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1장 - 서문
그리스 사람들은 헬렌의 후예라 하며 스스로를 헬레네스라고 자부한다. 오늘날 나라의 공식 명칭은 Hellenic Republic이며 간단히 헬라스라 부른다. 헬라스는 옛 테살리아의 한 도시 혹은 아소포스 강과 에니페오스 강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지칭한다. 라틴어로는 그리스의 한 옛 지역 이름을 본떠, 혹은 그리스인이 이탈리아 남부 식민개척지에 위대한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고 이를 마그나 그라이키아(대그리스)라 한 데서 그라이키아 및 그라이키라 불렀으며 이에 연유하여 현재 영어로는 Greece 및 Greeks, 불어로는 Grecque 및 Grece, 포르투칼어로는 Gresia라 한다. 동양에 있어서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헬라스의 발음을 수용하여 희랍이라 하고 일본은 포르투갈어 Gresia를 음역하여 기리시아로 쓴다. 서구인은 그 나라의 고대 문화와 정치체제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greek 혹은 grecque라는 낱말을 협잡꾼, 도박꾼이라는 뜻으로 전용하고 있어 과거 그리스 사람을 기피하는 심정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전설에 의하면 이 나라 선조 헬렌에게는 아리올로스, 도로스 및 크수토스라는 세 아들이 있었고 그 각각의 후손들은 아이올리아인, 도리스인 및 이오니아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오니아는 크수토스의 아들 이온에 연유한다. 언어상으로도 각각 아이올리아 방언, 도리스 방언 및 이오니아 방언이 있으며 여기에서 다시 여러 갈래의 방언이 생겨났다. 언어학자에 의하며, 사포의 시(기원전 611년경)와 알카이오스의 시(기원전 606년경)는 레스보스의 아이올리아 방언이며, 보이오티아 태생으로 테베에서 수학한 핀다로스의 일부 시(기원전 490)는 보이오티아의 아이올리아 방언에 일부 도리스 방언이 섞여 있다. 유명한 호메로스의 서사시(기원전 800년경)는 고대 이오니아 방언으로 서술하였고, 헤로도토스(기원전 420),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30), 투키디데스(기원전 423), 플라톤(기원전 399)등의 시문은 아티카 지방의 이오니아 방언으로 쓴 작품이다. 알렌산더 대왕(재위 기원전 334~323)의 통치 영역이 동방세계로 확장되면서부터는 코이네(주로 그리스어의 아티카 방언)라고 하는 표준말이 보급되었고, 아테네 크세노폰의 저술과 알렌산드리아 등지의 문학작품, 신약성경은 모두 이 코이네로 쓰여졌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에 그리스 신의 신성을 결부시킨 로마 신화는 서구세계의 문화 유전자로 깊숙이 스며 있어 지울래야 지울 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문화의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원래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한 것이고 로마시대에 와서는 라틴어로 번역 계승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그리스어 원본과 라틴어 판을 기초로 여러 나라 말로 옮겨져 번역판과 관련 논문 및 논설이 수없이 출간되고 있다. 자연히 신화에 나오는 고유 낱말과 발음 표기는 시대나 지역의 변천에 따라 변화되고 각 나라 언어의 운에 맞추어져 변형되었으며 낱말 표기에도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학자간, 또는 번역자 간에 적지 않은 이견이 제시되어 근래에 와서는 될 수 있는 한 그리스어 낱말의 원형과 원발음을 반영하고자 하는 정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리스어 발음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말 음역으로 적고, 또한 일반적으로 널리 보급된 라틴어 음역과 영어 번역음을 가리지 않고 수용하였다. 또한 그리스어의 고유 낱말의 장모음은 별도 표기하지 않았다. 낱말의 알파벳 철자는 영어 표기 방식에 따랐다. 낱말 어간의 철자는 영어(혹은 불어, 독어 등) 표기에서도 그리스어 어간의 철자와 큰 차이 없으나 어미의 표기에 있어서는 라틴어, 영어, 불어 등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어미 os와 us, lia와 ly, ce와 cia, ion과 ium, ia와 ea, d와 s는 서로 병용하고, 통용하는 낱말들의 융통성을 두어 획일화시키지 않고 또한 어미 생략 표기방식도 같이 적용하였다. 그리스어에 대한 이해 범위가 한정된 소위 'Greekless Greek'(번역물에만 의존한 그리스 문학 연구를 빗대는 말) 초보자로서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은 무리인 동시에 사족인 줄 안다. 이 기록은 신화 입문자의 초보 기록으로 체계를 세워 저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성에 초점을 두고 정리한 것도 아니다. 다만 보고 읽고 한 그리스의 신화 및 고대사의 인식을 보다 깊게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의향과 실용성 또한 개인적 선호성에 따라 적어 본 것이다. 첨부해서 말하면 아이들에게 직접 이야기로써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전할 소질이 없어 신화의 개요를 알린다는 의도도 갖고 정성을 다 해서 엮었으나 두찬을 면치 못하였음을 밝혀 둔다.
1. 그리스 나라의 개요
그리스의 자연 현 그리스의 면적은 남한은 1.3배, 경작지는 20% 이내로 국토의 5분의 4가 산지이며 1000m를 넘는 높은 산이 흔하다. 이 나라 산중에서 최고봉은 2,917m의 올림포스 산봉으로 신화시대에는 주신들의 상징적 주거지로서 외경하는 성역이다. 고지대에는 나무와 숲이 있으나 대부분의 높은 산은 석회질 절벽의 민둥산이며 중턱부터 완만한 고원 경사지로 이어지기도 한다. 옛 켄타우로스족이 살았던 테살리아 고원은 800평방km가 넘는 비옥한 목초지이며 말 사육지로 이름 높다. 고원의 계곡을 흐르는 이 나라 최장의 강 페네이오스는 2000km가 넘는 긴 강이지만 상류는 물살이 세고 하류는 완만하나 수심이 얕아서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다. 대부분의 내륙 골짜기는 좁아서 겨울 우기에 계곡의 하천이 범람하며 겨울이 지나면 건조기로 들어가 하천은 계속 말라붙어 자연의 혜택이라곤 거의 없다.
원래는 산야에 나무가 많아 소나무를 비롯한 플라타너스, 느릅나무, 떡갈나무 등 거목이 무성하여 날짐승과 들짐승이 우글거렸으나 원시시대부터 가옥, 목선, 숯을 만든다고 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말았다. 따라서 이미 기원전 5세기에 무성한 숲은 자취를 감추고 산지나 언덕은 지금과 같은 메마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무지한 주민은 별 수 없이 땡볕과 바윗돌, 우기에는 광란하는 물결에 몸을 맞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산지와는 달리 육지 둘레의 바다-지중해는 문자 그대로 대지 한가운데에 있는 풍광 명미한 고요한 내해로, 겨울철을 빼놓고는 천혜의 낙원이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거기에다 금상첨화로 쪽빛 바다의 뱃길은 그지없이 상쾌하고 삶의 즐거움을 솟게 한다.
고대에는 지정학적으로 소아시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키프로스, 크레타, 키클라데스를 거쳐 점진적으로 북상하여 그리스 본토에 전파되고 미케네 문명으로 이어졌다. 그리스의 큰 땅덩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지세로 보아 북쪽 본토의 짧은 줄기에 달린 큰 섬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현대에 와서 줄기 부위인 코린 토스 협부를 개척,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개통시켜 섬으로 만들고 교량을 가설해서 육로를 소통시켰다. 이 나라 해안선은 굴곡이 심해서 도처에 만과 곶이 있고 해안선이 이오니아해, 에게해, 지중해로 매우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의 왕래나 짐을 나르는 데는 언덕을 넘어야 하는 육로보다 배를 이용하는 바닷길을 선호하여 해운이 발달하였다. 남쪽 전설의 고장 크레타는 지중해섬들 중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키프로스, 코르시카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높은 산들과 산맥이 군데군데 끊긴 대형 협곡이 산재하고 최고봉은 이다 산의 타원형 단일봉 티미오스 스트라브로스(2,425m)이다. 섬의 해안선은 1000km가 넘고 기원전 2000년경 해안을 끼고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그 중 크노소스의 미노스 궁전은 가장 유서가 깊고 이름나 있다. 에게해의 중앙 부위에는 델로스를 둘러싼 한 무리의 섬들이 점철하는데 이 군도를 키클라데스라 한다. 여기에는 기원전 3000년경 이미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였으며 대부분 석회질 바위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지각변동이라는 대역사는 아티카, 에우보이아 산맥의 동남쪽 연줄을 바다 속으로 내려 놓아 높은 산봉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동쪽으로 가서는 다시 아시아의 산맥으로 이어진다.
북쪽 산악지대는 겨울철에 몹시 춥고 눈이 많은 대륙성 기후로 옛적에는 인구가 희박하였다. 이에 비하여 남쪽 해안지대와 에게해 섬은 아열대의 전형적인 지중해 기후로 사철 내내 밖에서 지내도 큰 지장이 없다. 겨울철 우기에는 서해안 쪽에 비가 많고, 동해안 쪽에는 비오는 날보다 맑은 날이 많다. 봄.여름.가을철은 대체로 많은 날이 이어지고, 초여름에서 늦가을까지 햇볕이 따가워 개울물이 줄어들고 초목이 시들며 말라 버린다. 해변은 해풍으로 견딜만 하고, 햇볕이 그리워 찾아오는 인파가 비취색 지중해 해안으로 모여든다. 태양열로 흐르는 땀을 식히느라 시원한 그늘진 곳을 찾는 모습은 일찍이 기원전 5~4세기의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도 희극시 '말벌'에서 "나귀 그늘을 차지 하느라 다툰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평지에는 곡물을 심기도 하나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므로 가뭄을 타지 않는 올리브, 포도 또는 더위에 강한 실과나무를 심으며, 생산되는 올리브유와 포도주는 예로부터 이 나라의 주요 산물이 되었다. 언덕은 목축지로 이용하여 양이나 산양을 기르고 있으나 소를 키우는 데는 적당하지 않다. 따라서 경작지의 부족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외국에서 조달해야 했다.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7세기 솔론 시태부터 올리브유, 포도주,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곡물, 특히 소맥의 수입을 무엇보다 중요한 시책으로 삼았다. 그런데 곡물은 주로 흑해 연안의 여라 나라와 이집트에서 들여왔고, 따라서 흑해로 가는 길목인 헬레스폰트 해협을 지키는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기원전 1240년 미케네가 유괴당한 헬레나를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트로이 성을 공략하여 헬레스폰트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장장 10년에 걸쳐(기원전 1240~1230) 전쟁을 벌인 것은 유명하다.
아테네는 북위 38도선에 위치한 그리스 수도로 인구 1100만 명중 400만 명이 시내와 근교에 거주한다(1995년 현재). 고대에 신전과 성채들로 들어찼던 아크로폴리스는 156m의 언덕으로 페르시아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된 것을 승전 후 아테네의 전성기를 구가한 페리클레스 시대에 파르테논 등 우아하고 찬란한 구조물과 조각상을 재건립한 성역이다. 지금은 폐허가 되고 신전의 돌기둥, 부조된 박공, 대들보 등의 조각만이 옛 영광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전히 옛 아테네인의 창의성과 예술성을 접하고 느낄 수 있는 감동적 유적이다. 자연은 거기에 자리한 생물, 인간의 생활과 얼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나라 사람들은 빈곤을 극복하는 강인성과 자립심이 유달리 돋보이며 쾌청한 기후 조건을 배경으로 쾌활한 심성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용감성에는 각별히 찬사를 보내고 신체단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으며 연극 경연에 열정을 The아 도시마다 또한 신전이 있는 곳마다 우아한 원형극장과 경기장을 설치하여 축제를 올렸다. 조각예술의 장인은 자연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이 곧 선이라는 사유를 지니게 되었다. 교역의 길로서 일찍이 해운이 발달한 바다는 그리스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바다는 신화의 세계가 펼쳐지는 무대였으며, 또한 이 바다를 통해 건너온 해외 문물에 접하여 독특한 헬레네스 문화를 꽃피워 낼 수 있었다.
그리스 사람은 어느 민족에 못지 않은 강렬한 조국 사랑의 혼을 가지고 있다. 종교 이상의 정서가 지배하는 이 혼은 오랜 역사의 오랜 역사의 흐름속에서 그리스(그리스어로 말한다면 바로 헬레네스)를 강고하게 지켜 오는 힘이 되었다. 오랜 오토만의 지배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고자 1821년 총궐기하여 항쟁하는 헬레네스의 용사를 위해 솔로모스는 다음과 같은 해방의 송시를 발표하였다.
당신의 날카로운 공포의 칼날은 해방을 이루게 할 줄 아나이다. 당신의 빛나는 광채는 국토를 비추어 줌을 잘 아나이다. 거룩한 폐허에서 되살아나는 헬레네스의 위대성과 자유 지난 날처럼 용감하여라! 만세 만세 오! 우리의 해방!
이 송시 158연 중에서 첫 7연이 1865년 그리스의 국가로 채택되었다.
고대문명 문화와 문명이라는 말은 흔히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두 낱말을 대비시켜 비교적 물질기술에 의존하는 인간사회의 편리를 위한 발전적 소산은 문명(Civilization)이라 하고, 이에 반하여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으로 정신에 의존하는 바 큰 성과를 문화(Culture)라 하는 견해가 있다. 구체적으로 문화는 예술.도덕.종교.학문 등 인간의 내적 정서 활동의 소산을 가리키고, 주로 언어와 얽혀 있다. 문명은 문자 그대로 도시를 만들어 시민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의 독일 문화철학에서는 문명에 대비하는 문화상위론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독창적인 정신 소산을 문화라 하며, 현실적 인간 생활 영위에 요구되는 합리적 수단을 문명이라 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인류발달사에 있어서는 야만, 미개에 이어지는 단계를 문명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스에는 구석기시대에도 주민이 있어 문명을 지닌 흔적이 있고 신석기인은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르나 기원전 3000년 청동기시대에 들어가 2000년간 융성한 에게 세계를 이루다가 쇠퇴하였다. 그리스의 초기 문화와 문명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후반까지 이뤄진 크레타를 중심으로 한 미노아 문명(기원전 2200~1400)이다. 그리스 본토 문명(기원전 1600~1200)과 구분되는 키클라데스 문명도 특징적이다. 이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의 빛나는 유물, 예컨대 옥제품이나 대리석 조각상, 항아리 등의 발굴로 입증되었으며 미노아 문명이나 헬라스(미케네) 문명과는 다른 특징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미노아 문명의 절정기(기원전 1600~1400)에 이르러 상류사회는 매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궁전과 정원, 대리석 층계로 이은 웅장한 고층건물, 발달된 위생시설을 갖춘 거실, 침실, 광 등을 미로형으로 배치하였다. 상쾌한 채색벽화는 이 시대 사람의 모습과 습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발굴자 에반스는 멋들어진 한 여인의 프레스코 초상회에 '파리의 여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궁전, 가옥 및 무덤에서 출토된 수많은 귀중품, 생활용품, 상아조각상, 광택 있는 홍색 고급토기, 정교한 금동제 기물들, 석각인, 반지 등은 그들이 누린 문화가 얼마나 찬란하였는가를 뒷받침한다. 부유하고 쾌활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락으로서 장기나 황소 뛰어넘기 같은 운동경기를 즐겼으며 왕과 여러 신, 특히 뱀여신을 숭배하였다. 이들은 동방의 이집트, 아시리아 등과의 교역과 접촉으로 해외문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켰다. 이집트의 기념비적 문명과는 달리 식물과 동물 등 자연을 주제로 장식적 예술을 창안하였으며 그 문화는 인근의 섬들과 그리스 본토로 전파되었다. 테라(산토리니) 섬 유적, 특히 아크로티리 도시의 출토물은 크레타 유적과 맞물려 플라톤의 대화편(기원전 4세기)에 나오는 아틀란티스의 실체라고 추리하는 견해도 거듭 나오고 있다.
한편 청동기시대 초반, 크레타와 주변 섬에 관련이 있는 인종과 소아시아인들이 그리스 본토로 침투 혹은 침입하였다. 청동기시대 중반 기원전 2000년 직후에 그리스 본토는 두 차례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현재 그리스인의 선조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북방 코카서스의 아리안 인도족이 들어와 점차 융화되었다. 초기 그리스인은 에게인의 주류를 형성하고, 크노스스에 나라를 건설한 후 점차 섬을 넘어 그리스 본토,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서방으로는 리파리 제도, 이스키아, 남부 이탈리아로 뻗어나가 기원전 8~7세기 그리스 식민도시를 크게 확산시켰다. 본토인은 크레타의 성숙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개성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미로식 궁전은 성채로 변천하였다. 그러나 내부 장식벽화, 작은 조각품, 금속공예, 항아리 등은 크레타의 그것과 유사하며 흔히 미케네 문명으로 불린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기원전 1600~11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이 문명의 후반기인 기원전 1400~1100년은 그리스의 영웅시대라 하며 아가멤논 왕의 세력권 아래 있던 미케네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트로이 전쟁을 감행하였다. 트로이가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은 청동기 말기에 미케네족은 멸망하고 많은 도시가 파괴 소각되었다. 멸망의 일부 원인은 먼 혈연의 도리스인이 일리리아인의 대이동에 밀려 침입하였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북방에서 새로운 그리스족이 내려오게 되었다. 이것을 헤라클레스 후예의 귀환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갑자기 토착문화를 덮치면서 문화 수준이 하락하고 건축, 항아리 모양등이 완연히 달라졌다. 이 시대에 특기해야 할 유물은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서판이다. 크레타에는 초기 청동기시대에 그림표기가 있었으며, 중기에는 드물지만 상형문자가 나타나는데 말기에는 2획문자로 선문자 A(기원전 2000~1500)와 선문자 B(기원전 1500~1100)가 등장하였다. 크노소스에서 출토된 선문자 B는 1952년 벤트리스가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선문자는 초기 형태의 그리스 문자이다. 서판의 기록은 영구적 문서가 아니고 그때 그때에 기록해 둔 비망록 정도에 불과한데, 기원전 1400년경의 화재로 점토서판이 구워지는 바람에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밖에 기원전 1200년경 불에 탄 본토 도시 퓰로스의 서판은 유일하게 글씨가 쓰여진 점토판으로 대량 출토되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역사시대에 들어가기까지의 기간은 단지의 무늬에 연유하여 기하학기로 부르며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이 무늬단지는 500년간의 암흑시대에 드물게 남겨진 유물이다.
기원전 8세기경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암흑시대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페니키아에서 들어온 알파벳 문자가 보급되어 다시 예술, 철학, 서사시(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듀세이아)가 정착하여 고전문화가 가꾸어졌다. 각 도시마다 독자적인 화폐가 주조되고 나아가 자체적으로 달력을 갖게 되었다. 일단 외침을 받으면 국가 간에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올림피아 축제기간이나 질병 등의 극한 상황에서는 싸움을 중지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하였다. 열정적이고 전투적인 분립주의는 폴리스의 정치활동의 중요한 특성으로 나타났고, 빈약한 영토에서 발전된 정치제도는 앞서 존재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개방적이고 시민 개개인의 광범위한 참여를 요구하였다. 단 이러한 모든 시민(여자.어린이.노예는 제외)의 참여는 오직 소규모 정치단위들 속에서만 가능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아테네와 그 주변지역에서 크게 융성하였고 기원전 5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스는 서구문명의 발상지이며, 서구의 지성사는 바로 이 그리스인과 더불어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앤드루스는 그의 저서 '고대 그리스사'의 권말에서 "대다수 그리스인들이 그들 문명의 독특한 장점이 자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 생각에 동의하길 주저할 까닭은 없으며 또 그 자유의 현상을 그리스인들이 의도하였던 정치영역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는 우리가 같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의 걸작품을 바라볼 때는 물론이고 일상적 사항을 볼 때조차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우리 세계와는 판이한 것이면서도, 그들을 움직였던 문제들이 오늘날의 문제와 대체로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두 세계는 서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에 대한 연구는 그저 기원을 알고자 하는 호고성 탐구에만 그칠 일이 아니다.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 유리피데스와 플라톤은 우리를 경탄하게 하고, 나아가 현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을 보다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맺음말은 서구인의 의향이며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지 이제 100년이 넘고 더구나 지나치게 빨리 돌아가는 현대화 물결에 휩싸여 온 지난 반세기를 돌아볼 때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절하고 의미있는 충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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