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53. 남월열전(南越列傳)
한나라 제국이 이미 중국의 평정을 끝냈을 때 위타는 옛 양주(揚州)의 월(越)을 평정해 속국으로 안정시키고 한제국에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그래서 제53에 <남월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남월(南越:廣東, 廣西地方)의 왕 위타(위는 官名, 타는 名)는 진정(眞定:河北省)사람이며, 성은 조(趙)씨이다. 진(秦)나라 때 천하가 병합되자 양주(揚州)의 남월을 공략해 이를 평정하고 계림군(桂林郡:廣西省)과 남해군(南海郡:廣東省)과 상군(象郡:廣東省)을 설치해 귀양갈 사람들을 그곳으로 옮겨 월나라 사람들과 섞여 살게 한 지가 13년이나 되었다. 조타는 진나라 때 등용되어 남해군의 용천현(龍川縣) 현령으로 있었다. 진의 이세황제 시대에 남해군의 군위(郡尉) 임효가 병들어 죽게 되자 그는 용천현 현령 조타를 불러 이처럼 말했다. "진승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들었소. 진나라가 무도한 짓을 해 천하 백성들이 때마침 괴로워하고 있던 참이라 항우, 유방, 진승 등이 각 주, 군에서 제각기 군사를 일으킨 것은 당연할 지 모르오. 문제는 천하를 놓고 맹수들이 다투니 온 나라가 안정될 수가 없다는 점이오. 천하의 호걸들이 진나라를 배반해 저마다 왕이 되고 있지 않겠소." "그런 소문은 저도 듣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오. 남해군은 외진 곳이라 생각되는데." "그렇지만 여기도 안심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군대를 일으켜 새로 개통된 길을 막고 제후들의 변란에 스스로 대비하는 것이." "현령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것은 옳습니다." "그렇지만 뜻밖에도 난 병이 들었소. 오래 살 수가 없소." "예에?" "이곳 파우(廣東省)는 산을 등지고 있어 험난한 데다가 남쪽은 바다로 막혀 있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수천 리나 되는 데다가 우리 중국 사람들도 많이 살며 함께 돕고 있으니 한 주(州)가 중심이 되어 나라를 세울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얘기요." "예에......" "그런데 우리 군(郡)의 고관 중에서 더불어 의논할 만한 사람이 그대밖에 없소. 그래서 부른 것이오." 임효는 위조한 조서를 조타에게 주었다. 그래서 조타는 졸지에 군위의 정무를 보게 되었다. 임효가 죽자 조타는 즉시 격문을 횡포(橫浦), 양산(陽山), 황계(湟谿:모두 廣東省)의 각 관소로 돌렸다.
-도둑들이 침입하려 한다. 빨리 도로를 차단하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지켜라.
그런 후 조타는 진나라가 임명한 관리들을 법에 걸어 죽인 후 자기 편 사람들을 우선 군수로 앉혔다. 진나라가 마침 패망하게 되자 조타는 즉시 계림군과 상군을 병합해 스스로 즉위하여 남월의 무왕(武王)이 되었다. 고조가 천하를 통일했을 즈음에는 중국은 너무 지쳐 있었다. 조타를 토벌할 힘이 도무지 없었다. 그래서 고조 11년에 육가(陸賈)를 보내어 아예 조타를 남월왕으로 삼고 할부를 갈라 가지고는 남쪽 변경에서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했다. 그때부터 남월은 장사(長沙)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여태후 시대였다. 한나라는 국경 관소에서 남월과 철기(鐵器) 교역을 갑자기 금지시켰다. 조타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고조께서는 나를 왕으로 세워 사신과 물자를 통하게 했다. 이제 고후(高后:여태후)는 중상모략하는 신하의 말만 듣고 오랑캐 취급하는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 물자 교역을 끊어버린 것은 틀림없이 장사왕(長沙王:吳芮)의 간계일 것이다. 장사왕은 중국의 힘에 의존해 남월을 격멸하고 두 나라 땅의 왕이 되려는 것이다." 조타는 자진해서 존호를 세워 남월의 무제(武帝)가 되었다. 굳이 병사를 동원해 장사 변경의 성읍을 공격해서는 몇 개의 현을 부수고 돌아가곤 했다. 고후는 장군 융려후(隆廬侯) 주조를 보내 남월을 치게 했으나 주조의 군사들은 더위와 습기 때문에 병에 걸려 양산령(陽山嶺:廣東省)을 넘을 수가 없었다. 한 해쯤 뒤에 고후가 죽었다. 한나라는 그제서야 군사를 철수했다. 조타는 이런 틈을 타서 군대를 보내 변경을 위협하는 반면 민월(福建省), 서구(交趾), 낙(駱:九眞) 등에 재물을 주어 모조리 복속시켰다. 이렇게 되자 남월의 영토는 동서의 길이가 1만여 리나 되었다. 조타는 천자(天子)를 본받아 황색비단으로 장식한 수레를 타고 좌독(左纛)이라는 기(旗)를 수레 왼쪽에 세우고 자신의 명령을 제(制)라 하면서 완전히 중국과 같이 했다.
효문제 원년이 되자 처음으로 한나라는 안정되었다. 효문제는 제후들과 사방 오랑캐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대(代)에서 들어와 즉위한 사실을 알리고 무력(武力)을 일삼지 않을 것임을 천하에 통고했다. 특히 조타의 부모 무덤이 있는 진정에다 묘지기의 영지를 설정해 주어 해마다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뿐만 아니라 조타의 종형제들을 불러들여 선물을 주고 고관에 오르게 하는 등 나름대로 그들을 총애했다. 황제는 승상 진평(陳平)에게 조서를 내려 남월로 사신갈 인물을 천거케 했다. "호치현(狹西省)의 육가(陸賈)가 좋겠습니다. 선제(先帝) 때에 한 번 갔던 경험이 있어 그쪽 사정에 익숙하거든요." 그래서 황제는 육가를 불러 태중대부로 임명한 다음 남월로 사신보냈다. 조타가 멋대로 황제로 자칭하는 바도 꾸짖게 했다. 그런데 육가가 남월에 도착하자 조타는 이렇게 말했다. "만이(蠻夷)의 우두머리인 늙은 신하 조타의 입장이 이러했음을 꼭 전해 주시오. 전날 고후(高后)께서 남월을 차별대우하셨을 때 나는 장사왕이 나를 헐뜯는 것으로 의심했지요. 더구나 멀리서 듣기로는 고후가 나의 일족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조상의 무덤까지 파서 불살라 버렸다고 하지 않았겠소. 자포자기해서 장사 땅을 침범한 것이었소. 그리고 이곳 남방에 위치한 남월은 습기가 많은 저지대로서 오랑캐들 사이에 끼어 있소. 웃기는 것이 동쪽 민월은 백성 1천 명을 가지고 왕으로 칭하며 서쪽 구, 낙(駱)처럼 벌거벗고 사는 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있는 형편이오. 이런 상황에서 늙은 내가 황제라 자칭한 것은 오로지 스스로 즐겨본 것이지, 어찌 이것을 사실인 것처럼 천자께 말씀드릴 수가 있었겠소." 더구나 조타는 머리를 조아려 사과했다. 또한 영구히 번병지신(藩屛之臣)이 되어 공물을 바치겠다고 청원했다. 그런 후 조타는 곧 나라 안에 포고령을 내렸다.
-내가 들은 바로는, 두 영웅은 함께 설 수 없고, 두 현인 역시 함께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 고로 한나라의 황제만 현명한 천자인 것이다. 이제까지 내가 사용하던 제제(帝制), 황옥(黃屋), 좌독은 모두 폐지한다.
육가가 귀국해 경과를 보고하자 효문제는 몹시 기뻐했다. 그로부터 조타는 봄, 가을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으며 효경제 때에는 스스로 신(臣)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남월 안에서는 예전처럼 몰래 황제의 칭호를 썼지만 천자에게 사신을 보낼 때에는 왕이라 호칭했다. 한의 조정에서는 조타를 제후로 대우했다. 조타는 건원(建元) 4년에 죽었다. 조타의 손자 조호(趙胡)가 대신해서 남월의 왕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민월의 왕 영이 남월의 변경 고을로 쳐들어 왔다. 조호가 한나라로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렸다.
-남월과 민월 양국은 모두가 한실의 번병입니다. 제멋대로 병사를 동원해 서로 공격할 수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민월에서 군사를 동원해 저희 남월을 침입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병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자의 조칙만 있으시기 바랄 뿐입니다.
천자는 남월이 의리를 지켜 신하로서의 직분을 다하는 것으로 여겨 남월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래서 왕회(王恢), 한안국(韓安國) 두 장군을 보내어 민월을 치게 했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가 국경의 고개를 넘기도 전에 민월왕의 아우 여선(餘善)이 민월왕 영을 죽이고 투항했다. 그래서 한군은 철수했다. 황제는 파병의 뜻은 알려야 하겠기에 장조(蔣助)를 남월로 사신가게 했다. 조호는 장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자께서 소신을 위하여 군사를 동원해 민월을 토벌해 주셨소. 그 은혜 죽어도 보답할 수 없을 것이오." 그리고 조호는 태자 영제를 입조하도록 장조에게 딸려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남월은 외적의 침입을 입었소. 당장은 떠날 형편이 못되니 사자께서는 먼저 출발해 주시오. 저도 밤낮으로 여장을 서둘러 챙겨가서 천자를 뵙도록 하겠소." 장조가 떠난 후였다. 남월의 대신들이 조호에게 충고했다. "결국 민월은 한나라 의해 망한 꼴입니다. 왕께서 한에 입조하시게 되면 남월까지 위태롭습니다." "가지 말라는 얘기요?" "선왕(先王:조타)께서도 '천자를 섬기는 데에는 예를 잃지 않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달콤한 말에 유인되어 입조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일단 입조하시면 다시는 돌아오시지 못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남월은 멸망합니다." 그래서 남월왕 조호는 병을 핑계대고 한에 입조하지 않았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서 조호는 실제로 중병에 걸렸다. 태자 영제가 천자에게 청원해 귀국했다. 조호가 죽었다. 시호를 문왕(文王)이라 했다. 영제가 뒤를 이어 왕이 되자 그는 선왕 무제의 제인(帝印)을 감추어 버리고는 사용하지 않았다. 조영제가 황실에 입조하고 있을 때 한단(邯鄲:河北省)의 규씨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조흥(趙興)까지 낳았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규씨의 딸을 왕후로 삼고 아들 흥을 후사로 삼겠습니다.
한나라에서는 자주 남월로 사신을 보내 조영제를 입조하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조영제는 마음대로 살생하면서 멋대로 왕노릇하며 지내는 것이 즐거웠으므로 입조하지 않았다. "조정으로 들어가면 한나라 법에 따라 본토의 제후와 동등한 취급을 받을 게 아니냐. 그것은 싫다." 조영제는 병이라 핑계대며 끝내 입조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아들인 조차공(趙次公)을 입조시켜 황실을 수호하는 식으로 한실의 위협을 모면했다. 조영제 역시 죽었다. 시호를 명왕(明王)이라 했다. 태자 조흥이 즉위하고 그의 모친이 태후가 되었다. 태후는 조영제의 총희가 되기 전부터 패릉(覇陵:長安 동쪽)사람 안국소계(安國少季:安國은 姓, 少季는 名)와 사통(私通)하던 사이었다. 한나라에서는 원정 4년 조영제가 죽자 그런 안국소계를 남월로 사신보냈다. "태후와 왕께서는 조정으로 들어와 본토의 다른 제후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시지요." 변설에 능한 간대부(諫大夫:官名) 종군(終軍)까지 쫓아와 조흥을 달랬다. 뿐만 아니라 용사 위신(魏臣)을 곁에서 협박하게 하면서, 위위(衛尉) 노박덕(路博德)을 계양(桂陽:湖南省)까지 군사를 끌고 와 사신을 기다리는 척하면서 왕을 위협했다. 남월왕 조흥은 어렸다. 더구나 태후는 중국여자였고 한때 사신 안국소계와 사통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안국소계가 다시 남월로 오자 태후와의 사통은 또 시작되었다. 남월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히 태후에 대하여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태후는 자신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며 그만큼 한나라의 위세에 의지하려고 했다. 왕과 대신들에게 권해 한나라에 복속해 제후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3년마다 한번씩 입조하도록 타일렀다. 결국 남월왕은 사신을 보내 입조할 것과 변경의 관문을 없애 달라고 청원했다. 황제는 그 청을 허락했다. 남월의 승상 여가(呂嘉)에게 은인(銀印)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내사(內史), 중위(中尉), 태부(太傅)에게도 각각 인을 내려 주었으며 나머지 관직은 남월왕이 직접 임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남월이 관습적으로 집행하던 이마에 먹물들이기, 코베기 등의 형벌을 제거하고 한나라 법을 적용하도록 했으며 기타의 제도들은 본토와 제후들에 준하는 제도에 따르도록 했다. 그래서 한에서는 사자들을 남월에 머물게 하면서 그들을 진무하게 했다.
왕과 태후는 많은 예물을 가지고 조정으로 들어갈 행장을 꾸렸다. 남월의 재상 여가는 나이가 많았다. 3대의 왕을 재상으로 섬기면서 그의 일족으로 고관에 오른 자가 70여 명이나 되었다. 아들들은 모두 왕녀를 배우자로 맞이했으며 딸들은 모두 왕자나 왕의 형제나 왕족에게 시집보냈다. 또 창오군(蒼梧郡:廣西省)의 진왕(秦王:越中王)과도 인척관계를 맺고 있어 국내에서 여가의 권위는 매우 무거웠다. 남월사람들은 그를 신임했고 그의 귀와 눈이 되어 활동하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민심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는 왕보다 나았다. 왕이 천자에게 상서하려 하자 여가는 자주 충고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았다. 그래서 여가는 배반할 마음을 품었다. 병이라 핑계대면서 한의 사자들을 접견하지 않았다. 사자들은 그런 여가를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으나 제반 정세가 아직 그를 죽일 만큼 되어 있지 않았다. 왕과 왕태후는 여가가 변고를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해 선수를 쳐서 그를 주살하려고 계획을 짰다. 주연을 베푼 자리에서 한나라 사자의 힘을 빌려 죽일 작정이었다. 사자들은 모두 동향(東向)해 앉고 태후는 남향(南向)했으며 왕은 북향(北向)하고 재상 여가와 대신들은 모두 서향(西向)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장군인 여가의 아우는 병사들을 이끌고 왕궁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주연이 진행되자 태후는 여가에게 짐짓 물었다. "남월이 한에 복속하는 것은 나라의 이익이오. 그런데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승상의 의도는 무엇이오." 그것은 한나라 사자가 여가에게 트집을 잡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안팎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사자들은 서로 미루어 감히 행동으로 옮기는 자가 없었다. 여가 역시 태후와 사자들의 의도를 읽고 있었다. "요것들 보게! 나를 해칠 작정이로구나!" 그래서 여가는 얼른 좌석에서 일어나 퇴출해 버렸다. 태후가 성이나 창으로 여가의 등을 찌르려 했으나 왕이 얼른 제지했다. "여장군이 밖에서 군사를 대기시켜 놓고 있소. 기회가 좋지 않으니 참으시지요." 여가는 아우의 군사에 호위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는 병이라 핑계대며 왕이나 한의 사자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반을 꾀할 뿐이다!" 왕은 평소에 여가를 죽일 작정은 없었다. 여가도 왕의 그런 속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여가는 모반을 보류한 뒤 수개월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흘려 버렸다. 태후는 자신의 음란한 행실로 인해 백성들이 반감을 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힘만으로 여가 등을 처치하려 했으나 승복하는 신하가 없어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는 여가가 왕명에 복종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있었다. 왕과 태후의 세력이 약해 여가에 맞설 수 없을 만큼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한의 사자들 역시 겁이 나 결단하는 자가 없다는 내용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왕과 태후가 이미 한나라에 귀속했고, 여가가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출병할 것까지는 아직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겁을 줄 필요는 있겠다." 그래서 장삼(蔣參)에게 군사 2천을 주어 사신보내려 했다. 그러자 장삼은 이렇게 대답했다. "친선 우호사절이라면 두 사람만 가도 됩니다. 토벌하기 위해서라면 2천 명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가." 그래서 황제는 파병계획을 중지했다. 그러자 전날 제북(濟北)의 승상이었던 겹현(河南省)의 장사 한천추(韓千秋)가 분연히 일어나 소리쳤다. "그까짓 하찮은 남월 하나 가지고 무얼 그토록 심려만 하고 계십니까. 더구나 왕과 태후가 내응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방해자는 여가뿐입니다. 저에게 용사 2백 명만 주시면 기필코 여가를 목베고 와서 삼가 아뢰겠습니다." 드디어 황제도 결단을 내렸다. 한천추에게 2천 병사를 주어 왕태후의 동생 규락과 함께 가게 했다. 한천추 등이 남월의 국경선을 넘자 때마침 여가는 반란을 일으켰다.그러면서 전국에 포고령을 내렸다.
-왕은 어리고 어리석은 데다 태후는 중국인이다. 게다가 한나라 사신과 간통한 여인이다. 남월을 멋대로 한에 복속시켜 선왕의 보물들을 모조리 꺼내 천자에게 헌상하며 입조하려 한다. 아첨이 극심하다. 또 많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가서 포로로 팔아 노예로 삼으려고 한다. 그래서 용서할 수가 없다. 태후는 스스로 한때의 화를 모면하고 이익만 얻으려 할 뿐 남월왕 조씨의 사직을 돌본다거나 만세의 계략을 세울 마음은 없다.
이에 여가는 아우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왕궁을 공격해 왕과 왕태후 및 한나라 사신들까지 죽여 버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창오군의 진왕에게, 또 여러 군현에 변고 소식을 전한 뒤 명왕(明王:영제)의 남월 여인이 낳아 준 장남 술양후(術陽侯) 건덕(建德)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편 한천추의 병사들은 남월에 들어와 몇 군데의 소읍을 점령했다. 그 후 남월에서는 일부러 한천추에게 길을 열어 주며 식량 보급까지 해 주면서 점차 내지로 끌어들였다. 한천추 군이 파우에서 40리 못 미친 곳에 이르렀을 대 남월군은 드디어 이들을 습격해 전멸시켜 버렸다. 그리고 여가는 사람을 시켜 한나라 사자의 부절을 함에 넣어 봉해 국경 요새 위에 놓아두고 거짓 사죄를 하는 한편 군사를 동원해 요해지를 지키게 했다. 황제는 중얼거렸다. "짐의 결정이 무모했다. 그러나 한천추가 성공을 못했다 하더라도 군의 선봉에 서서 진격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한천추의 아들 한연연(韓延年)을 성안후(成安侯)에 봉했다. 뿐만 아니라 한에서는 규락의 누님 왕태후가 솔선해서 한에 복속했던 공로가 있으므로 그의 아들 규광덕을 봉해 용항후(龍亢侯)로 삼았다. 그런 후 황제는 이렇게 선언했다. "천자의 위엄이 쇠약해 제후가 서로 힘을 멋대로 겨눌 때 신하된 자로서 난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을 <춘추(春秋:孔子의 저서)>는 비난하고 있다. 지금 여가, 건덕 등이 모반해서는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라 칭하면서도 태연자약하다. 그래서 죄수 및 양자강 회수(淮水) 이남의 수군(水軍)10만에게 출동을 명령하여 이를 치게 한다." 원정(元鼎) 5년 가을이었다. 위위(衛尉) 노박덕은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계양(桂陽)에서 출격해 회수(匯水)로 내려가고 주작도위 양복(楊僕)은 누선장군(樓船將軍)이 되어 예장(豫章)에서 출격해 횡포(橫浦)로 내려가고 본래 월에서 귀복한 월후(越侯) 두 사람[한 명은 嚴, 또 한 사람은 甲 또는 光]은 과선장군(戈船將軍), 하려장군이 되어 영릉(零陵:廣西省)에서 출격하고 한 사람은 창오(蒼梧)로 진출했다. 또월에서 귀복한 치의후는 파(巴)와 촉(蜀)의 죄수들을 이끌고 야랑(夜郞)의 군사를 동원해 장가강을 내려와 모두 파우에서 합류하게 했다.
원정 6년 겨울이었다. 누선장군 양복이 정예병을 이끌고 먼저 심협(尋狹:廣東省)을 함락시키고 석문(石門:廣東省)을 깨뜨린 뒤 남월의 선박과 양곡들을 획득했다. 다시 전진하여 남월의 예봉을 꺾고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린 채 복파장군 노박덕을 기다렸다. 그런데 복파장군은 죄수를 인솔한 데다가 길은 멀고 험해서 합류 약속 기일에 늦은 탓에 많은 군사가 도망쳐 버려 누선장군과 합류했을 때에는 겨우 1천여 명밖에 없었다. 드디어 양군이 합세해 전진했는데 누선장군이 앞장서 파우에 도착했다. 이때 건덕과 여가 등은 파우에서 성을 지키고 있었다. 누선장군은 스스로 편리한 지대를 골라 동남쪽에 포진하고 복파장군은 서북쪽에 포진했다. 때마침 해가 저물었는데 누선장군이 성을 공격해 불태워 버렸다. 남월에서는 평소 복파장군 노박덕의 용명을 익히 듣고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 그의 병력의 다소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한편 복파장군은 진영을 정비한 뒤 사자를 보내 항복하는 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런 후 그들에게 후(侯)의 인(印)을 주어 성안으로 돌려보내 다른 자들도 투항하도록 권고토록 했다. 누선장군 측은 맹공을 퍼붓는 한편 적진을 불살라 적군들을 복파장군 진영으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이튿날 새벽 무렵에는 남월 성중의 적군 모두가 복파장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여가와 건덕은 이미 밤사이에 군사 수백 명만 거느리고 성을 탈출해 배를 타고 바다 서쪽으로 도망쳤다. 그래서 복파장군은 투항해 온 귀인(貴人)들에게 여가가 도망친 곳을 물어 알아내었다. 복파장군은 곧 부하를 시켜 여가를 추격케 했다. 결국 교위 사마(司馬) 소홍(蘇弘)은 건덕을 체포한 공로로 해상후(海常侯)에 봉해지고 남월의 낭관 도계(都稽)는 여가를 체포한 공로로 임채후(臨蔡侯)에 봉해졌다. 창오왕(蒼梧王:秦王) 조광(趙光)은 남월왕과 같은 성(姓)이다. 그는 한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남월의 게양현(揭陽縣:廣東省) 현령인 정(定)과 함께 스스로 한나라에 귀복하고 말았다. 또 남월의 계림군(桂林郡) 군감 거옹(居翁:居는 姓, 翁은 名)은 구, 낙(駱) 두 나라까지 타일러 한에 귀속되게 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후(侯)가 될 수 있었다. 과선장군, 하려장군 및 치의후가 출동시킨 야랑의 군사들은 아직 내려오기도 전에 남월은 이미 평정되었다. 한나라는 결국 구군(九郡)으로 편성되었다. 복파장군은 증봉되었고 누선장군은 견고한 적의 진지를 함락시킨 공으로 장량후(將梁侯)에 봉해졌다. 남월은 위타가 처음으로 왕이 된 지 5대 93년 만에 멸망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위타가 남월왕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임효 덕분이다. 한에서 처음에 천하를 평정할 때 조타는 때를 잘 만나 제후의 대열에 끼일 수 있었다. 융려후의 군사가 습기와 전염병으로 남하할 수 없게 됨으로써 조타는 더욱더 교만해졌었다. 서구와 낙라(駱裸)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하자['민월이 남월을 공격하자'의 잘못인 듯] 남월은 동요되었다. 그때 한나라 군사가 국경에 임박하자 영제가 입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나라가 망할 조짐은 규씨의 딸[王太后]에게서 싹텄다. 여가의 작은 충성이 조타의 후손을 단절시켰다. 누선장군 양복은 욕심을 부리며 태만하고 게으른 행동을 하다가 실패했다[편리한 지대를 고른 것은 태만이며 남월군을 자신이 공격하지 않고 복파장군 진영으로 몰아넣은 것은 실패다]. 복파장군은 곤궁할수록 더욱 지혜롭게 행동하여 화를 복으로 바꾸었다. 성공과 실패가 뒤바뀌는 것은 비유해 말하자면 마치 꼬아놓은 새끼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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