이 한나라 수도로 적합합니다."
고조는 일단 누경의 천도설을 유보시켰다. 그리고 가장 신임하는 유후 장량이 입조하였을 때 가만히 물어보았다.
"누경의 생각이 옳습니다."
다 듣고 나서 장량이 대답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즉시 관중으로 천도를 해야겠소."
고조는 이렇게 하여 한나라 수도를 낙양에서 관중으로 옮겼다. 천하의 요새인 관중에 도읍을 정하고 나니 마침내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고조는 누경에게 말하였다.
"진나라의 옛 땅에 도읍을 정하자고 한 것은 그대 누경이다. 누는 유와 통한다. 앞으로 그대 성을 짐과 같은 유로 부르겠다."
이렇게 하여 누경은 황제와 같은 성씨를 따서 '유경'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때 유경은 낭중의 벼슬에 올랐으며, 봉춘군에 봉해졌다.
진솔 : 진솔함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다. 애써 자신의 화려함을 내보이려는 사람은 자기 내면의 부족함을 가려보려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떳떳하게 행동한다. 그 떳떳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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