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10장 영웅의 등장
4. 페가소스
페가소스(Pegasus)는 날개 돋친 신마 혹은 천마로 여러 전승에 등장한다. 솟아오른다는 뜻의 그리스어 페게(Pege)에 연유한 명칭이다. 페르세우스가 공포의 괴물자매 고르곤을 목을 서쪽 끝 대양에서 또는 고르곤의 목에서 치솟았다고 하며, 고르곤이 포세이돈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는데 그 아들 크류사오르와 함께 태어났다고도 한다. 다른 설에는 고르곤의 피가 땅에 떨어져 대지에서 솟아나왔다고 한다. 솟아나온 천마 페가소스는 하늘을 날아올라 올림포스로 가서 제우스의 보호를 받으며 제우스의 무기 벼락을 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벨레로폰의 전승에서는 영웅이 난관에 부딪쳤을 때 뛰어들어 그를 등에 태우고 하늘을 날았다고도 하고 혹은 포세이돈이 그 말을 주었다고도 한다. 다른 설에는 벨레로폰이 피레네 샘물을 마시는 천마를 발견하고 아테나 여신에게서 받은 재갈을 단 굴레를 걸었다고 한다. 벨레로폰은 페가소스의 도움으로 공포의 괴물 키마이라를 퇴치하고 또한 아마존 여인족과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벨레로폰이 생을 마친 후 페가소스는 천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피에로스 딸들인 피에리데스와 뮤즈가 음악 경연대회를 벌일 때 헬리콘 산이 기쁨에 부풀어 올라 커지는 바람에 천상 가까이까지 높아지자 페가소스는 포세이돈의 명을 받고 발굽으로 산을 쳐서 원래 높이로 되돌려 놓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산을 순복시켰다. 당시 페가소스가 발굽으로 친 장소에서는 샘물이 분출되었는데 이 샘을 히포크레네(말의 샘)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아홉명의 뮤즈가 타고 다녀 생긴 말의 발굽자리에서는 시의 영감이 솟아올랐기 때문에 페가소스는 시흥 자체를 의미하게도 되었다. 트로이젠의 한 샘도 페가소스의 발굽자리에서 솟아난 샘이라 한다. 마지막에 천계로 올라가 별자리가 된 페가소스는 날아가면서 날개 깃털 하나를 떨어뜨렸는데, 그 장소에 도시가 세워져 그 이름을 타르소스(날개라는 뜻)라고 불렀다.
5. 펠롭스
펠롭스(Pelops)는 프리자아 왕 탄탈로스의 아들로, 어미는 클류티아, 에우류아나사, 에우류테미스테 또는 디오네라 한다. 펠롭스는 어릴 때 아비에게 살해되었는데, 그의 아비가 프리지아에 찾아온 신들의 신성 능력을 시험하고자 그를 토막내어 국을 끓여 만찬에 내놓은 것이다. 탄탈로스의 속셈을 알아차린 신들은 찬에 손을 대지 않았으나 데메테르는 최근 딸을 잃고 비탄에 빠져 9일간이나 침식을 거른 채 찾아다녔으므로 허기가 져 부주의하게 그만 한쪽 어깨부분을 먹어버렸다. 찬을 먹은 신은 데메테르가 아니라 아레스 혹은 테티스라는 설도 있고, 또한 당시 기근이 심해서 신에게 공양할 가축이 없어 경건한 마음에서 탄탈로스가 그랬다는 설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위와 같이 신들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제우스는 펠롭스의 희생을 불쌍히 여겨 그를 다시 살려내고 어깨뼈는 클로토(모이라의 한 여신)가 만든 상아로 대치하였는데 이 때문에 펠롭스의 후예는 상아와 같은 흰 어깨를 지니게 되었다 한다. 상아 어깨는 비상한 효험을 갖고 있어 대기만 해도 통증이 없어지고 몸의 불편한 증상이 모두 가셨다고 한다.
프리지아 왕국은 트로이 왕 트로스의 침공을 받았다. 탄탈로스가 트로스의 왕자 가뉴메데스를 납치하였기 때문이라 하나 납치는 제우스 자신이 관여한 것이었다. 계속된 전투 끝에 패한 탄탈로스는 아들 펠롭스와 도피하고 그리스로 가서 은신할 장소를 찾게 되었다. 다른 전설에서는 탄탈로스가 그리스로 가지 않았다고 논박하는데 이유는 그 이전에 벌써 그의 잔인한 행동 때문에 제우스가 그를 지옥에 감금하였고 따라서 페롭스만 트로스에게 박해당하다 그리스로 도피하였다 한다. 펠롭스는 피사 나라로 가서 왕 오이노마오스의 외동딸 히포다메이아에 구혼하였는데 왕은 그에게 이륜전차 경기에서 자신을 이길 것을 결혼조건으로 내세웠다. 당시 왕은 히포다메이아의 구혼자들에게 이륜전차에 공주를 태워 코린토스로 먼저 달리게 하고 그 뒤를 뒤쫓았는데 아레스가 물려준 명마를 가진 그는 뒤에서 추격하여 구혼자를 창으로 살해하였다. 펠롭스는 지면 죽음, 승리하면 공주를 차지하는 이 시합에 응하였다. 그는 포세이돈의 총애를 받아 그리스로 떠날 때 날개 달린 한 쌍의 말을 받았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신청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살해된 구혼자 12명의 해골이 왕궁 대문 벽에 즐비하게 내걸려 있는 것을 보자 으스스하고 기가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왕은 딸의 구혼자를 매번 살해했을까? 신탁에서 사위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공주를 지나치게 사랑했기 때문에 빼앗기기 싫어서 그랬다고도 한다. 그런데 펠롭스와 공주는 서로 만나자마자 가슴깊이 사랑을 느꼈던 차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왕의 마부를 매수하기로 하였다. 마부 뮤르틸로스는 헤르메스의 아들로 공주를 연모하고 있었으나 감히 나설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펠롭스는 그에게 만약 승리하게 해준다면 신혼 첫날밤을 신부와 같이 지내게 하고 나라도 함께 통치하겠다고 하며 매수하였다. 이에 뮤르틸로스는 경기 전 날 밤 왕의 이륜차 바퀴 비녀장을 뽑고 구멍은 밀랍으로 봉해 놓았다. 이 때문에 시합에 나온 왕은 오래지 않아 차륜이 빠지는 바람에 전복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펠롭스는 그 날 저녁 혹은 결혼하는 날 새벽에 승리의 대가를 요구하는 뮤르틸로스를 게라이스토스 곶까지 데리고 가서 바다로 밀어 버렸다. 이후 그 바다를 뮤르톤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뮤르틸로스는 숨을 거두기 전에 펠롭스 후손에게 저주의 절규를 던졌는데 이를 헤르메스 신이 듣게 되었다. 과연 그 저주는 후손에게 내려졌다. 뮤르틸로스는 헤르메스 신의, 오이노마오스는 아레스 신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펠롭스는 신부의 요망으로 그간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 구혼자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후대의 이름난 많은 젊은이들에게 승리를 알릴 의도에서 그랬다고도 한다. 또한 뮤르틸로스를 무참히 죽인 것을 후회하여 원령을 달래는 기념비를 올림피아 경기장에 세웠는데 어떤 사람 이야기로는 이륜차 경기 중 망령이 나타나 말들을 놀라게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한편 헤르메스의 노여움을 위무하기 위해 자신의 영토 전역을 헤르메스 신 숭배를 창시하였다. 그리고 히포다메이아의 남편으로서 피사 왕에 오르자 인근나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점차 반도 전체를 석권해서 막강한 왕으로서 이름을 날리니, 반도의 명칭도 펠로폰네소스라 하였다. 그런데 유독 아르카디아만은 정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 스튬팔로스에게 선린외교, 즉 우호와 친선을 빙자하여 초빙한 후 그를 살해하고 사지는 각처에다 흩어 내버렸다. 이로 인해서 나라에 기근이 일어나 온 영토가 피폐해져 고통을 당하였으나 경건한 왕 아이아코스의 기원으로 가까스로 그 피폐에서 벗어났다.
펠롭스의 죽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으나 신격으로 존숭되며 신 중에서는 주신 제우스처럼, 그리고 그리스의 어느 영웅보다도 존경을 받았다. 후손 헤라클레스는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경내 일부에 사당을 지어 그를 숭배하고 제의에는 흑염소를 공양하였다. 일반 제전에서는 예언자가 다 같이 희생물을 나누는 것이 상례이지만 펠롭스를 위한 제의에서는 제의에 쓰는 모든 나무와 희생양을 항상 정해진 사제가 대고 제공한 값어치만큼만 차지하게 하였다. 백양나무는 일반적으로 제우스 신과 펠롭스의 제의에 사용된다.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펠롭스와 히포다메이아 사이에는 많은 아들(6명)이 태어났는데 피테우스, 아트레우스 및 튜에스테스는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아들이다. 또한 시큐온, 에피다우로스, 플리스테네스, 트로이젠, 클로네, 코린토스, 혹은 엘리스의 레트리니 등의 도시에 이름을 남긴 소생도 있다. 그 외에도 이스트모스의 악당 스키론, 메가라 왕 알카투스, 에우류스테우스의 오만한 후견자인 코프레우스도 펠롭스의 아들이라 한다. 또한 펠롭스에게는 여러 딸이 있었는데 극히 빈틈없는 정략혼으로 명문 페르세우스 가계와 통혼하여 크게 번창하였다. 아스튜데미아는 알카이오스와 결혼하여 암피트류온과 아낙소(알크메네의 어미)의 어미가 되었고 류시디케는 메스토르와 결혼하여 타피오스(타포스라는 도시 이름을 남김)를 낳았고, 니키페는 스테넬루스와 결혼하여 에우류스테우스(미케네의 왕)를 두었다. 이들 후손들은 모두 펠로피다이인 동시에 페르세이다이이다. 히포다메이아에서 태어난 펠롭스 아들 중 트로이젠 왕이된 피테우스(딸 아이트라는 테세우스의 어미), 서로 상극인 아트레우스와 튜에스테스 형제가 가장 세력이 강한 2세들이다. 그 외 펠롭스는 요정 악시오케에게서 아들 크류시파스를 두었는데 본부인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 후 테베에서 추방되어 망명온 라이오스(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가 그 아들을 편애하여 변태성 성욕으로 유괴한 후 죽었다. 일설에는 펠롭스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어미의 말을 듣고 두 형제가 살해하였다고 한다.
미케네 사람들은 신탁에 따라 펠롭스의 아들 아트레우스와 튜에스테스 형제중에서 왕을 영립하기로 하였다.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으르렁대는 상극 사이로 미케네에 가서 원로들이 왕의 옹립을 의논하는 동안 서로 질시하며 기다렸다. 이 때부터 펠롭스 후손의 운명에 뮤르틸로스의 저주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아트레우스가 자신의 가축에서 가장 좋은 양을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한 사실을 헤르메스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트레우스와 튜에스테스 형제는 펠롭스의 가축 한 무리를 공동으로 물려받았고 헤르메스는 그 무리에 황금모의 어린양 한 마리를 넣어 놓아 형제 간에 곧 그 양을 차지하려는 흉측한 쟁탈전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아트레우스는 여신에게 맹세하였지만 한 마리밖에 없는 아름다운 양을 희생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연장자이므로 황금모의 양이 나타난 것도 자신을 왕으로 점지한 징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우 튜에스테스도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형수 아에로페를 유혹하였고 그녀 또한 시동생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아트레우스는 황금모의 양을 희생시켜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고기만 공양하고 양모는 왕권의 표증으로 간직하였고, 튜에스테스는 아에로페에게 자신을 위해 양모를 훔쳐오게 하였다.
미케네의 원로들이 왕을 선택하여 발표하는 날이 닥쳤다. 황금양모를 가진쪽이 확연히 중요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튜에스테스가 그 증거물을 제시하니 그에게 왕관이 수여되었다. 그러자 분명히 양모를 간직한 것으로 믿었던 아트레우스는 혼비백산, 신에게 자신을 도와주기를 애원하였다. 제우스 신은 이에 소응하여 배신행위를 폭로하고 또한 불가분 형수와 동침한 튜에스테스의 불륜도 밝혔다. 결국 왕관은 아트레우스에게 다시 넘어가고 튜에스테스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가정과 자식을 남겨둔 채 도망쳤다. 왕권이 안정되자 아트레우스는 튜에스테스가 저지른 범죄를 곰곰이 되씹으며 보복할 방도를 생각하였다. 우선 배신한 처 아에로페를 죽이고 튜에스테스의 아이들은 감금한 후, 형제에게 사신을 보내 죄의 사면 선언과 돌아와서 왕국을 같이 통치하자는 내용의 전갈을 전하였다. 튜에스테스는 기쁨으로 망명지를 떠나와 아트레우스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축하연이 벌어지고 만찬을 들자 튜에스테스는 자기 아이들의 소식을 물었고 아트레우스는 아이들의 머리를 가져오게하여 만찬에 제공하고 남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튜에스테스는 극도의 분노와 슬픔으로 발광하고 아트레우스 후손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고 떠났다.
펠롭스 가계에 얽히고 설킨 음영은 더욱 더 깊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아트레우스 2세인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그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일설에는 두 형제와 여동생 아낙시비아는 플레이스테네스의 아이들이고 아비가 젊어서 죽어 아트레우스의 아이들이 되었다 한다. 어떤 비극작가는 플레이스테네스는 아트레우스의 아들인데 튜에스테스가 데려가 길렀으며 자신의 아이로 믿고 있었다. 후에 튜에스테스가 아트레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를 보냈는데, 도리어 아트레우스가 그를 죽였으며 그가 자신의 아들인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한다. 또한 튜에스테스는 후사를 원하여 델포이에 호소를 하였는데 살아 있는 딸에게서 아들을 낳게 된다는 신탁을 받았다. 이에 튜에스테스는 시큐온으로 여정을 잡는데, 딸 펠로피아가 그 곳의 왕 테스프로토스 영내 아테나 신전의 여사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튜에스테스는 복면으로 자신의 정체를 가리고 신전 숲에서 펠로피아를 기다렸다. 그녀는 복면한 이 이방인에게 요격을 당하자 용케도 그의 칼을 잡아 빼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그의 품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얼마 후 튜에스테스는 칼집이 비어 있는 사실을 알고 칼로 인해 자신의 정체가 알려질 것임을 직감, 황급히 그 곳을 떴다. 이후 펠로피아는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은 후 산에다 내버렸다. 그러나 버려진 아기는 암염소의 젖을 먹고 살아나 후에 아트레우스 왕실에서 성장하게 되며, 산양의 젖을 먹고 자랐다 하여 아이기스토스라 불리게 되었다.
아트레우스는 어린 조카들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죄책감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아 델포이로 가서 신탁을 받아보니 형제를 망명 장소에서 다시 부르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큐온을 찾아갔더니 튜에스테스는 떠나고 없었으므로 잠시 테스프로토스 왕실에 머물게 되었다. 바로 그 곳에서 펠로피아에게 매료당한 그는 테스프로테스에게 결혼 허락을 요청하였다. 그의 공주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에 왕은 펠로피아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아트레우스에게 결혼을 허락하였다. 결혼 후 아트레우스는 펠로피아가 낳은 첫 아이이자 산에 내버렸던 아이기스토스를 왕실로 데려와 자신의 아들로 키웠다. 이 때부터 미케네에 악운이 내려 기근과 흉작이 겹치고 가축이 죽어갔다. 절망에 빠진 아트레우스는 델포이의 신탁을 이행하고자 아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를 보내 자신의 동생을 찾아오게 하였다. 온갖 고난을 무릅쓴 끝에 이들은 완력으로 튜에스테스를 델포이에서 미케네로 끌고 왔다. 아트레우스는 신탁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의 형제를 눈 앞에서 보게 되자 과거의 증오감에 휘말려 지하감방에 넣어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 밤, 감옥에 갇힌 튜에스테스가 눈을 떠보니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시퍼런 칼을 들고 앞에 서 있었다. 그 아이는 바로 아이기스토스로, 자신의 아비로 알고 있는 아트레우스의 허락으로 삼촌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튜에스테스는 간단하게 어린이의 칼을 떨구고 칼을 집어들어 살펴보니, 그 칼은 바로 펠로피아에게 빼앗긴 자기의 칼이었다. 이제 두 형제의 형세가 역전되는 때가 다가왔다. 이 사건으로 아이의 친 아비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펠로피아는 부끄러움으로 자살을 하고, 자신의 내력을 분명히 알게 된 아이기스토스는 마침내 아트레우스를 죽였다. 이에 튜에스테스가 미케네의 왕에 오르고 아이기스토스는 왕자가 되어 한동한 평화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펠롭스 왕실에 씌워진 저주는 계속되어, 얼마 안 가서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 삼촌에게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튜에스테스를 미케네에서 내쫓은 아가멤논은 스스로 왕위에 앉아 사촌 아이기스토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아가멤논은 클류템네스트라와 결혼하여 아르고스의 으뜸 가는 왕이 되고 동생 메넬라오스는 헬레나와 결혼하여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다. 스파르타를 친선 방문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이 헬레나에게 한눈에 반해 납치하게 되니 여기에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트로이 전쟁은 아르고스의 패왕이자 친형인 아가멤논이 총사령관으로서 헬라스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10년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펠롭스의 후손에 대한 저주는 여전히 계속되어 아이기스토스는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 전쟁 중 아이기스토스와 아르고스의 왕비 클류템네스트라는 사련에 빠져 아가멤논이 원정에서 귀환하자 아가멤논과 포로로 데려온 트로이의 예언자 카산드라 공주를 살해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아이기스토스는 7년간 미케네를 통치하며 딸 에리코네와 아들 알레테스를 두었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자매 엘렉트라의 도움으로 포키스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엘렉트라와 퓰라데스(포키스의 왕자로 엘렉트라와 혼인한다)의 도움으로 복수를 감행, 아이기스토스와 친어미 클류템네스트라를 살해하였다. 미케네는 얼마 안가 혈연이 먼 도리스족의 침입(헤라클레스 후예의 내도!)으로 멸망하고 그 후 500년간의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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