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두 번째이야기 - 하늘의 감동
옛날에 한 국왕이 광활한 땅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에겐 모두 여섯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각각 그들에게 지역을 나누어 지키게 했다. 그때 라후구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됨이 음험하고 야심 또한 대단했다. 대신은 갖가지 권모술수와 아첨을 통해 국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렇게 해서 암암리에 세력을 넓힌 라후구는 어느 날 반란을 일으켜 국왕과 다섯명의 왕자를 죽여버렸다. 마침 변방을 지키고 있던 막내 왕자는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왕자가 집무실에서 일을 보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한 귀신이 뛰어들어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라후구가 부왕과 당신의 다섯 형님을 모두 죽여버렸소. 이제 그는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소."
겁이 덜컥 난 왕자는 정신을 차린 후 곧 집으로 돌아갔다. 왕자의 아내는 남편의 안색이 초췌한 것에 놀라 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남자의 일을 일개 부녀자에게 말할 수 없소이다."
"저는 당신의 아내로 삶도 죽음도 함께 할 사람인데, 어찌 그리 무정한 말씀을 하십니까? 부디 숨기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글쎄,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귀신이 나타나서는 나라에 변이 생겨 부왕과 형님들이 모두 피살되고 이제는 내 차례라고 말하지 않겠소. 두렵고 겁이 나 어찌할 바를 모르겠소."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당신이 요즘 일 때문에 과로하여 그런 꿈을 꾼 모양입니다."
그때 한 병사가 황급히 뛰어들어와 알렸다.
"보고드립니다. 일단의 군마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 하옵니다."
왕자 부부는 꿈이 사실이었음을 알아차리고 즉시 다른 나라로 도망치기로 했다. 그들은 아이를 데리고 일주일치 양식을 짊어진 채 길을 떠났다. 양식은 이웃 나라까지 가는데 충분한 양이었으나, 마음이 급하고 경황이 없어 불행히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그래서 십여 일이 지났건만 여전히 이웃 나라에 도착하지 못했다. 준비한 양식마저 떨어지자 굶주림에 지친 세 사람은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왕자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했다.
'이제 여기서 죽어야 하나보다. 아, 세 명이 모두 살 길이 없으니 한 사람을 죽여 두 사람이나마 살아보자.'
생각 끝에 왕자는 아내를 죽이려고 검을 뽑아들었는데, 그 모습을 본 아이가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제발 어머니를 죽이지 마세요.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왕자는 자기 가족이 이렇게 처참한 지경에 빠진 것에 울컥 눈물이 치밀어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아이가 왕자 곁으로 와서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대신 저를 죽이세요. 그러나 목숨을 단번에 끊지는 마세요. 그렇게 되면 제 살이 금방 썩어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차라리 매일 조금씩 베어먹다 보면 이웃 나라까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왕자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더 이상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눈물을 머금고 아이의 말대로 했다. 세 사람은 필사적으로 이웃나라를 향해 가다가 목이 마르면 길 옆에 있는 샘물에서 목을 축이고 배가 고프면 아이의 살점을 조금씩 베어 먹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인가는 보이지 않았고 아이의 몸에는 살이 세 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때 아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땅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으니 저를 버리고 가세요. 제 몸엔 이제 세 점의 살이 남아 있으니 두 점을 드시고 나머지 한 점은 저를 위해 남겨 주세요."
왕자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살점을 베어내고선 아이의 말대로 아내를 데리고 떠났다. 그때 제석천(제석천은 수미산의 꼭대기 도리천의 임금으로 사천왕과 32천을 통솔하며 불법과 불법에 귀의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이다)은 자기 궁전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살점이라고는 거의 없는 한 아이가 풀밭에 버려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아이의 지극한 효행 때문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었다. 이에 제석천은 한 마리 늑대로 변신하여 그 아이의 곁에 다가가서 말했다.
"나는 배가 고파 죽겠다. 마음씨 좋은 아이야, 네 마지막 살점을 내게 주지않으련?"
늑대의 말을 들은 아이가 생각했다. '나는 어차피 죽게 될 몸인데, 마지막 남은 살점을 저 늑대에게 줘서 늑대라도 살게 해야겠다.'
아이는 늑대에게 마지막 남은 살점을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늑대는 아이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땅이 진동하더니 늑대는 사라지고 한 사람이 나타나 말했다.
"너는 네 몸의 살점을 부모에게 먹이고 이렇게 큰 고통을 받고 있으니 후회하지 않느냐?"
"후회하지 않습니다."
"난 믿지 못하겠다. 네 몸엔 피가 철철 흐르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속으로는 분명히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이에 아이는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맹세하건대 후회하는 마음이 있으면 당장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내 몸이 원래대로 회복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그 사람은 소리내며 웃었다. 그러자 아이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그제서야 아이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제석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석천은 아이를 도와 그 부모를 다시 찾게 해주었다. 세 사람은 곧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 나라의 국왕은 왕자 식구들을 열렬하게 환영해 주었는데, 그 아이의 효행을 듣고 감탄하며 말했다.
"이 아이의 효행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것이로구나!"
그후 그 나라의 국왕은 왕자에게 군대를 빌려주었고, 왕자는 그 군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 라후구를 죽인 다음 나라를 되찾았다. 제석천의 도움으로 그 나라는 날로 강성해져 결국에는 염부제(염부제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인간 세계를 동서남북 4주로 나눌 때 남주에 해당하는 곳으로 인도는 여기에 속한다)를 통일하였다.
<잡보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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