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48.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그의 지혜는 시세변화에 대응하기에 넉넉하였고 그의 관용은 인재를 발굴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제48에 <한장유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은 양(梁)나라 성안(成安:河南省)사람인데, 후에 수양(河南省)으로 이사했다. 일찍이 한비자(韓非子)와 잡가(雜家:諸子百家의 학설을 취사선택해 一家를 이룬 學派)의 학설을 추(騶:山東省) 땅의 전선생(田先生)한테서 배운 뒤, 양나라 효왕(孝王)을 섬겨 중대부(中大夫)가 되었다. 오, 초 7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효왕은 한안국과 장우(張羽)를 장군으로 삼아 양나라 동쪽 국경을 방위하게 했다. 장우는 역전분투했고 한안국은 신중하게 대처하여 함부로 출전하지 않아 오군(吳軍)은 그래서 양나라를 통과할 수 없었다. 오, 초 7국이 이미 격파되자 한안국과 장우의 명성은 그로 인해 드높아졌다. 양의 효왕은 효경제의 동복(同腹) 아우다. 두태후(竇太后)는 아들 효왕을 사랑해 효왕 자신이 양의 재상이나 봉록 2천 석 이상의 관리를 추천,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 주었다[漢의 제도에는 2천 석 이하만 王이 임명할 수 있고 2천 석 이상의 고급관료는 天子가 임명해 각국에 파견했다]. 그런데 효왕이 출입하거나 노닐 경우 왕의 분수를 넘어 참월하게도 천자와 다름없는 격식을 차리고 다녔다. 효경제가 그 소문을 듣고 속으로 좋지 않게 생각했다. 태후도 그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황제가 언짢게 여긴다는 사실도 알았다. 때마침 양나라에서 사자가 왔으나 만나보지도 않고 사람을 시켜 왕의 소행을 문서로 제출하라고 꾸짖었다. 양나라에서도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양왕은 한안국을 양의 사자로 삼아 한나라로 보냈다. 한안국은 우선 대장공주(大長公主:효경제의 누님)를 찾아뵙고 울면서 호소했다. "양왕께서는 아들된 도리로 효도를 다하고 신하된 도리로 충성을 다하는데 태후께서는 어찌 그 점을 살펴주시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전날 7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곡관 동쪽 나라들이 모조리 합종해 서쪽 한나라를 공격해 왔지만 오로지 양나라만이 한실(漢室)을 보호해 반군을 상대해 싸우느라고 곤란을 겪었습니다. 그날 태후와 황제께서 관중에서 고립되고 제후들이 난동하는 것을 근심한 양왕은 매일같이 걱정 근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저희들을 시켜 오, 초군을 쳐서 막도록 군사를 파견, 독려했습니다. 그래서 오, 초군이 서진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그들은 패배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양왕의 힘이었습니다. 지금 태후께서는 사소한 예절을 가지고 양왕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양왕은 부친과 형님이 모두 황제였던고로 보고 듣고 한 것이 그것뿐이라 필(천자의 출입시 행인을 통행금지시키는 의식)을 외치고 경(警:천자 출입시 경계, 엄숙케 경고하는 의식)을 지키도록 경고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거기(車旗)는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것으로 시골 백성들에게 자랑하고 나라 안을 말달려서 제후에게 과시하며 태후와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천하에 알리려고 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양의 사자를 보낼 때마다 문서로 소행을 제출하라시며 책망하시니 효왕은 두렵고 난감하여 밤낮으로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십니다. 양왕은 아들로서 효도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있거늘 태후께서는 어찌 그 점을 어여삐 여기지 않으시는지요." 한안국의 말을 들은 대장공주는 그것을 자세히 태후에게 전했다. 그랬더니 태후는 몹시 기뻐했다. "양왕을 위해 이 사실을 황제에게 말하겠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황제의 마음도 그제서야 풀렸다. 관을 벗고 태후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형제가 서로 화목하지 못한 탓으로 태후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황제는 서둘러 양의 사자들을 인견한 후 후하게 상을 내렸다. 그 이후로 양왕은 황제와 더욱 친애하는 바 되었다. 태후와 대장공주는 그 공로가 한안국에게 있다 하여 다시 천금을 내리니 그 일로 한안국의 이름은 크게 드러나고 한나라 황실과 더욱 친밀해졌다.
그 후 한안국이 법에 저촉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때 몽현(蒙縣:河南省)의 옥리(獄吏)인 전갑(田甲:이름을 몰라 甲이라 했음)이 한안국에게 모욕을 주었다. 죄수의 몸이라 모욕을 달게 받으면서도 한안국은 말했다. "아무리 불꺼진 재라 하지만 다시 살아나는 경우도 있지." "무어야! 불씨가 살아나면 거기에다 오줌을 갈겨 주겠다!" 그 후 정작 얼마 안 있어 양의 내사(內史) 자리가 비었다. 한실(漢室)에서 한안국을 양의 내사로 임명했다. 이것은 죄수의 몸으로 일약 2천 석 봉록을 받는 고관으로 승진되는 경우였다. 전갑이 놀라 도망쳐 버렸다. "잡아오너라. 전갑이 관직에 복귀하지 않으면 일족을 멸하겠다." 놀란 전갑이 출두해 윗통을 벗고 사죄하자 한안국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 오줌을 갈겨 보시지. 하지만 내 어찌 너 같은 놈과 시비하고 앉았겠느냐." 끝내 그를 잘 대우해 주었다.
전날 양나라 내사 자리가 비었을 때 실상 효왕은 새로 얻은 제(齊)나라 사람 공손궤(公孫詭)를 내사로 삼을 것을 주청하려 했었다. 그때 두태후가 그 소식을 듣고 왕에게 조명(詔命)을 내려 한안국을 내사로 삼게 했었다. 그런 사정이 있는 공손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승(羊勝) 등과 더불어 엉뚱한 사건을 획책했던 것이다. 즉 한나라 대신들을 설득해 효왕을 황태자로 삼도록 하는 계략이었다. "대왕께서는 그렇게 일을 꾸미도록 승낙하셨지만 반대하는 자들이 많소." 공손궤와 양승이 밀담을 나누었다. "반대하는 자가 누구요?" "누군 누구겠소. 한실의 대신 한 놈과 오나라 재상 원앙이오." "자객을 보내 두 놈을 찔러 죽이면 일이 간단해지겠구먼." 그런데 그런 계획이 누설되어 효경제의 귀로 들어갔다. "그토록 발칙한 자들이 있나! 가차없이 두 놈을 체포해 오너라!" 그래서 한나라에서는 열 명의 사자를 양나라로 급파했다. 그런데 공손궤와 양승은 일이 탄로난 줄 알자 곧 숨어 버렸다. 양나라 재상을 비롯해 온 나라가 두 사람을 잡으려고 이잡듯이 뒤졌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이때 한안국에게 공손궤와 양승의 소재를 귀띔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한안국은 효왕을 만나 울면서 간했다. "군주가 모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입니다. 지금 대왕에게는 어진 신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랏일이 사사건건 말썽이 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공손궤와 양승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이 얼마나 어렵게 번질지 모르겠습니다. 청컨대 저를 사직시키고 죽음을 내려 주십시오." 효왕이 놀라서 되물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말하는 거요!" 한안국은 다시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대왕 스스로 생각해 보실 때 태상황(高祖의 父)과 고조와의 친애함, 또 지금의 황제와 임강왕(臨江王:황제의 아들)과의 친애함을 비교해 대왕과 황제와의 친애함이 더 낫다고 보십니까." "아니오." "그분들은 친부자지간입니다. 그런데도 고조께서는 '3척의 검(劍)을 가지고 천하를 취한 것은 짐(朕)이다'라고 외치며 태상황이 평생토록 정치를 해보지 못하게 역양(狹西省)에만 머물도록 하셨습니다. 임강왕은 적장자(嫡長子)인 황태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모친 율희(栗姬)의 한 마디 실수로 폐위되어 임강왕이 되었고 거기에다 율희는 종묘 외원(外垣)의 땅을 자기 궁전 부지로 사용한 죄를 입어 중위부(中尉府:國都治安局)에서 자살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들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천하를 통치하려면 사정(私情)으로써 공연(公然)한 질서를 어지럽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옛말에도, '친아버지라 할지라도 호랑이가 안 된다고 누가 장담할 것이며, 친형이라 하더라도 이리가 안 된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제후의 반열에 위치하고 계시면서 일개 간사한 신하의 뜬말에 혹하시어 한실의 금단(禁斷)을 범하고 밝은 법률을 굽히려 하셨습니다. 황제께서는 지금 태후의 대왕에 대한 애정을 참작하시어 차마 대왕을 처벌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태후 역시 주야로 눈물을 흘리면서 대왕께서 스스로 개심하시기를 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만일 태후께서 붕어하실 경우 대왕께서는 또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안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효왕은 참회의 눈물을 떨어뜨렸다. "내 잘못이 크오. 내가 그들을 숨겨 두었소. 곧 내놓겠소." 결국 공손궤와 양승은 자살하고 말았다. 한나라 사자들은 돌아가 일의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양나라 사건이 깨끗이 해결된 것은 한안국의 힘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효경제와 태후는 한안국을 더욱 귀하게 여겼다. 양나라에서는 효왕이 죽고 공왕(共王)이 즉위했다.
한안국은 법에 저촉되어 관직을 잃고 은퇴해 집에 있었다. 건원(建元) 연간이었다. 무안후 전분이 한실의 외척으로 태위가 되어 정권을 주도했다. 좋은 기회라 생각되어 한안국은 전분에게 금 5백금과 물품을 선물했다. 이에 전분은 태후에게 한안국을 추천했다. 효무제(孝武帝) 또한 한안국의 현명함을 평소에도 듣고 있었으므로 그를 즉시 불러 북지군(北地郡)의 도위(都尉)로 삼았다가 곧 대사농(大司農)으로 승진시켰다. 민월과 동월(東越)이 서로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한안국과 대행(大行:四夷의 빈객을 주관하는 官名) 왕회(王恢)가 장수가 되어 출동했으나 이들이 월에 도착하기도 전에 민월에서 그들의 왕을 죽여 한나라에 항복했으므로 곧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건원 6년에 무안후 전분이 승상이 되고 한안국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그때 흉노에서 사자가 와서 화친하기를 청했다. 황제는 이 안건을 조정에 내려 심의하게 했다. 대행 왕회는 연(燕)나라 출신으로서 변방의 관리로 오래 있었으므로 흉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한나라가 흉노와 화친한다 해도 대개 수년이 못가 또다시 약속을 깨 버릴 게 뻔합니다. 그러니 화친할 게 아니라 병사를 일으켜 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한안국이 왕회의 말을 반박했다. "천릿길을 달려가 전쟁을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흉노족들이란 원래 군마의 날쌤을 믿고 짐승같은 마음을 품은 채 새떼처럼 여기저기 이동하는 족속으로서 포착해 제어하기가 어려운 족속들입니다. 그 불모의 땅을 얻어보았자 우리가 국토를 넓혔다고 할 수 없으며 인도(人道)를 알지 못하는 그 따위 무리들을 얻어보았자 우리 군대가 강해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부터 그들을 복속시켜 백성으로 삼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라에서는 수천 리 원방을 달려가 승리를 다툰다 해도 인마(人馬)는 지쳐버릴 것이고 흉노는 온전한 상태에서 지친 자를 제압해 버릴 것입니다. 강력한 쇠노의 화살도 그 힘이 다한 지점에 이르면 아무리 엷은 노(魯)나라의 깁[縞]도 뚫을 수 없으며 아무리 세찬 돌풍이라도 힘이 다한 지점에 이르면 가벼운 홍모(鴻毛)조차 떠돌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최초에 강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힘이 쇠약해지기 때문입니다. 흉노를 친다는 것은 불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화친하느니만 못합니다." 심의에 참석한 대신들 대부분이 한안국의 의견에 찬성했으므로 황제도 화친을 허락했다.
이듬해는 원광(元光) 원년이었다. 안문(雁門)군 마읍(馬邑:山西省)의 호족 섭일이 대행 왕회를 통해 황제께 아뢰었다. "우리 변방사람들이 흉노와 잘 화친하고 있는데다 그들도 우리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미끼로 그들을 유인할 수 있겠는데......" 그들의 속마음을 떠볼 수 있는 기회로도 좋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섭일노인을 간첩으로 삼아 흉노로 도망해 들어가게 했다. 섭일은 선우를 만나서 말했다. "제가 마읍의 현령과 현승(縣丞)과 관리들을 벤 뒤 성읍(城邑)을 가진 채로 투항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곳의 재물을 몽땅 차지할 수 있을 텐데 어떠실는지요." 선우는 섭일이 마음에 든데다 또 믿었으므로 곧 허락을 내렸다. 그래서 섭일은 다시 마읍으로 돌아와 사형수의 머리 몇 개를 베어 마읍 성벽에다 내걸었다. 그리고 선우의 사자에게 귀띔했다. "보다시피 마읍의 장리(長吏)들을 모조리 베어 죽였으니 바삐 달려가 내침해 오도록 일러 주시오." 보고를 받은 선우는 즉시 10만여 기병을 동원해 요새를 뚫고 나와 무주(武州:山西省 雁門)의 요새로 돌입했다. 이때 한나라 복병 30여 만은 마읍 부근의 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위위(衛尉) 이광(李廣)은 효기장군(驍騎將軍:용감한 기마대의 장군),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는 경거장군(輕車將軍:전차대의 장군), 대행 왕회는 장둔장군(將屯將軍:騎駐軍을 감시하는 장군), 태중대부 이식(李息)은 재관장군(材官將軍:騎射隊의 장군), 어사대부 한안국은 호군장군(護軍將軍)이 되었으며 여러 장군은 모두 호군장군에게 예속되었다. 이들은 선우가 마읍으로 들어가는 순간 한군이 돌격해 나오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왕회, 이식, 이광은 따로 대(代)에서 흉노의 치중대(輜重隊)를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드디어 선우는 한나라 장성(長城)의 무주요새로 돌입해 마읍에서 백여 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약탈을 시작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가축들뿐이었고 사람은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수상하다!" 선우는 의심을 품고 봉화대(烽火臺)를 습격하게 했다. 그리고 거기서 무주의 위사(尉史:변경 군의 武官, 百里마다 한 사람씩 배치)를 사로잡아 금방 찔러죽일 듯이 위협했다. 별 수 없이 위사가 자백했다. "한나라 군사 수십 만 명이 마읍 부근 골짜기에 숨어 있습니다. 들어가지 마십시오." 선우가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자칫 한나라에게 속을 뻔했다!" 군사를 철수시켜 요새 밖으로 나온 선우는 다시 소리질렀다. "내가 위사를 사로잡은 건 하늘의 도움 때문이다!" 그래서 위사를 천왕(天王)이라 부르게 했다.
한편 한군에서는 선우가 이미 철수했다는 보고를 전달받았다. 즉시 요새까지 추격해도 그들의 빠른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우리도 철수한다." 한편 3만의 병사를 거느린 왕회도 본부군사가 흉노병과 교전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만 있거라. 일이 이렇게 되면...... 우리가 선우의 치중대를 부수려 달려든다 해도 그들은 이미 최고의 정예병들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닌가. 형세로 보아 우리가 패할 게 틀림없어. 후퇴한다." 그래서 왕회 군도 철병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니 군사만 움직였을 뿐이지 아무도 공을 세운 자가 없었다. 황제는 몹시 노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왕회는 어째서 선우의 치중대를 공격도 해보지 않고 마음대로 철병했단 말인가!" 왕회가 대답했다. "처음 약속으로는 흉노가 마읍으로 들어가 한군과 선우군이 접전을 시작해야 우리가 치중대를 치기로 돼 있습니다. 물론 그랬을 때 승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우는 복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경계하면서 철수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 3만 군으로는 중과부적일 뿐만 아니라 정예병과 대적해 패배의 오명을 남길 따름이라는 판단이 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귀환하면 참죄를 받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군사 3만 명은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그대로 건졌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왕회를 정위(廷尉:刑獄長官)에 넘겨 버렸다. 정위는 왕회를 두요(逗橈:적을 피한 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정작 일이 다급해진 왕회는 승상 전분에게 아무도 몰래 천 금을 보냈다. 구명자금이었다. 그러나 전분은 굳이 황제에게 말하지 않고 태후에게 말했다. "왕회가 주동이 되어 마읍의 사건을 꾸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왕회를 베면 결국 흉노를 위해 원수를 갚아주는 일밖에 더 되겠습니까." 황제가 태후에게 문안인사차 들렀을 때 태후는 승상이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랬더니 황제는 몹시 화를 냈다. "그렇습니다. 주동이 되어 마읍 일을 꾸민 것은 왕회입니다. 천하의 병사 수십 만 명을 동원해 제 말대로 행동을 개시한 자도 분명히 왕회입니다. 그러니 설사 선우를 잡을 수가 없었다 치더라도 치중대를 습격만 했어도 참전한 사대부(士大夫)들의 마음은 위로받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토록 어설픈 군사작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왕회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에 사과할 길이 없어집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왕회는 자살하고 말았다.
한안국의 사람됨을 말하자면 그 지략이 원대했고 그 지혜는 세상에 대처하기에 충분했다. 그 모든 것은 충성스럽고 후덕한 마음에서 우러나왔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재물을 탐하기는 했으나 그가 추천하는 인사들은 모두 청렴한 선비였으며 자기보다 현명했다. 양나라에서 호수(壺遂), 장고(臧固), 질타 등을 천거했는데 모두가 천하의 명사들이었다. 선비들도 이 점을 들어 그를 칭송하고 사모했으며 황제도 그를 국기(國器)로 인정했다. 한안국이 어사대부가 된 지 4년 후에 승상 전분이 죽었다. 한안국이 승상 대행을 하던 중 황제가 행행할 때 선도(先導) 수레를 지휘하다가 그만 떨어져 다리를 다치게 되었다. 그를 승상으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다리를 몹시 절어 황제는 할 수 없이 평극후(平棘侯) 설택(薛澤)을 승상으로 삼았다. 결국 한안국은 승상이 못 되고 다리 부상으로 사직하고 말았다. 수개월이 지나자 한안국의 병세는 호전됐다. 그래서 중위(中尉)에 다시 복직되었다. 다시 일 년이 지나 위위(衛尉)로 승진했다. 거기장군 위청(衛靑)이 흉노를 치려고 상곡(上谷)에서 장성 밖으로 나가 용성(單干가 神에게 제사 지내는 곳)에서 흉노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장군 이광이 일단 흉노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용성을 잃게 되었고 기장(騎將) 공손오(公孫敖)는 많은 사졸을 잃었다. 이광과 공손오는 참형을 당할 처지였으나 속전(贖錢)을 내고 풀려나와 서민이 되었다. 이듬해에 흉노가 변경으로 크게 침입해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죽이고 또 안문(雁門:山西省 北部)까지 들어와 수천 명의 백성을 죽이고 또 노략질해 갔다. 거기장군 위청이 그들을 공격하려고 안문에서 장성 밖으로 나갔다. 위위 한안국이 재관장군이 되어 어양(漁陽:河北省)에 주둔했다. 그때 한안국이 흉노의 병사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 포로는 흉노병들이 멀리 퇴각했다고 실토했다. 그래서 한안국은 황제께 즉시로 글을 올렸다.
-농번기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얼마 동안 주둔군을 돌아가 농사일을 거들도록 해 주십시오.
그런데 주둔군이 철수한 지 한 달쯤 후에 흉노의 대군이 상곡과 어양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한안국의 누벽에는 7백여 명의 군사밖에 없었다. 출격해 싸워 보았으나 대적할 힘이 없기로 다시 누벽으로 돌아와 성을 지켰다. 흉노들은 뻔히 보는 앞에서 천여 명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고 많은 가축들을 약탈해 갔다. 황제가 그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한안국을 문책했다. 한안국은 동쪽 우북평(右北平:河北省 東北部와 熱河省 南部)으로 치우쳐 주둔하게 했다. 이것은 흉노의 포로가 바로 동쪽으로 침입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황제가 그에게 책임을 무겁게 지우기 위해서였다. 한안국은 처음에 어사대부와 호군장군의 직책 등에 있었다. 후에는 점차 배척되고 황제로부터 소원해지더니 끝없이 좌천되어갔다. 그와 반대로 새로이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청년장군 위청은 더욱 많은 전공을 세워 존귀하게 되어갔다. 한안국은 더욱 소외된 채로 나날을 전방에서 말없이 보낼 뿐이었다. 주둔군의 장군으로서 흉노에게 자주 속아 많은 사졸들을 잃었으므로 그는 스스로 몹시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사직해 귀환하기를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더욱 동쪽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고민도 많은 데다 일이 즐겁지도 않아 수개월이 지나자 그는 병이 들었다. 원삭(元朔) 2년이었다. 그는 거기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호수(壺遂)와 함께 율력(律歷)을 제정하면서 느낀 것은 한 장유는 의리(義理)가 있는 인간이었고, 호수는 마음속 깊이 후덕한 인정을 감추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양나라에 유덕자(有德者)가 많다고 하는데 빈 말은 아닌 듯하다. 호수는 관직이 첨사(詹事:皇后, 太子의 執事)에 이르렀는데 안타까운 것은 황제가 그를 신뢰해 승상으로 임명하려 할 때 그가 죽은 것이다. 만약 그가 죽지 않고 승상이 되었더라면 청렴하고 단정한 행실로 근신, 근면한 군자로서의 칭송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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