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49. 이광장군열전(李廣將軍列傳)
적을 만나면 용감하였고 사졸들에게는 인애로웠으며 그의 호령은 명쾌하여 부하 장졸들이 심복했다. 그래서 제49에 <이광장군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이광 장군은 농서군 성기현(成紀縣:甘肅省 秦安縣) 출신이다. 그의 선조는 진(秦)나라 때 장군이 되어 연(燕)의 태자 단(丹)을 추적해 가서 사로잡은 이신(李信)이다. 그의 가족들은 괴리(槐里:狹西省 興平郡)에 살고 있었으나 훗일 성기현으로 이주했다. 이광의 가문에서는 대대로 그들 특유의 사법(射法)인 궁술이 전수되고 있었다. 효문제 14년이었다. 흉노가 대거 소관(蕭關)으로 침입했다. 이때 이광은 양가(良家)의 자제로서 종군해 흉노를 쳤다. 말을 탄 채로 활쏘기에 뛰어나 수많은 적을 죽이고 또 포로도 많이 잡아 그 공로로 낭중(郎中:侍從)이 되었다. 이광의 사촌동생 이채(李蔡)의 공로도 혁혁해 낭관이 되어 두 사람 모두 무기상시(武騎常侍:侍從騎兵 武官)가 되어 봉록 8백 석씩 받았다. 언젠가 이광이 황제를 수행해 사냥을 하다가 위험을 가로막으며 앞으로 돌파하여 맨주먹으로 맹수와 격투해 때려잡자 효문제는 크게 한탄했다. "아깝다! 그대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게 억울하다. 만일 그대가 고제(高帝) 때 태어났더라면 어디 만호후(萬戶侯) 정도였겠는가!" 효경제가 즉위하자 이광은 농서군의 도위(都尉)가 되었다가 기랑장(騎郞將:侍從騎兵隊長)으로 승진했다. 오, 초 7국의 난이 일어나자 이광은 효기도위(驍騎都尉:효기부대장)가 되어 태위 주아부를 따라 오, 초군을 쳤다. 이광은 적의 군기를 빼앗고 창읍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양왕(梁王)한테서 장군의 인수를 몰래 받은 것이 탄로나 개선한 뒤에도 상이 없었다. 이광은 상곡군(上谷郡:河北省 廷慶縣 일대) 태수로 인근을 전전했다. 그것은 분명한 좌천이었다. 그는 분풀이라도 하듯 매일같이 몸소 전쟁터로 나아가 흉노와 충돌했다. 전속국(典屬國:속국 관리장)인 공손곤사(公孫昆邪)가 그런 이광의 짓거리들을 보고 돌아가 울면서 황제에게 간했다. "이광의 재능과 용기는 당대에서 천하무쌍입니다. 그는 제 능력을 믿고 자주 흉노와 맞닥뜨려 싸워 이기고는 있지만 이러다가는 언젠가는 그를 잃을 게 뻔합니다. 폐하께선 그런 인재를 버리실 것입니까." 잠시 놀란 황제는 이광을 옮겨 상군(上郡:狹西省 綏德縣 일대)의 태수로 삼았다. 뒤에는 변군(邊郡)의 태수로 전출됐다가 다시 상군으로 돌아왔고, 그가 태수로 돌아다닌 것은 농서, 북지(北地:甘肅省 環縣 일대), 안문(雁門), 대군(代郡), 운중(雲中) 등지였는데 가는 곳마다 이름을 드날렸다. 그가 상군 태수로 있을 때 흉노가 크게 침입했다. 이광이 끊임없이 만용을 부렸으므로 황제가 중귀인(中貴人:宮中에서 총애하는 宦官)을 시켜 이광의 병사를 통제하도록 한 상태였다. 그때 중귀인은 제멋대로 수십 기(騎)의 병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흉노병사 3인에게 포위되었다. 흉노병 세 명은 원을 그리고 빙빙 돌면서 중귀인 일행들을 향해 활을 쏘아대었다. 그들은 명사수였던지 쏘는 화살에 중귀인의 기병들은 가차없이 화살에 맞아 떨어졌다. 중귀인은 몸에 상처를 입은 채 간신히 살아 본대로 돌아왔다. "전멸했소이다. 놈들의 활솜씨가 하도 귀신같던지......" "독수리를 쏘아맞힐 정도로 솜씨가 좋다면......!" 이광은 적개심이 일었다. 즉시 백여 기병을 이끌고 그 자들을 추적해 갔다. 그들 세 명은 말을 잃고 수십 리쯤 걸어가고 있던 상태였다. "자, 그대들은 좌우로 늘어서서 내가 놈들을 어떻게 잡는가 구경이나 하고 있거라." 그러면서 이광은 화살 세 대로 두 흉노병을 쏘아죽인 뒤 한 자는 상처만 입히면서 사로잡았다. "너희들은 무엇하는 자들이냐." 이광은 포로를 결박한 뒤에 물었다. "수리를 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군사들이 수리로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그런데 사람을 쏘아?" 그때였다. 이광의 군사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장군님, 앞을 보십시오!" 건너편에는 수십 기의 흉노병들이 다가오다 말고 이광의 소대가 유인병이라 생각했는지 멈칫 놀라서 산으로 올라가 포진했다. "장군님, 적들의 본대가 뒤쪽에 있는 듯합니다. 우리도 피해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다. 우리가 도망치면 대군이 뒤쫓아 올 게 틀림없다. 더구나 우리의 본대는 수십 리나 떨어져 있다. 이런 상태로 도망치면 우리는 전멸한다. 그러니 이곳에서 적진 쪽으로 더 진격해 말안장을 풀고 머문다." "예에?" "유인병인 것처럼 행동해야 우리가 산다. 모두 전진!" 그래서 이광의 소대는 흉노의 본진에서 2리(里) 가량 떨어진 곳에다 말안장을 풀고 머물렀다. "적들이 급습해 올까 두렵습니다." "적들은 우리가 도망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가만히 있음으로 해서 유인병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흉노병들은 감히 쳐들어오지 못했다. 그 대신 흉노병들도 이쪽의 허실을 엿볼 작정이었는지 백마 탄 장수 하나가 수십 기를 거느리고 와서 자주 기웃거렸다, "열 기만 나를 따라오너라." 이광은 흉노 진중으로 달려들어가 백마 탄 장수를 사살한 뒤 다시 소대로 돌아와 태연하게 말안장을 풀었다. 부하들은 이광의 용기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얼마 후 해가 저물었다. 흉노병들은 시종 이상하게 생각은 하면서도 감히 쳐들어오지는 못했다. "자, 가만히 야음을 타서 철수한다." 이광의 소대는 날이 밝을 무렵에 본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본대에서는 이광의 행방을 몰라 구원병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효경제가 붕어하고 효무제가 즉위했다. 효무제의 좌우 근신들은 모두 이광을 명장이라 추켜 세웠다. 그래서 황제는 이광을 상군 태수인 채로 미앙궁(효무제의 거처)의 위위(衛尉:禁衛隊長)에 임명했다. 그리고 정불식(程不識)을 장락궁(長樂宮:太后의 거처)의 위위로 삼았다. 정불식은 본시 이광과 함께 변경군 태수로서 주둔군의 장군이었다. 그런데 흉노를 치러 나가는 두 장군의 태도는 판이했다. 이광은 출격시 부하들에게 부오행진(部伍行陣:군사를 隊伍로 나누고 陣法에 맞추어 행군하는 것) 따위를 강요하지 않았다. 사막이 대부분인 호지(胡地)이므로 때마침 좋은 물이나 풀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숙영하여 병사들을 휴식시켰으며, 밤에도 자유롭게 풀어주어 조두(구리로 만든 밥짓는 그릇. 낮에는 밥을 짓고 밤에는 이것을 쳐서 경비함)를 쳐서 방위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막부(幕府:장군의 사령부)에서도 형식적인 문서나 장부를 생략했다. 그렇지만 척후병을 멀리까지 세워 경계했기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정불식의 통솔방법은 달랐다. 그의 부곡(部曲:장군 밑에 五部가 있고 部 밑에 또 曲이 있다)은 대오와 진영이 항상 질서 정연했고, 밤에는 조두를 쳐서 경계를 엄히 했으며, 군리(軍吏)가 군의 장부를 지극히 밝게 정리하도록 요구했으므로 군은 휴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기 때문인지 여전히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언젠가 정불식은 이렇게 술회했다. "이광의 군규(軍規)는 지극히 간단 용이하다. 만약 흉노가 급습한다면 막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사졸들은 자유롭게 편히 지내는 탓으로 모두들 이광을 위해 죽기를 즐겁게 여긴다. 나의 군사는 군규가 번잡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흉노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당시 한나라 변경군(郡)에서는 이광, 정불식 모두 명장이었다. 그러나 흉노는 이광의 전략을 오히려 두려워했고 사졸들도 대부분 이광을 따르기를 즐거워한 반면 정불식을 따르기는 싫어했다.
정불식은 효경제 때 원칙을 존중해 자주 기탄없는 간언(諫言)을 했기 때문인지 태중대부(太中大夫:궁중 고문관)에 임명되었다. 그의 사람됨은 역시 청렴하고 법률과 규칙에 충실했다. 후에 한나라는 마읍성(馬邑城:山西省 朔縣 동북쪽)을 미끼로 삼아 선우를 유인한 뒤 마읍 부근 골짜기에다 대군을 매복시켜 두고 있었다. 그때 이광은 효기장군(驍騎將軍)이었으며 호군장군 한안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선우가 그 계획을 눈치채고 철수해 버렸으므로 한군으로서는 모두 아무런 공도 세울 수가 없었다. 그 후 4년이 지나서였다. 이광은 위위로서 장군이 되어 안문으로 나아가 흉노를 쳤으나 중과부적으로 이광은 흉노군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선우는 평소에 이광의 현명함을 듣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명령해 두고 있었다. "이광을 만나거든 가급적 산 채로 잡아오도록 해라." 그런데 흉노의 기병들이 이광을 잡았을 때는 마침 그는 부상을 당해 앓고있었다. 이광은 두 마리 말 사이에 얽어매여져 누워서 10여 리쯤 끌려갔다. 그는 죽은 척하고 곁눈질로 흘겨보자 흉노의 소년병 하나가 준마를 타고 가고 있었다. "바로 이때다!" 이광은 벌떡 일어나 느닷없이 소년병의 말 위로 뛰어오르며 소년병을 밀어뜨린 뒤 활까지 빼앗아 달아났다. 수백 기의 추격병들이 뒤따라왔다. 이광은 뺏은 활로 흉노들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남쪽으로 수십 리를 도망쳐 왔다. 그는 패잔병들을 만나 간신히 목숨을 구해 본대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는 한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는 형리의 손으로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많은 사졸들을 죽게 했고 또한 흉노에게 생포되었었다는 이유로 참형의 판결을 받았다. 그렇지만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그는 은퇴하여 수년 동안 집에 있었다. 영음후 관영의 손자 관강(灌强)과 함께 전야(田野)에 살면서 남전현(藍田縣)의 남산에서 사냥이나 하는 것이 소일거리였다.
어떤 날 밤이었다. 종자 하나만 데리고 야외로 나갔다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패릉의 정(亭:파출소)에 이르자 마침 패릉의 위(尉:경찰서장)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리를 질러 이광을 정지시켰다. 이광을 대신해 종자가 대답했다. "이 분은 전날의 장군 이광이십니다." "무어? 전날의 장군이라고? 현직장군이라도 야간통행 위반을 묵과할 수 없다!" 그렇게 되어 이광은 정에 유치되고 말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흉노가 침범해 요서군(遼西郡:熱河省 朝陽 일대)의 태수를 죽이고 한안국까지 격파했다. 그 일로 한안국은 우북평군(右北平郡:河北省 北東에서 熱河省 南東에 걸쳐 있음)의 태수로 좌천되었다가 거기서 죽었다. 그래서 황제는 별 수 없이 다시 이광을 불러 우북평군의 태수로 임명했다. 이때 이광은 황제에게 패릉의 위와 함께 보내줄 것을 주청해 군영에 이르자마자 패릉 위를 베어 버렸다. 흉노는 이광이 우북평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의 비장군(飛將軍)이 여기로 온단다!" 그래서 흉노는 여러 해 동안 이광을 피해 감히 우북평으로는 침범하지 못했다.
어느 날 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수풀 속에 큰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리고 살촉이 바위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활을 바위에다 대고 쏘았으나 살촉은 바위를 뚫지 못했다. 이광은 부임지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몸소 찾아나서서 그것을 쏘아 잡았다. 한번은 상처입은 호랑이가 달려들어 자신이 부상을 당했으나 결국은 그 호랑이를 쏘아 죽이기도 했다. 이광은 청렴했다. 상을 받으면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버렸으며 음식도 사졸들의 것과 꼭 같은 것을 들었다. 그는 죽기까지 40여 년 동안 2천 석의 봉록을 받는 신분이면서도 집에는 재산이 남아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일생 동안 재물에 관해서 말한 적도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 그의 생김새의 특징은 큰 키에 원숭이처럼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활의 명수였던 이유가 그런 신체적 특성에 기인한 듯도 했다. 그의 자손이나 남들이 그에게서 아무리 궁술을 열심히 배워도 도저히 그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는 말솜씨가 없었으며 그 때문인지 말수도 적었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는 거의가 땅에다 군진(軍陣)을 그리고 즐기거나 작은 표적으로 활쏘기를 해서 술내기 유희를 즐기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그는 활을 가지고 놀면서 생애를 마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광이 군사를 거느리고 황야를 건너다가 물을 발견하게 되면 사졸들이 모두 물을 마시기 전까지는 결코 물가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의 군령 또한 관대하고 가혹하지 않았으므로 사졸들은 그를 경애하였고 그를 위해 봉사하는 바를 즐겁게 여겼다. 그가 활을 쏠 때, 적의 급습이 있더라도 수십 보 사정거리 안으로 적이 근접하지 않으면 결코 발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쏘는 화살에 적은 백발백중으로 맞아 죽었다. 그는 근접사격을 즐겼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병사들이 곤경에 빠지기도 했으며 맹수를 잡는 경우에도 자주 부상을 입곤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석건(石建)이 죽었으므로 효무제는 이광을 불러 석건을 대신해 낭중령에 임명했다. 원삭(元朔) 6년에 이광은 다시 후위군(後衛軍)의 장군이 되어 대장군 위청의 군에 소속되었다. 정양(定襄:山西省 大同市 북서(北西)쪽)으로 나가 흉노를 쳤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적병을 베든가 포로로 잡는 숫자가 행상의 기준치에 도달해 후작(侯爵)이 되는 자가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이광에게는 공훈이 없었다. 그 후 3년이 지나 이광은 낭중령으로서 4천 기(騎)를 이끌고 우북평으로 출격했다.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도 1만 기를 이끌고 출격했으나 각각 다른 길로 갔다. 수백 리 가량 진격했을 때였다. 흉노의 좌현왕(左賢王)이 4만 기를 이끌고 와서 이광을 포위했다. 그 엄청난 군사들의 위세에 이광의 군사들은 모두들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이광은 눈 한 번 깜짝 않고 아들 이감(李敢)에게 명령했다. "네가 앞장서서 돌격해라!" 이감이 수십 기만을 데리고 일직선으로 흉노군을 돌파해 나가 다시 포위군을 뚫고 본대로 돌아와서는 이광에게 복명했다. "오랑캐놈들 별 거 아닙니다." 군사들이 그제서야 안심했다. 이광은 원형진을 쳤다. 그런 진형으로 밖으로 쳐나가자 흉노가 쏘는 화살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전사자가 절반이 넘고 화살은 거의 다했다. "활줄을 끌어당긴 채 발사하지 말라. 화살을 아껴야 살아남는다!" 이광은 선두에 서서 자신의 황색 대궁(大弓)으로 적의 비장(裨將:副將) 몇 명을 쏘아 죽였다. 그제서야 흉노의 포위망이 약간 풀렸다. 때마침 해가 저물었다. 군사들은 죽을 상을 하고 있었으나 이광의 의기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한층 더 군사들을 독려하며 군진을 정비했다. 군사들은 이광의 용기에 경복하여 사기가 되살아났다. 이튿날도 용전 분투하는 중 박망후의 군사가 도착해 흉노군의 포위망이 풀렸다. 그렇지만 한군은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그들을 추격할 수는 없었다. 그때 이광의 군사는 거의 전멸할 뻔했다. 전쟁을 끝내고 귀환했다. 장건은 지체하여 합류기일을 어겼다 해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이광은 군공은 있었지만 많은 부하를 잃었으므로 공죄(功罪)가 상쇄되어 상은 없었다. 전날 이광의 종제 이채(李蔡)는 이광과 함께 효문제를 섬겼다. 이채는 효경제 때 공로를 쌓아 봉록 2천 석의 지위에 올랐다가 효무제 시대에는 대국(代國)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또 원삭 5년에 경거장군(輕車將軍)이 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을 쳤다. 그 공로가 행상기준에 도달하여 봉을 받아 낙안후(樂安侯)가 되었다. 원수(元狩) 2년에 이채는 공손홍(公孫弘)에 대신하여 한의 승상이 되었다. 이채의 사람됨은 하급에서 중 정도로 대단할 것이 없었으며 그의 명성 또한 이광에 비하면 어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광이 작위도 봉령(封領)도 얻지 못하고 관위도 구경(九卿)에 불과했는데 이채는 열후가 되고 최고 관위인 삼공(三公)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한 이광의 부하였던 여러 군리, 사졸들 중에서 후작에 봉해진 자들까지 있었으니 벼슬이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이광은 낙담하면서 망기(望氣:雲氣의 움직임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예언자)하는 왕삭(王朔)에게 물었다. "한나라가 흉노 토벌을 개시한 이래 나는 종군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리고 각 부대의 장교 이하 중에서 재능이 보통도 못 되는데도 흉노 토벌의 군공이 후작에 이르른 자가 수십 인이나 된단 말이오. 문제는 내가 남보다 그 군공이 결코 떨어진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나는 한 치의 군공도 봉읍도 얻지 못하게 되니 그 이유가 무엇이겠소. 혹시 내 관상이 후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겠소, 아니면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이겠소." "장군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여 보십시오. 지금까지 후회되는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까." "글쎄 말이오. 내가 농서군의 태수로 있을 때 강족(羌族:티베트족, 즉 西藏族)이 반란을 일으켜 내가 투항권고를 하자 8백 명이 항복해 왔었소. 그런데 내가 그 자들을 속여 모조리 죽여버린 적이 있소. 가슴에 걸린다면 그것밖에 없소."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기왕에 항복한 자를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오는 일은 없습니다. 장군께서 작위를 얻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다시 2년이 지났다.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이 흉노로 대거 출격했다. 이광도 종군하고 싶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간청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광이 재삼재사 간청하자 황제는 할 수 없이 그를 전위장군(前衛將軍)에 임명했다. 그 해가 원수 4년이었다. 이광은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와 접전하려고 이미 요새에서 나와 있었다. 그런데 위청은 이광에게 우장군 조이기(趙食其)의 군사와 함께 동쪽으로 진군케 했다. 동쪽길은 멀리 돌아가는 길인데다 물과 풀밭도 없어 대군이 쉽사리 진군하기에는 몹시 어려운 행로였다. 이광은 불평할 수밖에 없었다. "대장군, 내 부대와 부서는 분명히 전위부대입니다. 나는 소시때부터 흉노와 싸워왔습니다. 이번만은 선우와 멋지게 맞부닥쳐 싸우고 싶은데 먼 길을 돌아서 가라 하시니 무슨 이유입니까. 내가 전위장군임을 기억하시고 부디 앞장서 선우와 대결토록 해 주시오!" "아니 됩니다. 조장군과 함께 명령대로 동도로 나가시오." 별 수 없었다. 사실 대장군 위청은 황제로부터 은밀한 훈계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광은 연로하다. 또한 흉노와의 싸움에서는 항상 불운했으니 절대로 선우와 맞서서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
위청은 이미 포로를 심문해 선우의 거처를 알고 있었으므로 이광을 결코 직진시킬 수는 없었다. 더구나 위청의 은인인 공손오가 전번의 패전으로 후작위를 잃고 중장군(中將軍)으로 따라나선 중이었으므로 선우와 부딪치게 하여 공을 세우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물론 이광도 그런저런 사정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가능할 줄 알면서도 대장군에게 떼를 썼던 것이다. 대장군은 이광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사(長史)를 시켜 봉서(封書)를 이광에게 다시 전달하게 했다.
-서면에 적힌 대로 부대를 이끌고 나가라.
이광은 원한과 분노를 품은 채 조이기의 군과 합류해 대장군에게는 출발한다는 인사도 없이 길을 떠났다. 속절없이 동쪽길로 돌아나가게 된 것이다. 이광의 군대에는 제대로 길을 안내할 만한 안내자가 없었다. 그래서 길을 잃고 헤매기만 하다가 대장군과 합류해야 될 날짜에 뒤늦고 말았다. 한편 대장군은 선우와 접전했다. 그러나 선우가 도망쳐 버렸으므로 잡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남진하여 사막지대를 건너다가 이광과 조이기를 만날 수 있었다. 이광은 위청을 이미 만났기 때문에 안심하고 본대로 귀환했다. 그러나 위청은 군공없는 싸움의 결과를 두고 난처한 책임을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위청은 또다시 장사를 시켜 건반(乾飯)과 술을 보내면서 이광과 조이기가 길을 잃게 된 상황을 문책하게 했다. "무어냐!" 이광은 장사를 보자 화가 날대로 났다. "질문은 여기 있습니다. 답신서를 제출하라십니다." "내가 네깐놈에게 중언부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답신서는 내가 직접 꾸며서 사령부로 가져가겠다. 어서 꺼져 버려라. 다른 장교들한테는 죄가 없으니 물을 것도 없다." 장사가 나간 뒤 이광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흉노와 싸우기를 70여 차례나 했다. 이번에 다행히도 대장군을 따라 출격해 선우와 싸워 그를 목베려 했었다. 전위장군이어서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겠나. 그런데도 대장군은 내 부서를 멋대로 옮겨 먼 길을 돌아가게 해서는 길을 잃게 만들었다. 어찌 이것이 나의 죄이겠는가. 그러나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천명(天命)일 테니까. 내 나이 벌써 60을 넘겼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내가 저 따위 도필(刀筆)의 사(史:文書를 취급하는 말단관리) 따위에게 곡절을 대꾸하고 앉아있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내 변명이다." 드디어 이광은 칼을 잡아 스스로 목을 찔렀다. 이광의 군대는 사대부를 비롯한 전군이 이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그 소문을 들은 백성들까지도 그를 알거나 모르거나 노인이나 장년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우장군 조이기는 형리에게 넘겨져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이광에게는 당호(當戶), 초(椒), 감(敢)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모두 낭(郎:侍從)으로 있었다. 한번은 황제가 한언(寵臣)과 장난말을 주고받았는데 이당호가 느끼기에는 한언이 몹시 불경, 불손했다. 그래서 단칼에 그를 쳐버리고는 도망했다. 황제는 이당호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이초는 대군(代郡)의 태수가 되었으나 아버지 이광보다 먼저 죽었다. 이당호의 유복자에 이능(李陵)이 있었다. 이광이 군중에서 자살했을 때 이감은 표기장군을 따라 종군하고 있었다. 이채는 이광이 죽은 다음해에 승상의 신분으로 있었는데 효경제의 어릉 외원(外垣) 안 공지를 불법 점유한 죄로 형리에게 넘겨져 취조를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미리 자살하여 취조는 면했다. 그의 봉령은 몰수되었다. 이감은 교위(校尉)가 되어 표기장군을 따라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해 군기(軍旗)를 탈취하고 수많은 적의 목을 베었으며 그 공으로 관내후(關內侯:봉령이 없는 후작)의 작위와 2백 호의 식읍을 받고 아버지 이광을 대신하여 낭중령이 되었다. 이감은 대장군 위청이 자신의 부친을 냉대해 죽게 만든 사실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후 사소한 트집을 잡아 위청을 쳐서 몸에 상처를 입혔다. 위청은 그런 사건이 밝혀져서 명예로울 것도 없거니와 이광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어 모른 척 덮어 두었다. 얼마 후 이감이 황제를 모시고 옹(雍)의 감천궁으로 가서 사냥을 할 때였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위청과 친했다. 위청에 대한 이감의 부손을 알고 있었으므로 곽거병은 실수한 척 이감을 사살해 버렸다. 곽거병은 당시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일이 난처하여 이감이 '사슴의 뿔에 받혀 죽었다'는 식으로 처리해 버렸다. 곽거병 역시 그로부터 일 년 후에 죽었다. 이감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황태자의 시녀가 되어 총애를 받았다. 이감의 아들 이우(李禹)도 황태자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利)를 좋아하는 인품이었다. 모쪼록 이씨 가문은 점차로 쇠미해져 갔다.
[이하의 이능전(李陵傳)은 후세 사람이 가필한 것인 듯하다.]
이능이 장년이 되자 건장궁(建章宮)의 감(監:경호관)으로 뽑혀 기사(騎士)들을 감독했다. 궁술에 뛰어났으며 사졸들을 아껴주었다. 황제는 그가 이씨 가문에서 대대로 장군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8백 기(騎)의 장(將)으로 삼았다. 한때 이능은 흉노땅 깊숙히 2천여 리나 침입해 들어가 거연현(居延縣:甘肅省)의 지형을 살피고 돌아왔다. 그 후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단양(丹陽)의 초나라 사람 5천 명을 거느리고 주천군(酒泉郡), 장액군(張掖郡:甘肅省) 등지에서 궁술을 가르치며 흉노땅에 수년 간 주둔, 경비했다.
천한(天漢) 2년 가을이었다.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군사 3만 기(騎)를 이끌고 기련산(祁連山:감숙성 장액현의 남서쪽, 흉노의 말로 '하늘'을 뜻하며 南山, 雪山, 白山이라고도 함)과 천산(天山:新疆省)에서 흉노의 우현왕을 쳤다. 이때 이광리는 이능에게 사사(射士)와 보병 5천 명을 주어 거연지방 이북으로 천여 리를 쳐나가게 했다. 이것은 이광리가 흉노군을 분산시켜 자신에게만 도전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었다. 이능은 약속한 기일이 되어 본대로 귀환하려 했다. 그러나 선우가 8만 대군으로 이능의 군사를 에워싸버렸다. 이능의 군사는 용전분투해 군사의 절반이 전사하면서도 1만의 흉노병을 살상했다. 화살이 다하도록 연전연투한 지가 8일이었다. 거연에서 백 리 못미친 곳까지 후퇴해 왔을 때 흉노는 길목 좁은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이능군의 식량이 다했고 구원군 역시 오지 않았다. 흉노는 이능의 군을 외목 틀어쥐듯 하고서는 항복을 요구했다. "이쯤 되어서는 폐하에게 보고할 면목도 없다." 이능도 드디어 흉노에게 항복했다.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전사하고 흩어져 한나라로 귀환한 병사는 겨우 4백 명이었다. 선우는 이능 가문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이능을 사로잡아 자기 딸을 이능에게 시집보내어 그를 존중했다. 한나라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이능의 모친과 처자를 몰살했다. 그로부터 이씨 일가의 명성은 실추되어 농서의 선비들은 그의 문하였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자기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며 자기 몸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해도 따르지 않는다[<논어>의 '자로(子路)편']'고 한다. 이것은 이광 장군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내가 이장군을 본 적이 있는데 시골 사람처럼 말은 잘 못했지만 성실 소박한 인품이었다. 그가 죽자 천하 사람들은 그를 알건 모르건 모두들 그를 위해 충심으로 슬퍼했다. 그의 충실한 마음씨가 진정으로 사대부를 믿게 만들었던 것이다. 속담에 보면, '복숭아나 오얏은 말은 하지 않지만 그 나무 밑에는 저절로 길이 생긴다'고 돼 있다. 이 속담은 비록 적은 것을 말했으나 실상은 큰 비유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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