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2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주머니 속의 송곳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 평원군
"현명한 선비는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당장에 그 끝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선생은 3년 동안 있었는데도 좌우 사람들이 칭송하는 일이 없었으며, 저도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평원군은 조나라의 여러 공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은 조승이다. 그는 공자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여, 그의 집으로 많은 빈객들이 몰려들었다. 평원군은 조나라의 혜문왕과 효성왕 때에 재상을 지냈다. 그는 세 번씩이나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평원군의 집 누각에서 바라보면, 그 아래 민가들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어느 날 평원군의 애첩이 누각에 올라가 안마당이 잘 보이는 민가를 내려보다가 깔깔대고 웃었다. 그 민가에는 절름발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절뚝거리며 우물물을 긷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 웃음소리에 문득 누각을 올려다 보던 절름발이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보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절름발이는 평원군을 찾아갔다.
"승상께서는 선비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비들이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아오는 것은, 승상께서 선비를 소중히 여기고 애첩을 천하게 여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래가 절름발이입니다. 그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승상의 애첩은 제가 다리 저는 것을 누각에서 내려다보고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그것은 크게 잘못한 일이로군요. 내가 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원군은 절름발이를 위로하였다.
"승상께서는 저와 약속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여자의 목을 베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겠소."
절름발이의 말에 평원군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이때 평원군은 절름발이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 싶었으나, 농담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작자 좀 보게. 한 번 웃었다는 이유로 나의 애첩을 죽이려고 하네?' 평원군은 애첩에게 절름발이의 이야기를 전한 후 앞으로 조심하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절름발이의 이야기는 평원군의 식객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1년이 지나자 반수 이상의 선비들이 떠나가 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평원군은 남아 있는 선비들에게 물었다.
"내가 빈객들에게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왜들 자꾸 떠나는 거요?"
마침 보따리를 싸던 선비 하나가 말하였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승상께서는 1년 전 절름발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승상께서 선비보다 계집을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평원군은 그때서야 1년 전 절름발이와의 약속을 기억하였다. 그는 곧 애첩의 목을 벤 후 절름발이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였다. 그 뒤부터 다시 선비들은 평원군의 집을 찾아들게 되었다.
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였을 때였다. 조나라에서는 평원군을 시켜 초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하였다. 평원군은 초나라로 떠날 때 식객과 문하의 가신들 중 용력이 있고 문무를 겸비한 사람 20명을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19명을 선정하고 나머지 1명을 누구로 뽑아야할 지 망설이고 있었다.
"저를 꼭 이번 행차에 참여토록 해주십시오."
그때 선뜻 평원군 앞으로 나선 사람이 있었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선생은 누구시오?"
평원군이 물었다.
"저는 모수라고 합니다."
"선생께선 우리 집에 몇 년이나 계시었소?"
"3년입니다."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명한 선비는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당장에 그 끝이 밖으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선생은 3년동안 있었는데도 좌우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으며, 저도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은 선생께서 지닌 재능이 없기 때문이니, 이번과 같은 나라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행차에는 동행 시킬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평원군의 이 같은 결론에 모수가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저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 되기를 청했을 뿐입니다. 만약 제가 일찍부터 주머니 속의 송곳이 되기를 원했다면, 이미 그 송곳은 자루까지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왔을 것입니다."
모수의 말은 그럴 듯하였다. 그래서 평원군은 일단 그를 일행에 끼워넣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평원군 일행은 곧 초나라에 도착했다. 평원군은 초나라와 합종하여 진나라를 쳐야 한다는 조나라의 의견을 내놓았다. 초나라 대신들의 반대가 심하여 한나절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모수가 칼을 들고 섬돌에 올라가, 단상에 초나라 왕과 함께 앉아 있는 평원군에게 물었다.
"대체 합종이라 함은 단 두 마디로 결정을 하는 일인데, 한나절이 지나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초나라 왕이 깜짝 놀라 평원군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저와 같이 온 객인입니다."
평원군의 말에 초나라 왕은 대뜸 모수를 향하여 꾸짖었다.
"당장 물러가라. 지금 과인이 너의 주군과 중요한 협상을 하고 있거늘 감히 객인이 나서다니!"
그러자 모수는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초나라 왕에게 칼을 들이대며 말하였다.
"대왕께서 저를 꾸짖는 것은 지금 이곳에 초나라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열 걸음 앞에 와 있습니다. 대왕의 목숨은 저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주군께서 앞에 계신데 저를 꾸짖는 것은 대왕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옛날 은나라의 탕왕은 70리 땅만 가지고도 천하의 왕 노릇을 하였으며, 주나라의 문왕은 백 리의 땅을 가지고 제후들을 신하로 삼았습니다. 어찌 대왕께서는 사졸이 많다는 것을 위세로 삼으려 하십니까? 지금 초나라 땅은 사방이 5천 리이고, 군사가 백만입니다. 이것은 곧 패자가 될 수 있는 바탕이니, 이러한 강대함을 잘 활용하면 천하에 당해낼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일전에 진나라의 졸장 백기는 불과 수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초나라와 한 번 싸워 언, 영의 땅을 공략하고, 두 번 싸워 이릉을 불살랐으며, 세 번 싸워 선대왕의 능묘를 욕보였습니다. 이것은 초나라가 백대를 넘겨도 잊지 못한 천추의 원수입니다. 우리 조나라조차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데, 당사자인 초나라에서는 도대체 진나라의 그와 같은 오만방자함을 관망만 하고 계실 것입니까?"
모수의 말에 초나라 왕은 신음소리를 깨물며 말하였다.
"으음! 선생의 말이 맞소. 합종에 찬성하는 바이오."
모수 덕분에 합종은 곧 성사되었다.
조나라로 돌아왔을 때, 평원군은 많은 선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앞으로 나는 섣불리 인물을 감정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선비들의 관상을 보아 온 것이 천 명을 넘었으며, 단 한 번도 잘못 보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모수 선생의 관상은 결정적으로 잘못 본 경우입니다. 모수 선생이 한 번 초나라에 가자, 당장 조나라는 든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수 선생이 한 번 놀린 세 치의 혀는, 백만 명의 군사보다 강했습니다. 나는 이후 감히 인물을 감정할 줄 안다고 자처하지 않겠습니다."
그후 평원군은 모수를 상객으로 대우하였다.
관상 :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쉽게 단정짓지 말라. 뛰어난 사람은 그 능력이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때를 만나지 못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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