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44. 전숙열전
절개를 지키기에 신실(信實)하기 그지없었고 그의 의로운 마음씨는 청렴결백을 주장할 만했으며, 그의 행실은 세상 어진이들을 격려할 만했다. 막중한 권력을 가지고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 비리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제44에 <전숙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전숙(田叔)은 조나라 형성(河北省) 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제나라의 명문 전씨(田氏)의 후손이다. 전숙은 검술을 좋아했고 또 황제.노자(黃帝.老子)의 학문을 악거공(樂巨公)한테서 배웠다. 청렴결백했고 뜻있는 인사들과 교제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조나라 사람들은 전숙을 조의 재상 조오(趙午)에게 추천했고 조오는 또 조왕 장오(張敖)에게 추천했더니 조왕은 그를 낭중으로 삼았다. 전숙은 친절.청렴.정직.공평한 인물이라 조왕도 그를 인정은 하면서도 아직은 승진시키지 않고 있었다. 그 때 진희가 대(代)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7년이었다. 고조가 직접 출정해 진희를 주살하고 조나라를 지나쳤다. 조왕 장오는 손수 밥상을 들고 고조에게 식사를 올리는 등 매우 공손하게 예의를 다했다. 그런데도 고조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조왕에게 욕설까지 퍼부으며 오만 결례를 다 저질렀다. 조의 재상 조오나 관고(貫高)등은 몹시 분개하여 조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폐하 섬기기를 모든 예를 다 갖추어 하셨는데 저희들 앞에서 저렇게 오만불손하게 나올 수가 있습니까! 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오니 부디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랬더니 조왕은 대경실색했다. "무슨 말씀이오! 나의 선부(先父: 張耳)께서 나라를 잃었을 때 만일 폐하가 아니 계셨더라면 지금쯤 우리들 시체에서는 한창 구더기가 끓고 있을 것이오.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하시오. 듣지 못한 것으로 하겠소." 그래서 대신들은 따로 모여 의논했다. "대왕께서는 유덕하신 분이라 은혜를 결코 잊지 못하시는 분이오. 그러니 우리끼리 모의해 고조를 죽입시다!" "그렇게 합시다!" 그리하여 관고 등은 조왕 몰래 고조를 죽이기로 합의하고 만반의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모의가 사전에 누설되었다. 그래서 고조는 칙령을 내려 조왕과 모반에 동조한 대신들을 체포하게 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조오 등 관련 대신들은 모두 자살해 버리고 오직 관고만이 체포되었다. 동시에 한에서는 조서를 내렸다.
- 조나라 사람으로 조왕을 따라 감히 장안으로 오는 자가 있으면 삼족(三族: 父.母.妻의 各族)을 멸하리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맹서(孟舒).전숙 등 10여 명은 붉은 옷을 입고, 자진해 머리를 깎고, 목에 사슬을 걸어 왕가(王家)의 노예임을 과시하여 조왕의 함거를 따라 장안으로 따라왔다. 관고 등의 실토로 조왕이 모반에 관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조왕 장오는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는 폐해지고 선평후(宣平侯)로 강등되었다. 얼마 후 장오는 고조에게 전숙 등 10여 인의 옛 신하들을 추천했다. 고조가 만나 보니 그들은 한결같이 한나라 신하들보다 유능했다. 그래서 고조는 기뻐하며 그들을 모두 군수나 제후의 재상으로 임명했다. 이 때 전숙은 한중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태수로 10여 년을 지냈을 때 고조가 붕어하고 고태후마저 죽었다.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여씨 일족을 주멸하고 효문제를 세웠다. 그 때 효문제는 전숙을 불러서 물었다. "그대는 지금 천하에서 누가 가장 유덕한 자라고 생각하오?" "제가 어떻게 감히 그것을 알겠습니까?" "그대가 유덕자이니 알고 있을 게 아니오." "저는 아닙니다. 굳이 말씀드리면 전날의 운중 태수 맹서가 바로 유덕한 인물입니다." "맹서가?" 그 무렵에 흉노가 한의 변경을 자주 약탈했는데 운중군의 그 피해가 가장 심했다 하여 맹서에게 책임을 지우고 면적시켰던 터였다. "그러합니다." "선제께서 맹서를 10년 동안이나 운중 태수로 두셨소. 그런데 성을 굳게 지켜 나가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도 흉노가 한 차례 침입하자 맹서는 제 부하 사졸들을 수백 명씩이나 이유없이 죽게 만들었소. 그런 자가 유덕자란 말이오?" "바로 그 점이 맹서가 유덕자인 증거입니다." "어째서?" "조나라 관고 등이 모반하자 당시 폐하께서 조칙을 내려 '조나라에서 감히 조왕 장오를 따르는 자가 있으면 삼족을 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맹서는 자진해 머리를 깎고 사슬을 목에 걸고 조왕을 따라 죽기로 장안으로 왔습니다. 그런 마당에 그가 운중 태수가 될 것을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그런 사람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거요?" "당시 사졸들은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공방전을 계속 하느라고 그랬었지요. 즈음의 흉노 묵특은 새로 북방의 이민족 월지(月氏)를 정복하고 승승장구해 한의 변방으로 덮쳐 와서 피해를 주었던 것입니다. 맹서인들 사졸이 지쳐 있음을 뻔히 알고 있는데 나가 싸우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사졸들은 앞을 다투어 성벽으로 나가 죽기살기로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고 아우가 형을 위하듯 그렇게 싸우다 죽은 전사자가 수백 명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맹서가 그들을 싸움터로 몰아 내었겠습니까? 그들 스스로가 나가 싸우다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맹서가 유덕자인 증거입니다." "오, 맹서가 그런 인물이었소!" 황제는 즉시 맹서를 소환해 다시 운중의 태수로 삼았다.
여러 해가 지나 전숙은 법망에 걸려 관직을 잃었다. 양(梁)의 효왕(孝王)이 사람을 시켜 전날 오(吳)의 재상으로 있던 원앙(袁앙)을 암살했다. 일이 괴이하여 효경제는 전숙을 불러 양나라 사건을 조사 보고케 했다. 전숙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뒤 돌아오자 효경제가 서둘러 물었다. "양나라에서는 정작 그런 일이 있었던 거요?" "불행히도 있었습니다." "글쎄, 그 증거가 어디에 있소?" "폐하께서는 양나라 사건을 문제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얘기요?" "지금 양왕을 주살하지 않으면 한나라의 법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며 만약 법을 지탱하기 위해 양왕을 죽이게 되면 황태후께서 음식을 드셔도 맛을 모르실 것이며 누우셔도 잠자리가 편치 않으실 것입니다. 처지가 딱하여 남는 것은 폐하의 근심밖에 없을 것입니다." "음......!" 결국 효경제는 양나라 문제를 묵살해 버렸다. 동시에 전숙이 몹시 현명한 인물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를 노(魯)나라의 재상으로 임명했다. 전숙이 노나라 재상으로 부임하자마자 백성들 백여 명이 몰려와서 호소했다. "왕께서 저희들 재물을 탈취해 가셨습니다. 선처해 주십시오." 전숙은 노했다. "무어, 이런 자들이 다 있는냐! 너희들의 주인은 누구냐! 왕이 아니냐. 왕이 자기의 물건을 가져가는 바도 탈취냐. 감히 제 주인을 헐뜯다니!" 그래서 전숙은 주동자 20명을 붙잡아 곤장 50대씩을 치고 나머지 무리들에게도 볼기 20대씩을 친 뒤 쫓아보냈다. 노왕이 그 소문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노왕은 전숙을 불러 중부(中府: 王室 財貨 倉庫)의 재물을 털어 백성들에게 상환하도록 했다. 재상이 말했다. "싫습니다. 탈취는 왕께서 하시고 갚는 것은 재상이 하면 왕께서는 악행을 하시고 재상은 선행을 하는 것이 됩니다. 재상으로서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왕은 직접 그들을 불러 재물을 돌려 주었다. 노왕은 사냥을 몹시 좋아했다. 그런 왕을 따라 재상 전숙은 항상 어원(御苑)으로 갔다. 왕은 미안해졌다. 그래서 승상을 쉬게 하려고 관사 안에 있게 했다. 그러나 전숙은 항상 노천에 앉아 관사 밖에서만 왕의 수렵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 그럴 때마다 왕이 사람을 보내 승상이 관사 안에서 쉬라고 권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의 왕께서 어원에서 옥체를 바람과 햇볕 속에 내놓고 고생하고 계시는데 어찌 나만 편하라고 관사 안에서 쉴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자 노왕은 거의 사냥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 전숙은 재직 중에 죽었다. 노왕이 백금(白金)을 풀어 전숙의 사당을 지어 주려고 유족에게 보냈다. 막내아들 전인(田仁)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백금으로 망부(亡父)의 명예를 훼손시키지는 않겠습니다." 전인은 몸이 건장했다. 위장군(衛將軍: 大將軍 衛靑을 이름)의 사인(舍人: 家臣)이 되어 자주 위장군을 따라가서 흉노를 공격했다. 그러자 위장군은 전인을 추천해 낭중이 되게 했다. 수 년 후 전인은 승상의 속관인 녹봉 2천 석인 장사(長史)가 되었는데, 얼마 후 면직되었다. 그 후 효무제가 전인에게 삼하(三河: 河南.河東.河內)지방을 감찰[관리의 현.불현, 능.불능을 감찰함]케 했는데 황제가 동방을 순행하다가 상주한 내용이 좋아 그를 불러 경보도위(京보都尉)로 삼았다. 다시 한달 남짓 지나 황제는 그를 사직(司直: 승상을 보좌해 不法을 단속하는 官)으로 승진시켰다. 그런데 효무제 정화(征和) 2년에 방태자(房太子)사건에 연좌되었다. 그 때 좌승상 유굴리(劉屈리)가 몸소 병사를 인솔해 나라 사직인 선인에게 성문을 폐쇄시키는 책임을 맡겼으나 전인은 고의로 황태자를 도주시킨 것이다. 그 죄를 지고 전인은 형리에게 넘겨져 주살되었다.
[以下는 사마천의 글이 아니라 주석으로 씌어진 글이 후대에 잘못으로 본문에 편입된 듯하다]
전인이 병사를 일으켰다. 이 때 장릉(長陵: 陝西城 咸陽縣)의 현령 차천추(車千秋)가 변고를 상주해 전인을 친 뒤 일족을 몰살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공자는 `가는 나라마다 그 나라의 군주는 반드시 정치상의 의견을 내게 물었다' (<論語><學而編>)고 말했지만 전숙도 그런 입장에 있은 듯하다. 그는 외로움을 지키어 현인을 버려 두지 않았고, 군주의 미덕을 드러내어 과실에 빠지지 않게 했다. 전인은 나 태사공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자세히 논술할 수 있었다.
[이하의 글도 사마천의 글이 아니고 후대에 저少孫이 보충한 것이다]
저 선생(저先生)은 말했다. 내가 낭(郎)으로 있을 때 들은 애기지만 전인은 본래 任安(任安: 任少鄕)과 친했다고 한다. 임안은 형양(滎陽: 河南城) 사람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남에게 고용되어 수레를 몰고 장안으로 갔다. 거기서 그대로 머물며 말단 관리나마 되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호적을 멋대로 꾸며 무공으로 갔다. 무공(武功)은 부풍(扶風:陝西省)의 서쪽 경계에 있는 작은 읍으로 산골짜기의 입구에 있었으며 촉(蜀)으로 가는 잔도(棧道)가 가까이 있었다. 임안은 무공이 소읍이라 호걸들이 없어 윗사람 되기가 쉬울 것이라 판단하고 거기에 머물러 남의 대신 도둑을 잡는 졸개인 구도(求盜)와 정보(亭父: 잡역에 종사하는 卒)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정장(亭長:派出所長)이 되었다. 읍민들과 함께 사냥을 자주 갔다. 그 때마다 임안은 언제나 고라니.사슴.꿩.토끼 등 노획물을 골고루 분배했으며 일의 부서를 정할 때에도 청장년들에게는 힘든 일을 맡기고 노소년들에게는 쉬운 일을 맡겼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임소경(任少卿: 任安의 字)은 잡은 짐승의 분배가 매우 공평하다. 그는 지략이 대단한 사람이야." 이튿날에도 읍민들이 다시 모였다. 수백 명의 군중들을 쓱 한번 휘둘러본 임안은 대뜸 지적해 냈다. "어제 왔던 왕씨 넷째아들은 오늘 왜 나오지 않았지요?" 사람들은 임안의 재빠른 눈썰미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 후에 그는 벼슬이 삼로(三老: 10亭이 一卿이고, 一卿에 敎化를 담당하는 三老 한 사람을 두었다)가 되었다가 다시 친민(親民: 卿邑의 民事를 담당하는 官)으로 추대되었고 녹봉 3백 석을 받는 장(長: 少縣長)이 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그 곳을 지날 때 장막치는 일과 음식 대접하는 준비가 불충분하다고 해서 그나마 관직에서도 파면되었다. 임안은 위장군의 사인으로부터 다시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전인을 만났다. 둘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구가 되어 서로를 아꼈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가난해서 장군의 가감(家監: 家令, 執事)에게 돈으로 환심을 살 만한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임안과 전인은 사람을 물어뜯는 사나운 말이나 쳐야 했다.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귓속말로나 불평했다. "가감 저놈은 사람을 알아볼 줄 몰라!" "장군도 우리를 몰라보는데 가감 주제에 어떻게......" 위장군이 두 사람을 데리고 평양 공주(平陽公主: 孝武帝의 누이, 후에 위청 장군의 처가 되었음)에게 들른 적이 있었다. 공주의 집에서는 두 사람을 기마나 거드는 노예처럼 취급했다. 식사도 같은 자리에서 하게 했다. 그래서 칼을 뽑아 자리를 절단하고는 따로 앉았다. 그래야 독상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원, 미친놈들 다 보겠네!" 공주의 집에서는 괴상한 놈들이라며 그들을 미워했지만 감히 꾸짖지는 않았다. 그 뒤 위장군의 사인들 중에서 사람을 가려 뽑아 낭(郎)으로 삼겠다는 조칙이 내려왔다. 위장군은 사인들 중에서 부유한 자들만 골라 말안장을 호화롭게 꾸미게 하고, 붉은 옷에 옥이 달린 검을 차게 했다. 때마침 현대부(賢大夫)로 이름난 소부(少府: 山海地澤의 세금을 받아 天子의 私府로 공급하는 官) 조우(趙禹)가 위장군의 저택으로 낭 예비심사를 하러 왔다. 조우는 장군의 가신들을 하나씩 불러 말을 시켜 본 뒤 세밀히 관찰해 보고 나서 위장군에게 말했다. "이토록 쓸 만한 인물이 없소?" "무슨 말씀이오?" "항간에서는 장군의 문하에 반드시 미래에 장군이 될 만한 훌륭한 인물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었소. 그렇지만 내가 만나 본 저자들은 모조리 틀렸소. 옛말에 '군주에 대해서 알 수가 없거든 그가 부리는 신하를 보고, 이들에 대하여 알 수가 없거든 그가 사귀는 벗을 살펴보라'고 했소이다. 지금 폐하께서 굳이 장군의 사인을 천거하라는 조칙이 내려진 이유는 그들을 통해 장군을 알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만 머리가 텅 빈 부잣집 아들들만 골라 화려한 치장만 시켜 내놓고 계시니 이는 나무인형에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힌 꼴과 다름이 없지 않소. 폐하께서 무척 실망하실 거요." 위장군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별수없었다. "대부께선 내가 선발한 열 명만 보셨지만 90여 명 사인들이 더 있으니 그런 쓰레기들까지 모두 만나 보시겠소?" "기왕에 왔으니 그럽시다." 그래서 조우는 백 명 모두를 모조리 만나 보았다. 그러고 나서 위장군에게 말했다. "됐소이다! 저 두 사람이 재목이오. 나머지는 아무 쓸모가 없소이다." 위장군이 바라보니 거지꼴의 임안과 전인이었다. "저자들을!" "폐하께서 기뻐하실 거요. 그리고 장군을 높게 평가하실 거요." 조우가 가 버린 뒤 위청은 두 사람에게 소리질렀다. "그 꼴들이 무언가! 어서 안장 갖춘 말과 새로 만든 붉은 비단옷을 준비해라." 두 사람이 대답했다. "저희들은 가난해서 그런 것들을 갖출 처지가 못 됩니다." "무어라고! 네놈들이 집이 가난한 것이 마치 내 책임인 듯이 말하는구나. 그런 말투가 어딨어. 너희들은 폐하께 추천하겠다는데 잔뜩 부어가지고 마치 나에게 은덕이라도 끼치는 듯한 말투를 쓰다니!" "사정이 그렇다는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위장군은 별수없었다. 일단 명부를 올린 뒤 기별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조칙이 내려져서 임안과 전인이 황제 앞으로 불려들어갔다. 황제는 임안과 전인에게 번갈아 가며 그들의 지략과 능력을 물었다.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 양보해 마지않았다. 전인이 먼저 대답했다. "북채와 북을 가지고 군문에 서서 사대부들이 죽음을 즐기듯 기꺼이 전투하게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 저는 임안만 못합니다." 이번에는 임안이 대답했다. "의문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고 옳고 그름을 확실히 판결하고 관리들을 잘 다스리고 백성들이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하는 점에서는 저는 전인만 못합니다." 효무제는 크게 웃고 나서 말했다. "알았다. 대장군 위청의 사람 보는 안목이 대단하구나!" 황제는 즉시 임안에게는 북군(北軍: 首都守護軍)을 감찰하는 직책을 주고, 전인에게는 황하로 수송되는 변경의 양곡을 감찰하는 직책을 주었다. 이로부터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임안은 익주(益州: 泗川省)의 자사(刺史: 州政監察官)가 되었고 전인은 승상의 장사(長史)에 임명되었다. 전인은 이렇게 상서했다.
- 천하의 군 태수들 중에 부정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삼하(三河)지방이 가장 심합니다. 청하옵건대 우선 삼하지방의 부정부터 적발케 해 주십시오. 이 지방 대부분의 태수들은 궁중의 중귀인(中貴人: 총애받는 환관)들과 결탁해 있거나 삼공(三公)과 친속관계를 맺고 있어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이 부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부디 삼하를 숙정(肅正)해 천하의 악덕관리를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그 무렵 하남.하내의 태수 모두는 어사대부 두주(杜周)의 부자형제(父子兄弟) 관계에 있었으며 하동태수는 승상 석경의 자손이었다. 더구나 석씨는 아홉 명이나 2천 석 봉록의 관료였기로 바야흐로 석씨 집안의 최전성기였다. 전인이 자주 이 사실을 상서하자 두 대부와 석씨는 사람을 시켜 전인에게 이렇게 말하게 했다. "우리가 감히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전장자께선 무고하게 죄를 그들에게 덮어씌우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전인은 이미 삼하를 감찰하고 부정한 삼하의 태수들을 적발해 형리에게 넘겨 이미 사형시키고 난 뒤였다. 전인은 돌아와 황제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효무제는 몹시 기뻐하여 강력한 호족에게도 두려워하지 않고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그를 특히 신임해 승상의 사직(司直)에 임명했다. 그의 위세는 드디어 천하를 진동했다. 그 후 황태자가 군사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승상이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사직 전인을 시켜 성문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사직은 태자와 황제 사이는 골육의 친분이라 친부자 사이의 일에 끼여들고 싶지가 않아 장릉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 때 효무제는 감천궁(甘泉宮)에 있었는데 어사대부 포승지(暴勝之)에게 황태자를 도피시킨 책임을 승상에게 묻도록 했다. 다급해진 승상이 사실대로 상서했다.
- 성문의 수비를 사직에게 책임지웠는데 그는 황태자께서 달아나도록 문을 열어 준 듯합니다.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으니 사직을 체포하게 해 주십시오.
사직 전인은 체포되었고 형리에게 넘겨지자마자 주살되었다. 그 무렵 임안은 북군의 자사가 되어 군을 감찰하고 있었다. 태자가 북군의 남문 바깥에다 수레를 세워 놓고는 임안을 불러 부절을 건네 주며 칙명이니 군대를 발동하라고 명령했다. 임안은 부절을 배수한 뒤 군중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닫고 꼼짝을 않고 있었다. "임안이 거짓으로 부절을 받는 체하면서 현장을 모면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황태자를 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효무제는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안이 북군 전관(錢官: 經理官)의 부정을 적발하고 태형으로 욕보인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전관이 임안에게 앙심을 품고 무고하여 상서했다.
- 임안을 취조하십시오. 황태자가 내리는 부절을 그가 받을 때 저는 곁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 황태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급적이면 선명하고 예쁜 것으로 저에게 주십시오'. 결국 그는 황태자와 공모한 처지였기로 그를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서면을 받아본 효무제는 가뜩이나 의심하던 중에 벌컥 노했다. "저 임안이란 놈은 노회(老獪)한 관리다. 병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 승패를 관망하면서 이긴 쪽 편을 들기로 했을 것이다. 두 마음을 품은 놈이다. 임안은 이제까지 사형에 해당되는 숱한 죄를 지었지만 항상 살려 주었는데 이제는 참지 못하겠다. 불충한 놈이다!" 결국 임안을 잡아 형리에게 넘겨 주살해 버렸다.
무릇 달도 차면 기울고, 만물도 극성하면 쇠퇴하는 게 천지의 상도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면 그 부귀한 기운이 재앙으로 쌓여 불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범려(范려)는 월나라를 떠나 관직을 사양해 받지 않았으니 이로 인해 그 이름이 후세에 잊혀지지 않는다. 어찌 범려에 미치기는 하겠냐마는 후진들은 특히 이 점을 경계해 마지않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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