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56.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당몽(唐蒙)은 사신으로서 야랑국(夜郞國:貴州省 西部)으로 가 계략을 사용해 통로를 열었다. 그리고 공(四川省 西昌縣), 작(四川省 成都縣 남서쪽)의 추장(酋長)들도 자청하여 한의 내신(內臣)이 되고 한나라 관리의 통치를 받았다. 그래서 제56에 <서남이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서남이(西南夷:蜀의 남쪽에 있는 만이)의 군장(軍長)은 수십 명이었다. 그러나 야랑국 군장의 세력이 가장 컸다. 야랑국의 서쪽에는 미막(靡莫)이라는 부족이 수십 개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전국(雲南省)이 가장 큰 부족이었다. 또 전국 이북으로는 군장국이 수십 개 있었는데 그 중에서 공도가 가장컸다. 이들은 모두 상투를 틀고 밭을 갈며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이밖에 서쪽으로 동사읍(同師邑:雲南省)과 동북방의 접유(雲南省 大理縣 東北)에 이르기까지를 쉬국(四川省 寧遠府), 곤명국(昆明國:四川省 鹽源縣)이라 이름한다. 모두들 머리를 땋고 가축을 따라 주거지를 옮기며 군장도 없이, 그들이 이동하는 땅은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쉬에서 동북방으로 또 수십 개의 군장국이 있는데 사국(徙國:四川省)과 작도국이 가장 컸다. 작도국에서 또한 동북방으로 수십 개의 군장국이 있는데 그 중에서 염국과 방국(모두 四川省)이 가장 컸다. 그들의 풍속을 보면 혹은 정착해 살고 혹은 떠돌며 살았는데, 대체로 촉(蜀)의 서쪽이 본거지였다. 염국과 방국의 동북방에도 역시 수십 개의 군장국이 있는데 그 중에서 백마국(白馬國)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모두가 저(티베트 종족)족이다. 이상은 모두 파, 촉의 서남 외부에 살고 있는 만이족들이다.
당초 초(楚)나라 위왕(威王)시대에 왕은 장군 장교를 시켜 양자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파군, 촉군, 검중군(黔中郡:湖南省) 이서를 공략케 했다. 장교는 본래 초 장왕(莊王)의 후손이다. 장교가 전지(昆明池, 雲南省)까지 갔는데 전지는 사방 3백 리이며 그 부근 수천 리가 비옥한 땅이었다. 장교는 무력으로 이곳을 평정한 뒤 초에 귀속시켰다. 그런데 마악 귀국하려는 순간 진나라가 공격해 와서 파군, 검중군을 탈취하는 바람에 초나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 버렸다. "차라리 전화위복이다. 내 부하들을 이끌고 되돌아 가서 전국의 왕이 되겠다." 장교는 지방민들의 복장으로 바꾸고 습속에 따르면서 그 땅의 군장이 되었다. 진나라 시대가 되자 상알이라는 자가 공략해 들어오더니 도폭 다섯 자가 되는 도로를 개통시켰다. 그런 후 많은 관리들을 보내와 일대를 다스렸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섰다. 한나라는 이들 땅을 치외(治外)의 땅으로 버려 두고 촉에 있던 요새의 관문까지 닫아 버렸다. 교통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파, 촉의 백성들은 작국의 말과 북국(건위군 지방의 종족)의 노비나 털이 긴 소 등을 밀무역했다. 그로 인해 파, 촉의 백성들은 부유했고 활기찼다.
건원 6년에 대행 왕회(王恢)가 동월을 토벌하고 동월은 그들 왕 영을 죽임으로써 한나라의 공격을 모면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왕회는 무력을 과시하며 파양 현령 당몽을 시켜 남월에게 한나라로 귀순하도록 간곡히 타일렀다. 그때 남월에서는 당몽에게 촉에서 생산되는 구장(枸醬:枸의 열매로 만든 장)을 먹였는데 당몽은 그 맛에 혹하여 생산지를 물었다. "서북쪽 장가강을 거쳐 온 것입니다. 장가강의 폭은 몇 리가 되며 파우성 아래로 흐르고 있지요." 당몽이 장안으로 돌아오자 촉의 장사치에게 구장 생산의 사실 여부를 물었다. "구장은 촉에서만 생산됩니다. 몰래 야랑땅으로 가지고 나와 매매하지요." "야랑은 장가강에 임하지 않는가. 거기에 배를 띄울 수 있겠는가." "강폭이 몇 리에 걸쳐 있으니 충분히 배를 띄울 수 있습니다." 당몽이 촉과 야랑을 탐내고 있음을 눈치챈 상인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남월에서는 재물을 보내 야랑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 동사(同師) 지역까지 거느린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역시 신하로까지 부리고 있지는 못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됐다." 당몽은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남월왕은 천자에게만 허락된 황금빛 수레와 좌독기(左纛旗)를 세우고 다니며 그 국토는 동서로 만여 리는 됩니다. 비록 한나라의 외신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한 주(州)의 군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장사(長沙), 예장(豫章)의 군사로 그들을 토벌하려 해도 수로(水路)가 자주 끊어지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관찰해 본 결과 야랑에서 정병 10만은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이들을 동원해 장가강에 띄워 남월을 불의에 습격하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만일 한나라의 강대함과 파, 촉의 부유함을 가지고 야랑으로 통하는 길을 개척하기만 한다면 그곳에 관리를 두기란 매우 쉬운 것 같습니다.
황제는 당몽의 제안을 허락했다. 그를 낭중령으로 임명해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는 한편 치중거를 끄는 병사 1만여 명도 주었다. 당몽은 이들을 이끌고 파촉의 작관(四川省)에서 야랑으로 들어가 드디어 야랑후 다동(多同)을 만났다. 당몽은 다동에게 후한 선물을 준 뒤 천자의 위덕을 깨우쳐 주고 야랑에 한나라 관리를 둘 수 있도록 권했다. "만일 이런 약정에 동의한다면 그대의 아들을 현령으로 임명되도록 하겠소." 야랑 주변의 성읍에서는 모두 한나라 비단을 탐내고 있었다. 그래서 다동은 혼자서 생각했다. "한나라로 통하는 길은 어차피 험난하다. 한이 야랑을 탐내 보았자 점령하지는 못할 걸." 그런 판단을 내린 다동은 드디어 당몽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당몽은 귀국해 그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한에서는 그 지역에 건위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파촉의 군졸을 징발해 도로를 닦으며 북에서 장가강까지 밀고 나갔다. 촉나라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서이(西夷)땅 공, 작 지역에도 군(郡)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사마상여를 낭중령으로 삼아 서이에게로 가서 한에 복속하도록 타이르게 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다 한 명의 도위(都尉)와 10여 개의 현(縣)을 설치해 촉에 소속시켰다. 이렇게 되니 파촉의 4군(四郡:漢中, 巴邑, 廣漢, 蜀郡)에서는 서남이의 땅으로 도로를 닦는 역사로 인해 식량운반 군사들의 왕래가 끊기지 않았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도 도로 개통을 보지 못했다. 사졸들은 지치고 굶주렸으며 습기에 시달려 사망하는 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자주 모반하는 서남이를 공격하려고 군사를 동원해 보았지만 힘만 소모할 뿐 군공 역시 없었다. 황제는 이런 사정을 근심했다. 그래서 공손홍(公孫弘)을 시켜 현지를 시찰케 했다. 시찰에서 돌아온 공손홍은 서남이와의 불편한 교통을 보고했다. 한편 공손홍은 어사대부가 되어 삭방군에다 성을 쌓아 황하에 의지해 흉노를 축출하는 일에 매달려 있던 터였으므로 황제에게 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남이의 경영은 잠시 중지하고 오로지 흉노 축출에 진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황제는 서남이에 파견된 관리 대부분을 철수시키고 남이와 야랑 두 현에만 도위 한 명씩을 두어 점차로 건위군을 자치(自治)하도록 했다.
한무제 원수(元狩) 원년이었다. 박망후 장건(張騫)이 대하국(大夏國:바트리아)으로 사신갔다 와서 이렇게 말했다. "대하에 체류할 때 촉(蜀)의 베[布]와 공의 지팡이[竹杖]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디서 나온 것이냐고 물었더니 동남방의 견독국(身毒國:印度天竺. '견독'은 '인도'로 발음되기도 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가 어딘가?" "촉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이고, 공의 서쪽으로 치면 2천 리 가량 떨어진 곳이지요. 물론 그런 물건들은 촉의 상인들이 견독국에서 무역해 온 것이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견독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해 보라." "미리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대하국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지만 흉노가 교통로를 막고 있어 올 수가 없답니다. 촉과의 길만 트게 한다면 견독국과도 길이 가까워지고 그럴 경우 중국에도 해는 없고 이익만 있다고 했습니다." 황제는 몹시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왕연우(王然于), 백시창(柏始昌), 여월인(呂越人) 등에게 영을 내려 오랑캐들 몰래 서쪽을 벗어나가 견독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게 했다. 그런데 그들이 전국에 도착했을 때 전국왕 상강(嘗羌)이 왕연우 등을 억류시켜 버렸다. "저 자들에게 좋은 일 시킬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찾아보도록 하자." 그러면서 상강은 전국 사람 10여 인을 시켜 견독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게 했다. 그러나 그들도 1년이 넘도록 길을 찾지 못했다. 거의가 곤명국(昆明國)에서 길을 차단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전국왕은 한의 사신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한나라와 우리 전국과 비교해서 어느 쪽 나라가 크오?" "모르겠습니다." 야랑국으로 갔을 때에도 꼭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 질문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통이 두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이나 야랑국이나 자신의 나라는 물론 한나라의 광대함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의 사자들은 하릴없이 귀환했다. "전국은 큰 나라입니다. 한나라와 친교를 맺어 두어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황제는 전국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다. 남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치의후(馳義侯)를 시켜 건위군을 통해 남이의 군사를 징발하도록 했다. 그런데 저란국(且蘭國:貴州省)의 군주는 자신이 원정간 사이에 인근 나라들이 자국의 노약자들을 잡아가지 않을까 근심했다. 결국 강제 원정을 떠나지 않으려면 한나라에 저항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치의후와 건위군 태수를 살해하고 말았다. 한나라에서도 바빴다. 전날 파촉의 죄수로서 남월을 토벌했던 8명의 교위(校尉)를 출동시켜 저란국을 격파하도록 했다. 그런데 때마침 남월이 격파된 상황이 되어 8교위군을 저란국에서 돌려 두란국(頭蘭國:南夷)을 먼저 치게 했다. 두란국이야말로 한이 전국으로 가는 길을 항상 가로막았던 나라였다. 두란국이 평정되자 남이는 저절로 평정되었으며 그곳에다 장가군을 설치할 수가 있었다. 야랑국은 원래 남월에 의지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한이 남월을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한을 배반했던 나라들을 도륙하기 시작하자 야랑도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야랑왕은 제빨리 한에 배반한 나라들을 주벌하는 일에 합세하면서 한나라에 입조해 버렸다. 황제는 야랑후를 야랑왕에 임명했다. 남월을 멸망시키고 난 한나라는 저란, 공, 작의 군장들을 모조리 살해해 버렸다. 그러자 염, 방 등의 군장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어서 한나라 신하가 될 테니 한시바삐 한나라 관할 군(郡)을 설치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래서 한나라는 공도에 월쉬군(四川省)을, 작도에 침려군(四川省)을, 염, 방에는 문산군(汶山郡:四川省)을, 그리고 광한(廣漢) 서쪽의 백마(白馬)에 무도군(武都郡:甘肅省)을 설치했다. 황제는 왕연우를 시켜 남월을 멸망시키고 남이를 주멸한 한의 무력을 전국왕에게 과시하게 하면서 그를 달래어 입조하도록 했다. 그러나 전왕은 그가 거느린 무리가 수만이며 또 동북방으로 노침국(努浸國)과 미막국이 동성(同姓)이라 협조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한나라의 요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노침과 미막은 한나라 사자와 사졸들에게 폭행을 가하기조차 했다. 원봉 2년에 황제는 파촉 군사를 동원해 마침내 노침과 미막국을 멸망시켰다. 연달아 전국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자 전왕은 서남이에게 이탈해 나라를 들어 한에 항복했다. 그리고 입조하기를 청원했다. 한에서는 전부터 전국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왕을 주살하지는 않았다. 이곳을 익주군(益州郡:雲南省)으로 삼고 전국왕에게는 국왕이 옥새를 내렸으며 자기 백성의 군장이 되게 했다. 서남이의 군장은 수백 명이었으나 오직 야랑과 전국만이 왕의 인장을 받았다. 전국은 가장 작은 나라였으면서도 한나라한테서 가장 총애를 많이 받았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초나라 선조는 하늘의 은총을 받은 것일까. 주대(周代)에는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초나라에 봉함을 받았으니까. 주가 쇠망했을 때에도 그의 영지는 사방 5천 리라고 했다. 진이 제후를 멸망시킨 후에도 오직 초의 후예만이 아직 전국왕으로 남은 것이다. 서남이를 주멸했을 때에도 오직 전국만 한의 황제가 총애하여 왕국으로 존속시켰다. 그런데 남이 사건의 발단은 당몽이 파우에서 구장(枸醬)를 본 데서 시작되었다. 서이는 후일 동서로 분리되었다가 드디어 7군(七郡)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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