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1장
2.그리스의 조소미술과 도자기
조소미술 그리스인은 일반적으로 조각의 목적을 신과 신화적 광경을 묘사하는 데 두었고 각각의 조각에서 순수한 미적 쾌감도 역시 종교적 체험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프로클로스에 따르면 그리스 조각에서는 오직 오성에 새겨진 상에 따라 만들어진 자연의 이상적인 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스인은 대리석과 청동을 사용하여 참으로 열정적으로 수많은 조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들은 오늘날 서구를 위시한 온 세계 대형 박물관의 경쟁적인 수집 대상이 되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풍부한 그리스 조상 더미에 당혹감을 느낄 정도이다. 그러나 진품은 이미 옛적에 사라져 버리고 독창적 작품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유품은 없다. 그 엄청난 수집품 속에는 반복하여 모방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변형되어 딴 물건이 되어 버린 것, 반쯤 생명이 없어진 모조품, 또한 후대 헬레니즘 복제 등만이 존재할 뿐 진정 설득력있는 품목은 하나도 없다. 다만 상고기(기원전 500년 이전)의 조각과 부조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파괴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신전을 재건할 때 성책의 기초로 묻혔다가 근래 발굴되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남아 있어 그 면모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기(기원전 5~4세기) 조각은 박공과 소벽의 부조 일부가 존재할 뿐 거장의 손으로 된 작품은 없다. 거장의 작품으로는 파락시텔레스의 '어린 디오뉴소스를 안은 젊은 헤르메스상' 정도가 고작인데, 그나마도 그의 대표작으로 치는 작품이 아니며 또한 일부 설에는 기원전 340년경의 헬레니즘 모작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전기 예술을 마무리하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남아 있는 페이디아스의 박공과 소벽의 부조 조각은 대부분 반출되어 런던 박물관의 어두운 광 속에 쌓여 광채를 잃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 조각에 대한 진수와 원천은 이처럼 믿음직하지 못하고 개탄스러운 상태다. 더구나 대부분의 고대 예술가들은 돌을 쪼는 것을 주로 한 것이 아니라 청동으로 주조하였다. 고전기의 세 거장인 기원전 5세기의 뮤론과 폴류클레이토스, 또한 기원전 4세기의 류시포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손수 만든 청동상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각처의 대형 박물관에 청동상의 수가 매우 적은 이유도 고대 말기 이후 청동제의 원작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거장들의 작품을 알아보고 탐구하는 데는 후세의 복제, 그것도 원작의 재질과는 다른 소재로 만들어진 모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청동 걸작을 녹여서 종, 화폐, 심지어 대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작을 접할 수 있는 경우는 전혀 없으며 언제나 모작, 그것도 두 번째 아니면 네 번째, 다섯 번째 모작일 뿐이라고 보나르는 통절히 개탄한다.
도자기 고대 그리스에서 도자기 생산은 매우 중요한 산업으로, 가마에서 구워 낸 단지는 식수, 올리브유, 포도주 같은 액체 음식의 저장에 불가결하였다. 아테네 및 아티카와 코린토스를 비롯한 모든 도시국가에서는 요업이 성행하여 그리스의 주 농작물인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단지나 항아리에 담아 수출하고 대신 곡물 특히 소맥을 수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제기와 생활 도자기도 없어서는 안 될 그릇이었으므로 그리스 세계의 요업은 크게 번창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단순한 둥근 무늬없는 토기였고 제조 수법도 간단하였으나 문명기(미노스 및 미케네 문명)에 들어서 기술이 향상, 모양과 장식이 다양해지고, 그림 새기는 기법도 도입되어 채문도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미케네의 멸망과 함께 도자기 숙련 기술은 사라졌고, 그 후 멀리 키프로스로 피난간 그리스인이 만든 미케네 기형의 단지가 본토에 역수입되었는데 장식은 간단한 원형, 삼각형, 사각형 무늬 정도에 그쳤다. 다시 아티카에서 도자기 요업이 재개되어 기원전 1100~660년 사이에는 단지의 표면 무늬가 단순성을 벗어나 다양한 기하학 무늬로 지그재그, 음영삼각형, 체크무늬, 그물 세공, 탄젠트 및 동심원, 반원, 웨이브 줄무늬, 장미꽃, 수레바퀴 장식, 만자, 구불구불한 무늬가 나타났다. 이처럼 단지 무늬가 두드러지는 때를 시대구분상 기하학기로 부른다. 한편 암흑기(기원전 1125~900)를 벗어나면서 기존의 단일 문양에서 탈피하여 인물과 동물 그림이 나타나고 자유로운 활동상과 표정까지 담아내게 되었다. 상고기의 동물 그림이 나타나고 자유로운 활동상과 표정까지 담아내게 되었다. 상고기의 화공들은 신화, 전설, 일상생활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영웅의 무용담 서사시 음송과 더불어 신화에 나오는 개개의 인물과 신의 속성을 그림으로 묘사해 냈다. 기원전 7세기부터는 가정의 단지와 식기에까지 빠짐없이 신화장면이 등장하고 그 외 향수와 기름을 담은 화장용기나 약병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내용은 기품 있고 자비에 찬 신과 인간의 탁월성, 싸우고 죽이는 냉혹한 전쟁장면, 신들의 불화, 납치, 유혹상, 인간사회의 이면상으로 도둑과 노상강도, 유곽에서의 성행위 장면도 거침없이 담고 있다. 신과 인간사회의 희로애락을 소재로 삼은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인의 신관, 개인관 또한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림도자기는 그리스 본토, 크레타, 키클라데스 군도, 시칠리아, 키프로스로 퍼져나가 각 도시국가의 도예 단지에서 생산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리스의 그림도자기 수는 수십만 점에 달하며 그것도 전에는 모사품이 없었고 근래까지(1960년대) 위조품도 나돌지 않아 그리스 미술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이 도기 그림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옛 벽화나 판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마당에 풍부한 도자기 그림은 고고학적 가치 이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옛 기록에는 미술 작품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어 아쉬움을 지울 수 없지만 도자기 그림으로 시대 측정은 어려움이 없다. 시대구분상 고고학에서는 원시기하학(기원전 1050~900)와 기하학기로 나누고 있으나, 역사학에서는 초기 철기시대로 총칭하고 이를 대략 기원전 750년까지로 잡는다. 다음은 상고기라 부르며 시기는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기원전 480년까지로 한다. 다음 시대는 고전기로 구분하고,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기까지는 헬레니즘기라고 칭한다. 그러나 공예, 미술 및 건축상으로는 시대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의 도기 화공은 원 고장의 연구기관의 집계에 따르면 1000명을 훨씬 웃돌며 그 중에는 화풍이 훌륭하며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는 자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도기에 명이 있는 예도 수백 종류가 넘는데 대부분 기원전 6~5세기 아티카 도자기에 서명한 것이다. 예컨대 '아무개가 만들었다'라든가 '아무개가 그렸다'라는 식의 명기이다. 고대에는 도기 형태를 만드는 기술이 그림장식 기술보다 더 높게 평가되어 화공이 도공의 이름을 적어 놓는 등, 도공의 명이 화공보다 더 많다. 초기에는 요업주 자신이 도공이자 화공이었을 것이다. 오듀세우스가 외눈박이 폴류페모스를 눈 멀게 하는 장면이나 페르세우스와 고르곤의 그림은 기원전 650년 이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필치가 거칠다. 그후 단지 그림(기원전 650~600)은 더 착실하고 온건한 화풍을 나타내 사람과 동물의 모습이 훨씬 정상적이고 일부 기명 도기에 의하면 엑세키아스, 두리스, 프시악스 같은 화풍이 뛰어난 화가가 묘사한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도기에는 도공이나 화공의 서명 표지가 없어 장인들은 명성이나 실리에 구애받지 않은 직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형태와 균형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고 대강 마무리한 것이 대부분인데 채식그림 단지는 일반 생활그릇으로서 염가품이라 공들여 만들 의욕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편의상 옛 화공의 명칭을 별칭으로 불러 구분하고(예:아킬레스 화공, 아우로라 화공 등), 또한 도공과 화공의 서명이 있는 도자기 작품이라고 발굴자의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인 프랑수와 꽃병은 불치(티베르 강 서북부 에트루리아 도시)의 에트루리아인 묘에서 발굴된 대형 크라테르(높이 66cm)로 기원전 570년경에 제작된 것이다. 신화를 소재로 한 찬란한 그림으로 가득 덮여 있고 인물과 동물 등이 270, 명이 121개, 도공은 에르고티모스, 화공은 클레이티아스라고 적혀 있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이후 자신의 그림에 이렇듯 서명을 남겼다는 사실은 장인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개성을 엿보게 한다. 같은 화가의 손으로 그린 수십 내지 수백 점(200점 이상)의 그림단지도 있다. 상고기 그림은 대체로 농담없이 단조로운 색채에 거친 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또한 화가의 서명은 페르시아 전쟁 이전(기원전 475년까지) 날짜에 한한다.
(디오니소스, 포도주에 취해 그를 따르는 무리)
도자기 그림은 흑색그림과 적색그림으로 구분하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흑색그림 : 기원전 7세기 말경부터 약 100년간 아티가(아테네 포함) 도기 화공은 녹로에서 붉은 빛이 도는 진흙으로 단지를 빚어 말린 다음 철화합물이 섞인 흙물로 검정 실루엣 그림을 그려 가마에 구워 냄으로써 그림자 그림이 나타나게 하였다. 코린토스에서는 더 오랫동안 이 기법이 지속되었다. 그림안의 세밀한 부분은 바늘로 긁어서 새기고 어떤 부분은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검정 바탕 위에 백색과 자색 도료를 덧칠하였다. 엑세키아스의 큘리스 술잔 그림(기원전 540년경) '디오뉴소스의 해상 귀로'에 잘 나타나 있다.
적색그림 : 기원전 530년경 아테네에서 발전한 도기 그림으로, 흑색그림과는 반대되는 기법을 사용하여 그림 묘사의 제한성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는 철분흙물 페인트를 묻힌 붓으로 그림 윤곽을 그려 불에 구우면 흑색으로 변하고 그림 내용은 붉은 진흙색으로 남게 되는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정밀한 세부묘사로 얼굴 표정을 세밀하고 또한 돋보이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재현 실험을 근거로 한 추정설에 따르면, 흑.적색의 채색은 산화철의 환원.산화 작용 기법에 의한 것으로 철분도료로 그림을 그리고 가마의 온도를 조절하여 공기 차단으로 흑색을, 자유로운 통풍으로 적색을 표출케 한 것이라 한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옛 도공이 온도 조절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문득 우리 나라의 한 도공이 읊은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도자단상 - 한익환
도자기에다 내 영혼을 넣는다고 그 많은 세월을 부셔 깼지만
언제부터인가 흙의 참 맛을 알게 되면서 침묵의 스승 자연을 알게 되었고 자연을 알게 되면서 인간의 길 깨닫게 되었다.
한잎 잎새와도 같은 도공의 꿈 도자기에다 내 하찮은 영혼을 넣는다는 것이 어느덧 흙의 영혼이 내 속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도자기(단지, 항아리, 생활용기) 명칭 피토스 : 독 혹은 큰 항아리, 족자리(손잡이) 또는 위아래 및 몸체에 밧줄고리가 달려있다. 암포라 :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타원형 단지. 구형 단지는 펠리케라 한다. 크라테르 : 혼주 단지로 아가리가 넓다. 손잡이 장식의 모양에 딸 볼루테(나선), 칼륙스(꽃받침), 콜룸(기둥) 크라테르라 한다. 그밖에 벨(종) 크라테르가 있고, 식탁용으로는 스탐노스, 손잡이가 없는 들통 모양의 칼라토스도 있다. 프슉테르 : 포도주 냉각용 단지로 대야의 찬물 속에 담근다. 휴드리아 : 작은 물항아리로 두 손잡이 외에 물을 쏟는 데 필요한 손잡이가 하나 더 길게 붙어 있으며 칼피스라고도 한다. 소녀가 모리에 똬리를 얹고 이고 다녔다. 오이노코이 : 한 개의 손잡이가 길게 붙어 있는 포도주 조끼로 받침대가 없는 것을 올페라 한다. 칸타로스 : 두 손잡이와 긴 축 받침대가 있는 포도주 잔으로, 주신의 잔이다. 큘릭스 : 운두가 낮은 사발 술잔. 한 쌍의 손잡이와 홀쭉한 축과 굽이 있으며, 굽이 없는 잔은 스템리스 큘릭스라 한다. 스큐포스 : 두 귀가 달린 작은 술잔. 더 깊고 수평 손잡이가 달린 코듈레도 있다. 레큐토스 : 향료 단지. 낮고 폭이 넓은 스쿠아트 레큐토스도 있다. 아류발로스 : 화장 기름병, 램프 기름병은 아스코스라 하며 아가리가 좁다. 알라바스트론 : 향수, 기름 또는 약을 담는 병. 뚜껑 있는 약병은 퓩시스라 한다. 레베스 : 고기 삶는 솥. 두 귀 달린 후기의 솥은 데이노스, 결혼 선물용 솥은 레베스 가미코스라 한다. 루트로포로스 : 정수를 긷는 단지, 또는 제의에 쓰이는 꽃병이다. 류톤 : 짐승머리 모양의 잔 혹은 뿔잔으로, 유방형 잔은 마스토스라 한다. 피알레 : 운두가 낮은 헌주 사발로, 손으로 잡기 위해 한가운데가 돌출된 것은 피알레 메콤팔레스라 한다. 레카니스 :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대야(수반)로, 뚜껑과 기대가 달린 수반도 있다. 아미스 : 휴대용 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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