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43. 만석.장숙열전
온후. 성실하고 자애로왔으며 효성스러웠다. 말은 더듬었으나 행동은 민첩했다. 몸을 굽혀 남을 존중할 줄 아는 군자(君子)나 장자(長者)되기에 힘썼다. 그래서 제43에 <만석.장숙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만석군(萬石君)의 이름은 분(奮)이며 성은 석(石)씨다. 부친은 조나라 사람인데 진(秦)이 멸망하자 온(溫: 河南省)으로 이주했다. 고조가 동진하여 항우를 치기 위해 하내(河內)지역을 통과할 즈음 15세의 석분이 말단관리로 고조를 섬기고 있었다. 우연히 말을 나누어 본 고조는 석분의 공손한 인품이 마음에 들어 좀더 세밀한 데까지 묻게 되었다. "너에게 가족이 있느냐?" "어머님이 계시지만 불행히도 실명(失明)하시어 집안이 가난합니다. 누님이 어머님을 뫼시며 거문고를 잘 탑니다." "너는 나를 진심으로 섬기겠느냐." "정성을 다하여 섬기겠습니다." 그래서 고조는 석분을 중연(中涓: 侍終)으로 삼아 성서 및 배알자의 명함을 정리하게 했고, 그의 누이를 불러 미인(美人: 側室의 계급명)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집을 장안의 척리(戚里: 황실의 인척들을 거주하게 한 곳)로 이주케 했다. 누이가 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석분은 효문제 때에도 공로를 쌓아 가서 대중대부(大中大夫)에 이르렀다. 학문에는 능하지 못했으나 공손하고 근신함에 있어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효문제 때에 동양후 장상여(張相如)의 후임으로 태자대부(太子大傅)를 골랐는데 모두들 석분을 추천했으므로 그는 황태자의 대부가 되었다. 황태자가 효경제로 즉위했다. 석분이 구경(九卿)의 지위에는 올랐으나 황제는 그의 지나친 공손과 근신이 답답했던지 제후국의 재상으로 전출시키고 말았다. 석분의 장남 이름은 석건(石建)이었다. 다음이 석갑(石甲)이고 삼남이 석을(石乙: 모두 이름을 몰라 甲乙로 칭했음)이었다. 그 다음이 석경(石慶)인데, 모두가 착하고 효성스러웠으며 신중하였다. 그래서 모두 관직이 2천 석의 녹봉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다. 효경제가 말했다. "석군(石君)과 그의 네 아들 모두가 봉록 2천 석씩 받는 몸이 되었으니 신하로서 존귀와 은총이 그의 일가문중에 다 모였네. 모두 합해서 만석(萬石)이라." 그로부터 석분을 만석군이라 불렀다. 만석군은 효경제 말년에 연로한 탓으로 상대부(上大夫)의 봉록을 받으며 귀향해 은거했다. 그러나 조정의 연중행사에는 반드시 조퇴에 참례했다. 만석군은 궁성문 앞을 통과할 때에는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지나갔으며, 황제의 수레를 보면 반드시 수레의 횡목을 잡고 경의를 표했다. 자손들이 관리가 되어 귀향하여 찾아오면 만석군은 반드시 예복을 입고서 그들을 대했으며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자손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는 직접 꾸짖는 대신 자신을 책하기 위해 골방에 꿇어앉아 음식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자손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반성하며, 집안 원로의 주선으로 당사자가 채찍맞을 각오로 어깨살을 드러낸 채로 사죄해 오면 그제서야 그를 용서하고 비로소 음식을 들었다. 자손들 중에 관을 쓸 만한 나이가 된 자가 옆에 있으면 그는 비록 쉬고 있을 때라도 관을 쓰고 온화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하인들도 감화되어 언제나 단정하고, 삼갈 것을 잊지 않았다. 황제가 때때로 그의 집으로 음식을 보내면 그는 마치 황제 면전인 것처럼 꿇어엎드려 그것을 먹었다. 복상(服喪) 중에는 몹시 애통하게 애도했으며, 자손들도 가르침을 받아 역시 그와 같이 했다. 만석군의 일가는 효도와 근신으로 군국에 이름이 나서, 제(齊).노(魯)의 유자(儒者)들도 만석군 일가에서는 당하지 못할 것임을 인정했다.
건원(建元: 효경제의 年號) 2년에 낭중령(郎中令: 궁성 門戶의 관리관) 왕장(王臧)이 학문상의 이유로 황태후에게 죄를 지었다. "유자란 허위와 과장만 심했지 실질적인 내용이 없다. 말없이 몸소 실행하는 집안은 만석군 일가밖에 없지 않은가." 황태후(皇太侯: 두太侯)는 왕장에게 노했기 때문에 만석군 일가를 더욱 추켰다. 그 바람에 장자 석건이 낭중령이 되고, 말자 석경이 내서(內史:首都長官)에 임명되었다. 아들 석건은 백발이 성성한데도 부친 만석군은 건장했다. 석건은 낭중령이 되어서도 닷새마다 돌아오는 휴가에는 반드시 귀가하여 부친에게 문안드린 후 자기 방으로 시종을 불러 부친의 속옷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몸소 빨래해서는 부친 모르게 넘겨 주도록 했다. 낭중령 석건은 상주해 간해야 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주위 사람을 물리치기를 청한 뒤 절실한 것을 소신껏 발언했으며 반대로 조정에서 공식적인 발언이 있을 때에는 가급적 말을 삼가다가 그나마도 눌변의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황제는 그에게 다정하게 대했으며 존대하고 예우했다.
만석군이 능리(陵里: 長安城門의 里名)로 이주했다. 내사 석경이 이(里)의 외문(外門)에서 들어오면서 술에 취했기 때문에 깜박 수레에서 내리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만석군은 식사를 끊어 버렸다. 놀란 석경이 벌을 받으려고 윗도리를 벗은 채 사죄했으나 용서받지 못했다. 그의 형들까지 모두 어깨살을 드러내어 사죄하자 그 때 만석군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내사(內史)라면 고위층이다. 이문으로 들어서면 마을의 노인네들까지도 모두 걸음을 빨리해 숨어 버린다. 그러면 내사는 태연하게 수레 속에 버티고 앉아 있을 테지. 참 꼴 좋겠구나!" 비꼬아서 석경을 물러가게 했다. 그 이후로 석경과 다른 자제들은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귀가하게 되었다. 만석군은 원삭(元朔: 孝紋帝의 年號) 5년에 96세로 죽었다. 장자인 낭중령 석건은 너무 애통하게 운 나머지 지팡이가 있어야만 걸을 수가 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너무 쇠약해져서 1년 조금 지나 석건도 죽었다. 만석군의 자손들은 모두가 효성스러웠지만 석건은 더할 나위가 없었고 차라리 만석군보다 더했다. 석건이 낭중령으로서 한때 상주문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각하되어 다시 읽어 보고 나서 말했다. "글자를 잘못 썼다! 말 마(馬)자를 쓰려면 다리 네 개와 꼬리까지 합해 5획이라야 되는데 4획밖에 안 되는 1획이 빠진 오자(誤字)다. 폐하의 견책이 있으면 나는 죽어 마땅하다!" 매우 황공해했다. 그가 삼가는 정도는 다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석군의 막내아들 석경이 태복(太僕: 輿馬를 주관하는 長官)일 때 황제를 모시고 궁 밖으로 나갔다. 그 때 황제는 석경에게 느닷없이 수레는 몇 마리의 말이 모느냐고 물어 왔다. 그 때 석경은 말채찍으로 하나하나 찍어가며 자세히 세어 본 뒤에야 대답했다. "여섯 마리이옵니다." 만석군의 여러 아들 중에서 석경이 가장 덜렁거리는 성격인데도 이 정도였다. 그가 제나라 재상이 되자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의 가풍을 사모하여 석경이 아무 말이 없는데도 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그를 위하여 석상사(石相祠)라는 사당까지 세워 주었다. 원수(元狩: 효무제의 연호) 원년에 효무제가 태자를 위해 대신들 중에서 태부를 선발하다가 결국 패군(沛郡: 安徽省에서 江蘇省에 걸치는 지역)의 태수로 있던 석경을 태부로 데려왔다. 석경은 7년이 지나 어사대부가 되었다.
원정(元鼎: 효무제의 연호) 5년 가을에 승상 조주(趙周)가 죄를 범하고 파면되었다. 이에 황제는 어사대부 석경에게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만석군은 선제(先帝)께서 존중한 인물이며 자제들도 효성스럽다. 그러므로 어사대부 석경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목구후(牧丘侯)에 봉한다." 이 무렵 한제국에서는 민(福建省 方面)과 남(南: 廣東省.廣西省 方面) 두 월(越)을 주멸하고 동으로는 조선을 공격하고 북으로는 흉노를 쫓아 내고 서로는 대원(大원: 中亞의 FERGANA)을 정복하는 등 일이 많았다. 그리고 천자는 천하를 순행하고 옛날의 신사(神祠)를 수리하며 봉선(封禪)을 행하고 예악(禮樂)을 일으키느라고 국가의 재정이 쪼들렸다. 그래서 상홍양(桑弘羊) 등은 부국책인 균수법(均輸法)을 제창하고 왕온서(王溫舒) 등은 법률을 준엄하게 했고 아관(兒寬) 등은 학문을 진작시키는 등 구경(九卿)인 그들끼리 번갈아 가며 정무를 추진했기 때문에 승상인 석경으로서는 상징적으로만 자리에 앉았을 뿐 어떤 일도 결재한 것이 없었다. 그러기를 9년 동안 중후.근신할 뿐 정치를 시정하거나 진언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때 황제의 근신인 소충(所忠)과 구경인 감선(減宣)의 죄를 규탄하려다가 복죄시키기는커녕 역부족으로 오히려 무고로 죄를 받고 벌금형을 받기까지 하였다. 원봉(元封: 효무제의 연호) 4년에 관동(關東) 땅에 유량민이 2백만 명, 호적이 없는 자 40만 명이 발생했다. 이에 삼공(三公).구경(九卿)들이 상의해 유량민들을 변방으로 추방시키려는 법안을 만들려고 했다. 이 때 황제는 승상 석경이 연로한 데다 매사 근신만 하니,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해 휴가를 주어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그러니까 어사대부 이하의 신하들끼리 상의해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그제서야 승상은 자기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는 점을 부끄럽게 여겨 황제께 상서했다. - 폐하께서는 신에게 승상의 자리를 주어 폐하를 보필하도록 하셨으나 늙고 재능도 부족해 치정(治政)에는 아무 보탬이 되지 못했고 성곽은 헐고 창고는 텅 비어 백성들은 유민이 되어 표류케 했으니 저의 죄는 참형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을 불쌍히 여겨 차마 벌 주지 않으시니 차제에 승상과 후의 인을 돌려드리고 귀향함으로써 현자들의 승진길을 열고자 하니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그를 파면시킬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글로써 석경을 심히 꾸짖었다. - 말씀 잘 하셨소. 치정에는 보탬이 없고 성곽은 헐었으며 창고는 텅 비고 백성들은 유량하며 불안에 떨고 있는데,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자인 그대가 위급하게 된 다음에야 사임하려고 하니 대체 그대는 이 책임을 누구한테 돌리려고 이러시는 거요. 석경은 더욱 부끄러웠지만 별수가 없었다. 다시 승상의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석경은 충실하게 법을 지키고 매사에 근신.신중했지만 자신의 말대로 큰 경륜이 없어 백성들을 위해 별로 진언할 것이 없었다. 그 후 3년쯤 지난 태초(太初: 효무제의 연호) 2년에 승상 석경은 죽었다. 시호를 염후(염侯)라 했다. 석경은 차남 석덕(石德)을 가장 사랑하고 신임했다. 고로, 황제도 석덕을 후사로 삼고 작위를 계승시켰다. 그 뒤 석덕은 태상(太常)이 되었는데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으나 벌금으로 속죄한 뒤 서민이 되었다. 어쨌든 석경이 승상으로 있을 무렵에 그의 자손들 중 녹봉 2천석 이상의 관리가 13명이나 되었었다. 석경이 죽은 후 자손들은 점차로 죄를 짓든가 하여 면직되었고, 효도.근신의 가풍도 점차 쇠미해져 갔다.
건릉후(建陵侯) 위관(衛관)은 대(代)나라의 대릉(大陵: 山西省)사람이다. 위관은 희거(戱車: 車를 사용한 曲藝)를 잘 했으므로 낭(郎)이 되어 효문제를 섬긴 사람이었다. 그는 공무를 집행하면서 특별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기로 때가 되어 중랑장으로 승진했다. 사람이 순수하고 건실하여 나쁜 생각일랑 품을 줄 몰랐다. 효경제가 태자였을 무렵 효문제는 좌우 근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푼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초대된 위관은 병중이라 핑계하고 참석치 않았다. 효문제는 임종시에 효경제에게 유언했다. "위관은 유덕한 자이니라. 반드시 그를 후대해라." 효문제가 붕어하고 효경제가 즉위했다. 그러나 효경제는 한 해가 넘도록 위관에게 가타부타도 없었다. 위관은 여전히 근신하며 성실했다. 효경제는 상림원으로 행차하면서 중랑장 위관을 배승케 했다. "그대가 왜 참승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아오?" "영광인 줄은 알지만 그 이유는 모르옵니다." "내가 황태자였을 적에 그대를 불렀는데도 왜 오지 않았소?"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병중이었습니다." 효경제는 위관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검(劍)을 하사하려고 했다. "아닙니다. 선제께서 이미 여섯 자루나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만 주셔도 충분합니다." "검이란 주는 즐거움도 받는 즐거움도 있는 것인데...... 그런데 그대는 아직도 그 검을 소지하고 있소?" "예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사람을 시켜 그 여섯 자루의 검을 가져오라 했는데 확인해 본 결과 칼집 한 군데도 흠집난 데가 없었다. 위관이 황제의 검을 여섯 개씩이나 하사받고도 한번도 남에게 으스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위관은 낭관들이 죄를 지으면 항상 자신이 그 죄를 뒤집어썼다. 공을 세워도 모든 공로를 부하들에게 다 돌렸다. 그러니 다른 중랑장과도 공을 다툴 필요가 없었다. 효경제는 위관이 청렴.충직하고 사심이 없음을 알고 하간왕(河間王:효경제의 子, 이름은 德)의 태부로 삼았다.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황제는 칙명으로 위관을 장군에 임명해 반란군을 치게 했다. 그 때의 공로로 중위(中尉)에 임명되었다. 3년이 더 지나서 효경제 전원(前元) 6년, 위관을 건릉후(建陵侯)에 봉했다. 그 이듬해에 황제는 황태자(皇太子: 栗太子)를 폐하고 그의 외삼촌 율경(栗卿)이 무리들을 주살했다. 그 당시 황제는 위관이 유덕자이므로 차마 율씨 일족을 주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위관에게 휴가를 주어 귀가시킨 뒤 질도(질都)에게 명해 율씨의 죄를 다스리게 할 만큼 위관에 대한 황제의 배려는 따뜻했다. 황제는 교동왕(膠東王: 후일의 孝武帝)을 황태자로 삼고 위관을 불러 태부로 삼았다. 오랫동안 태부로 지난 뒤 위관은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그로부터 5년 뒤 도후(桃侯) 유사(劉舍)를 대신해 드디어 승상이 되었다. 그는 조정에서 주청할 때 자기 직분에서 해야 될 내용 말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토록 말을 아끼다 보니 만석군과 석경처럼 백성을 위한 특별한 경륜을 펼쳐보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황제는 위관의 인품이 돈후하여 어린 군주를 보살필 만한 재상이라 판단하고 존중.총애하여 그에게 내린 하사품이 대단히 많았다. 위관이 승상이 된 지 3년 만에 효경제가 붕어하고 효무제가 즉위했다. 건원(建元) 연중이었다. 효경제가 병석에 있을 때 억울하게 옥에 갇힌관리들이 많았다. 결국 그런 사건은 승상의 관리 잘못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어 결국 승상에서 면직되었다. 위관이 죽은 후 아들 위신(衛信)이 그 작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그는 주금(酎金: 황제가 처음 익힌 술을 종묘에 바칠 때 제후가 헌금하여 제사를 돕는 일)법에 걸려 작위를 잃고 말았다.
색후(塞侯)의 직불의(直不疑)는 남양(南陽: 河南省) 사람이다. 그는 낭(郎)이 되어 효문제를 섬겼다. 같은 낭들끼리 숙사를 쓰다가 꼭 같이 휴가를 얻어 각각 귀가한 적이 있었다. 갑(甲)이 아침 일찍 일어나 집으로 떠났다. 그런데 갑이 실수하여 을(乙)의 보따리를 가지고 가 버린 것이다. 그 보따리 속에는 을의 황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을은 그런 줄도 모르고 직불의를 의심했다. "죄송하게 됐네. 내가 변상해야지." 직불의는 을의 황금을 변상해 주었다. 휴가가 끝나고 돌아왔다. 갑은 을에게 실수로 남의 보따리를 가지고 떠났던 사실을 설명하고 그 보따리를 그대로 을에게 돌려 주었다. "내 황금을 가지고 갔던 게 자네였나!" 을은 실색했다. 그런면서 공연히 의심한 직불의에게 백배사죄를 했다. "진작 그랬었다고 말할 것이지!" "그렇게 설명했다고 해서 자네의 의심이 풀렸겠나. 그리고 자네의 황금을 누가 가지고 갔는지 내가 알 턱도 없지." 그 일로 인해 직불의는 유덕자로 칭송되었다. 효문제도 이를 칭찬하고 점차로 승진시켜 결국 직불의는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조정의 한 관리가 직불의를 헐뜯었다. "불의가 잘생긴 사내라는 건 알아.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자기 형수하고 붙어먹지?" 누군가가 와서 귀띔해 주었다. 그 때 직불의는 거두절미하고 딱 한 마디만 했다. "허지만 나에겐 형이 없는데."
오.초칠국의 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 직불의는 봉록 2천 석의 신분이었다. 그는 병사를 이끌고 나가 크게 공을 세웠다. 효경제 후원(後元) 원년에 그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그리고 색후(塞侯)로 봉해졌다. 효무제 건원 연중에 그는 승상 위관과 함께 과실로 인하여 면직되었다. 직불의는 노자(老子)의 학문을 공부해 관직에 임했고, 직무상의 일은 반드시 전임자를 따라 함부로 변경하지 않았으며, 관리로서의 업적이 드러날까 두려워했으며, 명성을 드날리는 일을 아주 싫어했다. 때문에 유덕자로 칭찬받았다. 직불의가 죽은 후 아들 직상여(直相如)가 작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직상여의 아들 직망(直望)잉 주금(酎金)의 일에 실수하여 후의 작위를 잃었다. 낭중령 주문(周文)의 이름은 인(仁)이다. 본시 조상이 임성(任城:山東省) 사람이다. 그는 의술(醫術)이 인연이 되어 황제를 뵐 수가 있었다. 그는 처음 효경제가 황태자였을 적에 그의 사인(舍人)이었다. 공을 쌓고 점차고 승진해서 효문제 때에는 태중대부가 되었다. 효경제가 즉위한 초기에 주문은 낭중령이었다. 그 사람됨이 신중하고 입이 무거워 그를 통해서는 절대로 비밀이 새는 법은 없었다. 언제나 헤어져서 더덕더덕 기운 옷을 입고 오줌묻어 얼룩진 바지를 입고 다녔다. 오히려 그런 불결한 소탈감이 효경제의 신임을 얻어 침실에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토록 더러운 사내라면 이성(異性)관계가 생길 리가 없다고 믿어 버린 것이다. 황제가 후궁과 음탕한 놀이를 벌일 때에도 주문은 항상 황제곁에 있었다. 효경제가 붕어한 후에도 그는 낭중령으로 있었으나 끝내 남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황제가 때때로 신하의 인물 됨됨이를 물어도 그의 대답은 딱 한 가지였다. "폐하께서 직접 그를 살펴 판단하십시오." 남을 비방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좋아해 효경제는 그의 집으로 두 번이나 행행했다. 주문은 후에 양릉(陽陵: 陝西省)으로 이사를 했다. 황제가 하사하는 물품이 매우 많았으나 가급적 사양하였고 구태여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후와 대신들도 그가 황제의 측근임을 알고 뇌물을 주려고 애를 썼으나 그는 한사코 받지 않았다. 효무제가 즉위한 뒤에도 주문을 선제 이래의 총신이라 해서 그를 존중했다. 주문은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2천 석의 봉록을 받으면서 향리로 은퇴했다. 그의 자손들 중에 고관이 된 자가 많았다.
어사대부 장숙(張叔)은 이름이 구(歐)이다. 안구후(安丘侯) 장설(張設)의 서자였다. 장숙은 효문제 때에 법가(法家: 刑名學)의 학문을 연구했다 해서 황태자를 섬길 수가 있었다. 비록 그가 법가의 학문을 했지만 사람됨은 유덕자였다. 효경제 때에는 구경(九卿)에 올랐다. 효무제 원삭 4년에 한안국(韓安國)이 면직되면서 장숙이 어사대부로 임명되었다. 장숙은 관리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남을 죄로 다스릴 것을 주청한 일이 없었다. 관속들 역시 그를 유덕자로 보고 속이려고 하지 않았다. 관속에게서 옥사(獄事)에 관한 상주문이 올라오면 각하시켜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가급적 각하시켜 버리고 그럴 수 없는 것이라면 눈물을 흘리면서, 피고가 죽어도 여한이 없는가를 본인한테서 인정받은 후에야 문서에 결재를 했다. 그의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 장숙은 늙고 병들어 면직을 청원하자 황제는 상대부(上大夫)의 봉록을 주어 그를 은퇴케 했다. 양릉에 거주했으며, 그의 자손들 중에 고관이 많았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공자께서 '군자란 말을 더듬거리더라도 실행은 민첩하게 했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만석군이나 건릉군이나 장숙 같은 이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의 교화는 엄숙하지도 않았으나 성과를 올렸고 엄격하지도 않으면서 잘 통치되었다. 색후는 다소 간교한 기교를 부린 것도 같고, 주문은 군자들의 비난을 다소 받는 걸로 보아 역시 아첨 가까이에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정도의 인물들이라면 독실한 군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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