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47. 위기후, 무안후열전(魏其侯, 武安侯列傳)
오, 초 7국의 반란이 일어나자 황실의 종속(宗屬) 중에서는 오로지 위기후 두영만이 현명하여 선비들을 좋아했으며 선비들도 그를 사모하여 따랐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산동(山東)의 형양에서 반군(反軍)과 항전했다. 그래서 제47에 <위기후, 무안후(武安侯:전분)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위기후 두영은 효문제의 황후(皇后:뒷날의 竇太后)의 종형(從兄)아들이다. 부친의 대까지 대대로 관진현(觀津縣:河北省)에 살고 있었는데 두영은 유달리 빈객들을 좋아했다. 효문제 때에 그는 오나라 재상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을 했다. 효경제가 즉위하자 두영은 첨사(詹事:皇后나 太子의 執事)에 임명됐다. 양(梁)의 효왕은 효경제의 아우로 모친인 두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양의 효왕이 입조했을 때 황제는 형제로서의 주연을 그에게 베풀었다. 그때에는 황제가 아직 황태자를 세우지 않고 있었다. 술이 얼근해지자 황제는 별 생각 없이 아우 양효왕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천하를 아우인 네가 가져라." 태후가 옆에서 듣고 몹시 기뻐했다. 그런데 두영은 벌주(罰酒)를 황제에게 올리면서 정색하여 말했다. "천하는 고조의 천하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를 물리는 것이 그때부터 한 나라의 정해진 약속입니다. 어찌 마음대로 양왕에게 천하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태후가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 노했다. "제깐 게 무어길래 그런 일에 참견하누!" 그 일로 해서 두태후는 두영을 몹시 미워하게 되었다. 두영 역시 태후한테서 미움받는 사실을 알아차린 데다 관직 또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고 사실상 병에 걸려 있기도 해서 첨사직을 사임했다. 태후는 두영을 더욱 미워하여 문적(門籍:宮門을 出入할 수 있는 名札)까지 없애 버렸다. 그렇게 되니 두영은 황제를 알현할 길까지 막혀 버렸다.
효경제 3년이었다. 오, 초 7국이 모반했다. 다급했다. 황제는 종실과 외척인 두씨 일가까지 두루 살펴보았으나 두영만큼 현명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두영을 불렀다. 그 무렵에는 두태후도 두영의 위인됨을 깨닫고 자신의 불명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궁한 두영은 신병으로 인해서 책임을 다할 수 없다고 중책을 굳게 사양했다. 황제는 꾸짖었다. "천하가 바야흐로 위급한 처지에 놓였는데 왕손(王孫:두영의 字)만 굳이 겸양하고 앉아 있을 수 있겠소!" 별 수 없었다. 두영은 대장군에 임명되고 금 천 금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두영은 하사받은 금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군문의 낭하에 벌려놓아 군리(軍吏)들이 필요한 만큼 재량하여 갖다 쓰도록 했다. 또한 두영은 차제에 원앙과 난포 등 운거하고 있는 명장과 현사(賢士)들을 황제에게 추천했다. 두영은 형양에다 진을 치고 지키면서 제나라와 조나라 군사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결국은 두영이 7국의 반란군을 모두 물리치고나서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졌다. 많은 유세객들과 빈객들이 다투어 두영의 문하로 모여들었다. 효경제도 조정에서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와 두영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렇게 되니 열후들도 감히 두영에게 대등한 예(禮)로 대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효경제 4년에 율희(栗姬)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 두영을 태부로 삼았다. 그런데 효경제 7년에 율(栗) 태자를 폐위시켜 버렸다. 두영은 이 문제로 자주 황제와 간쟁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이에 다시 두영은 병을 핑계하여 종남산(終南山:長安의 남쪽) 기슭으로 은거해 버렸다. 그는 거기서 수개월 동안 밭이나 갈면서 살았다. 여러 빈객이나 변사들이 조정으로 나가게 하려고 설득했으나 아무도 그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양나라 출신의 빈객 고수(高遂)가 이렇게 설득했다. "장군을 부귀하게 만든 것은 폐하이시며 장군을 친애하신 분도 태후이십니다. 지금까지 장군은 태자의 스승으로 계셨으나 폐위된 마당에 간쟁할 수도 없거니와 기왕에 간쟁했으나 성공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은거하며 병을 핑계대면서 조나라 미녀들을 끼고 앉아 참조(參朝)하지도 않으면서 빈객들을 상대로 시비(是非)만 논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옳게 변명하면서 폐하의 잘못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폐하와 태후의 양궁(兩宮)에서 문득 장군께 진노함을 품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군은 물론 아마 처자까지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두영이 생각해 보자 고수의 말에 수긍되는 점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참조하게 되었다.
때마침 도후(桃侯) 유사(劉舍)가 재상직을 사임했다. 두태후가 이번에도 두영을 재상으로 황제에게 추천했다. 효경제가 대답했다. "태후께서는 제가 인색하여서 위기후에게 재상자리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는 위기후는 잘난 척하는 인물일 뿐입니다. 경솔하여 승상이라는 중책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결국 황제는 두영을 재상으로 등용하지 않고 건릉후(建陵侯) 위관을 재상에 임명했다. 무안후(武安侯) 전분은 효경제의 황후(皇后:후일의 王太后) 동생인데 장릉(長陵:狹西省) 출신이었다. 위기후 두영이 대장군이 되어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 전분은 겨우 낭관(郎官)에 불과했다. 그래서 고귀한 신분인 두영의 집을 드나들면서 술시중이나 들며 아들이나 손자처럼 굴었다. 효경제 만년에 이르렀을 때 전분은 차츰차츰 승진하더니 드디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전분이 변설이 능한데다 <반우(槃盂:皇帝의 史官인 孔甲이 서술한 26편의 書)>와 잡가서(雜家書)들을 읽어 아는 것이 종횡무진 많아 보였으므로 왕태후는 그를 무척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효경제가 붕어하자 그날로 태자가 즉위해 효무제(孝武帝)가 되었다. 곧 왕태후가 섭정(攝政)했다. 천하 인심을 진무하기 위한 계책 중에는 전분의 빈객들이 올린 계책이 많았다. 또 전분과 그의 아우인 전승(田勝)도 모두 왕태후의 동생이므로 효경제가 붕어한 3년 후에는 전분은 무안후로 봉해졌고 전승도 주양후(周陽侯)로 봉해져 있었다. 전분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그는 가급적 승상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빈객들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였고 은거하고 있는 명사들을 추천해 존귀하게 해 주었다. 이는 기존의 세력가들인 두영이나 장군, 재상들을 몰아내기 위한 계략의 하나로 진행되는 일이었다. 건원(建元) 원년 승상 위관이 병으로 사임했다. 황제는 후임 승상과 태위(太尉) 문제를 거론했다. 무안후 전분의 문하인 적복(籍福)이 전분에게 넌지시 설득했다. "위기후 두영은 존귀해진 지가 오래 되어 천하의 선비들이 그의 문하에 많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흥기하는 장군께서는 결코 위기후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만일 폐하께서 짐짓 장군을 승상으로 삼으려 하시더라도 결코 받지 마시고 위기후에게 양보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장군은 반드시 태위가 됩니다. 태위와 승상은 그 존귀하다는 점에서는 거의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군께서는 현명한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셨다는 명성을 얻게 됩니다." 전분은 적복의 말이 옳다 생각하고 태후에게 그 뜻을 넌지시 전했다. 황제의 귀로 들어가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일은 뜻대로 되어 두영이 승상이 되고 전분이 태위가 되었다. 적복이 이번에는 두영을 찾아갔다. "승상의 천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십니다. 이번에는 선인들이 모두 군후를 칭찬하였기에 승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상께서는 악인을 미워하십니다. 세상에 악인은 많으며 장차 승상을 비방할 것입니다. 승상께서 선인과 악인 모두를 포용하신다면 행운은 오래 계속될 것입니다만 악인을 미워하시면 그 악인의 비방으로 인해 자리를 떠나셔야 할 겁니다." "축하와 위로의 말을 동시에 해 주시는구려." 두영은 이상 더 말하지 않았다. 신통하게도 두영과 전분은 꼭 같이 유학(儒學)을 좋아했다. 그래서 합세하여 조관을 추천해 어사대부로 삼게 했고 또 왕장(王臧)을 낭중령 자리에 앉히도록 했다. 또 노(魯)나라 신공(申公)을 맞아들여 명당(明堂:天子가 제후를 모아 정치를 듣는 장소)을 설치했으며, 열후들을 각자의 나라로 돌려 보내고, 관문에 부과하는 세금도 없애 버렸다. 예법에 맞는 의례(衣禮) 제도를 정비해 가히 태평성대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외척인 두씨나 황족들 중에서 소행이 좋지 않은 자를 적발해 족적에서 빼버렸다. 즈음에 외척에 열후들이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황녀와 결혼해 자기들의 영지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이런 사정들은 결국 두영과 전분을 비방하게 만들었고 그런 소리는 매일같이 두태후의 귀로 들어갔다. 더욱 사태가 악화된 것은 두태후가 도가(道家)인 황, 노(黃, 老) 학설을 선호한 데에 있었다. 그럴수록 두영, 전분, 조관, 왕장 등은 유학을 애써 장려해 그만큼 도가의 학설을 몰아쳤다. 이래서 두태후는 두영 등을 더욱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건원 2년이었다. 어사대부 조관이 황제에게 동궁(東宮:두태후가 있는 長樂宮)을 통하지 않고 정무를 처리하고 싶다고 주청했다. 그것은 두태후의 세력을 만만하게 본 결과였다. 두태후는 몹시 노했다. 조관과 왕장은 말할 것도 없고 승상과 태위까지 추풍낙엽처럼 하루 아침에 벼슬자리가 떨어졌다. 백지후(栢至侯) 허창(許昌)이 승상이 되고 무강후(武彊侯) 장청적(莊靑翟)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두영과 전분은 그 사건으로 벼슬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후(侯)의 신분은 유지되었다. 그런데 전분은 현직에서는 떠났지만 왕태후의 동생이었다. 그래서 황제로부터 총애를 받아 가깝게 지낼 수가 있었다. 정사를 상주하면 청허되는 일이 많았다. 권세와 이익에 관심이 많은 천하의 관리들과 인사들이 그런 분위기를 놓칠 리가 없었다. "언젠가는 무안후의 시대가 반드시 온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두영을 떠나 전분한테로 모여 들었다. 건원 6년이었다. 두태후가 드디어 붕어했다. 승상 허창과 어사대부 장청적은 오히려 두태후의 장례 일을 소홀히 했다는 책임을 물어 즉시 파면되었다. 전분이 승상에 오르고 대사농(大司農) 한안국(韓安國)이 어사대부로 발탁되었다. 천하의 인사들과 군국(郡國)의 제후들의 인심은 더욱 무안후 전분에게 쏠리게 되었고 심하게 아부했으며, 전분은 날로 방자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분의 용모는 추악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존귀하게 보이게 하려는 성미였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황제는 어리고 제후, 왕들에 연장자가 많아 외척으로 승상이 된 내가 예법으로 그들의 콧대를 미리 꺾어놓지 않으면 천하가 나까지 공경하지 않을 테지." 즈음에 국사는 승상 혼자 궁으로 들어가 아뢰었다. 그리고 그가 상주하는 것은 모두가 윤허되었다. 사람을 추천해도 되지 않는 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서민에서 2천 석의 지위로 일약 뛰어오르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히 전분의 권세는 황제보다도 높았다. 어린 황제가 하루는 이렇게 전분한테 말했다. "승상의 관리 임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소? 나도 좀 관리를 임명하고 싶은데." 어느 날 전분이 고공실(考工室:기계제작을 주관하는 관청)의 부지를 불하받아 자신의 택지를 넓히겠다고 청한 적이 있었다. 황제도 그제쯤 많이 성장해 있었다. 그는 그때 대로하여 소리쳤다. "그대는 아예 무기창고의 부지가 탐난다고 말씀하시지 그래!" 전분은 찔끔했지만 그의 오만은 여전했다. 어느 날 전분은 객들을 초대해 주연을 베푼 적이 있었다. 그의 형 갑후(蓋侯)도 초대했다. 그러나 그는 형을 남향(南向:下席)해 앉게 하고 자신은 동향(東向:上席)으로 버티고 앉으면서 말했다. "승상의 자리는 존귀하오. 형이라고 해서 사사로이 굽힐 수는 없소." 그의 저택은 엄청나게 크고 호화로웠다. 전원(田園)은 매우 기름졌으며, 각 군현에서 저택 치장용 집기를 팔러오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앞채에는 종과 북이 벌려져 있고 곡전(자루가 구부러진 비단 旗)이 세워졌으며 안채에는 수백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제후들이 바친 금, 옥, 개, 말 등의 애완물들이 방마다 가득했다. 한편 위기후 두영은 두태후가 죽은 후에는 더욱 소외되어 등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권세가 없었다. 빈객들의 발걸음도 뜸해졌으며 그에게 경의도 표하지 않았다. 오직 관부(灌夫)장군만이 옛정을 잊지 않고 간혹 찾아왔다. 두영은 뜻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묵묵히 지낼 뿐이었다.
관부장군은 영음(潁陰:河南省)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장맹(張孟)은 일찍이 영음후 관영의 가신(家臣)이었는데 관영의 총애를 받아 봉록 2천 석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리하여 관씨 성을 받아 관맹(灌孟)이 된 사람이다. 오, 초 7국이 모반했을 때 영음후 관하(灌何:관영의 아들)가 장군이 되어 태위 주아부 밑에 소속되어 있을 때 관맹을 교위(校尉)로 삼겠다고 신청했다. 그때 관부는 천여 명을 거느리고 나가 아버지 관맹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관맹이 연로하여 싸울 수가 없는데도 관하가 억지로 청을 넣어 징용되었기 때문에 관맹은 울적한 심사를 풀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관맹은 항상 적의 견고한 성만 골라 공격하다가 결국은 오나라 군중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군법에 따르면 부자가 함께 종군해 어느 한 쪽이 전사하면 남은 한 쪽이 그 유해를 거두어 귀가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관부는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오나라 왕이나 적장의 머리를 베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분연히 말하자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옷을 입은 관부는 갈래창을 잡아 평소에 그를 따르던 수십 명의 병사를 모집해 용약 출진했다. 그러나 성벽문을 나서자 아무도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좋다! 그렇다면 혼자라도 가겠다!" 관부는 단신으로 말을 달려 오나라 군중으로 달려들었다. 여남은 기가 뒤따르고 있었다. 관부는 닥치는 대로 베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수십 명을 벤 뒤 더 전진하지 못하고 다시 한나라 군의 누벽으로 돌아왔는데, 다 죽고 오직 일기(一騎)만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도 열 군데나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나마도 때마침 만금짜리 좋은 약이 있어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상처가 아물게 되자 관부는 다시 장군에게 청했다. "저번에 돌격했다가 오나라 성벽의 곡절(曲折)을 익혀 두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가게 해 주십시오." 장군은 그의 의열함이 가상하나 십중팔구 잃을 것이므로 태위에게 상의했다. 그러나 태위도 이를 말려 허락하지 않았다. 오가 격파된 뒤 관부는 그 일로 용맹이 천하에 알려졌다. 관하가 황제에게 관부를 추천했다. 관부는 중랑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몇 달 안 되어 법에 저촉되어 면직되었다. 그 이후로 장안에 살고 있었는데 그래도 그를 칭찬하지 않는 인사가 없었다. 효경제 때에는 대(代)의 재상이 되었다. 효경제가 붕어하고 효무제가 즉위했다. "회양군(淮陽郡:河南省)은 천하의 요충이며 강병(强兵)이 배출되는 곳이다. 관부를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 그래서 관부는 회양군 태수가 되었다. 건원 원년에 관부는 조정으로 들어가 태복(太僕:天子의 車馬를 주관하는 長官)이 되었다. 건원 2년이었다. 관부가 장락궁의 위위(衛尉)인 두보(竇甫)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그의 태도가 돼먹지 않았다 하여 손찌검을 한 일이 있었다. 두보는 두태후의 동생이므로 황제는 태후가 관부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연(燕)나라 재상으로 전출시켜 버렸다. 관부는 몇 해가 지나 다시 법에 걸려 관직을 잃고 장안의 집으로 돌아와 소일하고 있었다. 관부의 사람됨은 강직했다. 술에 취하면 주사가 있는 게 흠이지만 의협의 사나이였다. 그는 아첨을 싫어했다. 일족이 존귀하여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는 위세등등한 상관에게도 예의를 다하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능멸하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자기보다 빈천한 사람에게는 항상 그들을 높여서 대등하게 교제했다. 그는 아랫사람을 추천하고 아껴주었으므로 선비들도 그 때문에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의협심이 있었고 일단 책임진 일은 반드시 수행했다. 그래서 그가 교제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호걸이 아니면 무뢰한의 두목급들이었다. 집에는 재물이 풍족했으므로 식객들이 들끓었으며 빈객들은 그의 연못과 전지(田地)를 이용해 권세와 이익을 얻는 이들도 많았다. 좌우지간 영천에서는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영천의 아이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영천 물이 맑으니 관씨는 태평 영천 물이 흐려지면 관씨는 멸족
관부가 은퇴는 했지만 여전히 부자였다. 그러나 권세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이나 시중(侍中) 등 거물급 빈객들은 점차 오지 않게 되었다. 그때 두영과 관부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두영이 권세를 잃었을 때에는 그도 관부에 의존하려 했고 관부도 두영에 의존해 열후나 종실과 교제를 맺어 명성을 얻고자 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이끌어 주는 것이 마치 부자지간 같았다. 그들은 서로 알게 된 것을 몹시 기뻐했다. 오히려 늦게 만나게 된 것을 한탄했다. 관부가 복상중(服喪中)인데도 승상 전분에게 들렀더니 전분은 별 뜻도 없이 지나가는 말을 했다. "나는 중유(仲孺:관부의 字)와 함께 위기후의 집을 방문하고 싶었는데 하필 그대가 복상중이구려." 관부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승상께서 다행히 위기후를 방문하시겠다면 제가 어떻게 복상중이라는 이유로 사절을 하겠습니까. 위기후에게 알려 승상을 대접하는 준비를 하도록 알려놓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왕림해 주십시오." 전분은 승락했다. 관부는 무기후 두영에게 전분의 방문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두영도 부인과 함께 시장으로 나가 고기와 술을 사오고 밤에는 집안청소를 하는 등 응대 차비를 극진히 했다. 그런데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전분은 오지 않았다. 두영이 관부에게 말했다. "승상이 혹시 잊어 버리고 있지나 않을까." 그러자 관부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복상중에 있으면서도 청한 것인데...... 가봐야 되겠습니다." 관부는 마차를 몰아 전분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실상 승상 전분은 관부에게 전날 예사롭게 말했고 예사롭게 승낙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가야 한다는 계획이 도무지 없었다. 관부는 자고 있던 전분을 다짜고짜 깨웠다. "승상께서는 어제 다행히도 위기후를 방문하겠다고 승낙하셨습니다. 그래서 위기후 부부는 어제부터 대접할 준비를 밤새도록 했으며 아침부터 승상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식사도 아직 하시지 않고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시지요." 전분은 깜짝 놀랐다. "아, 내가 어제 취해서 중유와 했던 약속을 깜박 잊었었구려!" 전분은 마지못해 일어나 천천히 마차를 몰아 떠났다. 관부에게는 전분의 그런 짓거리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이 시작되어 취기가 돌자 관부의 주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일어나 춤을 추었다. "당신도 일어나 한바탕 추슈!" 전분에게 소리쳤다. "나에게는 춤추는 재주는 없네." "뭐, 이런 승상이 다 있어!" 전분은 모른 척했다. 두영이 얼른 일어나 사람을 시켜 관부를 데리고 나가게 했다. 관부가 나간 후 두영은 전분에게 사과했다. "원래 버르장머리가 저렇습니다." "내 체질에 맞지 않을 뿐이지요." 두 외척이 화해할 수 있도록 관부가 적절한 기회를 잡아준 것만큼은 확실했다. 전분은 밤 늦도록까지 술을 마시며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그는 돌아갔다. 그런데 전분한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적복을 시켜 두영 소유의 성남(城南)밭을 양보해 줄 수 없느냐고 소개를 넣었던 것이다. 전분의 입장에서는 두영이 당연히 땅을 내놓아 줄 줄 알았고 그런 심부름을 해야 되는 적복의 입장에서는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적복은 말도 건네기 전에 전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기후 두영은 늙어 곧 죽게 됩니다. 조금만 참아 달랍니다." 그 소문이 슬금슬금 두영의 귀로 들어갔다. "내 아무리 버림받은 몸이며 전분이 존귀한 승상의 자리에 있다 하나 어찌 권세로 남의 재산을 탈취할 수 있단 말인가!" 두영은 노했다. 그 소문이 또한 관부의 귀로도 들어갔다. 그래서 관부가 고래고래 고함치며 전분을 욕했다. 결국 두영과 관부가 욕했다는 소문이 전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무어? 내가 달라는 땅을 못내놓겠다고? 세상에 그토록 뻔뻔스러울 수가 있나! 두영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을 때 내가 그를 구해줬는데 그 보답으로써도 그까짓 땅 몇 이랑쯤은 줄 수 있을 텐데. 게다가 관부 이놈은 또 무슨 참견인가. 그까짓 땅 몇 경(頃:一頃은 百畝, 一畝는 百步) 때문에 나를 그토록 모욕 준단 말인가!"
원광(元光) 4년 봄이었다. 승상 전분이 황제에게 말했다. "관부의 집이 영천에 있습니다. 그런데 관부의 횡포가 심해 백성들이 몹시 괴롭다고 상서하고 있습니다. 청하오니 자세히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는 황제대로 화가 났다. "그건 승상의 권한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새삼스럽게 짐한테 일러바칠 건 또 뭐가 있겠소!" 전분의 빈객들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살핀 후 전분에게 권했다. "이번 사건은 화해하시는 게 좋습니다. 관부가 승상의 비리와 간사한 이익을 꾀한 일 등에 대해 상세한 확증을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무어?" "회남왕의 요청을 금품을 받으시고 들어 주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다면 화해하는 게 상책이겠군." 여름이었다. 승상 전분이 연왕(燕王)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태후가 조명(詔命)을 내려 열후와 황족들 모두가 가서 축하해 주도록 했다. 두영이 관부에게 들렀다. "그대도 함께 가세." "아닙니다. 저는 술 때문에 승상에게 자주 실수를 해서...... 지금도 저를 싫어할 걸요." "그 일은 이미 해결되었네." 그래서 관부는 마지못해 두영을 따라갔다. 주석이 흥겨워져서 전분이 일어나 축배를 들자 전 좌석이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서 경의를 표했다. 그 다음에 두영이 축배를 들자 그의 옛 친구들만 자리를 고쳐 잡으려 경의를 표할 뿐이었다. 술에 취한 관부는 이번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어나서 술잔을 들고 신랑 전분에게로 갔다. 그러나 전분은 무릎을 꿇었지만 술은 사양했다. "이젠 마실 수가 없소." 관부는 조소하면서 대꾸했다. "존귀한 분이시니 마셔야 합니다." 그러자 전분은 아예 관부를 외면해 버렸다. 머쓱해진 관부는 다음 자리로 갔다. 마침 거기에는 임여후(臨汝侯) 관현(灌賢:관영의 孫子)이 있었다. 관현은 정불식(程不識)과 무언가를 귀엣말로 주고 받느라고 술잔이 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관부는 분노를 풀 길이 없었는데 마침 만만한 관현 앞에서 폭발구를 찾은 듯했다. "이봐! 자넨 평소에 정불식을 두고 한 푼 값어치도 없는 쓰레기라며 헐뜯고 다녔었잖아. 그런데 지금 어르신네가 축수를 하는데 넌 아녀자처럼 귀에 대고 속살거리고 있잖아!" 관현도 가만있지 않았다. "나는 괜찮소. 그런데 정불식 장군을 이런 식으로 모욕주어도 되는 거요?" "목이 잘리든 가슴팍에 구멍이 나든 내가 알 게 뭐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되자 손님들은 변소에 가는 척하고 일어나서 슬금슬금 집으로 가버렸다. 두영도 참지 못하고 관부를 손짓해 불러 밖으로 나갔다. 전분은 드디어 분노가 폭발했다. "저놈이 저토록 방자해지도록 방치해 둔 건 내 탓이로구나! 그러나 이제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나가지 못하게 붙들어라!" 전분의 사병들이 달려들어 관부를 붙들었다. 이때 적복이 일어나 관부에게로 달려갔다. 짐짓 관부의 목을 누르며 속삭였다. "고개 숙여 죄송하다고 사죄하게. 일이 심상치가 않네." "뭐라고!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저런 자한테 사죄를 해야 하는가!" 일이 그렇게 되자 전분이 소리질렀다. "무얼 하고 있나! 어서 저놈을 묶어 전사(傳舍)에 가두어라!" 관부가 병사들에 끌려 유치소로 가고 난 뒤였다. 전분은 장사(長史:승상의 속관)를 불렀다. "오늘 황족들을 손님으로 부른 것은 조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관부가 굳이 찾아와 빈객들에게 욕설을 퍼부은 것은 조칙을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불경죄로 일단 처넣고 기시(棄市)에 처해지도록 탄핵해라!" 과연 관부의 처지는 전분이 말한 대로 그의 지족(支族)들까지 잡혀와 옥에 갇혔다. 두영이 크게 놀라 자금을 풀어 자신의 빈객을 시켜서 관부의 석방운동을 폈으나 여전히 관부를 풀려나오게는 할 수 없었다. 전분의 관리들이 그날 현장의 이목(耳目)이 되어 있은데다 관씨들은 두려워 숨어 버렸으므로 관부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더구나 관부는 전분의 비위사실을 움켜쥐고 있었으나 구속된 몸이어서 전분의 부정을 고발할 수도 없었다. 그런대로 두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관부를 구해내려고 애썼다. 그러자 두영의 부인이 말했다. "관장군은 승상에게 죄를 얻은데다 태후의 집안을 거역한 몸입니다. 당신의 힘으로는 그를 구출할 수가 없으니 그냥 두십시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나에게는 위기후라는 작위가 있는 몸이요. 내 작위는 내 힘으로 얻은 것이니 내가 이것을 잃는다 해도 아까울 건 없소. 관중유(灌仲孺)를 죽게 하고 홀로 살 수는 없단 말이오!" 두영은 아무도 몰래 상서했다. 곧 황제가 두영을 불렀다. 그래서 두영은 관부가 술에 취했던 사정과 그 일로 인해 관부가 주벌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장황하게 아룄다. 황제는 두영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돼 음식을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태후한테 가서 변명해 주시오." 그래서 두영은 동조(東朝:태후의 朝延)로 가서 관부는 착한 사람이며 승상이 취중의 일을 빙자해 다른 감정을 가지고 관부를 죄주려 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태후는 이번에는 전분을 불렀다. 전분은 관부의 횡포와 악역무도, 오만방자함을 역설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천하는 다행히도 태평무사합니다. 그래서 황실의 외척으로서나마 오늘의 지위에 이르러 그렇기 때문에 몸조심하며 승상의 지위에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좋아하는 것은 음악과 견마(犬馬)와 장원(莊園)과 저택이 고작이며 더불어 아끼는 것이 있다면 창우(倡優:연예인)와 공장(工匠)이 기껏입니다. 그런데 위기후와 관부는 밤낮으로 천하의 호걸들과 장사들을 불러모아 뱃속으로 비방하고 마음으로 헐뜯어 하늘 우러러 천상(天象)을 점치지 않으면 땅을 굽어보며 모반을 꾀하면서 폐하가 계시는 미앙궁과 태후가 계시는 장락궁 사이를 쏘아보며 천하에 혹시 변란이라도 일어나지 않나 고대해 그 틈에 공이라도 세우려고 도모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저들의 행위 의도가 나변에 있는가를 살펴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일이 점차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황제는 조신들을 불러모아 누구의 말이 옳은가를 물었다. 어사대부 한안국이 대답했다. "위기후의 말에 의하면, 관부의 부친은 전쟁터에서 한몸을 던져 죽었고 관부 자신도 갈래창 하나를 들고 말을 달려 죽기살기로 오군(吳軍)에 뛰어들어 몸에 수십 군데의 상처를 입어 그 이름이 삼군(三軍)에서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관부는 천하의 장사지요. 대악(大惡)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술잔을 주고받다 저지른 실수오니 다른 허물을 끌어대어 주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위기후의 변명이 옳습니다. 그런가 하면 승상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관부는 무뢰한들과 상통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집에는 거만의 재산을 축적했으며 영천에 살면서 횡포하고 방자해 황족을 능멸하고 제 부모형제에게까지 해를 끼쳤다 하니, 이것이 바로 가지가 뿌리보다 크고 정강이가 다리보다 커서 꺾지 않으면 쪼개지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 승상의 말 또한 옳습니다. 오로지 현명하신 황제폐하의 처분만 기다릴 뿐입니다." 주작도위(主爵都尉) 급암은 두영의 말이 옳다고 했고, 내사(內史) 정당시(鄭當時)는 처음에는 두영을 편들었다가 나중에는 우물쭈물했고, 나머지 신하들은 친척싸움임을 꺼리어 아무도 답변하려 들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가자 황제 또한 노해서 정당시를 대표로 꾸짖었다. "그대는 평소에 위기후와 무안후의 장단점에 대해 자주 언급하더니 오늘 조정 회의에서는 어찌 그렇소. 그 위축돼 있는 꼴이 마치 멍에 밑에 매여 있는 망아지 같지 않겠소. 이런 식이라면 내가 그대들 같은 무리들도 참형에 처해야겠소!" 황제는 대신들에게 하문을 중지하고 태후한테 들어가 음식을 올렸다. 태후는 한편 사람을 시켜 조정의 회의 진행과정을 상세히 보고받고 있었기로 이상 더 묻지는 않았다. 노한 상태로 식사도 들지 않고 말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데도 내 동생을 저토록 짓밟고 있는데 내가 죽고나면 아예 어육(魚肉)으로 만들어 먹지 않겠소. 황제 역시 건재해 계신데도 저러하니 붕어하신 후에는 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이오." 황제는 사과하며 대답했다. "그토록 일방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오. 위기후나 무안후나 모두 황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조정에서 논의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않다면 일개 형리(刑吏)가 판결할 문제일 뿐입니다." 낭중령 석건(石建)이 황제에게 두 사람의 일을 분별 있게 아뢰었지만 결론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회가 흐지부지 끝나 전분은 지거문(止車門:宮門名)을 나서며 한안국을 수레에 태운 뒤 꾸짖었다. "오늘 나는 그 대머리영감[두영을 일컬음]을 단단히 해치우려고 작정했었는데 그대는 나를 도와주지 않고 어찌 애매한 소리나 하고 섰단 말이오!" 한안국은 잠깐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승상께서도 오늘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행동을 취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무어?" "위기후가 승상을 헐뜯을 때 승상께서는 당연히 관을 벗어 승상의 인수를 폐하께 돌려드리며 이렇게 역습했어야 옳았습니다." "어떻게?" "'제가 외척이기 때문에 승상 자리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실상 저는 승상이 될 자격도 없는 몸이올습니다. 위기후의 말씀이 모두가 옳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야지요. 그렇게 하셨더라면 폐하께서는 승상의 미덕을 높게 평가하시어 승상의 말씀을 옳게 들으셨을 것입니다. 위기후도 속으로 부끄러워 두문불출하다가 혀를 깨물어 자살했을 걸요. 그런데도 승상께선 위기후가 승상을 헐뜯자 승상 역시 그를 헐뜯었으니 이는 마치 장사꾼이나 아녀자들이 다투는 소행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른다우신 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하, 그 자와 다투느라고 미처 그걸 생각 못했었네!" 그래서 전분은 가만히 대궐로 돌아들어가 한안국이 들려주던 말을 그대로 황제에게 아룄다. 그렇게 되자 황제는 결국 어사대부 한안국을 불러 두영과 관부에게 잘못이 있었음을 문서로 올리도록 명령했다. 황제는 탄핵서가 올라오자 즉시 그 문서를 도사공(都司空:詔獄을 주관하는 官)에게 맡겼다. 두영은 일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효경제의 유조(遺詔)를 받아둔 사실을 생각해 냈다.
-불편한 일이 생겼을 때 언제든 상주할 수 있는 특권을 주노라.
관부의 죄는 일족에 미쳤고 두영 역시 체포되었다. 조신들 역시 황제에게 변명해 주려는 자가 없었으므로 일은 급박하게 되고 말았다. 두영은 옥으로 조카를 불러 유조문서를 찾아 황제께 상주토록 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두영은 즉시 황제 앞으로 불려갔다. 그러나 일이 묘하게 되었다. 상주문이 도착했을 때 황제는 즉시 유조를 상서(尙書:宮中 文書 취급관청)로 돌렸다. 그런데 효경제가 붕어했을 당시에 쓰여진 유조의 부본(副本)이 없었다. 부본이 없을 경우 그것은 아무 효력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조서는 오직 위기후의 집에서만 가령(家令)이 봉인(封印)하여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위기후 두영은 선제(先帝)의 조서를 속였다. 그 죄는 기시(棄市)에 해당한다.
두영은 그렇게 공식적으로 탄핵되었다. 원광(元光) 5년 시월이었다. 관부와 그 가족 모두가 논고되고 처형되었다. 위기후 두영은 얼마 후 그 소식을 들었다. 듣는 순간 격노하는 바람에 중풍에 걸려버렸다. 그래서 그는 단식하고는 죽을 작정을 했는데 황제가 두영을 죽일 뜻이 없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두영은 다시 일어나 음식을 들며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논의에서도 두영을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두영은 살아남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두영을 비방하는 유언비어가 끊임없이 나돌았다. 좋지 않은 소문만 황제의 귀로 들어왔다. 누군가가 두영을 한사코 죽이기로 작정한 계략이 있은 듯했다. 황제도 이상 더 참지 못했다. 그해 12월 그믐에 논죄되어 두영은 위성(渭城:狹西省)에서 처형되고 기시되었다.
이듬해 봄 전분이 앓아 누웠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전분은 헛소리를 지르면서 손바닥을 싹싹 비비는 흉내를 수없이 내었다. 귀신을 볼 수 있다는 무당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 "두영과 관부 둘이서 무안후에게 달려들어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 전분이 마침내 죽었다. 아들 염이 뒤를 이었다. 원삭(元朔) 3년에 무안후 염이 짧은 홑옷을 입고 입궁하는 불경죄를 범해 봉국(封國)이 제거되었다.
회남왕(淮南王) 안(安)이 모반을 기도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전날 회남왕이 입조했을 때 전분은 태위로 있었는데 유안(劉安)을 패상(覇上:狹西省)까지 출영해 가서 전분은 이렇게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황태자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가장 현명하신 분이 대왕 아니십니까. 더구나 고조의 손자이시고요. 만일 폐하께서 붕어하시면 대왕께서 제위(帝位)에 오르실 것이니 자중하십시오." 회남왕 유안은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황금과 재물을 전분에게 후하게 보냈다. 그때의 사건이 뒤늦게 황제의 귀로 들어갔다. 황제는 사실 두영, 관부의 사건 때부터 전분을 올바른 인간으로는 보지 않았다. 다만 태후와의 관계를 고려해 그대로 살려두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회남왕과의 금품수수 사건을 듣게 되자 황제는 울컥 화를 내었다. "억울하구나! 전분이 지금 살아 있다면 멸족의 형벌을 내렸을 터인데!"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은 모두 외척이었기에 중용되었고, 관부는 한때 결사(決死)의 계책(計策)을 단행했기로 유명해졌다. 위기후가 중용된 것은 오, 초 7국의 난이 계기가 되었고, 무안후가 존귀하게 된 것은 일월(日月:孝武帝와 王太后)이 동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후는 시대의 변천을 알지 못했고 관부는 학문도 없는데다 불손했다. 이 두 인물은 서로를 도와가며 화란(禍亂)을 조성했다. 무안후는 존귀한 지위를 믿고 권세를 좋아했으며, 주고받는 술잔으로 트집잡아 저 어진 사람들을 모함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관부에 대한 노여움을 두영에게까지 미치게 하여 자신의 명(命)까지 재촉했다. 뭇사람들의 추대와 존경도 받지 못하고 악평만 얻었으니 슬픈 일이다. 아, 화(禍)라는 것은 반드시 그 근원이 있는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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