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46. 오왕비열전
고조의 형 유중(劉仲)은 왕위를 빼앗겼지만 그의 아들 유비는 오(吳)의 왕이 되었다. 바로 한제국(漢帝國)이 기초를 다지는 초기에 그는 남방의 양자강과 회수(淮水) 일대를 평정했다. 그래서 제46에 <오왕비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오왕 비는 고조인 유방의 형 유중의 아들이다. 고조가 이미 천하를 평정한 지 7년에 형 유중을 대국(代國)의 왕으로 삼았다. 그런데 흉노가 대를 공격하자 유중은 사수하지 못하고 대국을 버리고 잠행도주하여 낙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황제에게 자수했다. 그러나 고조는 차마 형을 벌줄 수가 없어 왕위만 박탈한 채 합양후로 떨어뜨리는 것에 그쳤다.
고조 11년 가을이었다.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경포)가 모반했다. 그는 동으로 형(荊:양자강 델타지역) 땅을 병합하고 서로는 회수를 건너 초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고조는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토벌했다. 유중의 아들 패후(沛侯) 유비는 나이 20세로 기력이 흘러넘치는 기병대장이었다. 그는 영포의 군사를 기현(安徽省 宿縣) 서쪽인 괴추에서 격파했다. 형왕(荊王) 유가(劉賈)가 영포에게 피살되었는데 마침 아들이 없었다. 고조는 오군(吳郡)과 회계군(會稽郡:델타지역임)의 주민들이 재빠르고 사나워 이들을 다스릴 만한 경험많고 용맹한 인물을 골랐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고조의 아들들 역시 어려서 왕으로 기용할 수가 없었다. 그때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인물이 유비였다. 젊지만 용감무쌍했다. 유비를 패(沛)에서 기용해 오왕으로 임명하고 3군(三郡)과 53성시(城市)를 다스리게 했다. 고조가 유비를 불러 다시 찬찬히 인상을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이놈의 얼굴에는 반역의 상(相)이 있구나!" 그러나 이미 오왕의 옥새를 넘겨 주었으므로 취소할 수도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후회하면서도 고조는 그의 등을 두드리면서 부탁했다. "한조(漢朝)에서 앞으로 50년 후에 남동쪽에서 반란이 일아난다면 그건 아마 너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 유씨 천하가 아니냐. 꿈에라도 모반할 생각일랑 말아라."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유비는 머리를 조아리며 맹세했다. 효혜제와 여태후의 치세시대는 천하 평정 초기에 해당되어서였던지 그럭저럭 넘어갔다. 각국의 왕과 제후가 지배하의 백성들 어루만지기에 급급했기 때문인 듯했다.
오나라 예장군(豫章郡:江西省)에는 구리[銅]광산이 있었다. 유비는 전국의 유랑자들을 불러들여 많은 동전을 만들어 내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아도 국가재정은 튼튼했다. 효문제 때였다. 오나라 태자가 입조해 황제를 알현한 뒤 황태자를 모시고 술을 마시며 쌍륙(雙六)을 치는 기회가 있었다. 오나라 태자의 사부(師傅)는 모두가 초나라 사람들이어선지 사납고 경박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오나라 태자도 원래가 교만한 성격에 쌍륙을 치면서도 그 놀이방법을 가지고 무례하게 다투었다. 참다 못한 황태자가 쌍륙판을 들어 오태자의 머리통을 깨부수자 즉사했다. 오나라 태자의 유해는 오나라로 돌려보내졌다. 그러나 유해를 맞은 오왕은 대노했다. "무어라고! 장안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장례지낼 일이 아닌가. 천하가 같은 유씨 일가라면서 굳이 여기로 돌려보내 장례를 치른단 말인가!" 유비는 한사코 아들의 시체를 장안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것이 원한의 발단이었다. 오왕은 그 이후부터 한조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입조하라는 연락이 와도 병을 핑계로 장안으로 가지 않았다. 장안에서도 차츰 오왕이 태자 피살사건으로 신병을 핑계삼아 입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나라 사자를 번번이 잡아 옥에 가두며 힐책 심문했다. 오왕도 차츰 불안해졌다. "기왕에 잘릴 목이라면 모반하는 게 낫겠다!" 그래서 오왕은 음모에 몰두해 가게 되었다. 추청(秋請:봄에 천자를 뵈러가는 것이 朝이고 가을에 뵈러가는 것은 請이다) 때였다. 여전히 오왕은 오지 않았다. 효문제가 사자를 힐문했다. 그랬더니 사자는 대답했다. "사실 오왕께서는 병이 없습니다. 오의 사자들을 폐하께서 계속 투옥 심문하셨기 때문에 오왕이 겁이나 더욱 병이라 핑계한 것입니다. 연못 속 물고기를 들여다 보듯 아랫나라 사정을 너무 자세히 들추려 하시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듯합니다. 오왕께선 처음에는 신병이라 속였지만 발각되어 문책을 당하자 더욱 폐하의 주벌이 무서워 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기왕지사를 버리시고 오왕과 함께 새출발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오의 사자에게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오왕에게 보내 고령이니 입조하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그제서야 오왕도 죄를 용서받자 꾀하던 음모도 그만두게 되었다. 오나라는 오나라대로 잘 다스려졌다. 구리와 소금의 수입으로 백성들에게 부세를 받지 않아 배불렀으며, 남을 대신해 병역을 복무하는 자에게도 그에 따른 보수를 주었으며, 일 년 중 인재를 뽑아 상을 주었으며, 다른 나라에서 망명자나 범법자를 체포하러 오면 잡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하기를 40년 동안이나 하니 백성들은 모두 오왕을 믿고 따랐다.
한편 한나라에서는 조착이 황태자의 가령(家令)이 되어 태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종종 조착은 오왕이 과오를 범했으니 영지(領地)를 삭감해야 한다고 태자에게 말했고, 또 효문제에게도 상서했지만, 관인한 성품의 효문제는 차마 오왕을 처벌하지는 못했다. 효문제가 죽고 황태자가 즉위해 효경제가 되었다. 조착이 어사대부로 승진하자마자 그는 효경제에게 말했다. "옛날 고조께서 천하를 평정한 당초에는 형제분들도 얼마 안 되어 여러 황자들도 어렸기 때문에 큰 영지(領地)를 다만 동성(同姓)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씨들에게 봉했습니다. 그래서 첩복(妾腹)의 황자 유비(劉肥:悼惠王)에게 제(齊)의 70여 성을 지배케 했으며, 배다른 아우 유교(劉交:元王)에게는 초(楚)의 40여 성을 지배케 하고, 형의 아들 유비(吳王)에게는 오(吳)의 50여 성을 주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되어 이들 3인의 방계(傍系)에게 전국의 절반을 주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 오왕은 전날에 있었던 태자 피살사건으로 원한을 품고 거짓으로 병이라 핑계삼아 도무지 입조조차 하지 않습니다. 고래의 법으로는 사형에 해당합니다만 선제(先帝)께서는 차마 그를 처벌하지 못해 도리어 안석과 지팡이까지 내리셨습니다. 그 은덕은 지극한 것이어서 오왕은 당연히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 출발을 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오왕은 더욱 오만불손해져서 화폐를 사사로이 주조하고 바닷물을 멋대로 제염해서 그 부유함으로 전국에서 망명한 불평분자들을 끌여들여 반란을 획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폐하께서 단단히 결심하셔야 될 때입니다. 그의 영지를 삭감해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삭감하지 않아도 역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삭감하면 그 반란이 빨리 일어나나 피해는 적을 것이고 삭감하지 않으면 반란은 늦게 일어나나 그 피해는 클 것입니다." 효경제가 결심을 못하고 있을 때인 3월 겨울, 초왕 유무(劉戊)가 입조했다. 그 기회에 조착이 간했다. "초왕 유무는 왕년에 박태후(薄太侯)의 복상시(腹喪時) 남몰래 간통죄를 복상하던 집에서 범했습니다. 청컨대 그를 주벌(誅罰)하십시오." 그러나 효경제는 유무를 용서하고 그 벌로서 동해군(東海郡)만 삭감했다. 기왕 그 기회에 오왕의 예장군, 회계군을 삭감[<漢書>에는 이 구절이 없으나 있어야 타당함]하고, 전원(前元) 2년에는 조왕(趙王) 유수(劉遂)가 죄를 지었다 하여 영지 중에서 하간군(河間郡:<元王世家>와 <漢書>의 <비전>에는 常山郡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타당하다)을 떼어냈으며, 교서왕(膠西王) 유앙이 작위를 판 부정행위를 했다 하여 그의 6현(六縣)을 삭탈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의 대신들이 제후국의 영지를 삭감하자는 논의를 끊임없이 계속하자 오왕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나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오왕은 일의 진행이 영지 삭탈에서 그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래서 차제에 음모를 표면화해서 거사하려 했다. 그러나 제후 중에서 더불어 모의할 인물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교서왕이 어떻겠습니까. 용감하고 호전적이고 기개(氣慨)를 존중하는 분이니까요." 오의 중대부(中大夫) 응고(應高)가 간했다. 실상 교서왕을 제(齊)의 지방 제후[齊를 갈라 세운 나라로 膠西, 齊, 膠東, 濟南, 濟北 등]들이 모두 꺼려하고 두려워한다고 오왕은 듣고 있었다. "만일을 위한 것이니, 문서 없이 그대가 직접 가서 구두로 설득하시오." 그래서 오왕은 응고를 교서왕에게 파견했다. "오왕은 불초하여 여러 해 동안 어리석은 고민에 잠겨 계십니다. 감히 다른 사람에게는 속마음을 표시할 수가 없어 저를 직접 보내시어 충심(衷心)을 대왕께 알리도록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라고 하셨소?" "지금 황제께서는 간신들에 의해 조종되고 계십니다. 감언이설과 사소한 제 이익을 빙자한 인간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여서 마음대로 법률을 변경하고 제후의 영지를 불법으로 빼앗고 재물의 징발은 더욱더 많아졌으며 무엇보다 선량한 사람에 대한 처벌이 날로 가혹해지고 있습니다. 속담에 '쌀겨를 다 먹어버리면 쌀을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영지를 이토록 삭감당하다가는 제후국들은 언젠가 멸망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오왕과 교서왕은 제후들 중에서 특히 이름이 알려져 있는 고로 한번 가혹한 감찰을 받게 되면 그대로 안온하게 유지될 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오왕께선 20년 이상이나 속병을 앓아오고 계셔서 참조(參朝)를 못했는데 그것을 트집잡아 영지를 삭감당해 그것이 걱정스럽고, 교서왕께서는 작위를 팔았다는 죄로 영지를 깎였다고 들었는데 어디 그게 죄가 될 법이나 하는 일입니까. 그런 식으로 갔다가는 영지 삭감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나라를 몽땅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들어보니 그럴 것 같구려. 헌데, 나더러 어떻게 하자는 거요?" "함께 미움받는 자는 서로 돕고, 좋아하는 게 같은 자는 서로 붙들고, 뜻을 같이하는 자는 서로 도와서 성취시키고, 욕망이 같은 자는 서로 같은 길을 달려가고, 이익을 같이하는 자는 서로를 위하여 죽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오왕께서는 대왕과 꼭 같은 걱정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차제에 기회를 이용하여 도리대로 몸을 던져 천하의 걱정거리를 없애버리는 게 어떠하실지요." 교서왕은 깜짝 놀랐다. "과인이 어찌 모반하겠소. 지금 황제께서 꾸짖음이 추상같지만, 오직 죄를 입고 두말 없이 죽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 폐하의 뜻을 거스릴 수는 없겠소이다." "어사대부 조착을 아시지요. 그 자가 바로 천자를 현혹시켜 제후들의 영지를 불법으로 빼앗고 충신을 가리며 어진이를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를 미워하고 있으며, 제후들은 그를 원망해 모두가 배반할 뜻을 품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사는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전란의 징조인 살별이 나타나고 땅에는 황충(蝗蟲)의 피해가 자주 일어나 기근의 징후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만세에 한 번 있을 수 있는 일로서 천하 백성들이 근심과 고통을 느끼니 바야흐로 성인(聖人)이 일어나셔야만 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오왕은 안으로는 조착 토벌을 명분으로 삼고 밖으로는 교서대왕의 수레를 뒤따라 천하에 웅비하려고 하는 바......" "내가?" "우리 정의의 군사가 가는 곳에는 항복이 있을 뿐이며, 복종치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승낙한다는 한 마디만 해 주신다면 오왕은 초왕을 이끌고 함곡관을 공략해 형양과 오창의 곡창을 확보하고 한군(漢軍)의 진출을 막으면서 대왕이 나오실 때를 기다리겠답니다. 다행히 대왕께서 내림하시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때 두 대왕께서 천하를 양분해 가지시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교서왕은 잠깐 궁리한 뒤에 대답했다. "좋소. 그렇게 하겠소." 응고가 귀국해 오왕에게 보고했다. "그렇지만 혹시 교서왕이 마음이 변하면 어쩌지?" "의심스러우면 직접 면대하셔서 맹약을 체결하십시오." 그래서 오왕이 직접 교서국으로 가서 유앙과 맹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교서국의 신하들 중에서 모반 음모를 듣고 충고하는 자가 있었다. "한 사람의 황제를 섬기는 것이 훨씬 안락한 일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한나라를 배반하고 오왕과 함께 서진해 가서 설사 일이 잘 되더라도 결국은 두 군주가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니 또 하나의 화근을 만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제후국 땅을 모두 합해도 한실(漢室)이 직할하는 군(郡)의 2할도 채 못되는데 그로써 힘이나 제대로 사용해 보겠습니까. 더구나 반역함으로써 태후께 근심을 끼쳐드리는 바도 죄송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러나 교서왕의 귀에는 그런 충고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즉시로 사자를 출발시켜 제(齊), 치천, 교동(膠東), 제남(濟南), 제북(濟北) 등과 맹약을 맺음으로써 기고만장해졌다. "성양국(城陽國:山東省)의 경왕(景王:朱虛侯 劉章)한테는 협조를 요청할 필요도 없다. 제딴엔 의(義)를 존중한답시고 여씨(呂氏) 일족을 칠 때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사자를 보내 봐야 허탕일 것이다. 나중에 대사가 성취되고나서 성양국을 분할해 가질 따름이다." 실제로 제후들은 새로이 영지가 깎이든가 벌을 받음으로써 조착에 대한 원망이 컸다. 오나라에 회계군과 예장군을 삭감한다는 조서(詔書)가 드디어 도착했다. 그래서 오왕이 먼저 병사를 일으켰다. 교서국에서는 정월 병오일(丙午日)에 한(漢)에서 파견돼 있던 2천 석 이하의 관리들을 모조리 주살해 버렸다. 교동, 치천, 제남, 초, 조나라에서도 교서국에서와 꼭 같이 한의 관리들을 죽여 버렸다. 그런 후 병사들을 동원해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불길한 징조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왕(齊王) 유장려(劉將閭)가 동맹국에 가입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그래서 그는 음독자살함으로써 동맹국에서 이탈했다. 또 제북왕(濟北王) 유지(劉志)가 그의 낭중령(郎中令:侍從長)에 의해 감금당했다. "안됩니다. 파괴된 성을 아직 수리도 못했는데 군사를 동원하다니요!" 그래서 제북은 출병치 못했다. 그렇지만 교서왕이 동맹국의 통솔자가 되어 교동, 치천, 제남의 병사와 함께 임치를 에워쌌다. 조나라 왕 유수(劉遂)도 반란군에 합세한다는 뜻으로 가만히 흉노로 사자를 파견해 군사를 빌어 동맹국에 참전시켰다. 어쨌건 7개국의 군사동맹이 결성되자 오왕은 다음과 같은 총동원령을 국내에 포고했다.
-과인의 나이 62세다. 스스로 대장이 되어 출전한다. 내 막내아들이 이제 14살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 사졸의 선두에 선다. 그러하니 모든 백성들은, 위로는 과인과 동년배로부터 아래로 나의 말자(末子)와 동년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남자를 동원한다.
그렇게 되어 오나라에서는 20여 만 명이 동원되었다. 또한 남방의 만족인 민월에도 군사요청을 했었는데 동월에서 이에 응해 오왕의 뒤를 따랐다. 효경제 3년 갑자일(甲子日)이었다. 오왕은 광릉(廣陵:江蘇省 楊州)에서 행동을 개시해 서진하여 회수를 건너서며 초군과 합류했다. 오왕은 여기서 제후국들에 일제히 서신을 띄웠다.
-오왕 유비는 삼가 교서왕[유앙], 교동왕[劉雄渠], 치천왕[劉賢], 제남왕[유벽광], 조왕, 초왕, 회남왕[劉安], 형산왕(衡山王:劉勃), 여강왕(廬江王:劉賜) 및 전날의 고(故) 장사왕(長沙王:吳著)의 아들께 묻사오니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지금 한나라 조정에 적신(賊臣)이 있어 천하에 아무런 공로도 없는 주제에 불법으로 제후들의 영지를 빼앗고 형리(刑吏)를 시켜 탄핵하고 계류(繫留:구금)하고 심문하고 단죄(斷罪)하여 우리들을 욕보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인군(人君)에 대한 예의로써 제실(帝室)인 우리 유씨 골육인 제후들을 대우하지 않고 선제(先帝)의 공신들을 멸망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간악한 무리들을 대신 천거해 천하를 속이고 어지럽혀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폐하께서는 다병(多病)하시어 정사(政事)에 뜻을 잃으시고 사태를 성찰할 능력까지 잃고 계십니다. 이에 병사를 동원해 폐하의 측근에 있는 적신들을 주멸하고자 하는 바 여러 제후들의 뜻을 삼가 교시받아 따르고자 합니다.
오왕의 설득편지는 계속된다.
-저희 오나라는 비록 좁다고 하나 땅은 사방 3천 리이고 인구가 비록 적다고 하나 정예병 50만은 갖출 수가 있습니다. 또한 과인은 평소에 남월(南越)의 여러 나라들과 친교 맺은 지가 30여 년이나 되어 과인이 원하기만 하면 사졸을 갈라 따르기를 사양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병력이 30여 만입니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 과인은 비록 불초하오나 이 몸을 바쳐 여러 왕들을 따르고자 하는 바입니다. 장사(長沙)와 접경하고 있는 남월의 북부지방 백성들은 장사왕의 아들을 주축으로 서쪽 촉, 한중으로 달려가게 하여 장사 이북을 평정토록 하겠습니다. 동월왕, 초왕, 회남의 삼왕(三王:淮南王, 衡山王, 廬江王)은 과인과 함께 서진하기를 바랍니다. 제(齊)의 제왕(諸王:치천왕, 교동왕, 제남왕)과 초왕은 하간(河間)과 하내(河內)를 평정하고 임진관(臨晋關:狹西省 朝邑縣 북동쪽)으로 진입하든지 또는 과인과 낙양에서 합류하기 바랍니다. 연왕(燕王:劉嘉)과 조왕은 흉노왕과 맹약한 바 있으니 연왕은 북진하여 대(代)와 운중을 평정하고 흉노병을 통솔해 소관(蕭關:甘肅省 固原縣 남동쪽)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장안으로 진출해서 천자(天子:<한서>에는 天下)를 바로잡고 고조의 묘를 안태케 하십시오. 원컨대 여러 왕들께서는 이상과 같은 방향으로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의 원왕의 아들인 지금의 초왕(楚王:劉戊)과 회남의 3왕은 시름을 풀 길이 없어 입욕(入浴:官吏의 휴가)할 경황도 없이 지내온 지가 10여 년이어서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풀어 보려고 벼르고 있을 것입니다. 과인은 아직도 여러 왕들의 참뜻을 타진할 기회가 없었고 또 타진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여러 왕국들이 전멸하려는 마당이라 분연히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국가를 재흥시키고 약자를 구하고 포악한 자를 쳐서 유씨 일족을 안태롭게 하는 것이 한(漢)나라가 원하는 바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오나라는 비록 가난하나 과인은 의식(衣食)을 절약해 금전을 저축하여 밤낮으로 군비를 갖추고 식량을 모아온 지가 30년이나 됩니다. 이 모두가 기왕의 목적을 위해서였습니다. 여러 왕들은 이것을 마음껏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왕 비는 한실에 대한 모반의 명분을 적은 뒤 이번에는 공로에 대한 상사(賞賜) 규정도 자세히 적어내려갔다.
-적의 대장을 베거나 생포한 자에게는 황금 5천 근(斤:한 근은 약 256그램)을 하사하고 1만 호의 영지에 봉하며, 열장(列將)을 베거나 생포한 자에게는 황금 3천 근에 5천 호의 영지를, 비장(裨將:副將)을 베거나 사로잡으면 황금 2천 근에 2천 호의 영지에 봉할 것입니다. 봉록 2천 석의 관리를 베거나 사로잡으면 황금 1천 근에 1천 호의 영지에 봉하고, 1천 석의 관리의 경우에는 황금 5백 근에 5백 호의 영지를 주어 모두 열후(列侯)에 봉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적군으로서 적군과 함께 또는 적의 성읍(城邑)과 함께 항복하는 자에게는 그 병졸이 1만 명이거나 성읍이 1만 호일 때 대장을 얻은 경우와 같은 대우를 할 것이며, 5천 명의 군사와 5천 호의 성읍인 경우에는 열장을 얻은 경우와 같은 대우를 하며, 3천 명의 군과 3천 호의 성읍이라면 비장을 얻은 경우와 같은 대우를 하며, 1천 명의 군과 혹은 1천 호의 성읍인 경우에는 2천 석 호봉의 관료를 얻은 것과 같은 대우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적의 하급 관리를 얻은 경우에도 상대의 등급에 따라 작위와 상금을 줍니다. 기타의 봉작이나 상사도 모두 한(漢)의 통상규정보다 두 배로 할 것입니다. 본래부터 작위와 봉읍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위에 규정한 바에서 가증(加增)시키며 이전의 영지에 대해서는 구애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하니 여러 왕께서는 신하들에게 이런 내용을 자세히 주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속이지는 않겠습니다. 또한 과인의 금전은 천하 도처에 있으니 굳이 오나라로 와서 가져가지 않아도 됩니다. 아마 여러 왕들이 밤낮으로 이것들을 사용하더라도 모조리 없앨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할 것이 있다면 과인에게 보고만 해 주십시오. 언제라도 과인이 달려가서 상을 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삼가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7국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서가 천자에게 올라갔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태위(太尉:軍 최고사령관)인 조후(條侯)가 주아부(周亞夫:周勃의 아들)을 시켜 36명의 장군들을 거느리게 해 오, 초로 진격케 했다. 곡주후(曲周侯) 역기에게는 조를 치게 했고, 장군 난포에게는 제(齊)나라를 치게 했다. 대장군 두영에게는 형양에 주둔케 하여 제나라, 조나라 군사의 동태를 감시케 했다. 한나라 군사가 출발하기 전이었다. 두영은 전날 오나라 재상이었던 원앙을 효경제에게 추천했다. 그 무렵 원앙은 은퇴해 집에 있었다. 조칙을 받은 원앙이 입조하자 마침 효경제는 조착과 함께 병력을 점검하고 병량 조달에 관해서 상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제가 원앙을 반기며 물었다. "그대가 한때 오나라 재상으로 있었기에 묻겠는데, 오왕의 신하 전녹백(田祿伯:吳의 大將軍)의 사람됨에 대해서 좀 아오? 더구나 지금 오, 초가 반기를 들었는데 그대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는지." 그러자 원앙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실 일이 못됩니다. 금새 격파되고 맙니다." "오왕은 광산에서 화폐를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굽는 등 부자가 되었소. 그것으로 천하의 호걸들을 끌여들여 제 머리가 백발로 성성한데도 거사했단 말이오. 그가 만전의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어찌 거사를 했겠소.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그가 곧 격파될 것이라 말할 수 있소?" "오왕이 동광산에서 동전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구워 부자가 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가 천하 호걸들을 부력(富力)으로 끌여들였다는 얘기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왜 그렇소?" "진정한 호걸들이란 오왕 따위를 도와 반란을 획책하지는 않지요. 차라리 오왕을 잘 보필하여 오왕으로 하여금 의(義)를 지키게 했겠지요." "그럼 측근의 그 자들은 무어요?" "천하의 무뢰배 자제(子弟)들이거나 망명해 온 자들이며 위조화폐를 사주하는 간악한 무리들일 뿐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울려 일으킨 반란이니 성공할 턱이 있겠습니까?" "오나라에 대한 원앙의 판단은 지당합니다!" 조착이 곁에 섰다가 거들었다. 황제는 다시 원앙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계책을 어떻게 세우면 좋겠소?" "우선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신하들이 물러갔으나 총신 조착만이 곁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원앙이 다시 간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신하로서 알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아뢰자 황제는 조착까지 물러가게 했다. 조착은 궁전 동쪽으로 바삐 물러가며 투덜거렸다. "저 자가 지금 무슨 허튼소리를 하려고 저러누!" 좌우가 깨끗이 정리된 뒤 원앙은 이렇게 말했다. "오와 초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고조황제께서 자제들을 왕으로 삼고 각각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지금 적신 조착이 제멋대로 제후들의 죄를 문책하며 그들의 영지를 삭탈하고 있다. 이것을 반란의 명목으로 삼아 서진하여 조착을 주살하고, 옛 땅을 회복한 후에라야 군사 행동을 중지하자'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하니 당면한 계략은 조착을 베고 오, 초 7국에 사자를 파견해 그들을 용서한 뒤 삭감된 그들의 옛 땅을 돌려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양쪽 군사는 칼날에 피 한 방울 바르지 않고 반란군은 명분을 잃어 해산될 것입니다." 황제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일이 어렵소. 정작 한 사람을 아끼지 않고 벰으로써 천하에 사과하는 것이 옳을까." "어리석은 제 생각으로서는 이보다 나은 계책이 없을 듯합니다." 황제는 원앙을 전격적으로 태상(太常)에 임명했다. 오왕의 아우의 아들 즉 오왕의 조카 덕후(德侯) 유광(劉廣)을 종정(宗正:皇族을 주관하는 大臣)으로 삼았다. 원앙은 즉시 여장을 갖추어 오나라로 떠났다. 한편 열흘 쯤 후였다. 황제는 중위(中尉)를 시켜 조착을 불러내었다. 조착은 멋모르고 조복(朝服)으로 정장한 채로 입조했다. 그를 속여 수레에 태운 황제는 장안의 동시(東市)로 데려갔다. 그는 그 차림대로 참형에 처해졌다. 원앙과 유광이 오나라에 도착했다. 원앙은 종묘의 뜻을 받들게 하라는 설득을 하기 위해서 갔고, 종정 유광은 원앙의 계책대로 황실 친척들을 돕게 한다는 명목으로 파견된 것이다. 종정 유광은 친척이라는 이유로 먼저 오왕에게 들어가 회견했다. 그는 오왕을 잘 타일러 황제의 조칙을 배례하고 받게 하려 했다. "무어? 원앙도 함께 왔다고? 그렇다면 나를 설득하러 온 게 분명하군. 나 이미 동쪽의 황제가 되었는데 누가 누구에게 배례를 한단 말인가!" 오왕은 원앙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군중(軍中)에 억류해 놓고는 반군(反軍)의 장군이 되든가 주살되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협박했다. 원앙은 야음을 틈타 탈출할 수 있었다. 도보로 도망해 양군(梁軍)의 군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무사히 귀경해 황제에게 결과를 보고할 수 있었다. 대장군 주아부는 대군을 형양으로 집결시키려고 6두마차를 타고 달려 낙양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서 뜻밖에도 극맹(劇孟:俠客의 두목)을 만났다. "오, 반갑구려! 7국의 반란으로 인해 내가 역전거(驛傳車)를 타고 이곳에 도착하는 것조차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소. 모반한 제후들이 천하의 호걸 극맹을 한편으로 끌어들였다고 떠들었거든요. 그러나 당신은 엄연히 그대로 이곳에 계시니 지극히 안심이오. 이제 나는 걱정 않고 형양으로 가겠으니 낙양을 지켜 주시오. 이쯤되면 형양 이동(印)에는 근심될 만한 자가 아무도 없겠소이다." 주아부는 형양(滎陽:원문에는 淮陽으로 되어 있으나 梁玉繩의 說에 따라 형양으로 함)에 이르러 부친 주발의 빈객이었던 등도위(鄧都尉)에게 물었다. "좋은 계책을 주십시오." "오군이 매우 정예로워 정면대결로는 어렵습니다. 초군은 또 경솔하니 지구전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니 장군은 북동으로 병사를 철수시켜 창읍(昌邑:山東省 金鄕縣의 북서쪽)에다 누벽을 구축하십시오. 오나라를 양(梁)나라에 맡기는 것이 상책입니다. 오군은 반드시 정예병을 모조리 투입해 양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동안 장군께선 호(濠:垓字)를 깊이 파고 누벽을 높이 쌓은 뒤 굳게 지키는 한편, 기동력 좋은 경장비병을 이용해 회수와 사수(泗水)의 합류점을 차단하십시오. 오군의 군량미 수송로를 막아버리는 형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쯤 되면 오군과 양군 모두 전투에 지치게 되며 양식은 바닥납니다. 그때 상처입지 않은 날쌘 군사로 오군을 치면 피폐한 그들은 반드시 격파될 것입니다." "좋은 계략입니다." 주아부는 등도위의 계략을 따랐다. 창읍의 남쪽에 누벽을 굳게 구축한 뒤 경장비병을 출동시켜 오의 양도를 차단했다. 오왕이 진격을 개시한 당초에는 전녹백이 대장군이었다. 그래서 전녹백은 오왕에게 진언했다. "대군이 한 덩어리로 모여 진격하더라도 특별한 군략을 세우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저에게 5만 명만 갈라주십시오. 별도로 양자강과 회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회남과 장수를 수중에 넣고 무관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있다가 대왕과 합류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책(奇策)입니다." 그러나 오의 태자가 반대했다. "왕께서는 반군(反軍)의 이름을 내걸고 있습니다. 이런 군사를 남에게 빌려주다니요. 남에게 빌려주어 왕을 배신하면 어찌하겠습니까. 더구나 병권을 갈라놓았을 경우 우리에게 올지도 모를 폐해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왕은 전녹백의 진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오군의 젊은 장수 환장군(桓將軍)이 역설했다. "우리 오군에는 보병이 많습니다. 보병에게는 험난한 지형이 유리합니다. 한군에게는 전차와 기병이 많은데 그들은 평지가 유리합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진격하는 도중 항복하지 않는 성읍은 그냥 두고 재빨리 서쪽으로 달려가 낙양의 무기창고부터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오창(敖倉)의 양곡을 보급받아 산하의 험난한 지형에 의지해 제후들을 호령할 수 있어 굳이 관중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천하는 이미 평정된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만약 대왕께서 천천히 진군해 성읍을 모조리 항복시키고 있다가는 한군의 전차와 기마대가 양, 초의 들판으로 달려들어와 거사는 실패하게 되겠지요." 오왕은 얼른 결심이 서지 않아 노장(老將)들에게 물었다. "그대들 생각은 어떻소?" "젊은애의 무모한 계략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왕의 원래 계략이 가장 옳습니다." 그래서 환장군의 계략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직도 회수를 건너기 전이었다. 오왕의 여러 빈객들이 모두 장군, 교위(校尉), 군후(軍侯), 군사마(軍司馬) 등에 임명되었으나 홀로 주구(周丘)만이 어떤 자리에도 임명되지 못했다. 주구는 하비 출신이었다. 오나라로 망명해 와서 술장사를 하고 있던 재사(才士)였다. 그러나 그의 행실이 신중치 않고 짓거리가 경박하다 하여 오왕은 그를 임용치 않았던 것이다. 이에 주구가 오왕을 찾아 설득했다. "무능하다 하여 임용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장군이 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다만, 무언가?" "왕께서 가지고 계신 한나라 조정에서 발부한 절부(節符:使者라는 증명서) 하나만 주십시오. 반드시 왕께 보답하겠습니다." "그대가?" 오왕은 긴가민가 하면서도 절부 하나를 주구에게 내어 주었다. 주구는 절부를 받아가지고 밤을 도와 하비로 말을 달렸다. 이때에 하비에서는 오나라가 모반해 진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주구는 여사(旅舍)에 들러 절부를 사용해 현령(縣令)을 불러들였다. 주구는 종자(從者)를 시켜 현령이 여사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죄를 씌워 베어 버렸다. 그런 다음 주구의 형제들과 친한 토호들과 관리들을 모조리 불러놓고 설득했다. "오의 반란군이 곧 이곳으로 도착할 것이오. 오기만 하면 이까짓 하비성쯤은 한 식경도 못 되어 쑥밭이 될 것이오."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미리 항복하시오. 집집마다 안전을 약속할 테니까. 그리고 유능한 자는 제후에 봉해질 것이오." 관리들이 나가 주구의 말을 전하니 하비 백성들이 모조리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었다. 주구는 하비의 병력 3만 명까지 수중에 넣었다. 주구는 사람을 시켜 오왕에게 하비성의 사정을 보고한 뒤, 그 병력을 이끌고 북진하여 성읍을 공략했다. 성양(城陽)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주구의 군사는 10여 만 명이나 불어 있었다. 그래서 쉽게 성양의 중위(中尉:王國의 최고 武臣)를 격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구는 거기서 오왕이 패배하여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내가 저토록 허술한 자와 대사를 도모했다니!" 주구는 오왕에게 협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래서 하릴없이 군대를 철수시켜 하비로 다시 향했다. 그런데 그로 인해 울화가 치밀었던지 주구는 등창(瘡:잔등에 나는 악성 腫氣)이 났다. 그래서 하비에 채 닿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2월이 되었다. 오왕의 군사는 벌써 격파되어 패주했다. 동시에 천자는 한나라 장군들에게 조칙을 내렸다.
-짐이 들은 바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복으로 갚아 주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 갚아 준다'고 했다. 고조황제께서 몸소 공덕 있는 신하를 표창해 제후로 세워주셨다. 유왕(幽王)과 도혜왕(悼惠王)에게는 후사도 없었지만 효문황제께서는 그 나라가 끊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유왕의 아들 유수(劉邃)와 도혜왕의 아들 유앙 등을 왕으로 삼아 선왕의 종묘를 받들게 하여 환의 번병(藩屛)으로 두었었다. 그 덕은 천지에 비길 만하고 그 빛은 일월에 비길 만하다. 그런데도 오왕 비는 배은망덕해 의리를 저버리고 천하의 망명자들과 죄인들을 끌어들여 사전(私錢)을 주조해 공전(公錢)을 어지럽혔으며, 병이라 핑계하여 20년 이상이나 입조도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오왕의 죄를 들출 것을 요청했으나 효문황제께서는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오로지 그가 개과천선하기만 고대하셨다. 그런데 오왕 유비는 초왕 무, 조왕 수, 교서왕 앙, 제남왕 벽광, 치천왕 현, 교동왕 웅거와 합종의 맹약을 맺고 모반해 악역무도한 짓을 자행했다. 즉 병사를 동원해 종묘를 위태롭게 하였고 대신들과 한나라가 보낸 사자들을 살해했다. 또한 만백성을 협박하였고 죄없는 백성을 요절냈으며 민가를 불태우고 분묘를 파헤치는 등 포악한 짓이라면 가려서 다 하였다. 또 교서왕 유앙도 악역무도한 일을 거듭했다. 군(郡), 국(國)에 있는 고조황제의 묘(廟)를 불사르고 그곳의 복기(服器)를 약탈해 갔다. 짐은 특히 이 점을 애통히 여겨 소복(素服:白衣)을 입고 정전(正殿)은 피한 채 별전에 있으면서 근신하고 있다. 장군들은 각자의 사대부들에게 권고하여 반도들을 치게 하라. 반도를 치는 데는 적진 깊숙히 들어가 많이 죽일수록 그 공로가 크다. 목을 베어도 좋고 사로잡아도 좋으나, 3백 석 이상의 봉록자들은 그대로 두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감히 이 조칙을 비난하거나 또는 조칙에 불복하는 자는 요참(腰斬:斬首보다는 重刑, 허리를 베어 죽이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이보다 앞서 오왕이 회수를 건너 초왕과 함께 서진해 극벽(棘壁:河南省 寧陵縣 서쪽)을 격파할 때만 해도 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 기세가 매우 날카로워 양(梁)의 효왕(孝王) 유무(劉武)는 위협을 느껴 장군 6명을 보내어 오군을 공격케 했지만 격파된 두 장군의 사졸들은 쫓겨서 양으로 돌아왔다. 양에서는 여러 번 주아부에게 전황을 보고하고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구원요청은 번번이 기각되었다. 할 수 없이 양에서는 사자를 황제에게 보내어 주아부를 헐뜯었다. 그랬더니 황제는 주아부에게 사자를 보내 양나라를 구원하도록 설득했다. 그래도 주아부는 작전의 편의만 고집해 황제의 말도 듣지 않았다. 양에서는 별 수 없었다. 한안국(韓安國)과 또 전날 초왕에게 간하다가 죽은 초의 재상 장상(張尙)의 아우 장우(張羽)를 장군으로 삼아 가가스로 오군을 격파할 수는 있었다. 오군이 서진하려고 했으나 양이 성을 굳게 지킨 탓으로 감히 서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군은 주아부의 주력군을 상대로 하읍(下邑)에서 마주 싸우려 했다. 그런데 주아부도 굳이 누벽만 지키며 구태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진 오군은 초조했다. 사졸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자 밤을 타서 죽기살기로 누벽의 남동방을 공격했다. 그 기세가 대단했다. "지키기만 할 뿐이다. 오늘 밤 오군은 틀림없이 누벽의 북서쪽을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니 남서방의 수비를 굳게 하는 척하고 북서쪽으로 유도해라." 아니나 다를까 오군은 밤중에 북서방으로 침입해 왔다. 그제서야 주아부의 군은 밖으로 내달아 오군을 대패시켰다. 오군의 사졸들은 대부분 굶어죽었다. 그러자 나머지 사졸들은 오왕에게서 이반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오왕도 더 버틸 수가 없었다. 휘하의 장사(壯士) 수천 명을 거느리고 야음을 타서 도망해 양자강을 건넜다. 단도(丹徒:江蘇省 丹徒縣)를 거쳐 동월(東越)에 도착했다. 동월에는 1만 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그리고 흩어졌던 도망병을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한에서는 사람을 시켜 이익을 미끼로 동월을 매수했다. 오왕이 밖으로 나가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때 동월의 군사 하나가 미친 척 갈래창으로 오왕의 목을 찔렀다. 동월은 오왕의 머리를 그릇에 담아 역전거를 달려 한으로 보냈다. 오왕의 아들 자화(子華)와 자구(子駒)는 민월로 도망쳤다. 나머지 군사들은 주아부나 양군에게 항복했다. 초왕 유무는 패전을 하게 되자 자살했다. 교서, 교동, 치천의 3국 왕은 제의 수도 임치를 포위했으나 3개월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나라 군대가 진격해 왔으므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각각 군사를 철수시켜 돌아갔다. 교서왕은 웃옷을 벗고 맨발로 짚방석에 꿇어앉아 물만 마시면서 죄를 빌었다. 모친인 태후에게 회오의 정을 표한 것이다. 그러자 태자 유덕(劉德)이 왕을 말렸다. "왜 이러십니까. 한군은 멀리서 왔으므로 제가 보기에도 많이 지쳐 있습니다. 습격하면 이길 만합니다. 원컨대 대왕의 잔여병을 거두어 제게 주십시오.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그때 해중(海中)의 섬으로 도망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아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피로해 있다. 도저히 징발해서 쓸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교서왕은 태자의 진언을 듣지 않았다. 즈음에 한의 장군 궁고후(弓高侯) 퇴당(頹當)이 교서왕에게 서신을 보냈다.
-저는 조칙을 받들어 불의를 주멸하고 있습니다. 항복하는 자에게는 그 죄를 용서하여 전과 같이 대우하고, 항복치 않는 자는 주멸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왕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교서왕은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그래서 편지 대신 직접 한군의 누벽으로 접근해 가서 머리를 땅에다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나 유앙은 한나라의 법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으며 천하 백성을 놀라게 했으며 또한 장군을 괴롭혀 궁벽한 먼 나라에까지 오시게 했습니다. 저해(人肉을 잘게 썰어 젓담그는 형벌, 또는 짓이겨 죽이는 형벌)의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궁고후는 굳이 군을 지휘하는 종과 북을 쥐고서 말했다. "군사(軍事)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우선 병사를 동원하게 된 경위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왕은 절하고 무릎으로 걸어나와 대답했다. "조착은 천자의 정권을 대행하는 신하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자가 고조황제께서 정하신 법령을 함부로 변경해 제후들의 영지를 침탈했습니다. 저희들은 그것이 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7국이 병사를 동원해, 천하를 교란시키는 그의 정책을 응징해 장차 조착을 죽이려고 거사했던 바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들으니 조착이 이미 주살되었다고 하므로 저희들은 삼가 군대를 해산하고 귀국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퇴당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왕께서는 그토록 조착이 좋지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셨다면서 어찌 한 번도 폐하께 상주하지 않으셨는지요." "그것은 오왕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조칙도 없었고 호부(虎符:出兵을 허락하는 割符)도 없었을 텐데 제멋대로 군사를 동원해 어찌 정의를 수호하는 나라를 쳤지요. 결국 이러한 점들로 판단해 본다면 왕의 참뜻은 조착을 주살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교서왕은 할 말이 없었다. "아니되겠습니다. 조서를 읽어드릴 터이니 모두 들은 후 왕 스스로가 자신을 도모하기 바랍니다." 퇴당이 조서를 꺼내 교서왕에게 읽어주자 그는 체념한 듯했다. "그렇습니다. 나같은 인간은 죽어도 죄가 남겠습니다." 드디어 유앙은 자살했다. 태후도 태자도 죽었다.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도 모두 죽었다. 이러한 나라들은 모조리 몰수되어 한나라의 직할지로 편입되었다. 장군 역기도 조나라를 포위해 10개월 만에 항복시켰다. 결국 조왕도 자살했다. 제북왕은 협박을 당해 반란군에 가맹했고 또 신하에 의해 감금되어 있었으므로 죽음을 면한 채 치천왕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초에 오왕이 주모자로서 반란을 일으켰다. 초군을 병합 통솔하고 제나라, 조나라 등을 연합해 결국 1월에 기병해서는 3월에는 완전히 패한 꼴이 되었다. 오로지 조나라만 10개월을 버티다가 뒤늦게 항복한 것이다. 또 초의 원왕 유교(劉交)의 작은 아들 평륙후(平陸侯) 유례(劉禮)를 초왕으로 삼아 원왕 유교의 뒤를 잇게 해 주었고, 여남왕(汝南王) 유비(劉非)를 오의 옛 땅으로 옮겨 강도왕(江都王)의 칭호를 주었다. 이로써 오, 초 7국의 대란은 정리가 되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오왕 유비가 왕이 된 것은 그의 부친인 대왕(代王)의 죄를 덜어준 데서 기인한다. 그는 부세를 경감하고 민중을 사역해 산해(山海)의 자원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래서 교만해졌다. 반역의 싹은 그의 아들에게서 텄다. 쌍륙을 치다가 재난을 일으켜 자기 본가(本家)를 멸망시킨 꼴이다. 오왕은 만족인 동월과 친근해 종실인 한나라를 전복하려다가 오히려 멸망한 것이다. 조착은 국가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세웠다가 도리어 자신이 화를 입었고, 원앙은 권모술수로 처음에는 총애를 받았으나 뒤에는 욕된 생애를 보냈다. 옛말에, '제후의 영지는 사방 백 리를 넘어서도 안 되고, 산해(山海)의 자원이 있는 곳에 제후를 봉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예기(禮記)>의 '왕제편(王制鞭)']. 또, '이적(夷狄)과 가까이 하느라 친족을 멀리하지 말라[출처 미상]'고 돼 있는데 이는 오나라의 경우를 두고 말함인가. 또한 '권모술수의 주동자가 되지 말라. 도리어 그 허물을 입게 될 것이다 [<주서(周書)>]'고 돼 있는데, 이것은 원앙과 조착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