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45. 편작, 창공열전(扁鵲, 倉公列傳)
편작은 의술을 논해 의술(醫術)의 조상이 되었다. 음양(陰陽)과 수리(數理)에 기초를 둔 진단과 치료법은 정밀, 명확하여 후세의 의원들이 그 원리를 따라 정리하면서도 그 근본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리고 태창공(太倉公)은 편작에 가까운 명의(名醫)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45에 <편작, 창공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편작(扁鵲)은 발해군(勃海郡) 정현(鄭縣:河北省) 사람이다. 성은 진씨(秦氏)이며 이름은 월인(越人)이다. 젊었을 적에는 남의 사장(舍長:빈객을 숙박시키는 관사의 지배인)으로 있었다. 손님 중에 장상군(長桑君)이라는 노인이 자주 들르곤 했는데 여러 사인들 중에서 오직 편작만이 그가 기인(奇人)인 것을 감지하고 공손하게 대해 주었다. 장상군 역시 편작이 영특한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상군이 객사로 출입한 지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편작을 긴밀히 불렀다. "나는 비방(秘方)의 의술(醫術)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젠 나이도 먹어 누구에겐가 비법을 전수(傳授)코자 했는데 바로 그대를 선택했다. 받겠느냐?" "저에게요?" "천기(天機)이니 누설(漏泄)하지 말라!" "삼가 가르침대로 하겠습니다." 장상군은 품속으로부터 알약 한 알을 꺼냈다. "이것을 상지수(上池水:땅에 떨어지지 않은 물, 즉 이슬이나 竹木上의 물)와 함께 먹으라. 30일이 지나면 네 눈으로 괴이한 물상(物象)을 보게 되리라.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약이니 정성으로 먹으라." 그런 다음 장상군은 비방들이 적힌 의술서(醫術書)들을 꺼내 주면서 말했다. "많이 공부하고 많이 보태거라." 자신의 모든 재산을 편작에게 떠맡긴 장상군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거동이 지상의 인간이 아닌 듯이 느껴졌다. 편작은 이튿날 상지수를 받아 약을 삼켰다. 한 달이 지나자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아, 이것들이 무언가!" 담장 너머로 지나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런 눈으로 환자를 본즉 오장(五臟) 안의 기혈(氣血)이 엉키고 뭉친 것 등 병의 원인이 되는 그 소재(所在)를 환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천기누설이라 맥(脈)을 짚어 본 다음 명목상으로 병상(病狀)을 안다고만 말해 두었다. 그래서 그 날로 의사가 되어 제(祭)나라로 가기도 하고 조(趙)나라에 가 있기도 했다. 편작의 의술이 하도 뛰어나 조나라 사람들은 그를 편작(扁鵲:黃帝時의 名醫名)이라 불렀다.
진(晋)나라의 소공(昭公:定公의 잘못인 듯하다) 때에는 여러 대부(大夫)들의 세력이 공족(公族)들보다 강했다. 그때 조간자(趙簡子)가 대부가 되어 국사를 전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병이 나서 닷새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 걱정에 빠진 대부들이 편작을 초청했다. 한참 동안 조간자의 방에서 진찰을 하던 편작을 조간자의 가신 동안자(董安子)가 밖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증상을 물었다. "혈맥은 정상이오. 그런데도 인사불성(人事不省)이니 괴이한 일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주인께선 깨어나지 못하시는 겁니까?" "옛날 진(秦)의 목공(穆公)이 이런 상태로 죽었다가 이레 만에 깨어난 적이 있소. 그때 목공은 깨어나서 대부 공손지(公孫支)와 자여(子輿)에게 이런 말을 했소. '내가 7일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있었소?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동안 나는 천제(天帝)한테 갔었는데 매우 즐겁고 유익한 시간들이었소. 천제는 나에게 어떤 계시를 줍디다. '진(晋)은 장차 크게 어지러워져서 5대(五代) 동안은 안정되지 못한다. 그 후에는 패자(覇者)가 될 것이나 패자 문공(文公)은 늙기 전에 죽을 것이고 아들 양공(襄公)은 비록 천하를 호령하게 되나 음란해서 남녀의 구별이 없게 만들 것'이라 했소.' 공손지가 그 말을 적어 간직해 두었는데 <진책(秦策)>이라는 예언서는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오. 사실상 진(晋)에서는 헌공(獻公) 때에 내란이 있었고 문공은 패자가 됐고 양공은 효(河南省)에서 진(秦)의 군사를 격파하고 돌아와 마음껏 음란을 즐겼음은 그대도 들은 바와 같소. 지금 그대의 주인 조간자의 병세도 그와 꼭 같소. 그러니 사흘이 채 못 가 그는 반드시 깨어날 것이오. 회복되면 그가 반드시 무슨 말을 할 것이니 잘 들어 두시오." 편작이 떠나고 이틀 반이 지났다. 조간자가 과연 깨어나더니 여러 대부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휴우, 긴 여행이었소. 그동안 나는 천제에게 갔었는데 매우 즐겁고 유익한 시간들이었소." "어떻게 즐거웠고 유익했습니까?" "백신(百神)과 함께 중천(中天)에서 노닐 때 많은 악기들이 연주되고 있었는데, 춤도 있었소. 구주(九奏)의 음악과 만무(萬舞)의 무용이었소. 하, 은, 주 삼대의 무악은 아니었던 것 같소. 그러나 그 소리는 무척 감동적이었소. 한 마리의 곰이 나타나 나를 물어가려 했는데, 천제가 나더러 그 곰을 쏘라 명령했소. 그래서 나는 활로 그 곰을 쏘아 명중시켜 죽였소. 아, 그런데 이번에는 또 갈색곰[熊] 한 마리가 나타나는 게 아니겠소. 이번에도 내가 쏘아 죽였더니 천제는 몹시 기뻐하며 나에게 한 쌍인 네모난 상자 두 개를 하사합디다. 또 내 아들이 천제 옆에 서 있었는데, 천제는 내게 북적종(北狄種)의 개 한 마리를 맡기면서 '이 애가 성장하면 이 개를 주어라'고 말씀하셨소. 또 '진국(晋國)은 대대로 쇠약해져서 7대에 멸망할 것이며, 영성(秦의 王姓인 趙씨의 本姓)이 장차 강대해져서 주(周)의 일족인 위국(衛國)을 범괴(范魁:位置未詳)에서 격파할 것이다. 조나라 또한 국가를 보유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소." "무슨 의미일까요?" "모르겠소. 다만 그런 일이 있었소." 동안자가 그 말을 기록해 보관했다. 그리고 편작이 한 말을 조간자에게 낱낱이 보고하니 조간자는 몹시 놀랐다. 그래서 조간자는 편작을 불러 땅 4만 무(畝)를 상으로 주었다. 그 후 편작이 괵(괵나라는 셋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모두 멸망하고 없었다. 이토록 年代가 맞지 않은 것은 편작이 반쯤은 전설적 인물임을 말해 준다)나라를 방문했는데 태자가 방금 죽었다는 것이었다. 편작은 궁문 밑으로 다가가 의술에 관심이 많은 중서자(中庶子:官名) 하나를 만나서 말했다. "태자는 어떤 병을 앓다 죽었소? 온 나라가 태자의 병을 쫓느라고 그 기도가 예사롭지 않던데요."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태자의 병은 혈기의 운행이 불규칙하여 숨결이 뒤엉켜 있다가 갑자기 폭발하는 통에 몸 안이 상했습니다. 정기(精氣)가 사기(邪氣)를 누를 수가 없어 사기가 체내에 쌓이자 양기(陽氣)의 작용이 느려졌으며 이에 음기(陰氣)의 작용이 급증해 갑자기 역상(逆上)하여 죽었습니다." "죽은 게 언제요?" "닭이 울 무렵이었습니다." "입관(入棺)했소?" "아직 안 했습니다. 죽은 지가 반 나절도 안 됐으니......" "나는 제나라 발해군의 진월인(秦越人)이라는 사람이오. 집이 정(鄭)나라에 있어 태자를 모실 기회를 갖지 못하였소. 지금 듣자 하니 태자께선 불행히도 돌아가신 것으로 들었소만, 내가 태자를 소생시킬 수 있을 것 같소이다." "그토록 근거 없는 말씀 하시는 게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리자는 겁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아주 옛날 유부(黃帝時의 名醫)도 병을 치료할 때는 탕약(湯藥), 주류(酒類), 석침(石針), 수족(手足)의 굴신(屈伸), 안마(按摩), 고약(膏藥) 같은 것을 쓰지 않고 한 번 환자의 의복을 벗겨 병의 증상을 확인한 후 오장의 수혈(오장의 맥이 모이는 곳으로 침놓는 등의 要點)의 상태를 보고 피부를 갈라 살을 헤쳐 막혔던 맥을 터놓고 끊어진 힘줄을 연결하고 골수나 뇌수를 누르며 망막(盲膜:오장간의 격중막)을 바로잡고 장이나 위를 씻어내고 정기(精氣)를 다스리고 신체를 조정했다고 합니다. 그런 분도 그토록 복잡한 방법을 써서 의술을 시행하셨거늘 당신은 태자의 시신을 보기도 전에 다짜고짜 살려내겠다고 덤비시니 아마 어린애라도 그 말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보여 주기나 하시오." "일 없소이다. 매맞고 쫓겨나기 전에 어서 돌아가십시오." 그런 실랑이를 하는 동안 해는 벌써 저물었다. 편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당신이 말하는 의술이란 것은 대롱을 통해 하늘을 보고 작은 틈새로 무늬를 살피는 것 같아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소. 나의 의술은 진맥을 하거나 안색을 살피거나 음성을 들어 보거나 외양을 살펴서 병의 소재를 알아내는 방법을 쓰지 않소. 나는 양(陽:바깥의 상태)을 들으면 음(陰:속)을 알고 음을 들으면 양을 짐작할 수가 있소. 병의 증상이란 수차례 표면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먼 곳까지 가서 진찰하지 않고 듣는 것만으로도 진단할 수 있소.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지금 즉시 시험삼아 궁으로 들어가 태자를 진찰해 보시오. 귀에서 소리가 날 것이고 코가 부어오르는 소리가 들릴 것이며 그의 허벅지를 주물러 음부에 이르면 아직도 온기가 있음을 알 것이오. 그래서 태자는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이오." 중서자는 편작의 말을 듣자 한참 동안 현기증을 느끼듯 눈을 껌벅이지 못했고 혀가 굳어진 듯 말을 하지 못했다. 궁중으로 급히 들어가 괵군에게 편작의 말을 전했다. "일찍이 선생의 명성은 들었으나 만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소국(小國)을 방문하시어 태자의 병환을 거론해 주시니 천만 다행입니다. 자칫 선생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태자와는 영원히 작별할 뻔했습니다." 괵군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울음부터 터뜨렸다. 편작은 곧 태자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갔다. "태자와 같은 병세를 소위 시궐(피가 거꾸로 치솟아 죽은 것처럼 보이는 병)이라 합니다. 대체로 양기가 내려가 음기 속으로 들어가서 이것이 위(胃)에 작용해 양맥과 음맥에 엉키고 갈려서 삼초(三焦:上, 中, 下焦로 음식물의 통로) 중에서 하초인 방광(膀胱)으로 내려갑니다. 이래서 양맥은 밑으로 내려오고 음맥은 위로 향하여 다투어 팔회(八會:신체 내의 氣가 모이는 곳)가 막혀 통하지 않으며 음기는 위로 올라가고 양기는 안으로 돌아 밑으로 내려가 신체 하부에서 요동치더라도 위로 올라가지를 못합니다. 위로 올라간 음기는 올라간 상태인 채여서 또한 음의 작용을 못 하지요. 결국 위로는 양기가 끊어진 낙맥이 있고 밑으로는 음기가 파손된 적맥(赤脈)이 있어 음양의 조화가 무너진 채 살아 있는 빛이 없어져 이런 맥의 어지러움 때문에 몸이 움직이지를 못하여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태자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았다면 살 수가 있겠구려." "대체로 양기가 음기로 들어가서 오장을 비춰주면 살고 음기가 양기로 들어가 오장을 비춰주면 죽습니다. 이런 이법(理法)은 오장이 체내에서 역상(逆上)할 때 갑자기 일어나는 것입니다. 명의(名醫)는 이런 이법을 믿습니다만 돌팔이는 의심하지요." 편작은 그런 후 곧 제자 자양(子陽)을 시켜 침(鍼)을 숫돌에다 갈게 한 뒤, 그것으로 태자 신체의 표면에 있는 삼양(三陽:手足에 각각 있는 太陽, 少陽, 陽明)과 오회(五會:오장으로 통하는 百會, 胸倉, 聽會, 氣合, 수회)에 침을 주었다. 잠시 후에 태자는 소생했다. 또 편작은 제자 자표(子豹)를 시켜 오분(五分)의 고약을 만들고 팔감(八減)의 약제를 만들어 태자의 양쪽 겨드랑이 밑에 번갈아 붙였다. 태자가 일어나 앉게 되었다. 다시 음양을 조절해 탕약을 복용시키자 20일쯤 후에는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그렇게 되자 세상 사람들은 편작이 죽은 사람을 소생시킬 수 있는 명의라고 칭송했다. 그러자 편작이 대답했다. "내가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라 살 수 있는 사람을 내가 일어나게 했을 뿐이다."
편작이 제(齊)나라에 들렀을 때였다. 환후(桓侯:田和의 아들 田午)가 그를 빈객으로 초청했다. 입궁해 환후의 얼굴을 살핀 편작은 깜짝 놀랐다. "전하한테는 병이 있습니다. 아직은 피부와 살 사이에 있어 치료하면 간단히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나한테 병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소. 이토록 건장한데." 환후는 웃어넘겼다. 편작이 떠난 뒤 환후는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욕심 많은 의사로군. 아무 병도 없는 사람을 치료해 돈을 벌려 하다니." 닷새가 지나 편작이 다시 환후를 만났다. "전하의 병이 지금 혈맥(血脈) 속에 있습니다. 더욱 깊이 들어가기 전에 서둘러 치료하셔야 합니다." "내게는 병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소!" 환후는 불쾌한 목소리로 되쏘았다. 편작은 물러갔다. 닷새가 지나서 편작은 다시 환후를 만나러 갔다. "전하의 병이 지금 장(腸)과 위(胃) 사이에 있습니다.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더욱 깊어지겠습니다." 이번에는 대꾸조차 않았다. 편작이 물러가자 환후는 몹시 기분 언짢아했다. 닷새 후에 편작은 다시 환후를 만나러 갔다. 이번에는 편작이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자 환후가 비꼬듯이 물었다. "오늘은 내 병이 어디쯤 있소?" 그러나 편작은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편작이 떠나갔다. 제자들에게 말했다. "병이 피부와 살 사이에 있을 동안에는 탕약이나 고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 혈맥(血脈)에 있을 때에는 쇠바늘이나 석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 장(腸)이나 위 사이에 병이 있을 때는 주료(술로 조린 藥)로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골수로 들어가면 사명(司命:인간의 生命을 좌우하는 星名)이라도 어쩔 수가 없다. 지금 환후의 병은 골수에 들어 있다." 그 후 닷새가 지나자 환후는 정작 앓게 되었다. 그래서 편작을 불렀다. 그러나 편작은 그때쯤 이미 도망친 후였고, 얼마 후 환후는 죽었다. 사람[원문에는 聖人으로 되어 있으나 타당치 않다. 聖은 衍文인 듯하다]이 미미한 병의 증후를 미리 알아서 명의에게 치료를 받으면 고칠 수 있으며 몸은 살아날 수 있다. 사람이 걱정하는 바는 병이 많다는 것이고 의사가 걱정하는 것은 치료법이 적다는 점이다. 때문에 병에는 6가지 불치의 병이 있다. 그 첫째가 교만방자하여 도리(道理)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 몸을 경시하고 재물을 중시하는 것이다. 셋째는 의식(衣食)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는 일이다. 넷째는 음양이 오장 가운데에 함께 있어 혈기가 안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몸이 쇠약해 약을 복용할 수 없는 것이다. 끝으로 무당만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이 여섯째 불치병이다. 편작의 명성은 천하에 퍼졌다. 한단으로 갔더니 거기서는 부인을 존중한다는 말을 듣고 부인병 의사 노릇을 했다. 주(周)의 수도 낙양으로 갔더니 주나라 사람들이 노인을 존중한다는 말을 듣고 거기서는 귀, 눈, 신경통, 수족냉증 의사가 되었다. 진(秦)의 수도 함양으로 들어가자 진나라 사람들은 아이들을 사랑한다기에 소아과 의사 노릇을 했다. 편작은 이토록 의사로서 그 지방의 습속에 따라 적응했다. 진(秦)나라 태의령(太醫令:待醫長) 이혜(李醯)는 자신의 기량이 편작만 못한 것을 알자 사람을 시켜 그를 척살했다. 지금까지 천하에서 진맥을 하는 자는 모두 편작의 수법에 따르고 있다.
태창공(太倉公)은 제(齊)의 태창(太倉:국가의 곡물 창고)의 장관(長官)으로 임치(山東省) 사람이다. 성은 순우(淳于)씨이며 이름은 의(意)이고 젊어서 의술을 좋아했다. 고후(高后) 8년에 같은 고을 원리(元里)의 공승(公乘:제8위의 爵名) 벼슬하고 양경(陽慶)에게 사사했다. 양경은 나이 70여 세로 아들이 없었다. 양경은 순우의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의술을 모두 버리게 하고 다시 비방의 의술을 모조리 가르친 후 황제(皇帝), 편작의 맥서(脈書)를 전수했다. 이로써 순우의는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고 오색(五色)으로 오장의 병을 진단하고, 병자가 죽을지 살지를 짐작하고, 의심나는 곳을 발견해 치료법을 결정했다. 또 약론(藥論)에도 매우 정통하게 되었다. 가르침을 받은 지 3년이 되자 남을 위해 병을 치료해 주고 죽을지 살지를 판단했더니 그 결과가 좋았다. 그러나 그는 여러 제후국으로 가서 노닐기나 하며 자기집에 안주하지 못했으며 의사이면서도 환자를 치료해 주지 않아 환자들이 그를 원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효문제 13년[원문에는 4년이나 이것은 잘못]에 어떤 사람이 순우의를 고발하자 그는 역전거(驛傳車)에 실려 장안으로 호송되게 되었다. 순우의에게는 다섯 명의 딸이 있어 그에게 매달려 울자 순우의가 꾸짖었다. "자식을 낳아도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위급을 당해도 도움될 만한 놈이 없구나!" 그러자 막내딸 제영이 부친의 말에 상심하면서도 끝내 따라가서는 상서했다.
-저의 부친이 관리였을 적에 제나라에서는 청렴하고 공평무사하다 하여 칭찬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법에 저촉되어 죽게 되었으니 제가 애통해 하는 바는 몸이 죽어 다시 뵈올 수가 없고 잘못을 고쳐 새 길을 걸으려 해도 그럴 방법이 없게 되었으니 그것이 서러울 뿐입니다. 차제에 제가 애원하는 바는 제 몸을 관비(官婢)로 삼아 부친의 형벌을 속죄하여 부친께서 과거를 뉘우치고 새 인생길을 걷도록 해 주십사 하는 바입니다.
상서문을 들은 황제는 그 뜻을 가엾게 여겨 순우의의 죄를 용서하고 나아가 그 해에 육형법(肉刑法)도 폐지시켜 버렸다. [以下는 창공(倉公) 자신의 手記로 사마천의 손을 거치지 않고 後人이 덧붙인 것이라 한다.]
나 순우의가 석방되어 은거하고 있을 때 주상께서는 초서를 내려 여러 가지를 물으셨다. -그대의 의술 가운데 능통한 것은 무엇이며, 잘 치료할 수 있는 병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의서(醫書)는 가지고 있는가 혹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어디서 누구한테 의술을 배웠으며 공부는 몇 해나 했는가. 일찍이 효험을 본 환자는 무슨 현(縣) 무슨 리(里)의 누구이며 무슨 병이었는가. 의술과 약제가 그 병을 낫게 한 상황은 어떠했는가. 모두 소상히 대답하라. 그래서 나 순우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의약(醫藥)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의약 의술을 실지로 시험해 보니 효험을 보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26세 때인 고후(高后) 8년에 저의 스승인 임치현 원리의 공승 양경을 다행히도 뵐 수가 있었습니다. 양경은 나이 70여 세로 저를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분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가진 의술에 관한 책은 모조리 버려라. 옳지 않은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래의 선인(先人)들의 의도(醫道)를 터득했으며 특히 황제(皇帝)와 편작의 맥서(脈書)를 물려받았다. 얼굴에 나타나는 5색을 보고 5장의 병을 진단하며 환자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판단해 의문점을 해결함으로써 치료법을 결정한다. 그리고 약학(藥學)의 서적에도 정통해 있다. 나는 부자이기 때문에 개업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비방의 서적 전부를 가지고 너를 가르치려 한다." 그래서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나아가 '맥서', '상경(上經)', '하경(下經)', '오색진(五色診)', '기핵술(비상용법)', '규탁음양외교(揆度陰陽外交:體外의 음양 제 조건을 헤아리는 術書)', '약론(藥論)', '석신(石神:石針의 비법)', '접음양(接陰陽:閨方術)'의 비서(秘書)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받아 읽고 이해하고 실험한 지가 한 해가 지나 다음 해쯤 시험해 본즉 약간의 효험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충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리하여 의술에 전념한 지 3년 만에 전수받은 의술로 병을 치료 진단하여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를 예측할 수 있었으며 다소는 정확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스승 양경이 작고하신 지가 10년이 되고 작고하시기 전에 3년을 사사했으니 제 나이 어언 39세가 되었습니다. -제나라 시어사(侍御史:宮名) 성(成)이 저에게 두통을 호소해 왔었습니다. 그의 맥을 짚어 보고 말했지요. "당신의 병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악성이오." 밖으로 나와 그의 동생 창(昌)에게 귀띔했지요. "이 병은 저(疽:악성 종기)로서 체내의 장(腸)과 위(胃) 사이에 나 있어 닷새 후에는 부어오르고 다시 8일 후에는 고름을 토하고 죽을 것이오." 성의 병은 음주와 과도한 방사(房事)로 얻은 것으로서 예기한 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성의 병을 알게 된 것은 그의 맥을 짚어 보고 나서였고 간기(肝氣)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간의 기운이 흐려져서 조용했습니다. 이것이 내장의 병입니다. 맥법에 따르면, '맥이 길고 팽창이 급하고 사계절에 따라 변화가 없으면 그 병인이 주로 간장에 있으며, 맥이 길어 활과 같더라도 온화하다면 그 병은 경맥(經脈)에 있고, 맥이 일시 중지했다가 다시 움직이면 낙맥에 고장이 생긴 것이고, 경맥에 병이 있으면서도 맥이 온화한 것은 그 병이 힘줄과 골수에 있는 것이고, 맥이 끊어졌다가 높아지는 것은 병이 음주와 과도한 방사에서 온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닷새 후에 부어오르고 8일 후에 고름을 토하고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맥을 짚었을 때 소양(少陽:손의 경맥의 脈所)에 맥의 막힘을 확인하고 나서였습니다. 맥의 중절이 생기는 것은 경맥에 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맥의 병이 진행되어 전신에 퍼지면 낙맥에도 고장이 생겨 이때에 소양(少陽)은 초관(初關:손의 脈所를 寸, 關, 尺으로 구분하고 關을 다시 五分으로 나눈다)의 일분(一分)에 미친 것뿐으로, 속으로 열이 있어도 고름은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5분까지 진행되면 소양의 끝에 이르러서 8일이 지나면 고름을 토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즉 소양의 관(關)은 2분 이상에 미치면 고름이 나오고 말단에 이르면 부어오르고 모두 토하고 죽는 것입니다. 열이 올라가면 양명(陽明: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의 밑부분)이 타고, 그 염증이 낙맥으로 전달되어 낙맥에 염증을 일으키면 맥이 울결(鬱結)하고 맥이 울결하면 염증은 사라집니다. 이래서 낙맥이 발열을 되풀이하면 열기가 위로 올라가 머리에 도달하게 되어 염증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두통이 오지요.
-제나라 왕 중자(中子)의 아기 보는 사람이 병에 걸려 저를 불러서는 그의 맥을 짚어 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격의 병[氣가 흉격(胸膈)으로 모여드는 病]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기가 울렁거려 음식물이 내려가지 않고 때때로 거품을 토합니다. 이 병은 어릴 적부터 근심거리가 있는데도 억지로 먹는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즉시로 하기탕(下氣湯)을 조제해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루 만에 기가 내려가고 이틀 만에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며 사흘 만에 완쾌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병을 알아내게 된 것은 그의 맥을 짚었더니 심기(心氣)가 혼탁해 조급하게 흔들리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낙맥에 양기(陽氣)가 섞이는 병입니다. 맥법에 이르면, '맥이 급하게 뛰다가 갑자기 느려졌다 하여 일정하지 못한 것은 그 병이 주로 심장에 있다. 전신에서 열이 나고 맥박이 높은 것을 중양(重陽)이라 하는데 중양은 심장을 자극해 기가 울렁거려서 음식이 내려가지 않아 낙맥에 고장이 생긴 증상이다. 낙맥에 고장이 생기면 피가 치솟아 출혈하게 된다. 출혈하게 되면 죽는다. 이것은 슬픈 마음에서 생긴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나라 낭중령 순(循)이 병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은 모두 그의 기가 심장으로 거슬러 들어가 자극하는 것으로 진단했습니다. 저는 그를 진찰한 뒤 일러주었습니다. '이 병은 대소변을 잘 보지 못하는 병이오.' 그랬더니 순이 말합디다. '사실 대소변을 못본 지가 사흘이 됐소.' 그래서 저는 화제탕(火齊湯)을 지어 먹였습니다. 순은 한 번 먹고 소변이 통하고 두 번 먹고 대변이 통하고 세 번 먹고 완쾌되었습니다. 이 병은 과로한 방사(房事)에서 얻은 것입니다. 제가 이 병을 알아낸 것은 그의 맥을 짚었을 때 오른손 맥의 촌구(寸口:엄지손가락 밑뿌리에서 한 치 내려온 곳)의 기가 급해 오장의 기를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며 오른쪽 촌구의 맥박이 거칠고 빨랐기 때문입니다. 맥이 빠르면 몸의 중앙부와 하부(下部)가 뜨겁게 끓어오릅니다. 왼손 촌구를 아래로 하고 오른손 촌구를 위로 하는 것들인데 모두 오장의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용선이라고 한 것입니다. 중앙부에 열이 났으므로 오줌 빛깔이 붉었던 것입니다.
-제나라 중어부(中御府:宮中 衣類를 담당하는 부서)의 책임자인 신(信)이 병들었을 때 제가 들어가 진맥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병의 기운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위에 땀을 흘리니 맥이 약간 쇠약해 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습니다. 보아하니 흐르는 찬물에 목욕한 것이 화근인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신이 대답합디다. '그렇습니다, 지난 겨울 왕명으로 초(楚)에 사신갔다가 거현(山東省)의 양주수(陽周水)에 이르렀는데 다리가 크게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머뭇거리는 순간 놀란 말이 물 속으로 빠지는 통에 저도 빠졌지요. 죽을 뻔한 것을 관리들이 건져주어 살아났습니다만 옷이 흠뻑 젖었지요. 얼마 후 한기가 엄습했고 곧 불덩이 같은 열이 났었지요. 지금도 한기를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디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화제탕을 달여먹여 열을 내리게 했습니다. 이를 한 번 마시니 땀이 그쳤고 두 번 마시니 열이 없어지고 세 번 마셔서 완쾌되었습니다. 약을 먹은 지 그럭저럭 20일이 지나자 몸에는 병이 없어졌습니다. 제가 신의 병을 알게 된 까닭은 그를 진맥했을 때 양기가 음기에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백서에 따르면 '열병으로 양기와 음기가 붙어 떨어지지 않으면 죽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맥을 짚어보니 음양이 교차되지 않고 양기가 음기에 붙어 있었습니다. 양기가 음기에 붙어 있는 경우에는 맥이 순조롭고 평안해 병은 나을 수 있습니다. 그 열이 가시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신기(腎氣)가 가끔 탁해지는 수는 있었으나 태음(太陰:手太陰, 足太陰이 있다)의 맥구(脈口)에 와 있어 그것은 수기(水氣)로서 말할 것도 없이 물을 주재하는 신장을 통해 그 병을 알아냈습니다. 만약 치료가 조금이라도 늦어졌더라면 한열병(寒熱病:한기와 열기가 번갈아 일어나는 병)을 앓을 뻔했습니다.
-제나라 왕의 태후(太后)가 병에 걸려 저를 불러 맥을 보게 했습니다. '이것은 풍단(열병의 일종)이 잠시 방광(膀胱)에 머무른 것이고 대소변이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 소변이 붉지요' 하고 제가 말한 뒤, 화제탕을 먹였습니다. 태후는 한 번 먹고 대소변을 잘 보고 두 번 먹고 완쾌했습니다. 소변도 전처럼 제 색깔로 돌아왔습니다. 이 병은 땀을 흘린 뒤 그대로 말린 데서 온 것입니다. 그대로 말렸다는 말은 젖은 옷을 벗어 몸의 땀을 닦아버리지 않고 그대로 옷을 입은 채 말렸다는 뜻입니다. 태후의 병을 알아내게 된 것은 그녀의 맥을 짚었을 때 태음(太陰)의 맥구를 눌러본즉 축축한 풍기(風氣)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맥법에 따르면, '손끝으로 맥을 강하게 누르면 크고 굳으며, 가볍게 누르면 크고 강하다. 이 경우 병은 주로 신장에 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태후의 맥을 보니 신장의 병과는 달리 맥이 크고 조급했습니다. 큰 것은 방광의 기이며 조급한 것은 체내에 열이 있는 탓으로 그래서 소변이 붉었던 것입니다.
-제나라 장무리(章武里:山東省)에 사는 조산부라는 사람이 병에 걸렸습니다. 저는 맥을 짚어보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폐(肺)의 소단(폐맥이 위축하는 병)입니다. 게다가 한열병까지 병발했습니다.' 그래서 집안 사람들에게 귀띔했습니다. '환자는 죽을 것입니다. 고칠 수도 없으니, 환자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모두 해 주시오. 치료할 수도 없소이다.' 의법(醫法)에도, '3일 후에는 발광할 것이다. 그는 무작정 일어나 달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5일 후에는 사망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는 예기한 대로 그대로 죽었습니다. 조산부의 병은 격노한 상태로 방사를 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제가 그의 병을 알아내게 된 것은 맥을 짚었을 때 폐기(肺氣)에 열이 있음을 발견하면서였습니다. 맥법에 '맥박이 평상이 못 되고 힘차지 못한 것은 몸이 쇠약한 까닭이다'라고 돼 있습니다만 이것은 오장 중에서 위로는 폐장에서 아래로 간장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병에 걸려 있다는 뜻이 됩니다. 조산부의 맥은 평상이 아니었고 끊어져 있었습니다. 정상이 아니면 피는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 없고, 막히게 되면 때때로 상하좌우에서 뒤얽혀 뛰며 갑자기 조급해졌다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간과 폐의 양 낙맥이 끊어졌기 때문으로 죽는 것이 당연하며 고칠 수도 없습니다. 한열병까지 병발한 까닭은 병자가 시탈(尸奪:시체처럼 육체가 쇠약해지는 것)했기 때문입니다. 극도로 쇠약한 자에게는 뜸이나 석침을 놓을 수도 없고 극약(劇藥)을 먹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왕진하기 전에 제나라 태의가 먼저 조산부의 병을 진단하고 그의 발 소양(少陽)의 맥구에 뜸을 놓고 반하환(半夏丸)을 먹였는데 병자는 즉시 설사했으며 그로 인해 공복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소음맥(少陰脈)에 뜸을 놓았더군요. 이래서 아주 간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환자의 기를 거듭 망가뜨렸기 때문에 한열병까지 병발했던 것입니다. 3일 후 발병할 것이라 한 것은 간의 한 맥락이 유방 밑 양명(陽明:胃의 낙맥)에 연결되어 있어 그 낙맥이 끊어지면 양명맥에 구멍이 뚫려 그 손상으로 인해 발병하고 달려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일 후에 죽는다고 한 것은 간장과 심장의 거리는 5분(五分)인데 닷새면 도착합니다. 도달하면 죽게 되는 것이지요.
-제나라 중위(中尉) 반만여(潘滿茹)가 하복부에 복통을 일으켰을 때 제가 그의 맥을 짚었지요. '이것은 유적하(오랫동안 누적되어 장에 덩어리가 생긴 병)라는 거요'라고 말했지요. 그런 후 제나라 태복 요(饒)와 내사 요(繇)에게 귀띔했지요. '중위가 스스로 방사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으면 30일 안으로 죽습니다.' 과연 그는 피섞인 소변을 보고는 20일 만에 죽었습니다. 이 병은 음주와 방사의 과도에서 온 것입니다. 반만여의 병을 알아내게 된 것은 그의 맥을 짚어보니 맥이 깊은 곳에서는 미약하게 뛰다가도 갑자기 왕성해지기도 했는데 이것은 비장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입니다. 우맥 촌구(寸口:太陰)의 기가 극히 적고 하의 기가 나타나므로 맥 각부의 숫자를 상승(相乘:左石手의 寸, 關, 尺의 6과 五分의 5를 곱한다)해본즉 30일 만에 죽게 되더군요. 삼음(三陰:少陰, 厥陰, 太陰)의 맥이 다 함께 뛰고 있으면 규정대로 30일이면 죽습니다만 함께 뛰지 않으면 기일보다 빨리 죽지요. 한 번 뛰고 한 번 끊기면 죽을 날이 가까운 것입니다. 반만여의 경우에는 삼음이 다 함께 뛰고 있었으나 피섞인 소변을 보고 앞서 말한 것처럼 죽었습니다.
-양허후(陽虛侯)의 재상 조장(趙章)이 병에 걸려 저를 불렀습니다. 다른 의사들은 모두 한중(寒中:腸이 차져서 설사가 나는 병)이라 진단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진맥한 후 '동풍)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동풍이란 먹은 음식물이 위(胃)에 머물지 않고 즉시로 내려가는 병입니다. 의법에는 '5일이면 죽는다'라고 돼 있습니다만 조장은 그 후 10일 만에 죽었습니다. 이 병도 과도한 음주에서 얻은 병입니다. 조장의 병을 알아낸 것은 그의 맥을 짚었을 때 맥이 어지럽게 뛰었습니다. 이것은 내풍(內風:설사병의 일종)의 기입니다. 음식물이 목을 넘어 위에 머물지 않고 내려가면 의법에서 닷새 만에 죽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분계법(分界法:맥 각부의 수와 5分을 곱하여 산출되는 死期)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 조장이 열흘 후에 죽은 것은 병자가 죽을 좋아해 내장이 충실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장이 충실하면 기일이 지나 죽습니다. 저의 스승 양경의 말씀에도 '병중에도 잘 먹으면 사기가 늦어지고 먹지 못하면 사기까지 가지 못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제북왕(濟北王)이 병에 걸려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그를 진맥한 후 '풍궐흉만(風蹶胸滿:열과 땀이 가슴으로 차오르는 병)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즉시 약주(藥酒)를 만들어 그것을 삼석(三石:一石은 8升弱)을 마시게 했더니 병이 완쾌되었습니다. 이 병은 땀을 흘리면서 땅에 뒹굴어 얻은 것입니다. 제북왕의 병을 알아낸 것은 맥을 짚었을 때 풍기(風氣:열이 나면서 땀을 흘리는 병)가 있었습니다. 심맥(心脈:左手의 寸口)이 흐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법(病法)에 '풍기가 양맥(陽脈)으로 들어가면 양기가 다해서 음기가 들어가고 음기가 들어가 퍼지면 한기가 오르고 열기가 내려오므로 가슴이 차오른다'고 돼 있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땅에 뒹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의 맥을 짚었을 때 음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음기가 있으면 병은 체내로 들어가 손발에 식은땀을 흘리게 됩니다.
-제나라 북궁사공(北宮司空:北宮은 姓, 司空은 官名. 三公의 한 사람)의 처 출어(出於)가 병이 들었습니다. 여러 의사들이 모두 '풍기가 체내로 들어가 병이 주로 폐장에 있다'고 생각해 그녀 발의 소양맥(少陽脈)에다 침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맥을 본 뒤, '이것은 산기(疝氣)가 일시 방광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대소변 보기가 어렵고 소변이 붉어지며 한기를 쐬면 소변을 흘리고 또 환자의 배가 붓게 됩니다'고 진단했습니다. 출어의 병은 소변을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방사를 진행한 데서 얻은 것입니다. 저가 출어의 병을 알아내게 된 것은 그녀 맥을 짚어보니 크고도 힘찼으나 느리게 뛰었습니다. 이것은 궐음(厥陰:음기가 갑자기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며 느리게 뛰는 것은 산기가 일시 방광에 머물렀기 때문이고 배가 부어오른 것은 궐음의 낙맥이 아랫배에 연결되어 고장이 생겨 연결되어 고장이 생겨 연결점이 움직여 배가 부어오르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즉시 그녀 발의 궐음맥 좌우 각각 한 군데씩 뜸을 떴습니다. 그랬더니 소변을 흘리지 않게 되고 또 색깔도 밝아졌으며 아랫배의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화제탕을 달여먹었더니 3일 만에 산기는 흩어지고 완쾌되었습니다.
-전 제북왕의 유모가 발에 열이 나서 견딜 수 없다고 호소해 왔습니다. '열기가 갑자기 거슬러 올라가는 병입니다' 하고 말하고는 양 발의 족심(足心:발바닥의 땅에 닿지 않는 곳)에 각각 세 군데씩 침을 놓고 손끝으로 눌러 피가 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병은 조금 후 완쾌했습니다. 이 병은 술을 마시고 만취한 데서 얻은 것입니다.
-제북왕이 저를 불러 시녀에서 여종에 이르기까지 맥을 보게 했습니다. 한 여종은 자신은 병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궁의 장(長)에게 말했습니다. '저 하녀는 비장이 상해 있으니 피로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의법에 따르면 그대로 두었다가는 봄이 되면 피를 토하고 죽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또 왕에게도 물었지요. '저 여종은 무슨 재주를 가지고 있지요?' 왕이 대답합디다. '저 아이는 방술을 좋아하오. 기술도 좋을 뿐 아니라 새로운 기법도 잘 만들어내요. 작년에 민간에서 4백8십만 전을 주고 사들였소. 5인조가 한 짝이오. 병은 없겠소?' '저 하녀의 병은 중합니다. 병법대로라면 죽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왕이 하녀의 안색을 살피더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다른 제후에게 팔아넘기지 않았습니다. 봄이 되어 그녀는 칼을 받들고 왕을 따라 측간으로 갔는데 왕이 나왔는데도 하녀가 나오지 않아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더니 그녀는 피를 토하고 측간에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이 병은 땀을 과도하게 흘린 데서 얻었습니다. 땀을 과도하게 흘리면 병법에서는 체내에서 병이 무겁게 되어 모발은 싱싱하고 안색은 빛나며 맥박도 정상이라 밖으로 보이지만 않을 뿐 속으로는 병들어 있었을 뿐입니다.
-제나라 중대부(中大夫)가 충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왼쪽 양명맥(陽明脈)에 뜸을 뜨고 즉시 고삼탕(苦參湯)을 달여 하루 석 되씩 양치질을 하게 했더니 5, 6일 전후에서 병이 완쾌되었습니다. 이 병은 바람을 쐬거나 입을 벌리고 자거나 식사 후 양치질을 하지 않은 데서 얻은 것입니다.
-치천왕의 애첩이 임신했으나 아이를 분만하지 못해 저를 부르러 왔습니다. 왕진해서는 낭탕약(낭탕자라는 약초로 만든 약) 한 숟갈을 술에 타서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 후 아기를 분만했습니다. 맥을 짚어본즉 맥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맥이 혼란스럽다는 것은 남은 병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소석(消石:硝石, 通血劑)을 한 모금 먹였더니 피를 밑으로 쏟았는데 콩알 같은 것이 대여섯 알이었습니다.
-제나라 승상 가신의 종이 입조하는 주인을 따라 왔습니다. 그 노복은 규문(閨門:宮中의 小門)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었는데 안색을 살피니 병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한테 공부하러 오는 환관 평(平)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비장이 손상되어 있소. 봄이 되면 흉각이 막혀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오. 의법에 따르면 여름이 되면 밑으로 피를 쏟고 죽게 되오.' 환관 평이 즉시 승상에게로 가서 전했습니다. '승상 가신의 노복이 병에 걸려 중태입니다. 죽을 날이 가까웠습니다.' '그대가 그것을 어떻게 아오?' '창공(倉公)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승상이 가신을 불러 물었습니다. '그대의 노복의 병이 중하다고 들었는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는 건강합니다.' 그런데 그 노복은 봄부터 앓기 시작하더니 4월이 되어 밑으로 피를 쏟고 죽었습니다. 노복의 병을 알아낸 것은 비장의 기가 두루 오장의 기에 압도되어 비장에 상처를 주고 그 상처가 비장을 헤치고 들어가 섞인 것입니다. 고로 비장이 손상된 빛이 얼굴에 생기 잃은 황색과 창백한 듯 검푸른 빛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러 의사들은 회충 때문이라고만 여길 뿐 비장이 상한 것을 몰랐습니다. 봄이 되어 죽을 병이라고 한 것은 위(胃)의 기는 황색이며 황색은 오행(五行:木火土金水)으로 말해 토기(土氣)에 해당되어 토는 목(木)에 이기지 못하여 봄[五行에 木]에 죽을 병에 걸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름에 죽었습니다. 맥법에 따르면, '중병이라도 맥이 순조로우며 맑은 것을 내관(內關)이라 하는데 내관의 병은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의식도 없고 기분도 상쾌해 합병증이 있으면 중춘(中春:음력 2월 25일)에 죽을 것이나 병세가 순조로우면 봄 3개월 간은 견딘다'고 했습니다. 그가 여름 4월에 죽은 것은 진찰했을 때 병세가 순조로웠기 때문입니다. 노복의 병은 자주 과도하게 땀을 흘리고 불을 쬐고는 밖으로 나가 큰 바람을 쐬었기 때문에 얻은 것입니다.
-치천왕이 병들어 저를 불렀습니다. 진맥한 뒤 말했습니다. '기가 역상해 중태입니다. 이 때문에 두통이 오고 몸에 열이 나며 환자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즉시로 머리를 냉수로 찜질하고 좌우 양 발의 양명맥에 각각 세 군데씩 침을 놓았습니다. 조금 후 병은 쾌차했습니다. 이 병은 머리를 감고 마르기 전에 잠들어서 얻은 것입니다. 진단은 지금 말씀드린 대로이며 기가 역상해 머리에 열이 오르고 그것이 어깨에까지 미쳤습니다.
-제왕의 애첩 황희(黃姬)의 오빠 황장경(黃長卿)의 집에서 주연을 베푼다기에 저도 초대되었습니다. 객들이 착석하고 아직 요리가 나오기 전이었는데 왕후의 아우 송건(宋建)을 먼 빛으로 바라보니 안색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제가 말했지요. '당신은 지금 앓고 계십니다. 지난 4, 5일 동안 허리와 갈비뼈가 아파 엎드릴 수도 누울 수도 없었고 소변보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병은 신장까지 깊이 들어갑니다. 병이 오장으로 자리잡기 전에 고쳐야지요. 병은 방금 신장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일단 들어가면 신비(腎痺:신장의 혈기가 막혀 통하지 않는 병)가 됩니다.' 그랬더니 송건은 깜짝 놀라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래 저는 허리가 아팠는데 지난 4, 5일 전 비가 올 때 황씨 사위들이 모여 우리집 창고 부근에서 힘자랑을 했지요. 나도 지지 않으려고 무거운 네모진 돌을 들었다가 놓치고 말았습니다. 날이 저물어 허리와 등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소변도 못보고 이제는 낫지도 않습니다.' 송건의 병은 무거운 것을 들다가 얻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낸 것은 그의 안색을 보니 태양(太陽)의 맥(脈:관골 부근에 나타남) 색깔이 말라 있으며 신부(腎部)의 위에서부터 허리 아래 경계까지 4분(分)이나 되는 곳이 말라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4, 5일 전에 발병한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즉시로 유탕(柔湯:완화제)을 달여 먹였고, 18일이 지났더니 완쾌되었습니다.
-제북왕을 모시는 한녀(韓女)라는 여인이 병들어 허리와 등에 통증을 앓고 한기를 느끼며 열이 올랐습니다. 의사들은 한열병이라 했습니다만 저는 진맥 후 말했습니다. '속이 차서 월경이 순탄치 못하군요.' 그래서 즉시 음부에 약을 삽입했더니 조금 후 월경이 통하고 완쾌됐습니다. 이 병은 남성과 교접하고 싶었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한 데서 얻은 것입니다. 한녀의 병을 알아낸 것은 그녀의 맥을 짚었을 때 신맥이 가늘면서 느리고 연속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늦고 미세하고 연속되지 못하는 맥박은 단단히 뭉친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월경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간맥(肝脈:왼손 맥의 關部. 간장을 지배하며 性器에도 관계가 있다고 함)이 활처럼 팽팽했고 왼손 맥의 촌구(寸口:심장을 지배함)가 울리고 있었습니다[情欲을 발산하지 못했기 때문]. 그래서 남성과 교접하고 싶었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임치(山東省) 범리(氾里)에 사는 박오(薄吾)라는 여인이 위독해 의사들은 극심한 한열병으로 진단하고 치료를 포기하고 죽을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 제가 진맥해 보고 나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요하(배 속에 기생하는 短蟲)일 뿐이오.' 요하 증세는 배가 부풀어오르고 그 부분의 피부가 누렇게 거칠어지며 쓸어보면 꺼칠꺼칠합니다. 저는 원화(살충제)를 한 숟가락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곧 몇 되 가량의 요충을 쏟고는 완쾌되었습니다. 30일이 지나니 전과 같이 회복되었습니다. 요하를 앓게 되는 것은 한기와 습기 때문입니다. 한기와 습기가 뒤엉켜 발산되지 못하고 그것이 변해 벌레가 된 것입니다. 제가 박오의 병을 알아낸 것은 맥을 짚었을 때 그 척(尺:맥에는 寸, 關, 尺이 있고, 寸은 三分, 尺은 八分을 말함. 촌은 關上에 척은 關下에 있음)을 만져보자 기름기가 없어 찌르는 것처럼 거칠었습니다. 그러나 모발은 빛나고 아름다웠습니다. 이것은 충기(蟲氣) 때문이며 모발에 광택이 있고 내장에 사기(邪氣)가 없었다는 것은 중병이 아니라는 증거였습니다.
-제나라 사마(司馬) 순우(淳于)가 병들어 제가 진맥했습니다. '동풍을 앓고 있습니다. 음식물이 목을 넘어가면 즉시 설사해 버리는 병이지요. 이 병은 포식 후 뛰었기 때문에 생긴 거지요.' 순우가 말했습니다. '제가 왕가(王家)에 들어가 말의 간장을 실컷 먹었는데 술이 나오길래 마시지 않으려고 집으로 도망쳐 나왔지요. 그랬더니 수십 차례나 설사를 하게 됩니다.' '화제탕에 쌀즙을 타서 마시면 7, 8일이면 낫습니다.' 이때 의사 주신(奏信)이 근처에 살았는데 제가 돌아간 뒤 곁에 있던 각(閣)이라는 도위에게 슬며시 물었던 것 같습니다. '순우의가 순우 사마에게 어떤 진단을 내립디까.' '동풍이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데요.' '그 돌팔이로군. 순우사마는 의법에 따르면 9일 후에 죽는 것으로 돼 있소.' 그러나 9일이 지나도 순우사마는 죽지 않았습니다. 순우사마가 다시 불러 집으로 가서 다시 화제탕과 쌀즙을 먹였더니 7, 8일 후에는 완쾌되었습니다. 제가 그 병을 알아낸 것은 그의 맥을 짚었을 때 제가 진단한 대로 맥법에 있는 것처럼 병세가 순조로웠고, 그렇기에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나라의 중랑(中郞) 파석(破石)이 병들어 제가 진맥했습니다. '폐가 상해서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열흘 뒤 정해일(丁亥日)에 피오줌을 싸고 죽을 것입니다.' 과연 그는 11일 만에 피오줌을 싸고 죽었습니다. 파석의 병은 말에서 떨어지며 돌더미 위를 굴렀기 때문입니다. 그의 병을 알아낸 것은 맥을 짚었을 때 폐의 음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맥박이 흩어져 몇 갈래였으며 안색 또한 음기로 붉으레했습니다. 그가 말에서 떨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은 맥을 짚어 번음맥(番陰脈:음양이 역전한 陰脈)이 있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번음맥이 폐의 빈 곳으로 들어가 폐맥과 뒤섞여졌던 것입니다. 폐의 맥박이 흩어지면 아무래도 안색이 변합니다. 기일대로 죽지 않은 것은 제 스승의 말씀대로 '환자가 식사를 잘 하면 죽을 날을 넘기고 식사를 못하면 사기를 못 버틴다'가 맞았기 때문입니다. 파석은 평소 수수를 좋아했는데 수수는 폐에 좋습니다. 그래서 사기를 넘긴 것입니다. 피섞인 오줌을 보게 된 것은 진맥법에 '요양시에 한적한 장소를 좋아하는 환자는 피를 밑으로 쏟으며 죽고 떠들썩한 장소를 좋아하는 환자는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곳에서 엎드려 자던 파석은 피를 밑으로 쏟으며 죽은 것입니다.
-제나라 왕의 시의(侍醫)인 수(遂)가 병이 났습니다. 그는 스스로 5석(五石:丹砂, 雄黃, 白礬, 曾靑, 慈石 등 5종의 약명)을 조합해 복용했습니다. 때마침 제가 방문했더니 수가 말합디다. '제가 병에 걸렸소이다. 진찰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진찰한 뒤에 말했습니다. '귀공은 체내에 열이 있습니다. 의론(醫論)에서 말하기를, 체내에 열이 있으면서 소변을 보지 못하면 5석을 복용해선 안 되며, 약석(藥石)은 약으로서 너무 강해 소변이 통하지 않는다고 돼 있습니다. 속히 복용을 중지하십시오. 안색을 살피니 장차 종기가 생길 것 같습니다.' '편작은 음의 약석은 음의 병을 고치고 양의 약석은 양의 병을 고친다고 말했습니다. 무릇 약석에는 음, 양, 수(水), 화(火)의 약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체내에 열이 있으면 유화(柔和)한 음석의 약제를 만들어 치료하고 체내가 냉하면 강강(剛强)한 양석의 약제를 만들어서 치료하는 게 아닙니까.' '귀공이 논하는 바는 실정과 거리가 있습니다. 편작이 그렇게 말했더라도 환자를 세밀히 진찰하고 자[度]로 재고 되[量]로 계산하고 규(規:콤파스)로 원을 긋고 거(곡척)로 정해서 저울로 달아보는 것처럼 안색과 맥박을 종합해 표리(表裏)와 유여(有餘)와 부족(不足)과 순역(順逆)의 법에 비추어 보고 환자의 동정(動靜)과 호흡이 상응하는 상태를 참작해 비로소 치료를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약론에도, 양의 질병이 체내로 들어가고 음의 증상이 밖으로 응하여 나타나는 환자에게는 극약이나 석침을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돼 있습니다. 무릇 극약이 체내로 들어가 사기(邪氣)를 물리칠 수는 있으나 음울한 기운이 더 깊어지는 바는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진찰법에도, 이음(二陰)이 밖으로 응하고 일양(一陽)이 안에 있어 냉기가 있는 환자에게는 극약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돼 있습니다. 극약이 체내로 들어가면 양기를 발동시켜 음기의 병은 더욱 쇠해지고 양기의 병은 더욱 나타나 사기가 유동해 경맥 수혈이 거듭 곤란하게 되어 종기가 폭발하게 됩디다.' 제가 이렇게 설득한 후 백여 일 후에 가 보았더니 과연 수의 젖가슴 위로 종기가 생겼고 그것이 결분(缺盆:견갑골 안의 오목히 들어간 곳)이란 뼈에까지 들어가 결국은 죽었습니다. 이상은 논란의 개략만 적었을 뿐입니다. 의사는 반드시 통달해야 되는데 서툰 의원은 의서(醫書) 해석에 미숙해 음양관계를 곡해하여 과실을 범하게 되는 듯합니다.
-제나라 왕이 양허후(陽虛侯)였을 때 중병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모두 궐(蹶:氣가 逆上하는 병)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폐장의 비(痺)로 진단했습니다. 병근(病根)은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 있으며 크기는 잔을 엎어놓은 것만큼이나 했습니다. 환자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고 기가 역행해 식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즉시 화제탕과 죽을 먹였더니 엿새 만에 기가 진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환약을 복용시켰더니 6일 만에 병은 쾌차했습니다. 이 병은 과도한 방사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의사들이 그를 진찰했을 때 의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시킬지를 몰랐습니다만 대략 병이 있는 소재는 알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한때 안양(安陽) 무도리(武都里)의 성개방(成開方)이라는 사람을 진찰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병이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제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풍질(風疾)을 앓고 있습니다, 3년을 고생하게 되면 사지를 못쓰게 되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됩니다. 소리를 내지 못하면 죽습니다.' 이 병은 자주 술을 마시고 크게 외풍(外風)을 쐰 데서 얻은 것입니다. 성개방의 병을 알아내게 된 것은 그를 진찰할 때 스승에게서 받은 <맥법기해(脈法奇咳)>라는 의술의 비방을 적은 책에서 '오장의 기가 상반하는 자는 죽는다'라는 글에서 바로 그의 맥이 신맥과 폐맥이 상반하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의법에서는 '3년이면 죽는다'고 돼 있습니다.
-안릉(安陵:狹西省) 판리(阪里)의 공승(公乘) 항처(項處)라는 사람이 병에 걸렸습니다. 맥을 짚어보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모산(牡疝:심장의 疝氣)입니다.' 그의 모산은 흉부 아래쪽에 있으면서 위로 폐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병은 과도한 방사에서 얻은 것입니다. '삼가서 힘든 일을 하지 마십시오. 힘든 일을 하면 반드시 피를 토하고 죽습니다'고 타일렀지요. 그러나 항처가 후일 축구를 하다가 갑자기 허리에 냉기가 돌면서 땀을 흘리더니 피를 토했습니다. 저는 다시 그를 진찰했습니다. '내일 저녁에는 죽겠습니다.' 그는 예기한 대로 죽었습니다. 항처의 병을 알아내게 된 것은 그의 맥을 짚어보고 번양(番陽:음양이 역전한 陽脈)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번양이 공허한 곳으로 들어가 뒤틀리거나 엉키는 것이 모산입니다.
-이 밖에도 저는 진찰해 보고 생사를 예기, 결정한 환자 및 치료한 사람이 많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 대부분 잊어버려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아뢰지는 않겠습니다.
황제의 질문이 있었다. "그대가 진찰하고 치료한 병은 병명이 대부분 비슷하다. 그럼에도 진단이 다르고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죽지 않기도 했으니 무슨 까닭인가." "많은 병명이 흡사해 사실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옛날의 성의(聖醫)들은 자신의 맥박으로 진맥법을 만들어 도량(度量), 규거, 권형(權衡)을 정하고 법칙을 고안하고 음양을 고찰해 사람의 맥박을 구분하여 각각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천지의 이법(理法)에 상응하고 인체의 구조에 합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백 가지 병은 구별되고 그 진단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의술을 터득한 사람은 진단을 달리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의사는 이를 혼용해 사용합니다. 그러나 맥법을 이루 다 열거해 실험하고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법도에 따라 환자를 진찰하고 같은 병일지라도 분별하여 치료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진찰해 온 환자는 모두 진료부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저로서는 배운 방법이 대체로 습득된 즈음에 스승께서 작고하셨으므로 저는 진찰한 바를 기록에 남겨 생사를 단정하고 그 진단이 적중했는가 어쨌는가를 확인하고 다시 맥법과 대조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경과를 알 수 있었습니다." "병을 진찰하고 생사 시기를 예측 판정했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먹지 않아야 될 음식을 먹고, 지키라는 희로(喜怒)에 절도를 지키지 않았고, 먹지 않아야 될 약을 먹었고, 맞지 않아야 될 침을 맞아 그 예측이 틀리든가 혹은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환자의 생사를 알아 약의 적절한 용법을 잘 논한 줄로 안다. 제후왕, 대신 등으로 지금까지 그대에게 병을 문의한 사람은 없는가. 제나라 문왕(文王:孝文帝 15년에 사망)이 병에 걸렸을 때 그대에게 진찰, 치료를 요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조왕, 교서왕(膠西王), 제남왕, 오왕 등 모두가 사람을 보내 저를 부르긴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굳이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문왕 역시 마찬가지로 저를 불렀습니다만 가지 않았습니다. 집이 가난해 남을 치료해 주고 상받을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공부를 모두 마치기 전에 혹시 제가 관직을 받아 속박될까 그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것을 피해 이리저리 호적을 옮겨가며 생업도 돌보지 못한 채 오로지 의술에 능통한 분들만을 찾아 천하를 헤매었던 것입니다. 제가 논술한 오늘의 의서들은 오로지 몇 분 훌륭한 스승에게 시사하여 그 분들의 비방을 전수받고 실험, 연구하여 해명, 기술한 것들입니다. 그 무렵 양허후의 나라에 제가 있었으므로 입조하는 그 분을 따라 장안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릉의 항처 등의 환자 등을 진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왕이 병에 걸려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된 증상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문왕의 병을 직접 진찰해 보지는 못했으나 들은 말로써 가늠해 보니 천식에 걸려 있었고 두통에다 시력장애를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니 그것은 병이 아니었습니다. 지나치게 살이 쪄서 정기가 과도하게 축적된 데다 그로 인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 뼈와 살이 조화를 잃어 그렇게 된 것이며 의사의 치료로 나을 병은 아니었습니다. 맥법에 따르면, 20대에는 맥의 기세가 달리기에 적합하고 30대에는 빠른 걸음이 좋으며 40대에는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이 좋고 50대에는 편히 누워 있는 것이 좋고 60대에는 정기를 깊이 축적하는 게 좋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도 20대의 문왕은 한창 달려야 할 나이에 가만히 걸었습니다. 이는 천도(天道)와 사계(四季)의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뒤에 들은 말이지만 어떤 의원이 그에게 뜸을 뜨고 나서 병이 곧 위중해졌다고 했습니다. 병을 잘못 판단한 것이지요. 뜸을 뜨자 신기(神氣)가 마구 혼란해서 그 허한 틈을 타 사기(邪氣)가 헤집고 들어갔으니 혈기왕성한 젊은 육체가 회복할 수가 없었겠지요. 기라는 것은 음식을 조절해야 되고 좋은 날씨를 골라 수레 혹은 도보로 외출해 마음을 넓게 펴고 근육과 골격과 혈맥을 쾌적하게 해서 시원스레 발산해야 되는 것을 이름입니다. 고로 20대 나이를 역무(易貿:혈기의 교통)라 합니다. 모름지기 이런 나이에는 석침이나 뜸을 놓아서는 혈기가 분출해 제지할 수 없다고 돼 있습니다." "그대의 스승 양경은 어디에서 의술을 배웠다던가, 제나라 제후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알려졌던가." "스승께서 어디서 의술을 전수받았는지는 모릅니다. 그 분의 집은 부자였던고로 의술에 능하면서도 굳이 남을 위해 병을 고쳐 주려 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게 되니 이름이 알려질 턱이 없겠지요. 뿐만 아니라 스승께서는 저에게, '나의 의술을 네가 배워갔다는 사실을 내 자손들에게 결코 알리지 말아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대 스승이 하필 그대를 사랑하여 그 비방을 죄다 가르쳐 주려고 하였는가." "처음에 저는 그런 분이 계시다는 걸 알 까닭이 없었습니다. 다만 저는 어려서부터 의술을 좋아해 혼자 공부하고 시험해 보고 하던 중 치천(山東省)의 당리(唐里)에 비방을 잘 안다는 공손광(公孫光)이라는 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뵙고 섬겼지요. 입문, 사사가 허락되면서부터 음양 조화의 의술과 구전의 비법을 전수받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저는 기록하였지요.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의술은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 내가 중년 시절 양중천(중천은 양경의 字)이라는 걸출한 의사에게 사사받고자 했으나 그 분은 적당한 그릇이 아니라며 나를 거절하셨다. 그 분 역시 늙었으나 부유하여 의사로 이름을 내지는 않았으나 당대의 국수(國手)임은 분명하리라. 너가 백세 뒤에도 명의로 이름을 내고자 하거든 반드시 그 분의 제자가 되도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분을 찾아가지 못했는데 마침 양경의 아들 은(殷)이 왕께 바치려고 말을 가지고 양경의 집으로 들렀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은과 친해져 양경을 스승으로 모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양경을 스승으로 충실히 섬기며 정직하였기 때문에 사랑을 받게 된 듯합니다." "관리든 서민이든 그대에게 사사해 그대의 제자가 된 자는 있는가. 또 그대 의술을 빠짐없이 습득한 사람이 있다면 어디 사는 누구인가." "임치 사람 송읍(宋邑)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일 년 이상 오진(五診:오장의 맥을 진찰하는 法)을 가르쳤습니다. 또 제북왕이 그의 태의인 고기(高期)와 왕우(王禹)를 보내왔으므로 제가 일 년 간 수족의 경맥과 기락결(奇絡結:낙맥의 결집처)과 마땅히 알아야 될 수혈의 위치, 기가 상하, 출입하는 사정(邪正), 역순(逆順)과 침이나 뜸을 놓을 만한 자리 등을 가르쳤습니다. 치천왕이 때때로 태창장(太倉長)인 풍신(馮信)을 보내 의술을 질문했기로 그에게 진찰법, 혈기의 역순법, 약법, 정오미(定五味:약품을 辛, 酸, 甘, 苦, 鹹의 五味로 조합하는 法), 화제탕법 등을 가르쳤습니다. 또 고영후(高永侯)의 가령(家令) 두신(杜信)이 진맥을 좋아하여 와서 배우길래 2년 이상 수족의 경맥과 오진(五診)을 가르쳤습니다. 임치의 소리(召里)에 있는 당안(唐安)도 와서 오진, 수족의 경맥, 기해술, 음양 4계절의 맥을 가르쳤는데 다 배우기도 전에 그는 제왕(帝王)의 시의가 되더군요." "환자를 진찰해 생사를 판단함에 있어 실수가 전혀 없을 수 있는가."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먼저 환자의 맥을 짚어 역조(逆調)의 환자는 치료하지 않고 순조(順調)의 환자만 치료합니다. 순조로운 환자라야 마음이 안정되어 정밀하게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때때로 실수는 합니다. 저는 아직 완전무결할 수는 없습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여인은 아름답건 추하건 궁중에 있게 되면 질투를 받게 마련이고 선비는 현명하건 불초하건 조정으로 들어가면 의심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편작은 그의 걸출한 기량으로 인해 화를 입었고, 창공은 자취를 감추고 은둔했지만 형벌을 면치 못했다. 다만 창공은 막내딸 제영 때문에 여생을 안녕하게 보낼 수가 있었다. 노자(老子)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답고 좋은 사람은 불길한 그릇이다.' 편작 같은 인물을 두고 한 말이었을까. 창공 또한 이에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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