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57.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사마상여가 지은 <자허부(子虛賦)>와 <대인부(大人賦)>의 내용은 비록 과장된 표현은 있으나 그 언사(言辭)는 지극히 미려(美麗)하다. 무엇보다 그의 의도는 천자의 행위를 풍자해 무위(無爲)의 철학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제57에 <사마상여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사마상여는 촉군(蜀郡:四川省)의 성도(成都)사람이다. 자는 장경(長卿)이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검술 또한 배우기를 즐겼다. 그래서 그의 부친은 견자(犬子:劍과 犬은 발음이 비슷하다)라는 아명을 붙여 주었다. 그는 학문을 닦으면서 인상여(藺相如:전국시대 趙나라 大臣. <사기열전> 제21에 전기가 실려 있다)의 인품에 반하여 이름을 상여라고 고쳤다. 재물을 헌납하고 낭관(郎官:侍從見習)이 되었다가 무기상시(武騎常侍:侍從武官)로서 효경제를 섬겼으나 그는 이런 벼슬자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사(辭)와 부(賦:모두 韻文의 一種)를 좋아하는데 효경제는 문학을 좋아하지 않아 무기상시라는 자리가 그에게는 무척 괴로웠다. 즈음에 양(梁)의 효왕(孝王)이 입조했다. 그런데 그는 유세의 재주꾼인 제나라 사람 추양(鄒陽)과 회음(淮陰:江蘇省 北部)사람 매승(枚乘), 오(吳:蘇州)나라 사람 장기부자(莊忌夫子) 등을 거느리고 왔다. 그들을 만나 본 사마상여는 단숨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병이라는 구실을 붙여 벼슬자리를 사임한 뒤 양나라로 따라 붙었다. 양효왕은 사마상여를 여러 학자들과 같은 집에 머물게 했다. 거기서 그는 여러 유생들과 몇 해를 함께 보낼 수가 있었다. 그때 그는 <자허부>를 지었다. 그러다가 효왕이 죽었으므로 사마상여는 별 수 없이 고향인 성도로 되돌아왔다. 그는 수년간 하는 일 없이 떠돌이 생활만 해왔기 때문에 몹시 가난했다. 생계를 이을 만한 직업을 찾아보았으나 별다른 일거리가 걸려 들지도 않았다.
평소에 그는 임공(四川省)의 현령 왕길(王吉)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왕길은 언젠가 사마상여에게 이렇게 권했었다. "장경(長卿), 사정이 여의치 않거든 나를 찾아 주시오." 다급하게 된 사마상여는 왕길을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마상여는 임공현으로 가서 관리들이 묵는 정자에 숙박했다. 현령 왕길에게는 어떤 계략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왕길은 매일 사마상여를 문안하면서 짐짓 공손한 태도를 다했다. 사마상여는 처음에는 왕길의 방문을 받았으나 하릴없는 인사를 받는 일이 점차 멋적어졌다. 그래서 왕길과의 면회를 나중에는 사절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왕길의 태도가 더욱 공손해지는 것이 수상스러웠다. 임공현에는 부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탁왕손(卓王孫)과 정정(程鄭)은 거부였다. 집에는 8백 명의 노복을 거느리고 살 정도였다. 현령에 관한 소문은 재빨리 돌았다. 그래서인지 탁왕손과 정정은 이렇게 수근댔다. "현령에게 아주 귀한 손님이 와 계신다 하오." "나도 들은 바 있소. 현령의 신분으로 조석 문안을 드릴 정도라면 특별한 귀빈이 아니겠소." "우리도 이러고 앉아 있어서는 안될 것 같소. 현령을 초대하면서 그 귀빈도 함께 초청합시다. 그게 인사요." 그렇게 되어서 탁왕손의 집에서는 주연이 베풀어졌다. 백여 명의 빈객들이 초청된 것이다. 그런데 현령이 탁왕손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사마상여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이거 어찌된 거요. 나의 귀빈은 초청되지 않았소?" "아닙니다. 주빈으로 초청하였지만 신병이라 참석할 수 없다는 전갈을 보내 왔습니다." "그럴 리가 없소.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였소. 무슨 사유가 있을 것이오. 내가 직접 가서 모셔오지요. 장경께서 주연을 초대되지 않는 한 나는 수저에 손도 대지 않겠소." 그러면서 왕길은 마차를 몰아 사마상여를 직접 맞으러 나갔다. 현령이 그러하니 사마상여에 대한 좌중의 대접 역시 특별한 수밖에 없었다. 정오 경이 되어 사마상여는 탁왕손의 저택에 억지로 불려왔다. 상여가 도착하자 좌석의 손님들 모두가 그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그 훌륭한 풍채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현령 왕길은 사마상여에게 짐짓 권했다. "장경께선 거문고를 타는 솜씨가 일품이라고 들었습니다. 부디 한두 곡 들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마상여는 마지못해 거문고를 뜯기 시작했다. 그런데 탁왕손에게는 문군(文君)이라는 딸이 있었다. 시집을 가자마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음악을 몹시 좋아했는데 잔칫방에서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 솜씨가 절묘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연주자가 누구인가 하고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던 것이다. 문군은 사마상여의 풍모를 보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너무나 미남이었던 것이다. 사마상여 역시 우연히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혼백이 도망가는 듯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현령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탄주하는 척하면서 실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있었다. 그가 읊는 가사의 내용이나 음색 모두 그녀의 감정을 유혹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었다. 주연이 끝나자 사마상여는 사람을 시켜 문군에게 가만히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전하게 했다. 그랬더니 밤중에 문군은 집을 뛰쳐나와 사마상여에게로 달려왔다. 사마상여는 그녀와 함께 수레를 몰아 바삐 성도로 도망쳤다. 가세가 극도로 빈한한 사마상여였다. 문군이 성도의 상여집에 도착했을 때는 사면에 바람벽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딸이 도망친 것을 안 탁왕손은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한심한 딸년이로고! 그렇대서 죽일 수도 없고...... 그 대신 한 푼의 재산도 돌아가는 게 없을 게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탁왕손에게 두 남녀에 대해 좋게 말하며 다소간의 재산을 나누어 줄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문군도 얼마간의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견디지 못하고 사마상여에게 사정했다. "여보, 우리 함께 임공현으로 돌아갑시다. 오빠에게 돈을 빌리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습니다." "오빠가 돈을 꾸어줄 것 같소? 당신 아버지 말씀을 소문으로 듣지 못했단 말이오?" "어찌되었건 배가 고파 이대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정 안되면 임공으로 가서 말과 수레를 팔아 술집이라도 하나 열지요." 문군의 결심은 단호했다. 정작 두 사람이 임공현으로 왔으나 아무한테서도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문군을 술집을 차려 생활을 꾸려 나갔고, 사마상여는 허드렛옷을 입고 저자거리에 나앉아 인부들 틈에 끼어 그릇따위나 닦았다. 탁왕손이 그런 소문을 들었다. 너무도 부끄러워서 아예 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아 버렸다. 친척들과 현의 유지들이 탁왕손에게 들락거렸다. "어찌 그렇소. 그래봐야 당신한테는 아들 하나에 딸 둘밖에 더 있소. 문군은 기왕에 사마상여에게 몸을 맡겼고, 아 그래 장경이 사위감으로 어째서 그러시오. 지금이야 벼슬찾아 다니다 지쳐 있을 뿐이오. 비록 가난하지만 그 인물과 재능은 볼 만한 데가 있습디다. 더구나 그는 현령의 빈객 아니오. 이토록 그를 욕보이는 법이 아닙니다." 탁왕손도 결국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문군에게 노복 1백 명과 돈 1백 만 전과 시집갈 때 주려고 마련했던 의상과 재물을 모조리 보내 버렸다. 문군은 사마상여와 함께 다시 성도로 돌아갔다. 밭과 저택을 마련해서는 부자로 살았다.
세월이 흘렀다. 촉(蜀)사람 양득의(楊得意)가 구감(狗監:황제의 사냥개를 관리하는 官)이 되어 효무제를 모시고 있었다. 어느 날 효무제는 <자허부>를 읽고 나더니 갑자기 탄식했다. "아, 유감이로구나! 이토록 훌륭한 작자와 동시대에 살 수 없다니!" 양득의는 깜짝 놀랐다. "폐하, 그 자는 제 고향친굽니다!" "무어라고?" "사마상여라고 하는데, 그가 지은 부(賦)입니다." 황제는 다시 놀라 급히 사마상여를 부르도록 했다. 사마상여는 황제 앞으로 불려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은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 부의 내용은 제후들의 일을 노래한 것이므로 볼 만한 것이 못됩니다. 청하건대, 시일을 주시면 폐하께서 수렵하시는 부를 지어 다시 올리겠습니다." 황제는 허락했다. 그리고 문서를 취급하는 상서(尙書)에게 명하여 붓과 목찰(木札:글을 쓸 수 있게 만든 엷고 작은 木簡)을 그에게 지급하도록 했다. 사마상여는 구상에 바빴다. 그는 부 가운데에 등장하는 '자허(子虛)'라는 인물은 자신의 구상이 모두 허구(虛構)라는 것을 뜻하는 인물이며, 자허를 통해 초나라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오유선생(烏有先生)'이란 인물은 '어떻게[烏] 이런 일이 있겠는가'라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오유선생이 제(齊)나라 편에 서서 자허를 힐난하는 역할을 주었다. 또 '무시공(無是公)'이라는 인물은 '이런 사람[是公]은 없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며 무시공이 천자의 입장을 밝히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의 가공인물을 빌어 문장으로 엮어서 천자와 제후의 원유(동물을 사육한 동산)를 논하게 하고 마지막 1장에서는 절약과 검소의 필요성을 논하는 것으로 전편을 마무리했다. 이런 귀결로 하여 천자에 대한 풍자와 충고의 의도를 달성하도록 했다. 부가 완성되어 황제에게 바치니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그 사부(辭賦)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나라에서 자허를 제나라로 사신가게 했다. 제나라 왕은 국내의 인사들을 모조리 동원해 자허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 사냥이 끝나자 자허는 오유선생에게 들러 자랑했다. 때마침 무시공도 그 자리에 있었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아 오유선생이 자허에게 물었다. "오늘 사냥은 즐거웠습니까?" "즐거웠습니다." "많이 잡았습니까?" "조금밖에 잡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즐거웠다는 얘깁니까?" "제나라 왕은 저에게 거마(車馬)가 많은 것을 자랑하려 했으나 저는 운몽(雲夢:楚의 澤名. 江南側을 夢澤, 江北側을 雲澤. 湖北省 安陵縣 남쪽)의 일을 가지고 멋지게 대답해 올린 것이 즐거웠다는 얘깁니다.완전히 제왕의 기를 꺾었지요." "그러면 그때의 일을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어렵지 않지요." 자허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나라 왕은 1천 대의 수레를 몰고 1만 기의 무리와 함께 바닷가에서 사냥했습니다. 열을 지은 사졸들은 호수를 메우고 짐승 잡는 그물은 산을 뒤덮었습니다. 토끼를 덮치고 사슴은 수레바퀴에 깔았으며 고라니는 쏘고 큰 암사슴은 다리를 잡아 쓰러뜨리면서 염분으로 끈적거리는 해변을 치달릴 때 살아 있는 짐승의 살은 갈라터져서 선혈은 수레바퀴를 물들였습니다. 쏘아잡은 짐승들이 많아지자 제왕은 마치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으시댔습니다. 왕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나라에도 이토록 풍성하고 즐거운 사냥을 할 수 있는 넓은 초원과 광대한 호수가 있는가. "저는 수레에서 내려 대답했지요." -저는 초나라에서 비천한 신분의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왕궁의 숙위(宿衛)를 10여 년이나 맡아 보았기로 대왕을 좇아 곧잘 사냥터에는 나가 보았습니다. 대체로 사냥은 대왕의 후원에서 했는데 그 중 어떤 곳은 보았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전부를 보진 못했습니다. 그러니 후원조차 다 보지 못했는데 하물며 궁성 밖의 호수에 대해서까지 말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대가 보고들은 것을 대강은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저는 말씀드렸지요." -알겠습니다. 대충은 말씀드리지요. 제가 듣기로는 초에는 일곱 군데의 호수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 중의 한 개를 본 적은 있습니다. 제가 본 것은 그 중의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한 운몽이라는 이름의 호수였지요. 운몽은 사방이 9백 리로서 그 가운데에는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은 꾸불꾸불 굴곡이 심하며 높고 험하고, 산봉우리는 크고 작아 해와 달이 거기에 가려져 있고 산맥은 서로 얼키며 솟아서 위로는 청운(靑雲)을 뚫고 서서히 경사진 구릉은 아래로 강하(江河)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토양은 단사(丹沙), 청석(靑石), 적토(赤土), 백토(白土), 자황(雌黃), 백석영(白石英), 주석, 벽옥(碧玉), 금, 은 등으로 각가지 색채로 빛나고 있어 그것은 마치 용린(龍鱗)이 번득이는 것처럼 화려합니다. 또 그 산의 암석은 적옥(赤玉), 매괴, 임민, 곤오, 감륵, 현려, 연석, 무부(武夫) 등으로 엉켜 있습니다. -대단하구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그 동쪽에는 향기로운 풀들이 자라는 밭이 있는데, 두형(杜衡), 난지(蘭芷), 두약(杜若), 범부채, 궁궁이, 창포, 강리(江離), 미무, 감자(甘蔗), 박저들이 무진장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 남쪽에는 광대한 평원과 호수가 오르락 내리락 하듯이 펼쳐져 나가 장강(長江)을 가장자리로 해서 무산(巫山:四川省, 초의 襄王이 꿈에서 仙女와 交歎한 山)을 경계로 삼고 있습니다. 건조한 고지대에는 함사, 포려, 설사(薛莎), 청번이 자라고 습지대에는 장랑, 갈대, 동장(東薔), 조호(雕胡), 연뿌리, 고로(菰蘆), 암려, 헌우(軒芋:모두 水草名)들이 자라 지금 여기서는 그 모든 것을 적을 수가 없습니다. 그 서쪽 땅에는 용솟음치는 샘물과 맑은 연못이 있어 수면으로 물결이 살아나 부용꽃 마름꽃을 피워내고 물살 아래로는 큰 바위와 흰 모래가 곱게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수중에도 그 무언가가 또 있겠구려. -있지요. 신령스런 거북이와 이무기와 자라와 대모 등등 별의별 자라 종류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북쪽의 울창한 수풀 속에는 거목이 자라고 있으니 이름하여 편, 남(楠), 예장(豫章), 계초(桂椒), 목란(木蘭), 벽(蘗), 이(離), 주양(朱楊), 아가위, 이, 영, 밤, 귤, 유자나무들이 자라며 향기를 내뿜고 있고, 그 나무 위에는 빨간원숭이와 구유가 뛰놀고, 원추, 공작, 난새들이 지저귀며, 등원(騰遠), 야간(射干) 등이 노닐고, 나무 밑에는 백호, 현표(玄豹), 만연, 추간, 외뿔소, 코끼리, 야서(野犀), 궁기(窮奇), 만연 등의 맹수들이 놀고 있습니다. -꿈같은 얘기요. -그래서 전저(專諸:勇士의 이름)와 같은 용사들을 시켜 짐승들을 손으로 때려잡게 하고, 대왕께서는 길들인 박마(駁馬)가 끄는 수레를 손수 몰기도 하고, 옥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수레에 올라타 고래수염으로 만든 깃발을 명월주로 장식한 깃대 위에서 흔들며, 간장(干將:吳의 刀劍의 名匠)이 만든 날카로운 갈래창을 곧추세우고, 오호(皇帝가 사용한 弓名, 烏名, 烏號)같은 활을 왼편에 끼고, 하왕조(夏王朝)시대의 예(夏時代 有窮國의 君主, 名弓)처럼 화살통에 강한 화살을 꽂아 오른편에 끼고, 백락(伯樂:孫陽子, 말의 품평에 뛰어났던 인물)같은 사람을 옆에 태우고, 섬아(纖阿:말을 잘 모는 유명 마부)같은 명인이 말을 몰고 있습니다. 이쯤이면 말고삐를 잡아 천천히 달리는 듯한데도 어느 새 공공이(말처럼 생긴 짐승)를 따라잡고, 거허(距虛:공공이와 같은 짐승)를 바퀴로 깔아 버리며, 야마(野馬)를 걷어차고, 도도(역시 말과 비슷함)를 자축으로 받아버립니다. 그러면서 유풍(遺風:千里馬 名)처럼 달려서 달아나는 기마(騏馬)를 화살로 쏩니다. 달리는 수레는 처절한 만큼 신속하여 우뢰처럼 움직이고 질풍처럼 내닫고 유성처럼 흐르며 천둥처럼 내리치니, 화살은 결코 헛되이 날지 않고 명중하면 반드시 짐승의 눈을 찢고 가슴 뚫은 화살은 겨드랑이를 지나 심장에 처박힙니다. 이렇게 잡은 짐승들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것처럼 풍성해 온 초원을 덮고 대지를 가리듯 했습니다. 그런 후에 초왕께선 고삐를 느슨하게 잡고 한가롭게 여유만만하게 사방을 배회합니다. 울창한 수풀을 구경하기도 하고 장사들의 성난 모습을 눈여겨 보며 두려움에 떠는 맹수들의 지친 모습도 관찰합니다. -초나라에 그런 곳이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소. -그런 한편에서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가는 실로 짠 모시옷을 입고 비단 옷자락을 끌며 안개같이 엷은 비단옷을 머리에 드리우고는 사뿐사뿐 걸어서 다가옵니다. 주름잡힌 옷들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울창한 계곡에 부드럽게 휘어져 길게길게 늘어진 여인의 자태가 도드라집니다. 소매자락은 산들산들 흔들리고 윗옷의 긴 띠가 바람에 날려서 꼬리를 내립니다. 그런 차림으로 걸음도 가볍게 옷깃은 사각사각 초왕의 수레를 따르니 옷자락이 아래로는 난초와 혜초를 쓸고 위로는 수레의 덮개를 덮습니다. 여인들은 아름다운 비취새의 날개짓으로 머리장식해 꽂고 옥으로 만든 수레의 장식에다 손을 대고 걸으니 그녀들은 가히 신선과 닮았습니다. -여인들도 사냥을 즐기오? -그렇습니다. 그녀들은 향초가 자라는 들녘으로 나가 밤사냥을 하지요. -밤사냥을! -무성하게 자란 풀숲을 기어나가 금제(金堤:제방 이름)로 오릅니다. 그물로 비취새를 덮어잡고 화살로 준의(봉황의 일종. 상서로운 神鳥로 여긴다)새를 쏘며 줄살로 흰 고니를 맞추고 연달아 줄살을 쏘아 올리니 들거위가 잡히고 왜가리 두 마리가 떨어져 현학(玄鶴:검은 학. 흰 학이 260년을 살면 검어진다고 함) 위에 포개집니다. 밤사냥에 지치면 이제 맑은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놉니다. 뱃머리에 새머리가 새겨진 배는 두둥실 떠다니는데 삿대는 계수나무요 장막은 비취새 깃털로 장식되었지요. 대모는 그물을 쳐서 잡고 자패(紫貝)는 낚시하여 잡아 올리지요. 황금북 둥둥 치며 퉁소를 불 때 사공 또한 노래를 따라 부르니 그 소리 유창하다 애타게 쓰러집니다. 그 소리에 물고기들은 깜짝깜짝 놀라며 솟구쳐 오르니 수중에서 조약돌은 도골도골 구르고 혹은 대갈대갈 부딪치니 그 소리 또한 바윗돌 부딪치는 소리같고 우르르 쾅쾅 뇌성 번개와 흡사하여 수백 리 밖에까지 그 소리 들리듯 합니다. 드디어 밤사냥이 끝나는 영고(靈鼓:六面鼓)가 울리고 봉홧불이 오릅니다. 수레는 행렬을 정돈하고 기병들은 대오를 짜서 행진을 시작합니다. 초왕은 드디어 양운대(陽雲臺:운몽호수 가운데에 있는 高唐이라는 臺 이름)로 올라 조용히 쉬고 담담하게 앉아 오미(五味)의 조화가 갖추어진 사냥한 것들을 드시지요. 정신은 벌써 무위의 상태에 계시게 되지요. 그런데 대왕[齊나라 왕을 지칭)처럼 하루 종일 말을 달려 사냥하는 수레에서 한 번도 내리시지 않고 생고기를 그대로 베어 먹느라 수레를 피로 물들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으니 제가 생각하는 즐거움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저가 관찰하는 바로는 제나라가 초나라보다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설명한즉 제나라 왕은 나한테 아무 대꾸도 못했습니다." 오유선생이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토록 심하게 하셨습니까. 그대는 천릿길도 멀다 않고 제나라로 왕림하셨습니다. 또한 제나라 왕은 국내의 인사들을 모조리 동원해 수레를 따르는 무리까지 갖추어 사냥길에 나섰습니다. 나름대로 힘과 정성을 다해 짐승을 잡은 것은 손님인 당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찌 제왕이 으시대며 자랑하기 위해서였다고 판단하셨습니까. 초나라에 사냥할 만한 땅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은 것은 초나라의 아름다운 풍속과 선생의 고상한 담론을 듣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초왕의 후덕함은 한 마디도 칭송하지 않고 열을 내어 고작 운몽이나 훌륭하다며 지나치게 추켜 올렸으니 이는 초왕의 향락과 사치만 선전한 결과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정말 유감스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하신 말씀들은 초나라의 자랑이 될 수 없으며,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고 귀국 군주의 악덕만 선전한 일이 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당신의 신의(信義)를 손상시키는 일이 됩니다. 군주의 악덕을 선전하거나 자신의 신의를 손상시키는 일,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도 바람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생께선 그렇게 행하고 말았으니 당신은 반드시 제나라에서는 경멸당하게 될 것이고 초나라에 대해서는 누를 끼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 생각은 하나의 이유를 가지고 그랬습니다." "아닙니다. 잘 보십시오. 그나마도 제나라에는 동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고 남쪽으로는 낭야산(山東省)이 있습니다. 성산(成山:山東省)은 유람하기에 좋으며 지부산(山東省)은 사냥하기에 알맞습니다. 발해에다 배를 띄우면 즐겁고 맹저(孟諸:山東省)의 호수에서 노닐 수도 있습니다. 동북쪽으로는 숙신(肅愼:吉林省)과 이웃하고 오른쪽으로는 탕곡(湯谷:해가 뜬다는 곳)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가을에는 청구(靑丘:海上의 山名. 혹 우리나라)에서 사냥하고 바다 멀리로 나가 노닐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제나라는 운몽 같은 호수 8, 9를 삼켜도 전연 가슴에 걸리지 않을 만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나라에는 탁월하고 기이한 것, 외국에서도 특별한 물품, 진기한 새나 짐승들 역시 물고기의 비늘처럼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라 안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임금도 다 이름을 붙일 수 없었고 설(전설적 商족의 조상. 요임금의 司徒로 회계를 맡았음)도 그 통계를 내보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제나라 왕은 제후의 지위에 있으므로 구태어 유희의 즐거움이나 원유의 크기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으며 선생을 빈객으로 모셨기 때문에 제왕은 사양해 답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찌 제왕이 대답할 말이 없어서 꼼짝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무시공은 빙그레 웃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하부터가 <상림부(上林賦)>이다].
-초나라도 잘못했습니다만 제나라 또한 잘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무릇 천자가 제후들에게 공물을 바치게 하는 것은 재물을 탐해서가 아니라 제후로서의 직분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경계(境界)를 설정해 주는 것은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자함을 금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나라는 동쪽지방을 지키는 제후국인데도 국외로 숙신(肅愼)과 사통하고 자기 나라를 버리고 국경을 넘어서며 바다를 건너 사냥을 즐기니 이것 역시 의리상 옳은 일이 아닙니다. 또 두 분의 논쟁은 군신의 의리를 밝히고 제후로서의 의리를 바로잡기에 힘쓰지 않고 부질없이 수렵의 즐거움이니 원유의 크고 작음이니 그런 것을 두고 다투어 사치하는 것으로 상대를 이기려 하고 있으니 이래가지고는 자신의 명예는 물론 군주의 명예까지도 손상시키기에 알맞은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 제나라나 초나라의 화려함같은 걸 가지고는 말할 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두 분 모두 천자의 상림원(上林苑)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상림원은 창오군(蒼梧郡:狹西省)을 왼편으로 하고 서극(西極:地名. 狹西省)을 오른쪽으로 하고 있으며 단수(丹水)는 상림원의 남쪽을 흐르고 자연(紫淵:澤名)은 북쪽으로 흘러갑니다. 패수(覇水)와 산수는 상림원 안에서 발원해 바로 원내(苑內)에서 끝나고 경수(涇水)와 위수(渭水)는 상림원 밖에서 흘러들어와 다시 밖으로 흘러나가며 풍수, 호수, 요수(遼水), 귤수(橘水)는 원내를 꾸불꾸불 흘러서 호호탕탕 8천(八川:패수, 산수, 경수, 위수, 풍수, 호수, 요수, 귤수)을 서로 등을 돌린 채 각각 흘러 동서남북으로 서로 엇갈려 가며 초구(椒丘) 사이로 흘러나와 섬 사이를 스치면서 계림(桂林)을 관통해 광활한 평야에서 합류해 속도를 더하여 주알(地名)의 포구를 흘러 협곡으로 빠집니다. -그토록 넓은 광야인 줄은 몰랐습니다. -질풍같은 이 물줄기는 바위에 부딪치고 절벽에도 부대끼며 부글부글 끓어올라 높이 치솟았다가 스러지고 무섭게 박두했다가는 옆으로 빠지면서 뒤로 꺾여 뒹굴기를 수십 번씩이나 합니다. 소리는 요란하고 구름처럼 휘어지며 놀라서 솟았다가 은은하게 흐릅니다. 뒷파도는 앞파도를 잡아먹고 물거품을 토해내며 사납다가 꺾여져서 이제는 도도하고 고요하며 느리게 영원히 흰 물빛을 빛내면서 동쪽으로 태호(太湖)에 흘러듭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원내의 수중에는 이무기와 적리, 상어, 점리, 우, 용, 건, 탁, 우우, 가자미 등의 물고기들이 비늘을 빛내면서 물속 깊이 꼬리치며 살고 있습니다. 고기와 자라가 노닐고 강변에는 보석들이 빛나며 촉석과 황연과 수정은 도처에서 반짝이고, 기러기와 고니와 숙상새와 너새와 들거위와 산까마귀와 교청새와 환목, 번목, 용거, 짐자, 백로 등등이 물위로 떠다니고 있습니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다니다가 물풀을 부리로 쪼아대기도 합니다. -그 정도야 초나라 제나라에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원중(苑中) 하나만 두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산, 울창한 숲속에 키를 다투는 거대한 수목들, 구종산은 험준하고 종남산(終南山)은 웅장하고, 산을 뚫고 흐르는 계곡은 동굴을 만들고, 혹은 언덕과 섬을 만들고, 그 넓은 평원에는 혜초(蕙草)가 뒤덮이고 강리풀과 미무초가 섞여 자라며, 유이풀과 결루와 여사도 심어져 있습니다. 또 갈차, 형란(衡蘭), 고본, 범부채, 자강, 양애, 침, 약손, 선지(鮮枝), 황력, 과장풀, 도토리나무, 청번, 유자 들의 초목이 택지(澤地)에 깔려 있고 평원에 가득하여 향기는 바람결에 스치어 취할 듯이 천지를 덮습니다. 원내를 또 둘러보면 황홀하게 현기증나는 풍물들이 가득차서 아무리 보아도 그 끝이 없습니다. 해는 동쪽 연못에서 떠서 원의 서쪽 언덕으로 집니다. 원의 남쪽은 따뜻해 엄동에도 초목이 생장하고 물이 얼지 않으니 사시에 물결은 춤을 춥니다. 짐승 또한 용, 모, 우(牛), 모, 모우, 물소, 주, 미, 적수(赤首), 환제, 궁기(窮奇), 코끼리, 물소 등이 있습니다. 게다가 원의 북쪽에는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고 땅이 갈라질 지경이니 빙판을 걸어서 강을 건넙니다. 여기에 사는 짐승도 기린, 각단, 도도, 낙타, 공공이, 타해, 결제, 노새, 당나귀 등이 있습니다. -원내에 궁(宮)도 있습니까. -있지요. 이궁(離宮)과 별관(別館)은 산속에 가득하고 계곡 양쪽으로 걸타고 앉아 사방이 회랑으로 돌아오는데, 층층이 올라간 누대와 구비구비 흘러나간 누각은 화려하게 장식된 서까래와 기와로 치장되었고 누각간의 보랑(步廊)은 너무 멀어서 하루에 다 갈 수가 없어 하룻밤 묵고서 가야 합니다. 큰 산을 평평하게 깎아 집을 짓고서는 층층이 방을 만들고 바위 속 깊숙한 곳에도 방들을 은밀히 꾸몄습니다. 굽어보면 깊고도 멀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우러러 보면 높고 높은 서까래가 하늘을 만지듯 합니다. 유성(流星)은 궁전의 문틈으로 사라지고 무지개는 난간에 걸려 있으며 청룡을 조각한 수레는 동상(東廂)을 돌아나가고 만상(萬象)을 조각한 수레는 서상(西廂)에서 꿈틀거리고 산의 정령은 한적한 대궐에서 쉬고 악전(仙人)은 지붕끝에서 볕을 쪼이며 달콤한 우물물은 맑고 선선한 실내에서 샘솟아 뜰 가운데로 흘러갑니다. 반석은 시냇가를 장식하고 기우뚱한 바위는 조각품처럼 서 있습니다. 매괴와 벽림(碧琳)과 산호도 거기서 자라고 문옥(文玉)과 적옥(赤玉)은 바위 틈에서 물고기 비늘처럼 아름답게 아롱집니다. 수유(垂綏)와 완담과 그 유명한 화씨벽(和氏璧)도 다 여기서 산출됩니다. -꿈길같은 곳입니다. -여름에는 노귤과 황감이 익고 등(橙), 주, 비파(枇杷), 연, 감, 후박(厚朴), 영조, 앵도, 포도, 은부(隱夫), 울, 상체, 답답, 여지 등등은 후궁에 널려 있고 북쪽 동산에도 구릉에도 과수들은 면면이 이어져 나가 푸른 나뭇잎과 자줏빛 가쟁이 빨간 꽃들과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어우러져 피고 열려서 드넓은 들판은 휘황하게 아름다울 뿐입니다. 사당(沙棠), 역저, 벚나무, 단풍나무, 벽, 노나무, 유락(留落), 서여(胥餘), 빈(檳), 병려(幷閭), 참단, 목란, 예장, 여정(女貞) 등은 키가 천 길이고 굵기는 몇 아름드리입니다. 수목은 곧게 뻗고 열매는 크며 잎사귀는 무성하고 어우러지고 쌓이기도 하면서 자라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꽃잎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수목을 지나는 바람소리는 종소리나 피리소리같이 들립니다. 게다가 현원(玄猿), 소자(素雌), 유, 구, 다람쥐, 지주, 탁유, 참호(모두가 나무에 오르는 짐승) 등과 혹궤 등이 상림원 안에서 살고 있으며 길게 울부짖고 애달프게 울며 획획 달아나고 대롱대롱 나뭇가지에 매달렸다가 나무 꼭대기로 쪼르르 기어오릅니다. 그러다가 이 나무 저 나무 건너뛰고 짓까불고 하면서 아무 곳이건 돌아다닙니다. 이런 장소들은 수천 군데나 있어 아무 곳이든 유람하면서 이궁에서 잠자고 별관에서 쉽니다. 주방시설 또한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어 먼 데서 음식을 옮겨오지 않아도 되며, 후궁과 시종들도 거기에 있고 백관들도 대기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수렵 모습도 듣고 싶습니다. -가을로부터 겨울에 걸쳐 천자께서는 교렵(校獵:校는 짐승을 막기 위한 木柵. 교렵은 목책을 쳐서 짐승이 도망 못 치게 하고서 하는 사냥)을 합니다. 이때 황제는 상아로 장식한 수레를 타고 옥으로 장식한 여섯 마리가 끄는 수레를 끌게 해서 5색으로 물들인 무지개같은 깃발을 흔들고 용호(龍虎)로 운기(雲氣)를 상징하는 기를 나부껴 호랑이 가죽으로 꾸민 수레가 대열의 앞을 제치고 대열의 뒤에서는 도거(導車) 5대와 유거(遊車:도거는 원래 천자가 道德을 선포할 때 타는 수레이며, 유거는 천자가 수렵할 때 쓰는 수레) 9대가 따릅니다. 손숙(孫叔)과 같은 말몰이의 명인이 고삐를 잡고 역시 위(衛)의 장공(莊公)같은 명인이 황제의 수레에 배송하며 뒤따르던 무리들이 종횡으로 뛰쳐나가 사방의 목책으로 진입하면 황제는 사냥을 시작합니다. 엽사들은 장강(長江:양자강) 황하를 짐승의 우리로 삼고 태산을 망루로 삼아 드디어 북소리 진동하면 무리지어 구릉을 오르고 호숫가로 미끄러지며 구름처럼 퍼지고 비처럼 땅을 덮어 사냥꾼들이 이르지 않는 곳이라곤 없습니다. 그들은 이나 표범을 산 채로 잡고 승냥이와 이리를 두들겨 잡으며 곰과 비를 주먹으로 때려잡고 산양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기도 합니다. 사냥꾼들은 또 갈새 꼬리깃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백호(白虎)무늬를 새긴 바지를 입고 호랑이무늬로 된 겉옷을 걸친 다음 야마(野馬:도도의 다른 이름)를 타고서 삼종산 같은 험산을 뛰어오르고 자갈밭 산허리를 가로질러가서 비렴(蜚廉:길게 털이 난 날개달린 새의 몸에 사슴머리를 한 전설상의 짐승. 바람을 잘 일으킨다고 함)을 때려잡기도 하고 해치(뿔이 하나 달린 사슴같은 짐승)를 사로잡아 희롱도 하며 하합(蝦蛤)을 자르고 맹씨(猛氏:모두 짐승 이름)을 찌르며 요뇨(하루에 1만8천 리를 간다는 神馬)의 고삐를 잡고 큰 돼지를 죽이는데, 쏘는 족족 명중입니다. 이때 황제는 수레에 깃발을 꽂은 채 이리저리 거닐면서 대오의 진퇴를 바라보며 장수들의 지휘 명령도 관찰하다가 홀연히 먼 곳으로 내달립니다. 그럴 땐 날던 새들이 흩어지고 날센 짐승도 따라잡고 흰 사슴을 발굽으로 밟고 빠른 토끼를 산 채로 잡는데 그 빠르기가 번개보다 빠르며 말 꽁지에서 여광이 번쩍일 정도여서 마치 우주 밖으로 나가 번약(繁弱:夏王朝 때의 名弓)에 백우전을 먹여 효양(梟羊:불불이라고도 하는, 사람 잡아먹는 짐승)을 잡음과 같고 비거(사슴머리에 용의 몸을 가진 짐승)를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짐승을 잡음에 있어서 살진 것을 고른 다음에 활을 당기고 시위를 떠난 화살은 반드시 명중이니 화살이 날 때마다 짐승은 반드시 자빠집니다. 그런 다음 천자의 수레는 바람 타고 오르듯 회오리바람을 밟으며 허허로운 창공에서 신(神)들과 함께 놉니다. 현학(玄鶴:흑조, 학은 260년이 지나면 흑색으로 변한다 함)을 밟고 곤계(昆鷄)를 흩어버리고 공작과 난새를 쫓고 준의새를 붙잡기도 하며 예조(5색조)를 덮치고 봉황새를 치기도 합니다. 또 원추(鴛雛:鳳의 일종)를 사냥하고 초명(焦明:봉황과 비슷함)을 덮칩니다. -사냥은 언제 끝납니까. -드디어 길이란 길은 모두 밟았으니 수레를 되돌려 돌아가야지요. 석궐관(石闕觀:甘泉宮 근방의 觀)을 밟고 봉만관(封巒觀)을 거쳐서 지작관을 통과하여 노한관(露寒觀:이상 네 개의 觀은 한무제 建元 중에 지은 것으로 雲陽 감천궁 안에 있음)을 바라보며 당리궁(棠梨宮:운양현 동남방 30리에 있던 궁)에 이르렀다가 의춘궁(宜春宮:秦, 漢 시대의 궁.長安城 동남방)에서 휴식합니다. 혹은 서쪽으로 말을 달려 선곡궁(宣曲宮:섬서성 장안현에 있는 昆明池 서쪽에 있는 宮)으로 가기도 해서 우수지(牛首池:上林苑 中에 있음)에서 노를 저어 배를 띄우기도 하고 용대관(龍臺觀:渭水 근방의 관)에 오르기도 하고 세류관(細柳觀:昆明池 남쪽에 있는 관)에서 휴식을 하기도 합니다. 거기서는 사대부들의 근면하는 모습과 무예의 정도를 관찰하고, 사냥꾼들이 획득한 짐승들을 공평하게 분배합니다. 짐승들은 말발굽과 수레바퀴에 깔린 것도 있고 엽사들에게 밟혀죽은 것들도 있으며 기진맥진했거나 기절해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죽은 것들도 있습니다. 짐승들은 계곡에 가득하고 평원을 차서 넘쳤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반드시 잔치가 열리겠지요. -수렵도 오래 하면 지치고 싫증나지요. 높은 대 위에다 술좌석을 마련하고 넓다란 실내에다 악기들을 배설해 천 석(千石)이나 되는 커다란 종을 치고 만 석이나 되는 종가(鍾架)를 세워놓고 비취새 깃털로 장식한 깃발을 세우고 악어가죽으로 만든 큰 북을 설치합니다. 이같이 한 후도당씨(陶唐氏:帝堯)의 무곡(舞曲)을 연주하고 갈천씨(葛天氏:古代의 帝王) 시절의 노래를 듣습니다. 천 사람이 노래부르고 만 사람이 이에 화답하니 산과 언덕이 이로 인해 진동하고 강과 계곡은 이로 인해 물결이 일렁입니다. 파유(巴楡:舞曲名)의 춤과 송(宋), 채(蔡)지방의 음악, 회남(淮南)에서 발생한 우차(于遮:古代 樂曲의 名)의 노래, 문성(文成)과 전(顚:모두 益州의 縣)의 노래 등이 한꺼번에 일어나는가 하면 금석(金石)의 소리와 북소리가 둥둥 가슴을 쳐 귀를 놀라게 하고 형(荊:楚), 오(吳), 정(鄭), 위(衛)의 음악, 소, 호, 무, 상의 음악[韶는 순임금의 음악, 護는 殷의 湯王의 음악, 武는 周 武王의 음악, 象은 周公旦의 음악]이 연주되고 주색에 탐닉되는 방종한 초나라 언, 영 지방의 노래가 뒤섞여 격초(激楚), 결풍(結風:역시 초나라 음악)이 연주됩니다. 배우와 난쟁이도 나오고 적제(河內의 地名으로 名唱을 배출하는 곳)의 가수들이 이목을 즐겁게 해주고 마음을 유쾌하게 해주는 것은 앞에는 고운 음악이 있고 뒤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금(靑琴:옛날의 神女)과 복비(宓妃:伏羲氏의 딸로 후에 洛水의 神이 됨)같은 여인네들이 그 곁에서 모시는데 미모는 절세이고 자태는 요염하여, 지분으로 화장하고 눈썹을 그리고 머리를 곱게 빗고 조심스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산뜻하게 방긋거리며 비단 치맛자락을 사뿐사뿐 끌고 가니 그 의상은 이 세상의 것과 같지 않고 몸에서는 향기를 풍기고 아름답게 빛나는 치아는 웃을 때 더욱 찬란하고 가늘게 긴 눈썹은 반달같고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은 정을 담뿍 담아서 그녀들에게 혼백을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잔치는 언제 끝나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술은 거나해지고 음악은 한창 무르익는데 천자께서는 갑자기 망연자실하여 무언가를 잃어버리신 듯한 표정을 지으시고 이렇게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아아, 이것은 지나친 사치로다. 짐은 정무를 듣는 여가에 아무런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것을 시간버리는 것이라 여겨 하늘의 도리에 따라 가을과 겨울에는 사냥을 하고 때로는 이렇게 휴식을 취해 왔지만 이것이 관례가 되면 아아 후세의 자손들은 필시 사치하고 화려하게 되어 마침내 애초의 근검, 순박한 기풍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조상이 대업을 시작하고 전통을 남겨 준 본의가 아닐 것이로다!" 이래서 주연을 중지하고 사냥을 그만두도록 관리에게 명령합니다. "개간할 수 있는 토지는 모조리 개간해 교외의 농경지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돌려주어 만민을 부유하게 하라. 상림원의 담장을 헐고 성을 둘러싸고 있는 못을 메워서 산과 늪가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라. 물고기와 자라가 가득 살고 있는 피지(陂池)를 백성들에게 개방하라. 궁(宮)이나 관(觀)에 여인이나 관리가 있지 못하게 하라. 창고를 터뜨려 빈궁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홀아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고아와 고독한 노인들을 위문해 주고 형벌을 간략하게 하는 특혜를 내리고 의복의 색깔을 바꿀 수 있도록 제도를 고치고 역법(曆法)도 차제에 고쳐서 천하의 백성들과 함께 서정(庶政)을 일신케 하겠다!" 그래서 길일을 택하여 목욕재계하고 예복을 갈아입고 법가(法駕:6두마차가 끄는 황제의 수레)에 타고 비치깃으로 장식한 깃발을 세우고 수레에 매달린 방울을 울리면서 육예(六藝:六經, 易經, 詩經, 書經, 春秋, 禮記, 樂經)의 동산에서 놀고 인의(仁義)의 도(道)로 달리고 <춘추>의 숲을 돌아보고 이수(<逸詩>의 편명)를 쏘아잡고 추우(騶虞:<시경>의 <召南>의 편명)를 겸하여 잡고 현학(玄鶴:舞曲名)을 줄살로 쏘아 맞추고 간척(干戚:무용에 사용하는 방패인 朱干과 도끼인 玉戚)을 세우고 운한(雲罕:旌旗名)을 달고 군아(群雅:<시경>의 '大雅' '小雅'편 중에 나오는 賢者들. 大雅에 31人 小雅에 74人이 나옴)를 잡고 벌단(伐檀:<시경>의 '魏風'의 편명)에서 현자가 명주(明主)를 만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고 악서(樂胥:<시경>의 '小雅' '桑扈'편)에서 군자의 즐거움을 즐기고 <예기(禮記)>의 동산에서 용모를 꾸미고 <서경(書經)>의 밭에서 거닐고 <역경(易經)>의 도를 서술하고 원중(苑中)에서 괴물짐승들을 추방하고 그리하여 명당(明堂:천자가 제후를 引見하는 堂)에 오르고 청묘(淸廟:太廟)에 앉아 뭇신하들에게 시정(施政)의 득실을 자유롭게 상주하도록 했더니 사해(四海) 안에서 천자와 은덕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천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위로부터 부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은덕에 감화되어 분발해서 정의로운 도덕을 일으켜 형벌이란 것이 소용없게 되어 천자의 덕행은 삼황(三皇)보다 높으며 치적은 오제(五帝)보다 더했습니다. 이와 같은 수렵이라야 참으로 즐길 만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만약 종일토록 몸을 야외에 내놓아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심신을 괴롭히며 거마를 지치게 하고 사졸들의 원기를 꺾고 부고(府庫)의 재물을 허비하면 위로부터의 후덕한 은혜도 없이 오직 자신의 향락만 일삼게 되고 서민을 돌보지 않고 정치를 망각하고 사냥한 꿩이나 토끼를 탐내기만 하는 것은 어진 이가 취할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관찰해 본다면 제나라, 초나라는 불쌍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영토란 것이 겨우 사방 1천 리에 불과하면서 원유(君主의 전용 수렵장) 하나만도 사방 9백 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백성들은 어디를 개간하며 어디서 오곡백과를 얻을 수 있으며 식량을 구득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대체가 기껏 제후의 신분으로서 만승천자라도 사치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즐기고 있으니 그 백성들만 피해를 입게 될 것을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같은 무시공의 말을 들은 자허와 오유선생 두 사람은 망연자실해져서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시골놈인지라 생각이 고루해 조심할 줄도 모르고 멋대로 지껄였습니다. 오늘 마침 가르침을 받았으니 삼가 말씀대로 쫓겠습니다." 이같은 <상림부(上林賦)>가 상주되자 황제는 몹시 기뻐하며 사마상여를 불러 낭관(郎官)으로 임명했다.
부 가운데에서 무시공이 천자의 상림원의 광대함과 산곡, 수천(水泉), 만물을 말했고 자허는 초나라의 운몽이 가지고 있는 막대함을 주장했으나 이런 것들은 실제 이상으로 호사, 화려하게 과장 표현된 것이니 도리상으로는 존중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래서 여기서는 정도(正道)로 돌아간다고 요점만을 집어내어 논했던 것이다[위에 실린 것은 후세 사람이 보충한 전문(全文)이라 한다]. 사마상여가 낭이 된 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때마침 당몽(唐蒙)이 야랑과 북지방을 공략해 한나라와 교통하려는 일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파촉의 관리와 사졸 천여 명을 징발했고 나중에 파, 촉 두 개의 군에서 당몽은 추가로 만여 명을 군수물자의 조달에 충원했다. 그런데 당몽은 이 과정에서 군흥법(軍興法:軍用에 충당하기 위해 재물을 징수하는 法)을 적용하는 한편 그 지방민의 수령을 죽였기 때문에 파촉의 백성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사마상여를 사자로 파견해 당몽을 꾸짖는 한편, 파촉 백성들에게는 당몽의 소행이 천자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고(諭告)했다. 그 격문은 이러하였다.
-파군, 촉군의 태수에게 고한다. 오랑캐들은 각자 제멋대로 날뛰고 있으나 이것을 토벌하지 않고 놓아둔 지가 오래인 까닭으로 때로는 변경으로 침입해 사대부들을 괴롭히고 있다. 지금 폐하께서는 즉위하시어 천하백성을 위로하고 중국의 민심을 수습 안심시킨 후 군사를 일으켜 북쪽 흉노를 정벌했다. 흉노 추장 선우는 놀라고 겁내어 양팔로 팔짱낀 채 공손한 태도로 폐하의 명령에 복종했으며 무릎 꿇어 화친을 청해 왔다. 또 강거(康居:西域의 大月氏國) 등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거듭 통역을 바꾸어 가면서 멀리로부터 입조해 머리를 땅에다 조아리며 토산물을 헌상했다. 그리고 동진하여 민월을 치자 그들은 그들의 왕인 영을 죽이고 항복해 왔다. 우진해서는 파우(남월의 수도, 廣東省)를 위문하자 남월은 폐하의 은혜에 감동해 태자를 입조시켰다. 남이(南夷)의 군장이나 서북의 수장(首長)들은 언제나 조공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목을 누르고 발뒤꿈치를 들고,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위를 쳐다보는 것처럼 앙모하고 있으나 길이 멀고 산천이 험난해 입조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어쨌건 공손하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이미 주벌했으나 선을 행한 자는 아직도 상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중랑장 당몽을 파견해 저들을 빈객의 예로써 후대하려고 했었다. 그러기 위해서 파촉의 사민 각각 5백 명씩을 징발해 사신이 가지고 가는 예물을 호송케 하고 사자가 당할지도 모르는 사고에 대비케 한 것이었지 결코 군대를 동원해야 할 일이나 전투를 벌여야 할 우환거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들은 바로는 사자 당몽이 군법을 발동해 수령을 목베고 파촉의 자제들을 누르고 두렵게 했으며 노인들을 근심스럽게 했다. 양군(兩郡)에서도 또한 멋대로 식량을 수송한 모양이다. 이런 모든 일은 폐하의 본의가 아니다. 또 징발되면 당연히 출정해야 할 자가 도망을 하고 혹은 서로 살해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사람의 신하로서 할 절의(節義)가 아니다. 대체로 변방의 사졸들은 봉화불이 오르고 봉수의 연기가 솟으면 모두 활을 가지고 달려가 흐르는 땀을 씻을 틈도 없이 오직 늦어질 것만 두려워하며, 번쩍이는 칼날과 쏟아지는 화살을 무릅쓰고 오로지 의를 지켜 후퇴하거나 더욱이 발길을 돌릴 생각은 품지도 않은 채 사사로운 원수를 갚듯 적개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죽음을 좋아하고 삶이 미워서만 그러겠는가. 또 그들이 이 나라의 호적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라 너희들 파, 촉과 다른 군주를 섬기는 자들이라 그러겠는가. 그들의 계략은 심원해 멀리까지 내다보며 국가의 위난을 급선무로 생각해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그러기에 할부를 갈라 후(侯)로 봉하고 규옥(珪玉)을 갈라 작위를 주어 통후(通侯)로 삼아 동제(東第:수도의 동부에 있는 저택가)에 저택을 가지고 끝내 빛나는 이름을 후세에 남겨 봉토를 자손에게 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행위는 매우 충성스러운 것이고 그가 얻게 되는 작위는 매우 평안한 것이며 그 공적은 세상으로 드러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명한 자나 군자들은 간과 뇌를 땅에 발라 전사하고 기름과 피를 들판의 풀에 적신다 하더라도 결코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칙사 경호의 임무를 띠고 남이에 당도함에 즈음하여 혹은 서로 살해하고 혹은 도망치다가 주살되면 그 죽음은 명분이 없으며 지극히 어리석은 자의 소행이라는 악명만 후세에 남기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치욕은 부모에게까지 미쳐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인물의 크고 작은 차이라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오직 징발되어 출정한 자만의 죄과는 아니다. 그들 부모의 교훈이 선행(先行)되지 못했으며 자제들이 삼가 교훈을 따르지 못했기에 염치가 없어지고 풍속이 흐트러진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건 형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폐하께서는 사신인 관리가 당몽과 같이 된 것을 근심하시고 또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저와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사자인 나를 파견해 사졸을 동원하게 된 사정을 설명하도록 함과 동시에 백성들이 국가에 충성하는 대신 저희들끼리 싸워 죽은 죄를 질책하셨다. 또한 삼로(三老)와 효제(孝弟:둘 다 鄕, 縣, 郡에서 백성을 교도하는 직명)에게도 잘못을 꾸짖게 한 것이다. 지금은 농번기에 해당하므로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꺼려지는 바이나 인근 현의 백성들은 나 자신이 이미 만나 보았으나 멀리 떨어진 계곡이나 산간지방 혹은 물가 지방 백성들은 두루 전해 듣지 못하지나 않았나 싶어 염려하는 바이다. 이 격문이 도착하는 대로 즉시 각 현의 오지에까지 전파하여 모두들 폐하의 본의를 알게 하라. 절대로 일이 소홀하게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사마상여는 귀환하여 황제에게 경과를 소상히 보고했다. 한편 당몽은 이미 야랑을 공략해 교통을 열고 계속해서 서남이(西南夷)로의 통로를 열기 위해 파군, 촉군, 광한군(廣漢郡:모두 四川省)의 사졸들을 징발했다. 수만 명이 노역에 종사해 도로공사에 힘썼으나 2년이 지났는데도 도로는 개통되지 못하고 있었다. 사졸들은 많이 사망, 부상했으며 비용은 억만 금을 헤아릴 지경이었다. 촉군의 백성이나 한실(漢室)의 위정자들 중에서는 이 사업의 폐해를 거론하는 자가 많았다. 당시에 공, 작, 염, 방 등의 군장들은 남이가 한나라와 국교해 막대한 상을 받았다고 듣고 한에 귀속돼 남이와 같은 대우를 받고자 하는 나라가 많았다. 황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사마상여에게 하문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 작, 염, 방은 촉군과 근접해 있으며 길 또한 열기 쉽습니다. 진대(秦代)에도 이들과 일찍이 교통해 군, 현으로 삼았습니다만 한제국이 흥기하면서 다시 교통이 두절되었습니다. 다시 그들과 교통해 군, 현을 설치한다면 그 이익은 남이보다는 클 것입니다." 황제도 그렇다고 판단하고 사마상여를 중랑장(中郞將:郎中令의 속관)으로 임명하고 천자 사절의 증명인 신절(信節)을 주어 그들 나라로 사신가게 했다. 부사(副使)로서는 왕연우(王然于), 호충국(壺充國), 여월인(呂越人)이 갔다. 그들 사절은 4두역마차를 몰아 파군, 촉군의 관리 힘을 빌려 뇌물을 서이(西夷)에게 주게 했다. 사마상여가 촉군에 도착하자 태수 이하 모두가 교외에까지 출영나왔으며 현령이 뇌쇠[弩]를 등에 지고 선도했다. 촉군 백성들은 사마상여를 맞이하는 일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탁왕손(卓王孫)이나 임공의 유지들은 모두 사마상여의 문하들을 통해 쇠고기와 술을 바치며 그와 사귀려 했다. 더구나 탁왕손은 너무 늦게야 딸을 사마장경에게 시집보낸 것을 후회하면서 재산을 더 많이 나누어 주어 아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대하였다. 사마상여는 즉시로 서이를 공략 평정했다. 공, 작, 염, 방, 사유(斯楡)의 군장들은 모두 한의 신하가 되기를 청원했다. 그렇게 되자 변새에 있던 관문은 모두 제거되고 새로운 곳에 관문을 설치해 한의 지배영역은 더욱 확장되었다. 서쪽으로는 매수와 약수(若水)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장가강을 경계로 삼았으며 영관(零關)으로 통하는 길을 개척하고 손수(孫水:모두 四川省)에 다리를 놓아 공의 수도로 통하게 했다. 사마상여가 귀환해서 보고하니 황제는 몹시 기뻐했다. 사마상여는 촉군에 사자로서 파견되었을 때 대부분의 군장들은 서남이와 국교를 트게 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며 한실의 대신들 역시 부정적인 주장들을 했다. 그래서 사마상여는 황제에게 충간하려고 했으나 기왕에 자신이 건의한 것이어서 간언은 못하고 글로써 올렸다. 그것은 촉군의 부로(父老)들의 의견을 빌어 진술케 해놓고 자신은 그것을 힐난함으로써 황제를 풍간(諷諫)함과 동시에 사자로서의 의견을 말하고 황제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방식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한제국이 흥기한 지 78년, 황제의 덕망이 왕성하게 펼쳐진 것이 벌써 6대[고조, 효혜제, 여후, 효문제, 효경제, 효무제]에 미쳤다. 위엄은 성대하고 은덕은 깊고 넓게 퍼져 만민은 혜택에 젖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멀리 사방으로 넘쳐 흘렀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사자로 임명되어 서쪽 정벌에 나섰는데 물을 따라 흐르는 것같이 한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고 바람을 따라 나부끼는 것처럼 역시 복종치 않는 나라가 없었다. 이래서 염을 입조하게 만들고 방을 복종시키고 작을 평정하고 공을 안정시키고 사유(斯楡)를 공략하고 포만(苞滿)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수레를 동쪽으로 돌려 귀국해 황제께 보고하러 갈 적에 촉의 수도로 들렀더니 기노(耆老:80세를 耆, 70세를 老라 한다), 대부(大夫), 유지, 선생들 27인이 위용을 갖추고 방문해 왔다. 인사가 끝나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이 들은 바로는 황제폐하의 오랑캐에 대한 태도는 '소나 말을 매어두는 것처럼 국교를 단절하지 않는 정도의 선에서 버려두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고 합니다. 지금 파, 촉, 광한 3군이 사졸들을 지치게 하면서 야랑으로의 도로를 개통시키려고 3년 간이나 애써왔습니다만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졸들은 피로하고 권태로우며 백성들은 생활하기에 무척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다 지금 또 서이(西夷)와 교통하려 한다는 소식에 접했습니다. 백성들은 기진맥진해 아마 그 사업을 완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자에게도 필시 누가 미칠 것입니다. 근신(近臣)인 당신을 위해서도 속으로는 근심되는 바가 큽니다. 또 공, 작, 서북은 중국과 병존해 온 것이 하도 오래되어 그 년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지경입니다. 고래로 어질고 덕 있는 제왕(帝王)이라도 이들을 굳이 덕으로 구슬리려고 하지 않았고 강력한 힘을 가졌던 제왕이라도 무력으로 병합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파군과 파군의 재물을 갈라 오랑캐들에게 보태주며 천자에게 의지하고 있는 백성들은 피폐케 하면서 아무 소용도 되지 않는 서이와의 교통을 일삼고 계시니 저희들 시골놈들은 생각이 고루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자인 내가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만약 당신들 말대로라면 촉이나 파의 의복이나 풍속은 중국에 동화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나같이 범용한 사람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소. 하물며 서이와의 교통은 중대문제로 원래가 곁에서 방관하는 자로서는 그 진상을 알 수 없는 것이오. 나도 황급하게 떠나 왔기로 상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으나 당신네들을 위해 그 대략은 말하겠소.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반드시 비범한 인물이 나타난 연후에 비범한 일이 생기는 것이오. 비범한 일에 대해서는 범인은 원래가 이상(異常)을 느끼는 법이오. 그래서 '비범한 일이 시작되면 범인들은 두려움을 품게 되지만 그 사업이 성취되면 천하는 안심한다'고 하는 말이 있소. 옛날 홍수가 져서 각지가 범람하자 사람들은 수해를 입지 않으려고 높은 곳으로 오르내리면서 불안에 떨고 있었소. 하후씨(夏后氏:夏王朝 禹王)는 이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홍수를 막으려고 강물을 트고 하수(河水)를 소통시켜 심수(深水)를 분산해 재앙을 없애려고 물을 동해로 흘러들게 하니 천하는 길이 안녕했소. 이럴 경우에 노동에 애를 쓴 것이 비단 백성들뿐이겠소. 하후씨도 노동한 것이오. 즉 그의 마음은 치수(治水)할 계획으로 심려했으며 몸소 노동에 종사해 몸에는 못이 박히고 잔털은 닳아 없어졌으며 피부에는 털이 나지 않았소. 그래서 하후씨의 거룩한 공업은 세상에 알려져 그 명성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거요. 대체로 현군(賢君)이 즉위한 경우에 어찌 사소한 일에 구애되어 법규에 얽매이고 풍속에 이끌려 세상으로부터 칭찬받을 일을 할 수가 있겠소. 현명한 군주라면 반드시 숭고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워 새로운 사업을 전개해 세상에 남겨줌으로써 만세의 규범이 되는 것이오. 그래서 현명한 군주는 만인을 포용하고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자신이 덕행을 천지와 비교하기 위하여 심력을 기울이는 것이오. 그래서 <시경>의 {소아(小雅)} '북산(北山)편'에서는 이렇게 읊고 있소.
넓고 넓은 하늘 아래 제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넓고 넓은 땅 끝까지 제왕의 백성 아닌 자가 없네.
그래서 천자의 덕화(德化)란 6합(六合:天地와 四方) 안에 8방(八方:四方과 四隅) 바깥까지 침투하고 넘쳐 흐르는 것으로 생을 향유하는 만물로서 그 혜택을 입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현군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오. 지금 중국 안에서 덕화의 결과로 의관속대(衣冠束帶)의 예를 따르는 사람들[漢民族]은 모두가 복을 받아 한 사람도 제외된 사람이 없소. 그런데도 중국과 풍속을 달리 하는 오랑캐의 나라나 멀고 먼 이민족의 땅에서는 배도 수레도 갈 수가 없으니 중국인의 내방도 드물어 정치적 교화가 미치지 못해 천하의 덕화 역시 미치지 못하고 있소. 그로 인해 그들은 중국에 대해 변경에서 의(義)를 침범하고 예(禮)를 지키지 못하여 자기들의 군주를 추방하거나 시살하거나 하고 있소. 신하가 군주에 대신해 즉위하고 존비의 질서를 잃고 부형(父兄)은 죄없이 피살되고 남은 유아나 고아는 노예로 떨어져 줄에 묶인 채 소리내어 울고 있는 형편이오. 그래서 그들은 중국을 향해 원망하면서 '중국에는 지극히 인자한 천자가 계시어 덕행이 왕성하고 은혜가 널리 퍼져 만물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나 이제 오직 우리들만 버려 두시니 어찌된 셈일까' 하면서 가뭄에 자비로운 비를 기다리듯이 목을 내빼고 중국을 사모하고 있소. 포악한 자라도 이런 일에는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데 하물며 성천자(聖天子)로서야 어찌 그대로 버려둘 수가 있겠소. 그래서 북쪽으로는 군사를 출동시켜 강포한 흉노를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사자를 달려가게 해서 강한 월(越)을 꾸짖게 했소. 이래서 천자의 덕행은 사면의 나라들을 휩쓸어 서이와 남이 두 방면의 군주들은 물고기가 물 흐르는 방향으로 군집(群集)해 흐르는 것처럼 중국의 작위를 얻고 싶어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소. 그래서 매수와 약수(若水)에 관문을 설치하고 장가강을 국경으로 정하고 영산(零山)을 깎아내려 도로를 통하게 하고 손수(孫水)의 근원에다 다리를 놓아 도덕의 길을 마련해 인의(仁義)의 전통을 확립해 장차 은혜를 끼칠 범위를 넓혀 그 은덕과 혜택을 넓게 베풀고 먼 지역 사람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미개하고 암울한 나라들을 광명으로 빛나게 하려 했던 것이오. 그래서 이쪽에서는 무장병을 해체시키고 저쪽에서는 서로 죽이는 일을 못하게 했던 것이오. 그럼으로써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 혼연일체가 되어 중국과 외국이 모두 행복을 누린다면 이것이 바로 태평성대가 아니겠소. 대체로 백성들을 고통에서 구해내고 지존이신 천자의 높은 덕을 받들어 말세(末世)의 쇠운을 만회하고 주왕조(周王朝)와의 끊어진 문화를 계승한다는 것이 곧 천자가 해야 할 급선무인 것이오. 그러니 백성이 피로하다 하여 어찌 이 일을 중지하겠소. 원래 제왕의 사업이란 것은 근로로 시작해 안락을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일이 없소. 그렇다고 본다면 천자의 명령을 받아 서남이와 교통하려고 하는 뜻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오. 이제 천자는 바야흐로 태산(泰山)에 토단(土壇)을 쌓고 천신(天神)에 제사 지내고 양보(梁父:泰山下의 小山)에서 지신(地神)에게 제사 지내고 화란(和鸞:수레를 끄는 말에 단 방울)을 울리며 송가(頌歌)를 연주하니 천자의 덕은 위로 오제(五帝)와 대등하고 밑으로는 삼황(三皇)을 넘으려 하고 있소. 그러나 곁에서 방관하는 자들은 아직도 천자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학명(鶴明:大鳥名)이 이미 천공을 날고 있는데도 사냥꾼은 아직도 덤불이나 살피고 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소." 이렇게 설파하자 촉의 여러 대부들은 망연자실해져서 원래 품고 온 본의를 잃고 진언할 말도 잃고서 길게 한숨만 쉴 뿐이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탄식하듯이 말했다. "참으로 한나라의 덕은 위대합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시골놈들인 저희들이 듣고 싶어했던 말씀입니다. 백성들이 피로해 게을러진다 하더라도 저희들이 앞장서서 일을 돕겠습니다." 그런 후 얼굴빛을 바꾼 촉의 부로(父老)들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슬금슬금 작별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물러갔다. 그 뒤 어떤 자가 상서했다.
-사마상여는 사신으로 갔을 때 뇌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상여는 벼슬자리를 잃고 1년 남짓 쉬었다. 그렇지만 그는 곧 황제에게 불려가 다시 낭관(郎官)으로 복직되었다. 사마상여는 말을 더듬었지만 글은 잘 지었다. 그는 또 소갈병(消渴病:지금의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탁씨집 딸과 결혼해 재물이 넉넉했으므로 굳이 대신이 되려 한다든가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신병을 핑계로 한가하게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번은 황제를 수행해 장양궁(長楊宮:狹西省에 있는 官名)으로 가서 수렵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황제는 신바람을 내며 몸소 말을 몰아 달려 곰이나 산돼지 등의 들짐승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 후 사마상여는 상서하여 간언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만물에는 동류(同類)라 할지라도 능력을 달리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완력으로는 오확(烏獲:秦의 力士)을 칭찬하고 민첩하기로는 경기(慶忌:吳王 僚의 아들. 용감하기로 유명)를 알아주고 용맹으로는 맹분(孟賁:秦의 勇士)과 하육(夏育:衛의 勇士)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인간의 세계에도 능력이 저토록 다르거늘 짐승의 세계에서도 마땅히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험준한 산야를 뛰어다니시며 맹수 사냥하기를 즐기시나 만일 유난히 사나운 맹수가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뛰어나오는 놀랄 만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일테면 수레가 일으킨 먼지를 뚫고 달려들기라도 하면 폐하는 수레를 미처 돌리지를 못할 것이고 주위에 호위하는 신하들이 있을지라도 미처 손 쓸 겨를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며 비록 오확이나 봉몽(逢蒙:夏王朝의 弓術의 名人)만한 기량을 가졌다 하더라도 능력을 발휘해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땐 마른 나뭇가지나 썩은 그루터기조차도 하나하나 모두 다 폐하께 해를 끼칠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한나라제국의 적인 북방의 흉노나 남방의 월인(越人)이 수레바퀴 밑에서 저격을 하고 강이(羌夷)가 수레 뒤에 매복하고 있다가 달려드는 것과 꼭 같이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만전의 준비를 갖추어 근심할 일이 조금도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은 천자가 하실 일이 아닙니다. 길을 깨끗이 청소한 후에야 길을 가고 또 길 복판을 택해서 말을 달려도 때로는 말의 재갈이 벗겨지든가 말이 발광하는 변고가 생기는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잡초밭을 건너고 구릉을 달리며 목전의 짐승을 잡는 즐거움만 생각하고 안으로 숨어있는 변고에 대한 경계심을 소홀히 한다면 재앙이 일어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대저 만승천자의 지위를 가볍게 보시고 안전한 곳에 처하지 아니하고 만에 하나라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로 나가기를 즐기신다면 저는 폐하를 위하여 유감된 일이라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은 사태가 발생하기도 전에 그 일이 있을 것을 미리 내다보며 지혜로운 사람은 위험이 닥치기 전에 그 재앙을 피해 버립니다. 재앙이란 원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으며 소홀히 여기는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 이르기를, '집안에 천 금을 쌓아둔 부자는 (기왓장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당(堂) 아래에는 앉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찮은 말에 불과하지만 많은 뜻을 품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유념하셔서 밝게 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황제는 사마상여의 진언을 가상하게 여기고 곧 받아들였다. 황제 일행이 사냥을 그만두고 의춘궁(宜春宮:秦의 二世皇帝陸墓에 가까운 離宮. 狹西省)을 지나갈 때 사마상여는 황제에게 부(賦)를 지어 바쳤다. 진나라 이세황제의 과실을 슬퍼한 내용이었다.
가파르게 길고 긴 언덕을 올라 층층이 높게 솟은 궁궐로 들어서서 굽이쳐 흐르는 강두(江頭)를 보고 남산(南山) 높이 솟은 봉우리를 보네 깊은 산 깊은 계곡 길게 열렸고 활짝 트인 계곡은 광활하도다 급류는 바위틈서 춤을 추면서 영원을 흘러서 평야로 나간다 무성한 숲들은 숨어 살피고 대나무 빽빽하게 눈여겨 보네 동쪽 토산으로 말을 달리고 북쪽 자갈밭 여울물을 건너 비로소 가쁜 숨 가라앉히며 진나라 이세황제 애도를 한다 몸가짐 삼갈 줄 모르던 이세황제 나라도 잃고 권세도 잃었다 참언을 믿어 잘못을 못 깨달으니 진나라 종묘는 끝끝내 사라졌네 아아 슬프다 몸가짐 마음가짐 분묘는 황폐하여 돌보는 이 없다 영혼은 돌아갈 데 없고 제사도 드리는 이 없다 세월이 흐른다면 더욱 황폐하고 가면 갈수록 더욱 암담하리 영혼은 구천(九天)을 헤매다 영원히 사라지니 슬프다
사마상여는 효문제의 능원(陵園)을 관리하는 대신인 영(令)에 임명되었다. 사마상여는 황제가 이미 <자허의 부>를 크게 칭찬한 바 있는데다 또 선인(仙人)의 도(道)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상림의 부>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는데 바로 <대인(大人)의 부(賦)>이지요. 아직 끝을 못 맺었기로 완성되면 폐하께 올리겠습니다." 신선이란 산과 계곡 사이에 살면서 그 모습은 매우 수척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마상여는 제왕(帝王)이 생각하는 신선이 그게 아닐 것이라고 여겨 드디어 <대인(大人)의 부(賦)>를 완성했다. 그 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대인(大人:天子)이 있어 중국에 살고 있지 저택은 만리에 걸쳤으나 잠시 머물기에도 부족하네 속세의 각박함을 슬퍼하고 하늘 높이 가볍게 여행 떠났네 붉은 깃발에 흰 무지개수레 타고 구름 따라 떠올라갔네 격택성(格澤星:妖氣의 별. 황백색의 별로 地上에서 기운이 일어나 하늘까지 도달한다고 함)의 기운으로 긴 장대를 만들어 세우고 번쩍이는 오색빛을 장대 끝에 매달았네 순시(旬始:북두칠성 부근에 나타나는 氣. 별 이름)를 매달아 펄펄 휘날리게 하고 혜성(慧星)을 끝에 잡아 연미(燕尾)로 삼았네 깃발은 바람따라 흔들리고 하늘 가득 드리워졌네 참창(혜성의 일종)을 깃발로 삼고 반월 무지개로 기를 싸는 주머니를 만드네 붉은 기운 아스라이 퍼져 오르고 바람은 홀연히 일어 구름자락 드날리네 날개달린 응용(應龍)이 구름수레를 타고 붉은 용 푸른 용이 부마(副馬)가 되어 꿈틀꿈틀 오르락 내리락 눈알을 굴리고 혀를 토하네 솟구치고 내달리고 번개치듯 빠져가니 어느새 안개는 걷히고 구름은 흩어졌다. 소양(少陽:東極)을 건너 태음(太陰:北極)에 오르니 진인(眞人:神仙)끼리는 서로 만나 창공을 돌아서 비천(飛泉:崑崙山 西南에 있다는 谷名)을 건넌다 신선들을 모조리 초청하여 진인을 가려 뽑아 요광(瑤光:북두칠성의 제1성)에 서서 자리를 정해준다 오제(五帝:東, 西, 南, 北, 中央의 神)를 길잡이로 삼고 태일성(太一星:尊神)을 제자리로 보낸 뒤 능양(陵陽:仙人의 名)을 시종으로 거느리고 현명(玄冥:北方의 黑帝. 佑神)은 왼쪽에 있고 금뢰(造化의 神. 水神)는 오른쪽에 있고 앞에는 육리(陸離:神名. '漢書'에는 長離로 돼 있음)가 있고 뒤에는 율황(神名)이 있네 선인 정북교(征北橋)를 심부름꾼으로 삼고 선인 선문고(羨門高)에게 잡역을 시키네 기백(岐伯:黃帝의 太醫)에게는 약방(藥方)을 맡아보게 하고 축융(祝融:南方의 炎帝. 火神)에게 경호 임무를 맡기네 그런 후 악기(惡氣)를 제거한 후 드디어 길을 떠난다 대인(大人)인 내가 모은 수레 1만 대의 두껑에다 오색 구름으로 치장하고 화려한 깃발을 앞세워 구망(句芒:東方 靑帝의 보좌신. 두 마리의 용을 타고 다니는 새몸뚱이에 사람 얼굴의 神)에게 행렬을 거느리게 하여 구의산(九疑山:堯, 舜을 매장한 장소)을 방문하려네 행렬은 분주하게 뒤섞이고 어지럽게 몰려서 달려가네 뇌실(雷室:雷神이 거처하는 곳)에 들러 우르릉 쾅쾅 우뢰소리를 듣고 험난한 귀곡(鬼谷:곤륜산 북쪽의 귀신의 집합소. 북두칠성 밑)을 날렵하게 빠져나가 팔방을 관람하고 사방의 구석까지 살펴본 뒤 구강(九江:大江)과 오하(五河)를 건너 염화산(炎火山:곤륜산 바깥산. 산에 물건을 던지면 그대로 타버림) 날아뛰고 약수(弱水:鴻毛라도 가라앉는 河川)를 떠서 배를 타고 건넜네 부주(浮洲:떠 있는 땅)를 넘어 총령산(蔥嶺山:西域의 山이름)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파도 위에서 휴식을 취한다 여와(古代의 女帝)에게 거문고를 뜯게 하고 풍이(馮夷:水神. 河伯의 字)에게 춤을 추게 한다 때마침 하늘이 어두워지자 우뢰의 신 병예를 소환해 풍백(風伯:바람의 神)을 주살하고 우사(雨師:雨神)에게 형벌 내리고 곧바로 서쪽 곤륜산을 바라보며 삼위산(三危山)으로 달려갔네 하늘문 활짝 열고 천제의 궁전으로 들어가 옥녀(玉女:女神)를 수레에 싣고 함께 되돌아 왔었지 낭풍산에 올라 하늘 밑에다 자리를 잡고 놀다 음산(陰山:곤륜산 동남쪽)으로 내려와 서왕모(西王母:仙女)를 그제서야 만났네 머리카락은 하얗고 옥승(玉勝:부인들의 머리장식)을 하고서는 굴속에서 살고 있네 세 발 달린 새가 다행히 있어 그녀를 위해 봉사하고 있지만 장생 불사가 이와 같다면 만대를 산다는 것이 굳이 기뻐할 일은 아니라네 수레를 돌려 부주산(不周山:곤륜산 동남방)으로 옮겨가 유도(幽都:북방의 仙都)에서 회식하고 밤기운을 마시고 아침 맑은 기운도 마시고 영지(靈芝) 꽃잎을 씹고 경수(瓊樹:곤륜산 서쪽에 있는 3백 아름드리 나무) 꽃도 따먹고 몸은 가볍게 되어 하늘문을 뚫고 나가 빗물구름을 지나서 배종수레를 달리게 하여 먼 곳을 떠나네 우주의 좁음이 싫어서 북극 경계를 벗어나가네 현궐(玄闕:北極의 山)에서는 기마대를 남겨두고 한문(寒門:北極의 門)에서는 선봉대까지 추월해 버렸네 이제사 땅은 깊어 보이지를 않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는 것이 없네 황홀한 허무(虛無) 속에 올라 오로지 초연하게 벗도 없이 지나네.
사마상여가 '대인의 송(頌:詩에는 風, 雅, 頌의 三體가 있는데 風은 民歌, 雅는 宮庭 儀禮歌, 頌은 神에게 德을 찬미하고 고하는 祭歌)'을 상주하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구름 위로 표연히 나는 듯도 천지간을 헤엄치는 듯도 하다고 말했다. 그 후 사마상여는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무릉(茂陵:狹西省)에서 은거했다. 어느 날 황제는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충(所忠)이라는 자를 시켜 사마상여의 집으로 급히 가 보도록 했다. "상여의 병이 중태라 한다. 가서 그가 지은 책들을 모조리 가져오도록 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모두 없어지고 말 것이다." 소충이 도착해 보니 사마상여는 이미 죽은 뒤였고, 집에는 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소충은 사마상여의 처에게 그 사유를 물었다. "장경께서는 한 번도 저작을 보관한 적이 없습니다. 책을 저작했을 때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와서 재빨리 챙겨 갔으니까요. 그러나 장경께서 사거하시기 전에 꼭 한 권의 저서를 남긴 것은 있습니다. 그 분의 말이 '필시 황제의 사자가 올 것이다. 와서 만일 저서를 요구하거든 이것을 드려라'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고 가십시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의 유고(遺稿)는 봉선(封禪)에 관한 것이었다. 소충이 가지고 가서 황제에게 바친 서책의 내용은 이러했다.
-저 아득한 상고시대에 하늘이 백성을 낸 이래로 역대의 군주를 거쳐서 진(秦)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근세의 군주에 관해서 알고자 한다면 그 사적을 찾으면 될 것이고 먼 시대의 군주를 알고자 한다면 그들의 유풍(遺風)이나 명성이 남아 있으니 그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래로 군주가 된 자가 하도 많아 이름이 묻히고 혹은 기록되지 못한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순(舜)과 우(禹)의 뒤를 이어 생전의 칭호와 사후의 시호를 후세에서 추앙하고 칭송하기에 족한 분들은 대략 72인은 됩니다. 무릇 천도(天道)에 순종하여 착하게 산 인물 치고 창성하지 않은 군주는 없고 누구든지 도를 거역하고 행실을 바르게 가지지 않은 사람 치고 멸망하지 않은 군주는 없습니다. 황제(黃帝) 이전에 관해서는 너무 아득한 옛 일이라 알 수가 없지만 오제(五帝)나 삼황(三皇)의 사정이나 육경(六經:詩, 書, 禮, 樂, 春秋)이나 기타 서적에 전하는 바는 현재라도 밝게 알 수가 있습니다. <서경>에는 '군주는 총명하고, 신하는 선량하도다'라고 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군주로서 요임금보다 덕이 왕성했던 분은 없고 후직(后稷:요의 신하이며 周王朝의 시조. 후직은 그의 官名)보다 훌륭한 신하는 없었습니다. 후직은 농사를 지도하는 과업을 요임금 시대에 시작했고 그의 증손자인 공유(公劉)는 서융(西戎) 땅에서 유업을 일으키고 그 뒤 문왕(文王)이 제도를 일신해 주왕조가 크게 흥왕하고 치세의 대도가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그 후 주왕조가 쇠퇴했다 하더라도 1천여 년 동안 악평을 들은 적은 없으니 이 어찌 시작과 종말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된 이유는 특별한 까닭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서의 조상들이 제도를 잘 만들고 또 구비되어 있던 제도 역시 잘 계승했으며 후손들 역시 그 뜻을 잘 받들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주왕조가 물려준 사업은 평이해서 받들기 쉬웠으며 심후한 은택이 넘쳐 흘러 풍성할 수밖에 없었으며 법도는 명백해서 지키기 쉬웠으며 물려주고 왕업이 천리(天理)에 순응했기 때문에 자손들이 계승하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왕조의 왕업은 강보에 싸인 어린 성왕(成王) 때 융성하여 문왕, 무왕(武王:夏, 殷의 양 왕조라고도 함)의 시대보다 더 나았다고 합니다. 주왕조가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를 연구해 보더라도 각별하게 탁월한 치적을 오늘에 참고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양보(梁父:泰山 아래의 小山)를 밟고 태산을 올라 봉선해서 영광된 명예를 세상에 나타내게 했습니다. 지금 대한제국(大漢帝國)은 용솟음쳐 오르는 샘물처럼 사방으로 그 세력이 뻗어나가 구름이 퍼지고 안개가 흩어지듯 은혜는 곳곳을 적시고 있습니다. 위로는 구중(九重)의 하늘에 닿고 밑으로는 대지의 끝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만물은 천자의 은택에 젖고 화기(和氣)는 넘쳐 흐르며 제국의 위엄은 회오리바람처럼 순식간에 멀리까지 미쳤습니다. 천자의 은택을 물에 비유하자면 가깝게 있는 자는 샘물의 원천에서 노닐고 먼 데 있는 자는 그 말류(末流)에서 헤엄치는 격입니다. 모든 악행들을 저지르던 원흉들은 자취를 감추고 무지몽매한 자들은 광명을 찾았으며 미물들까지도 화락하여 천자의 은덕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천자는 추, 우(騶, 虞)같은 상서로운 짐승을 원유에서 기르고 고라니와 사슴같이 진귀한 짐승을 국경에서 잡고 한 줄기에 이삭 여섯 개가 달리는 곡식을 종묘에 바치고 뿌리 하나에 두 개의 뿔이 난 기린을 희생물로 바치며 망주(亡周)가 남겼던 보정(寶鼎)을 얻으며 신귀(神龜)를 기산(岐山)에서 사로잡고 비취색 신룡(神龍)을 불러들이고 귀신을 시켜 영유(仙人名)를 불러와 한관(閒館)에 머물게 하니, 이토록 진귀한 물건과 괴이한 사물들이 상서롭고 다양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상서로운 증거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천자께서는 아직도 쌓은 덕이 적다 겸손하시어 봉선에 관해서는 구태여 입밖에 내지 않으시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 뿐이옵니다. 옛적 주나라 무왕은 은의 주왕을 정벌하기 위해 진격하던 중 흰 물고기가 왕의 배 속으로 뛰어들었기로 이를 상서로운 일이라 하고 그것을 구워 하늘에 제사지냈습니다. 이토록 하찮은 일을 가지고도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부끄러운 봉선을 했는데 한나라는 그토록 상서로운 일이 속출하는데도 봉선하지 않으니 주나라와 한나라의 겸손한 차이가 어찌 이다지도 큰 것입니까. 일이 이렇게 되자 대사마(大司馬)가 나서더니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폐하의 어지심은 생을 향유하는 만물을 기르시고 의로운 생각은 불순한 자를 정복하셨습니다. 중국의 백성들은 공을 바치기를 즐거워하고 여러 이민족들은 공물을 가지고 입조하고 있습니다. 폐하의 은덕은 상고의 제왕과도 같으며 그 공로는 비길 만한 분이 없습니다. 착하고 아름다운 공적은 만천하에 혜택을 주고 상서로운 징조는 형태를 바꾸고 수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태산과 양보가 제단을 마련하고 폐하께서 왕림하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징후입니다. 그리하여 천제로서 아랫백성들에게 은혜를 내리고 복을 쌓아 왕업의 성공을 아뢰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겸양하시어 봉선에 착수하지 않고 계십니다. 이는 삼신(三神:天神, 地神, 山神)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며 왕도(王道)의 완성을 이롭지 못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군신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은 상서로움으로 그 뜻을 나타내는 것이니 사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진기한 증거가 있다면 사양할 일이 못됩니다. 만일 옛 성왕들이 그런데도 사양을 했을 것 같으면 태산이 아무런 공업의 기록도 없었을 것이며 양보는 제사를 행할 기약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각자가 자기 일대의 영화만 누리며 모두 봉선을 행하지 않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면 후세의 논자(論者)들은 무슨 기록으로 그 제왕들을 논할 것이며 '봉선을 행한 72인의 군주'라는 칭송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대체로 천자는 덕을 닦아 상서로운 증거를 받고 그 증거를 받들어 봉선을 합니다. 그러니 봉선은 분수에 넘치는 소행이 아닙니다. 고로 성왕(聖王)이라는 것은 봉선을 폐지하지 않으며 예(禮)를 대지의 신에게 바치며 지성으로 천신에게 고하고 그 공업을 중악(中嶽:嵩山, 河南省)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천자의 지존함을 천하에 천명하고 성덕을 넓히며 명예로운 이름을 명시하고 후덕한 복을 받아 만민에게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봉선이야말로 성대한 대업이라 할 것이며 천하의 장관이며 왕자로서의 업적이니 결코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 후 이를 계기로 학자들의 학문을 종합하게 하고 그들에게 일월(日月)의 여광(餘光)에 비길 만한 폐하의 성덕을 우러러 보게 하십시오. 아울러 봉선의 의의를 열거하고 문장을 수식하고 <춘추>와 같은 하나의 경서가 되도록 하는 문헌을 남기시지 바랍니다. 그것은 '육경'에 하나를 더 보태어 '칠경'이 되게 하는 일이며 이를 만세가 지나도록 영원히 전해지도록 해 한나라의 맑은 정치 전통을 밝혀 그 여파로 꽃다운 명성을 떨치고 알찬 열매로 거둘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날의 성왕들이 영원히 위대한 명성을 보전하며 제일로 칭송되는 이유는 봉선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장고(掌故:故事를 담당하는 官)에게 명하여 봉선의 의식을 모조리 상주토록 하여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상주문을 읽은 황제는 감동하여 몸가짐을 고친 후 이렇게 중얼거렸다. "옳은 말씀이오. 짐이 기필코 이를 한번 시험해 보겠소." 황제는 심사숙고한 끝에 공경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봉선에 관한 일을 자문했다. 그래서 천자의 은택이 크고도 넓다는 사실을 시로 읊게 했다. 또한 상서로운 징조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도 널리 알리게 했다.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송가를 만들었다.
뭉게구름 누리를 뒤덮고 감로(甘露)와 단비는 때를 잃지 않고 내리니 그 윤택함은 대지를 덮는다 감미로운 물이 땅을 적시니 어느 생물이 자라지 않으며 여섯 개가 달리는 좋은 곡식 있으니 수확이 남아돌지 않으랴 비는 그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땅을 적시는 일이며 땅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적시고 있네 혜택이 만물에게 널리 미치니 사모하는 정이 가슴에 차네 태산은 봉선할 자리를 가려 천자의 왕림을 기다린다 폐하여 폐하여 어서 왕림하여 봉선을 서두르소서 문채 아름다운 짐승이 원유에서 노니나니 흰 바탕 검은 무늬 알록져서 아름답다 온화하고 공손하니 그 태도 군자로다 그런 짐승 명성은 들었으나 그 출현 오늘에사 보네 그가 온 자취는 알 수 없으나 상서로운 징조임은 분명하다 순임금 시대에도 나타났으니 그로 인해 나라는 흥기하였네 살진 흰 기린이 제사장에 나타났네 초겨울 시월에 제사 지낼 때 천자의 수레 옆으로 달려왔었네 그것을 잡아 하늘에 제사 지내니 삼대(三代)에도 이런 일 없었다네 덕행이 흥성함을 보고 황룡이 나타났었네 그 빛은 휘황하고 찬란하여 천자의 고귀한 덕을 깨우쳤다 '용은 천명을 받은 천자가 타는 것' 고서에도 그렇게 쓰였거늘 상서로운 그 징조는 이상 더 설명이 필요없다네 사물에 의지해 뜻을 기탁하고 천자는 태산에서 봉선을 행한다.
경전을 펴본즉 하늘의 의지와 인간계의 현상이 서로 교합하고 있고, 위와 아래에서 상서로운 징조를 서로 나타내 성왕의 덕을 감응하는 데도 성왕은 아직도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몸을 삼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참 흥하고 있을 때라도 반드시 쇠퇴함을 생각하고 평안할 때에도 반드시 위태로울 때를 생각한다'는 경우와 같다. 또한 은의 탕왕 주의 무왕은 지존 지엄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자신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순임금은 봉선을 행하는 대전(大典:郊祀와 封禪) 중에도 자신의 과실을 반성했다고 하니 그것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사마상여가 죽은 지 5년 후에야 황제는 처음으로 후토(后土)에 제사 지내고 8년 후에는 드디어 중악(中嶽:嵩山, 河南省)에서 배례했으며 태산에서 봉하였고 양보산에 이르러 봉선의 예를 엄숙히 거행했다. 사마상여의 기타 저작에는 <평릉후(平陵侯:蘇建)에게 보내는 글> <오공자(五公子)가 토론하는 '초목(草木)의 글'>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채록하지 않았다. 다만 공경들 사이에서 유명한 글만을 골라 실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춘추>는 밖으로 드러난 사실을 추론해 뒤에 숨은 심오한 의의를 발견하게 되고, <역경>은 뒤에 숨어 있는 심오한 원리에 의해 인생의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게 되고, <시경>의 '대아편(大雅篇)'은 왕공(王公), 대인(大人)의 덕을 칭송해 그 덕이 만민에게 미치는 것을 말하고, '소아편(小雅篇)'은 비천한 인물의 행위 득실을 비난하면서 그것으로 위에 있는 위정자들에게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춘추> <역경>에서 말하는 외관은 각각 다르다 하더라도 덕으로 귀착되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사마상여에게는 공허하게 과장되고 무의미한 설명이 많다는 흠은 있지만 요는 절약, 점검으로 귀착된다. 이는 <시경>의 풍간(諷諫)과 다를 바가 없다. 양웅(揚雄:前漢末의 文人)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마상여의 사치하고 화려한 부(賦)는 사치를 백 번씩이나 권고하는 것과 같으나 단 한 번의 절약과 검약의 권고는 정(鄭), 위(衛) 음악을 연주하고 난 뒤에 올바른 아악(雅樂)을 연주한 것과 같다. 이는 본래의 풍간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양웅의 의견을 적은 글은 <한서>에 있는 찬어(贊語)로 후세인이 삽입한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사마상여의 언사(言辭) 중에서 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을 가려 본편에서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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