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55. 조선열전(朝鮮列傳)
연(燕)의 태자 단(丹)의 군사가 진군(秦軍)에게 쫓겨 요하(遼河)근처에서 어지럽게 흩어진 뒤에 위만(衛滿)은 이들 망명한 백성들을 거두어 해동(海東:渤海의 동쪽, 즉 조선)에 집결시켰다. 진번(眞番)을 병합하고 국경을 확보하면서 한(漢)의 외신국(外臣國)이 되었다. 그래서 제55에 <조선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조선왕 위만(衛滿:衛는 姓)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는 그 전성기에 일찍이 진번, 조선을 공략해 복속시키고 요새를 쌓아 관리(官吏)를 두었다. 진이 연을 멸망시킨 뒤로는 조선을 요동 국경 밖의 땅으로 간주했다. 한나라가 일어난 뒤에도 조선은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다 하여 요동에 있던 요새를 새로 쌓고 패수(浿水:大同江의 옛 이름)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해 들어가자, 위만도 연에서 망명해 1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만이(蠻夷) 복장에다 상투를 틀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런 후 요새 밖으로 나가 패수를 건너서 본래 진나라 때의 공터였던 땅을 근거로 한의 요새 부근을 왕래하면서 점차로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그 전의 연, 제(齊)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모아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는 왕검(王儉:平壤, 原文에는 王險)에 도읍했다. 효혜제, 여후시대에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자 요동군 태수 위만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조선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국경선 밖 만이를 막고 변경지대에서 약탈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또 여러 만이를 군장(君長)들이 한으로 들어가 천자롤 뵙고자 하는 경우에도 이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 태수 위만이 이런 뜻을 상주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했다. 이래서 위만은 점차 무력과 재력을 갖게 되어 근방의 소읍들을 침략 병합했다. 진번, 임둔(臨屯)도 자진하여 복속해 왔으므로 위만의 영역은 사방 수천 리에 달했다. 그 후 왕위는 아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손자 우거(右渠) 때에 이르러서는 권유를 받고 조선으로 망명해 오는 한나라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원래 조선에서는 일찍이 입조해 천자를 뵈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진번 인근 사람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 싶다고 했지만 한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원봉 2년이었다. 한에서는 섭하(涉何)를 파견해 우거에게 귀순하라고 타일렀지만 우거는 듣지 않았다. 섭하가 조선을 떠나 경계인 패수에 임했을 때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裨王長:人名)을 부하를 시켜 찔러 죽였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섭하는 급히 패수를 건너 수레를 몰아 요새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귀국해 황제에게 보고했다. "말을 듣지 않길래 조선의 장(將)을 죽이고 왔습니다." 황제는 섭하의 행위를 가상히 여겨 책망하는 대신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섭하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를 동원해 습격해 가서 그를 죽였다. 그러자 한에서도 죄수들로 병사를 모집해 조선을 치게 했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에게 병력 5만을 주어 제(齊)에서 발해로 배를 띄웠다. 좌장군 순체에게는 요동으로 출격하여 우거를 공격케 했다. 우거도 병사를 동원해 나와 험준한 지점에서 방비를 튼튼히 했다. 드디어 좌장군의 졸정(卒正:卒의 長) 다(多)가 우거를 공격했으나 철저히 깨어지고서 도망했다. 다는 군법에 따라 참형에 처해졌다. 누선장군 양복이 제나라 군사 7천을 이끌고 왕검으로 육박했다. 우거는 우선 왕검성을 굳게 지켰다. 그런데 우거는 양복의 군사가 소수임을 알아차리고 성에서 나와 양복의 군사를 들이쳤다. 양복의 군사는 대패하고 양복은 산중으로 도망쳤다. 십여일 동안 숨어 있다가 흩어진 병졸을 다시 모아 일단 군대를 재편성했다. 한편 좌장군 순체도 패수 서쪽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격퇴당한 뒤 전진도 후퇴도 못하고 거기서 머뭇거렸다. 양복과 순체는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조선군은 의외로 강하오. 싸워서는 승산이 없으니 우리는 병력의 숫자로 과시 위협하는 한편 위산(衛山)을 시켜 항복을 권고해 보는 게 어떻겠소." "지금 처지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겠소이다." 그래서 위산이 우거에게 파견되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우거는 위산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상은 항복할 작정이었는데 두 장군이 나를 속이고 죽일까 두려워 염려했소이다. 이제는 신절(信節:天子의 使者라는 증거물)을 보았으니 안심하고 항복하겠소." 그러면서 우거는 태자를 한에 입조시켜 사과케 하고 말 5천 필과 군량미를 보내기로 했다. 태자가 군사 1만여를 데리고 패수를 마악 건너려는 순간 좌장군 순체는 번쩍 의심이 들었다. "태자는 이미 항복했지 않았소. 군사들에게 무장을 해제하도록 명하시오." 태자 역시 순체의 완강한 요구를 듣는 순간 번쩍 의심이 들었다. "그것은 싫소. 좌장군께서 나를 해치기 않는다는 보장을 어떻게 믿겠소." 그래서 태자는 패수를 건너지도 않고 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먼저 귀국해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그러나 황제는 노해서 위산을 주살해 버렸다. 일이 다시 어긋난 순체는 군사를 몰아 패수를 건너 왕검성 밑으로 박두했다. 양복 또한 군사를 몰아 성의 남쪽에다 포진했다. 그러나 우거의 왕검성 수비가 매우 견고했으므로 두 장수는 수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순체는 본래 궁중에서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며 총애받던 신하였다. 연과 대(代)의 사나운 용사들을 이끌고 온 승세 타던 군사들이었으므로 그들 모두가 매우 교만했다. 또 양복은 제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자주 패전하여 이미 많은 병사를 잃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미 우거를 겁먹고 있었고 양복은 속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거를 포위하고서는 싸우는 대신 언제나 화친을 맺자며 회유했다. 양복은 화친을 원하고 순체는 왕검성을 자주 급습해 왔으므로 우거는 두 장군의 군략이 다르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간첩을 놓아 한군의 사정을 탐색하도록 했다. 결국 우거는 양복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한다는 밀약을 통보하면서도 계속 미적거리며 시일을 끌고 있었다. 순체는 부하를 양복에게 보내 공동작전을 펴자고 했으나 양복은 일부러 순체의 사자를 만나지 않았다. 서둘러 조선의 항복문서를 받아 그 공로를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순체는 양복의 그런 기미를 알아채고 조선의 허술한 틈을 찾아 협박했으나 조선은 듣지 않았다. 차라리 조선은 양복 쪽에게 마음이 쏠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두 장군은 서로 화합할 수가 없었다. 순체는 불평했다. "누선장군은 많은 군사를 희생시킨 죄가 있지. 그런데 이제는 조선과 몰래 친하며 우호하고 있지 않은가. 양복은 모반을 꿈꾸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마음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 순체는 아직 입밖으로 발설하지는 않았다. 본국의 황제는 황제대로 화가 났다. "두 장군은 진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위산을 보내 우거에게 항복을 타일렀던 게 아닌가. 그때 우거는 위산에게 분명히 권유를 받아들여 태자를 한나라로 보내겠다고 했다. 위산은 누군인가. 일개 사자 아닌가. 위산이 혼자서 결정을 못내리고 순체와 의논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쳐 항복 약속을 망친 것이 아닌가. 이제 두 장군이 왕검성을 포위하고는 있지만 의견이 다르고 화합하지 못하니 함락은 글렀다. 어느 세월에 해결을 보겠는가." 그래서 황제는 제남군(濟南郡) 태수 공손수(公孫遂)를 파견했다. "서둘러 가서 사태를 바로잡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적절히 처리할 것을 허락한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가 먼저 만났다. "조선은 마땅히 오래 전에 항복했어야 했소. 또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었소." "그런데도 지금까지 항복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뭐요?" "이유가 있지요. 누선장군 때문이오. 함께 계략을 짜자며 아무리 타일러도 날 만나주지 않소." "그건 왜 그렇소?" "그는 군사의 대부분을 잃었소. 귀국하면 죄 받을까 그것이 두려워 조선과 모의해 반역을 꾀하고 있는 듯하오. 그래서 우거는 항복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틀림없소?" "사태를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가 큰 해를 입을 것이오. 누선장군이 조선군과 힘을 합치면 우리 군사는 전멸할 것이오." "그렇다면 적절한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지!" 공손수는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양복을 순체의 진영으로 불렀다. 공손수는 양복이 도착하자마자 군사를 시켜 체포해 버렸다. 그런 후 양복의 군사들을 순체에게 병합시켰다. 공손수는 귀국해 그 일을 황제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무어라고! 적절한 조치라는 게 겨우 그것이더냐. 양복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순체의 말만 들어 그를 체포한 것이 감히 그대가 할 짓인가!" 황제는 노하여 공손수를 주살해버렸다.
한편 순체는 기왕에 양군을 통합하자마자 즉시 조선을 급습했다. 이때 조선의 재상 로인(路人:河北省 密雲縣의 蘇縣 出身)과 한음(韓陰), 그리고 이계(尼谿:일찍이 齊의 景公이 孔子를 封하려던 곳)의 재상 삼(參), 또 장군 왕겹 등이 모여 의논했다. "애초에 우리는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는데 그는 지금 체포되어 버렸소. 사나운 좌장군이 양군을 병합했으니 이제 전투는 더욱 치열하고 급박해질 거요. 무엇보다 저들과 싸워 승산이 없다는 점이오. 그런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을 터이고......"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모두 죽게 되는 것 아니겠소." 그렇게 되자 한음, 왕겹, 로인은 모두 한나라로 도망했다. 로인은 투항 도중에 우거군에게 피살되었다. 원봉 3년 여름이었다. 이계의 재상 삼이 드디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투항해 왔다. 그러면서도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았다. 대신(大臣) 성이(成已)가 우거를 대신하여 굳게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에 순체는 우거의 아들 장(長)과 재상 로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서 성이를 주살하도록 백성들에게 권고케 했다. 그래서 성이는 성안에서 피살되고 조선은 평정되었다. 한나라는 그곳에다 사군(四郡:진번, 임둔, 樂浪, 현도)을 설치했다. 삼을 봉하여 획청후로 삼고 한음을 추저후, 왕겹을 평주후(平州侯), 장을 기후(幾侯)로 삼고 최는 아버지가 피살된 데다 공로 역시 컸으므로 온양후(溫陽侯)로 봉해졌다. 좌장군 순체는 황제에게 불려가 공로를 다투고 질투해 전략을 배반한 죄로 기시(棄市:처형 후 시체를 저자에 버리는 형벌)에 처해졌다. 누선장군 양복은 열구(列口:大同江口)에 이르러 좌장군의 군사를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전진해 많은 군사를 잃은 죄로 주살될 뻔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거는 요새의 견고함만 믿다가 나라를 망치고 조상의 제사를 끊어지게 했다. 섭하는 공로를 속임으로써 전쟁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양복은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고생하다가 죄를 입었다. 파우(廣東省)에서의 실패를 만회하려다가 도리어 의심을 산 것이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누선, 좌 두 장군 모두 치욕을 당했으므로 그 부하 장수들 역시 아무도 후에 봉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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