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40. 계포.난포열전
계포는 유연한 태도로 자신의 강직한 성격을 누르고 드디어 궁중의 대관<大官>이 되었다. 난포는 고조의 권세에 위협받으면서도 죽은 팽월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40에 <계포.난포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계포는 초나라 출신이다. 사내다운 의기와 의협심으로 초나라에서도 유명했다. 항우가 그를 장군으로 삼자 그는 자주 유방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항우가 멸망하자 고조는 당연히 현상금을 걸어 계포를 잡게 했다. - 감히 계포를 숨기는 자가 있으면 죄가 삼족에 미칠 것이다. 계포는 복양(복陽)의 주씨(周氏)네 집에 숨어 있었다. 그 때 주씨가 말했다. "한나라에서는 상금을 걸고 장군을 엄중히 수색하고 있습니다. 종적을 찾아 장차 이 곳까지 들이닥칠 것이니 장군께선 제가 드리는 계책을 듣든가 아니면 사전에 제가 먼저 자결을 하겠습니다." "우선 계책부터 들어 봅시다." 계포는 주씨가 내놓는 계책을 들었다. 그래서 그대로 하기로 했다. 주씨는 계포의 머리를 깎고 목사슬을 채우고 갈포옷을 입혀 노예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 다음 광류거(廣柳車: 덮개 있는 짐수레)에다 수십 명의 가복(家僕)과 함께 노(魯)나라 주가(朱家: 협객으로서 <유협전>에 나온다)한테로 가서 팔았다. 주가는 그가 계포라는 것을 알았다. 짐짓 모른 체하고 사들여서는 농지에 두고서 자기 아들에게 일렀다. "농사일이라면 저 노예의 말을 듣고 또 식사도 반드시 함께 하도록 하여라." 그런 다음 주가는 초거(단말마가 끄는 작고 가벼운 수레)를 타고 낙양으로 가서 등공을 만났다. 등공도 주가를 집에 머무르게 하며 며칠 동안 술을 마셨다. 어느 날 주가가 등공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계포를 엄중 수색하고 계시나 본데 그에게 무슨 큰 죄라도 있습니까?" "항우를 위해 폐하를 여러 번 궁지로 몰아넣은 게 죄지요." "괴상한 죄도 다 있군요." "어쨌든 폐하께선 그것을 원망하여 반드시 잡으려 하십니다." "공께선 그런 계포를 어떤 인물로 보십니까?" "현자(賢者)지요." "신하는 각각 자기 주인을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계포가 항우를 위해 충성한 것은 계포의 직분에 불과합니다. 도대체 항우의 신하라면 무조건 다 잡아 죽이신답디까."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께선 천하를 얻은 지 얼마 안 되지요. 그런 분이 계포만한 현자를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 한 사람을 엄중 수색하고 있대서 도량 좁은 군주라 천하에 소문이 났습니다. 폐하를 위해서도 좋은 처신이 아니지요. 계포는 북상하여 흉노에게로 도망치든가 아니면 남하하여 남월로 도망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는 장사(壯士)를 미워해 적국에 이익을 주는 결과와 같은데 마치 오자서가 형(荊:楚) 평왕(平王)의 분묘에서 시체를 꺼내어 채찍질한 것과 같은 일이지요. 이는 반드시 보복을 가져옵니다. 공께선 어찌 폐하를 위하여 그 일을 충고하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새삼스럽게 그대의 의견이 옳구려. 기회를 엿보지요." 등공은 주가가 대단한 협객(俠客)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포역시 그의 집에 숨겨 두었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등공은 한가한 틈을 타서 고조에게 주가가 말한 취지의 말을 했다. 고조도 깨달은 바가 있어서 고개를 끄덕거린 뒤 계포를 용서했다. 당시에 천하의 현사들은 계포가 자신의 강의(剛義)한 성격을 누르고 유연한 태도로 살아 있었음을 찬양했다. 주가 또한 그 일로 당세에 명성을 날렸다.
얼마 후 계포는 고조한테 불리어 갔다. 계포는 고조에게 사과했다. 계포는 낭중 벼슬에 올랐다. 효혜제 시대에 들자 계포는 중랑장(中郞將: 侍從武官長)이 되었다. 선우가 서신을 통해 여태후를 모욕한 사건이 있었다. 왈칵 노한 여태후가 제장들을 몰아놓고 대책을 논의했다. 상장군 번쾌가 나섰다. "저에게 10만의 군사만 주십시오. 흉노 땅으로 가서 놈들을 마음껏 유린해 놓겠습니다." "옳습니다." "찬성입니다." "번쾌에게 군사를 주십시오." 제장들이 모두 찬동했다. 여태후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였다. 계포가 벌컥 나섰다. "안 됩니다. 번쾌를 참죄(斬罪)에 처하십시오." "무어요?"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천하를 전단하는 여태후에 계포가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고조께서도 40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리고도 평성에서 참담한 고배를 드셨습니다. 번쾌가 10만 군사로 흉노 땅을 유린하다니 이것이 바로 면전에서 여태후를 기만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진(秦)나라는 흉노 땅 정벌을 일삼다가 진승의 봉기 빌미를 주었습니다. 그 여파의 상처가 아직 채 아물기도 전에 번쾌가 면전에서 아첨해 천하를 동요시키다니요." 전상의 신하들은 모두들 결론이 어찌날 것인가 하고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태후는 곰곰 생각해 보더니 흉노 징벌 논의를 철회시켜 버렸다. 그 이후로 흉노 토벌문제는 재론되지 않았다.
계포가 하동군(河東郡: 山西省 南部) 태수가 되었다. 효문제 시절에 이르러 계포의 현명함을 칭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효문제는 그를 불러 어사대부로 삼으려 했다. 계포는 불려 와서 서울의 하동군 숙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계포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용맹스럽긴 하지만 술에 취하면 난폭해져 아무도 그와 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물에게 어사대부의 자리는 맞지 않습니다." 결국 효문제는 단안을 내렸다. 숙사에 머문 지 한 달 만에 임지로 돌아가도록 명한 것이다. 계포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를 들었다. 그래서 계포는 어전에 나아가 말했다. "저는 공적도 없는데 폐하의 총애를 받아 하동에서 삼가 봉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 폐하께서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저를 부르셨으니 이는 틀림없이 누군가가 폐하께 저를 두고 기만했던 것입니다. 또 제가 상경해 기다렸지만 그대로 임지에 돌아가라 하시니 이 또한 누군가가 저를 두고 비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폐하께서는 한 사람이 칭찬한다 해서 저를 부르시고 한 사람이 비방한다 해서 저를 돌려보내십니다만, 두려운 것은 천하의 인사들이 듣고 폐하의 식견을 의심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효문제는 부끄러운 듯이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하동군은 짐의 팔다리와 다름없는 곳이오. 그래서 특별히 그대에게 맡기는 것이오." 계포는 작별인사를 드리고 임지로 돌아갔다.
초나라 출신에 조구생(曹邱生)이라는 변설가가 있었다. 그는 권력가에게 자주 붙고 돈을 밝히는 인물이라는 평이 나 있었다. 그는 고위층 환관 조동(趙同: 本名은 談이나, 사마천의 부친이 談이므로 그 이름을 고친 듯함)을 섬겼으며 두장군(竇長君: 李文帝 妃의 오빠)과도 친하게 지냈다. 계포가 이 소문을 듣고 두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 조구생은 성실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와 교제하지 마십시오. 조구생은 귀향하려 하면서 두장군에게 계포를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써 달라고 했다. 두장군은 난색을 표시했다. "계장군은 당신을 좋아하지 않소. 찾아가지 마시오." "아닙니다. 저에게도 생각이 있으니 꼭 써 주십시오." 조구생은 억지로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떠났다. 조구생은 먼저 계포에게 명함을 넣었다. 그랬더니 과연 노했다. "어디 그 뻔뻔스런 얼굴이나 좀 보자." 조구생이 들어왔다. 그는 계포에게 절한 뒤에 입을 열었다. "초나라 사람들의 속담에 '황금 백 근(斤)을 얻느니보다 계포가 승낙한다는 말 한 마디를 얻는 것일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양나라.초나라 지방에서 이런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제가 장군의 명성을 선양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에게 같은 초나라 사람인데도 심하게 역정을 내시니 섭섭합니다." 계포는 사과하고 그를 끌어들여 수개월 동안이나 상객으로 머무르게 하고 두둑한 전별금을 주어 떠나보냈다. 계포의 명성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조구생이 선양하며 돌아다녔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계포의 아우 계심(季心) 또한 관중을 집어삼킬 만한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람을 접할 때는 공손하고 은근하면서도 의협남아로 활약했으므로 사방 수천 리의 인사들이 모두 앞다투어 그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계심이 한때 사람을 죽이고 오(吳)로 도망해 원사(袁絲: 袁앙)를 의지하여 몸을 숨겼다. 그리고 원사를 형으로 섬기고 관부(灌夫).적복(籍福) 등의 무리를 아우로 돌봐 주었다. 한때 중사마(中司馬: 국도 수비대장인 中尉의 속관)로 있었는데 직속상관인 준엄한 중위 질도(李景帝 때의 酷吏, 列傳 62권 <혹리열전>에 나옴)조차도 계심을 예우할 정도였다. 젊은이들 중에는 때때로 계심의 부하로 행세하는 자들이 많았다. 당시에 계심은 '용맹'으로, 계포는 '신의와 단호함'으로 그 명성을 관중지방에서 떨쳤다.
계포의 외삼촌 정공(丁公)은 초나라 장군이었다. 그는 항우를 위해 팽성 서쪽에서 유방을 궁지로 몰아넣고 단병접전(短兵接戰)을 감행해 유방을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했다. 다급해진 유방이 적장인 정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둘은 모두 현인(賢人)인데 굳이 싸울 필요가 있겠소." 유방이 정공에게 자기와 동격의 현인이라 추켜세우는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그러자 정공은 흘낏 유방을 돌아보더니 군사를 이끌고 그대롤 돌아가고 말았다. 유방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유방은 겨우 풀려나서 도망했다. 항우가 멸망하자 정공이 고조를 찾아왔다. 전날에 살려 준 은공을 잊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러나 고조의 태도는 달랐다. "저자를 군중에 조리돌리면서 말해라. 정공은 항왕의 신하로서 불충했다. 항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바로 저자 때문이거든." 고조는 기어이 정공을 베고 말았다. "후세에 신하된 자는 결코 정공을 본받지 말라!"
난포는 양(梁: 河南省 中部)나라 사람이다. 양왕 팽월이 아직 서민이었을 적에 난포는 팽월과 친교가 있었다. 두 사람은 곤궁해서 제(齊)나라로 가서 날품팔이도 하고 술집 고용인으로 지내기도 했다. 몇 해가 지나서 팽월은 제를 떠나 거야(巨野: 山東省)로 가서 도적이 되었다. 난포는 난포대로 끌려가 연(燕)에서 노예로 있었는데 그는 자기 주인을 위해 원수를 갚아 주었으므로 연의 장수 장도(臧도)가 그를 발탁해 도위(都尉: 경비대장)로 삼았다. 훗날 장도가 연왕이 되면서 난포를 장군으로 삼았다. 장도가 모반하자 한나라는 연을 쳐서 난포를 사로잡았다. 양왕 팽월이 이 소식을 들었다. 즉시 고조에게 청원해 몸값을 지불하고 난포를 빼내왔다. 그리고 양의 대부로 삼았다. 난포가 제나라로 사신가서 돌아오기 전에 한은 팽월이 모반했다는 죄목으로 그의 삼족을 몰살했다. 그러고는 팽월의 목을 낙양성 아래 매달고 조칙을 내렸다. "감히 팽월의 시체를 수습해 가는 자가 있거든 즉시 사로잡아 들여라!" 난포는 제에서 돌아오자마자 팽월의 머리 밑으로 찾아갔다. 거기서 귀환보고를 하고 다시 머리를 제사 지내며 소리 높여 통곡했다. 그런 난포가 체포될 수밖에 없었다. 고조가 듣고 끌어오라 했다. "내가 그자의 시체를 수습하지 못하게 했더니 네놈만이 제사를 지내고 곡성을 냈으니 필시 네놈은 팽월과 함께 모반한 것이 명백하다. 삶아 죽이겠다." 형리가 난포를 끌고 끓는 물로 가려할 때 그제서야 난포는 입을 열었다. "한 말씀만 올리고 죽겠소." "할 말이 있겠는가." "폐하가 팽성에서 궁지에 몰려 형양과 성고 사이에서 패배했을 때 그래도 항우가 서진하여 한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한 것은 팽월이 양 땅에 버티고 서서 한과 합종해 초를 괴롭혔기 때문이오. 당시에 팽왕이 초를 편들었다면 한이 깨어지고 한의 편을 들었다면 초가 깨어지도록 돼 있었소. 또 해하(垓下)의 회전에서도 팽왕이 없었더라면 항씨는 결코 멸망하지 않았소. 천하가 이미 평정되고 팽왕이 할부를 받고 봉을 받아 이것 역시 그는 자손 만대에 전하려 했소. 그런데 폐하께서는 팽왕에게 양으로 출병하라 했을 때 신병으로 출동치 못한 것을 형적도 분명치 못한 사건을 가지고 모반으로 단정하여 가혹한 판결로 그를 주멸하고 말았소. 아마 모든 공신 하나하나가 속으로 불안에 떨고 있을 거요. 모두가 팽월처럼 죽게 될 테니까. 자, 지금은 팽왕도 이미 죽었으니 나도 살고 싶지 않소. 어디 삶아 죽여 보시지!" 고조는 아픈 표정을 짓고 차마 난포를 삶아 죽이지는 못했다. 결국 고조는 난포의 죄를 용서하고 도위(都尉)벼슬을 주었다.
효문제 때 난포는 연나라 재상이 되었다가 다시 장군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곤궁할 때 치욕을 참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고 부귀할 때 쾌적한 심경에 도달 못 하면 현인이라 할 수 없다." 난포는 한때 은혜입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후히 보답하고, 원한이 있던 자에게는 반드시 의법처단했다. 오군(吳軍: 吳.楚의 잘못인 듯하다)이 모반했을 때 군공을 세워 그는 유후(兪侯)에 봉해졌다. 다시 연의 재상이 되었다. 연과 제의 지방에서는 모두들 난포를 제사 지내는 사당을 세우고 난공사라고 불렀다. 그는 효경제의 중원(中元) 5년에 죽었다. 아들 분(賁)이 뒤를 이었고 그는 태상(太常)에 승진했으나 종묘제향(宗廟祭享)의 희생(犧牲)을 율령에 맞추어 사용하지 않은 죄를 입어 봉국이 제거되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계포는 의기충천하는 항우 밑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그는 자주 군을 통솔해 적군을 깨고 군기를 탈취했다. 그야말로 장사라 할 수 있다. 그는 죄인이 되어 형벌의 대상이 되고 남의 노예가 되고서도 자결하지 않았다.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재능에 자신을 가지고 치욕을 당하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기 재능의 활용만 염원하면서 여전히 못다 편 재주를 펴 보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끝내 한의 명장이 되었다.
- 현자는 참으로 자기 죽음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보잘것 없는 남녀들이 걸핏하면 비관자살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해 재기하려는 기력이 없어 그냥 죽은 것이다[사마천 자신이 宮刑을 받고도 살아남아 <사기>완성에 증진한다는 자부심과 자기편달의 뜻이 숨어 있는 대목이다].-
난포가 팽월의 죽음을 통곡하다가 열탕으로 향하는 태도는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이는 자신의 처신할 바를 알고 자신의 삶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옛날의 열사(烈士)라도 이 사람보다 나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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