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39. 유경.숙손통열전
완강한 호족(豪族)들을 강제 이주시켜 관중에 도읍하는 터를 만들고, 흉노와 화친조약을 맺었으며, 조정의 의례를 밝히고 종묘의 제법(祭法)을 제정했다. 그래서 제39에 <유경.숙손통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유경(劉敬)은 제나라 사람이다. 한(漢)의 5년에 그가 농서의 수비병으로 가다가 유방을 만났다. 원래 그의 성씨는 누씨였다. 나중에 유방에게서 성씨를 받아 유(劉)씨가 되었다. 그만큼 사랑을 받았다. 유경은 짐수레를 끌다 말고 뛰쳐나와 양피옷을 입은 채 소리쳤다. 그때에 만난 장군은 우(虞) 장군이었다. "폐하를 뵙게 해 줍쇼." 우 장군이 살펴보니 양피(羊皮)옷을 입은 거의 거지였다. "폐하를 만나 뵈려면 체면치레는 하게." "저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비단옷이면 어떻고 갈포(褐布)면 어떻습니까?" "맘대로 허게." 유방은 유방대로 기분이 나빴다. 우 장군에게 물었다. "저런 거지를 왜 나한테 소개시키시오." "정신은 있는 듯하니 한 마디만 듣는 척하십시오." 그래서 유방은 식사를 하는 척하면서 미적미적 몇 시간 미루다가 유경을만났다. 유경은 유방은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소리쳤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낙양에 도읍하시려는 이유가 주왕실(周王室)과의 융성을 다투려 하는 심사입니까?" 잠깐 생각하던 유방이 소리쳤다. "그래!" "그렇지만 주왕실과의 그것과는 다를 걸요." "뭐가 다른가?" 대화에 빨려든 꼴이었다. "주(周)의 선조는 후직(后稷)입니다. 그는 요(堯)임금으로부터 태(邰:陝西省 武功縣 남서)땅에 봉함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도 그곳에서 덕을 쌓고 선정을 베풀기를 10여 대(代)가 넘도록 하였습니다. 공유(公劉) 때에는 하(夏)의 걸(桀)왕을 피해 빈(陝西省) 땅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태왕(太王: 古公亶父) 때에는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 빈을 떠나 말채찍을 지팡이 삼아 기산(陝西省.山縣의 북동)으로 이주했는데 백성들은 앞다투어 그를 따랐습니다. 문왕(文王)이 서백(西伯: 西方諸侯의 우두머리)이 되어 우(虞).예(芮) 두 나라의 송사를 잘 조정하고 비로소 천명(天命)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때 태공망 여상(呂尙)이나 백이(伯夷)와 같은 현자가 동방의 해안지방으로부터 찾아와 그에게 귀속했습니다. 주의 무왕 때에는 은의 주왕을 치자고 기약도 하지 않았는데 맹진(孟津: 洛陽의 동쪽, 河南省 孟縣의 남쪽) 가에 8백여 명의 제후들이 모여 모두 주(紂)왕을 쳐서 없애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래서 은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주공(周公) 단(旦) 등의 현인들이 그를 보좌했습니다. 그 때 도성으로 낙양(洛陽)을 건설했습니다. 낙양은 천하의 중심이라 제후들이 사방에서 조공하거나 노역을 제공하는 데에 있어서도 그 거리가 알맞아 덕이 있는 사람이면 쉽게 왕노릇을 할 수 있는 곳이며 반면 덕없는 자는 패망하기에 딱 알맞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거요?" "무릇 이 곳을 수도로 정하는 것은 주나라에서는 왕자(王者)가 덕으로써 사람들이 모여들도록 힘써 또 그렇게 노력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며, 험준한 지형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한 군주가 백성들을 학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발상에서였습니다." "그대는 지금 짐을 비방하고 있는 거요?" "조금 더 들어 주십시오. 주나라가 융성할 시절에는 천하가 화합해 사방의 오랑캐들도 그 교화에 이끌려 의를 사모하고 덕을 기리어 천지를 이반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한 명의 수비병이 없고도 팔방의 오랑캐가 싸움을 걸어 오기는커녕 조공과 노역을 제공치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 주나라가 쇠잔해지자 동서로 분열되었고 천하에 입조하는 제후가 없었으나 그것을 제어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 점은 어째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오?" "주왕조의 덕이 희박해졌다기보다 도성의 지형이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형이 견고치 못했다?" "지금 폐하께서는 풍과 패에서 봉기하시어 3천 명의 병력으로 진격해 촉.한을 석권하고 삼진을 평정했으며 형양에서 항우를 부수느라 대혈전을 벌였었지요. 성고의 입구를 장악하기 위해 대회전 70차례, 소전투 40회를 치러 천하 백성들의 간과 뇌수를 으깨 그 땅을 적시게 했고 부자(父子)의 해골이 들판에 질펀히 뒹굴게 했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데 상이용사가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마치 주나라 최융성기인 성왕.강왕(康王) 시대를 꿈꾸듯 낙양에 도읍하려 하시니 저는 그 때와 지금의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했던 바입니다." "도읍을 낙양에 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그렇다면?" "저 진(秦)나라 땅을 보십시오. 산으로 덮혀 있고 황하를 끼고 있습니다. 사면이 자연으로 막혀 있는 요새이지요. 또 네 개의 관새(關塞: 동쪽의 함곡관.남쪽의 武關.서쪽의 大散關.북쪽의 肅關)가 견고하게 서 있어 일단 위급할 때에는 백만 대군을 동원 대처할 수가 있습니다." "음......" "그 곳의 비옥한 땅을 활용하는 것도 천연의 부고(府庫)를 껴안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 그 곳에 도읍 하신다면 혹시 산동(山東이 어지러워져도 최소한 진의 옛 땅만이라도 안전하게 보유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움을 할 경우에도 멱살을 잡아 쥐지 않거나 등판을 후려치지 않고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바로 지금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하시어 진의 옛 땅을 장악하시면 그것이 곧바로 천하의 멱살을 잡고 등판을 강타하는 것이 됩니다." "음...... 일리는 있다. 한데, 그대들의 의견은 어떻소?" 고조는 그래도 자신이 서지 않아 뭇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때의 신하들이 모두 산동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거의가 반대했다. "주왕조는 수백 년 계승되었고 진나라는 단 2대에 끝났습니다. 어찌 관중이겠습니까. 낙양이 옳습니다." 할 수 없이 고조는 일단 그 안을 유보시켰다. 그러고는 가장 신임하는 유후(留侯) 장량(張良)이 입조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가만히 물었다. 장량은 누경이 설파했다는 말을 다 듣고 나더니 단언했다. "누경의 생각이 옳습니다." "짐도 찬성이오. 즉일로 옮겨 가겠소." 그래서 고조는 거가(車駕: 天子의 수레)를 즉시로 돌려 서진하여서 관중에 도읍했다. "진의 옛 땅에 도읍하고자 주장한 것은 바로 누경이다. 누는 유(劉)와 통한다. 앞으로 누경은 유경으로 불러라." 고조는 누경에게 유씨 성을 하사하여 그 때부터 유경이 되었다. 또한 유경은 낭중(郎中: 侍從)에 임명하여 봉춘군(奉春君)이라 호했다.
한나라 7년이었다. 한왕 신(信)이 반역했으므로 고조가 친정하여 진양(晋陽: 山東省 太原)에 이르렀다. 그런데 한왕 신이 흉노군과 합세해 한군을 맞아 쳐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인가. 누군가가 가서 흉노의 실정을 알아오도록 하라." 고조는 사자를 흉노로 보냈다. 그것도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각각 10차례나 따로 사신을 파견했다. "흉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장정들도 보이지 않고 살찐 소나 말도 없습니다. 노약자와 비루먹은 가축들밖에 없으니 그들의 능력은 뻔합니다." 유경이 사신으로서 마지막 차례로 갔다 돌아왔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양국이 싸우려 할 때는 누구든 자국의 장점을 과시하려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가서 본 것은 쇠약한 노약자들 뿐입니다. 그것이 수상했습니다. 필시 단점만 보여 준 것은 정예의 기습병을 숨겨 두었다가 되쳐 나와서 그들이 승리를 거두려는 계략 때문입니다. 흉노를 쳐서는 안 됩니다." 즈음에 한군은 이미 구주산(句注山: 山西省 代縣 北西의 雁門山)을 넘어 20여만 대병력이 진군하고 있었다. "저자가 싸움을 앞두고 방정맞은 소리를 하네. 제나라에서 온 포로놈이 혓바닥 몇 번 놀려 벼슬을 얻더니 군사(軍事)에 대해서는 멋도 모르면서 망언을 씨부렁대네. 불길하다. 처넣어라!" 고조는 노해서 유경에게 차꼬와 수갑을 채우고 목에는 사슬을 걸어 광무(廣武: 山西省 代縣)의 옥에다 가두었다. 그런 후 진군해 평성(平城: 山西省 大同縣의 동쪽)에 도달했다. 그런데 흉노가 기습병을 가볍게 출동시켜 백등산(百登山: 山西省)을 포위해 버렸다. 고조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죽을 고비를 당해 우여곡절 끝에 7일 만에야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가 있었다. 고조는 광무에 이르러 유경에게 용서를 빌었다. "내가 그대의 진언을 듣지 않았다가 평성에서 곤욕을 치렀소. 용서하오. 그대 앞서 10차례나 사신 다녀와 흉노를 칠 만하다고 상주한 사자들은 벌써 모조리 베어 버렸소." 그런 후 고조는 유경에게 봉령으로 2천 호를 덧붙여 관내후에 봉하고 건신후(建信侯)라 호했다. 고조가 평성의 전투를 중지하고 귀환하자 한왕 신은 흉노로 망명했다. 당시 흉노에서는 묵특(漢字音은 묵돌)이 선우(선于: 匈奴의 王)가 되었는데 30만의 강력한 군사로 자주 한나라 북방 변경을 괴롭혔다. "오랑캐를 달래는 방법이 없겠소?" 고조의 물음에 유경이 대답했다. "천하가 평정된 초기여서 사졸들은 전투의 후유증으로 아직은 피로해 있습니다. 그러니 무력으로 흉노를 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렇대서 묵특은 제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된 자로 아비의 첩들을 제 처첩으로 삼은 자이니 인의(仁義)의 도덕으로 그자를 설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자를 한의 신하가 되도록 만드는 계략이 딱 한 가지 있긴 하지만 아마 폐하께서는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그 계략이 도대체 어떤 것이오?" "폐하의 적장 공주(適長公主: 嫡出年長의 皇女)를 묵특 선우에게 시집 보내는 일입니다." "무어요?" "그래서 실행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한의 황녀의 존귀함과 두터운 선물을 보고는 오랑캐라도 한을 사모할 것은 필시입니다. 필시 그자는 공주를 연지(單于의 正妻)로 삼을 것이며 아들을 낳게 되면 반드시 태자로 삼아 대신하여 선우로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자는 한나라에서 보내는 푸짐한 선물을 탐낼 것이기 때문이지요. 철따라 폐하께서는 한에서는 남아돌고 흉노에는 없는 물자를 문안편지와 함께 곁들여 가끔 보내십시오. 그 기회에 말 잘하는 변사를 보내 넌지시 예절을 가르치면 됩니다. 묵특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 한나라의 사위인 것이며 그가 죽더라도 한나라의 외손이 선우가 되는 것이 묘미입니다. 외손자가 감히 할아버지에게 대등한 예(禮)를 주장했다고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고서도 점차 흉노를 신하로 삼을 수가 있게 되지요." "그럴 듯하긴 하나 끔찍한 계교요." "만일 폐하께서 장 공주(長公主: 王의 姉妹이나 여기서는 天子의 嫡出皇女)를 보내지 못하고 종실이나 후궁의 여식을 뽑아 공주라 속여 보내면 아무런 효험도 없게 됩니다. 묵특도 나중에는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그녀를 후대하지 않을 테니까요." "좋은 계략이다." 고조는 그래서 장 공주를 보내려 했다. 그랬더니 여황후(呂皇后)가 밤낮으로 울면서 반대했다. "오로지 저에게는 태자 하나와 공주 하나밖에 없는데, 어찌 하나밖에 없는 공주를 오랑캐한테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여태후의 반대가 너무도 완강했으므로 고조도 장 공주를 흉노로 보낼 수는 없었다. 별수없이 차선책으로 아름다운 서민의 딸을 골라 장 공주라 속이고 선우에게 시집 보냈다. 그 때에도 유경이 흉노로 파견되었다. 유경이 흉노와 화친조약을 맺고 돌아와서 고조에게 권했다. "하남(河南: 黃河 남쪽, 오르도스 지방)에 살고 있는 흉노들인 백양왕(白羊王)과 누번왕(樓煩王)은 장안(長安)에서의 거리가 겨우 7백리입니다. 경기병이라면 하루낮 하룻밤이면 진중(秦中: 關中)에 도달할 거리입니다. 진중은 전화를 입은 지가 얼마 안 되어 인구가 적고 아직도 황량합니다. 그렇지만 땅이 비옥하니 번영의 가능성이 많은 땅입니다." "실상 버려 두기 아까운 땅이오." "백성들을 이쪽으로 이주시키시지요." "이주를? 누구를?" "진의 압정에 대항하여 제후들이 궐기할 당시에는 제의 전씨라든가 초의 명족인 소(昭)씨.굴(屈)씨.경(景)씨 등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봉기는 실패했을 것입니다." "옳은 얘기요." "그렇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요. 그런 호족들이 아직도 상주하고 있는 한 폐하께서도 베개를 높이 하고 잠드실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이주시키자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관중에 도읍했다고 하시나 인구가 적습니다. 게다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북방 흉노의 침략이 상존해 있는 데다 동방 옛 6국 호족들이 역시 강해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의 전씨 일족, 초의 소씨.굴씨.경씨, 연.조.한(韓).위(魏)의 왕족들의 후손 및 각지의 호걸.명족들을 모조리 끌고 관중으로 옮겨 오면 우선 인구가 넉넉해져서 좋고 그들의 반란을 예방할 수 있는데다 흉노에도 대비할 뿐 아니라 산동의 제후가 사변을 일으킬 경우에도 이들을 끌고 동벌(東伐)하기에는 아주 그만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근본을 튼튼히 하고 말단을 약화시키는 방법이 되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계략이다!" 고조는 몹시 기뻐했다. 그래서 유경이 적어 올린 족벌들 약 10만명을 관중으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뒷날의 우환을 없이 했다.
숙손통(叔孫通)은 설(薛: 山東省) 땅 사람이다. 진(秦)나라 때에 학문이 뛰어났다 하여 조정으로 불리어 갔다. 박사관(博士官)으로 임명될 예정으로 수 년간 출사(出仕)했다. 그러던 중 진승(陳勝)이 산동에서 봉기하자 사자들이 와서 그 소식을 전했다. 놀란 2세 황제가 박사관들과 유자(儒者)들을 불러 물었다. "초의 수비병 놈들이 기 땅을 공격하고 진현(陳縣)으로까지 쳐들어왔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오?" 박사와 유자들 서른 명 가까이가 나서서 이렇게 떠들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반란입니다. 신하된 자로 반란이라니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폐하께선 급히 군사를 동원해 그자들을 치십시오." "반란은 아닐 것입니다. 신하로서 '반란'이란 생각만 해도 그것은 이미 반역입니다. 사형에 처하십시오. 용서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자들은 분명 역도들이 아니라 단순한 도적들에 불과할 것입니다." 어쨌든 2세황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황제가 분노하는 기색의 뜻을 눈치챈 숙손통이 재빨리 내달아 아룄다. "여러 유생들의 말들은 다 잘못입니다. 이제는 천하가 통일되어 한 집안처럼 되었으며 군현의 성벽 역시 허물어진 지 오래고 무기 역시 녹여 버려 아무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천하에 명시했습니다. 명철한 군주께서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시고 법령 또한 밑으로 잘 완비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각자 자기 직분에 힘쓰며 사방의 백성들은 이런 정치를 사모하여 모여드는데 어찌 감히 반란을 도모할 자가 있겠습니까. 있다면 저들은 쥐나 개처럼 좀도둑질이나 하는 그런 떼거리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군수들이 도둑잡는 위관들을 시켜 그자들을 곧 잡아들여 논죄할 것입니다. 과히 근심하지 마십시오." 2세황제는 숙손통의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어사(御史)는 잘 조사하여 형리에게 넘겨라. '도둑'이란 말을 쓴 자는 용서하되 '반란'이란 말을 써서 짐을 현혹시킨 자들은 모조리 벌 주어라." 형리들이 유자들을 사정없이 잡아들였다.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왜 그렇소?" 유자들이 형리에게 따졌다. "그것은 말해선 안 될 것을 말했기 때문이오." 좌우지간 숙손통은 도둑임을 주장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고 비단 20필과 옷 한 벌을 황제로부터 하사받았다. 그리고 금세 박사관에 임명되었다. 숙손통이 궁에서 퇴출해 박사관사로 돌아오자 여러 유생들이 빈정거렸다. "선생은 어전에서 잘도 아첨합디다. 어쩜 그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쇼?" 숙손통이 되받았다. "모르는 소리 그만하슈. 그대들도 나 아니었다면 모조리 호랑이 이빨 속으로 들어가 살아 나오지도 못할 뻔했소. 어쨌든 어서어서 도망들이나 치시오. 참말이든 거짓말이든 어차피 여기서 꾸물대다간 살아남지 못하오." 숙손통은 그런 후 즉시 도망해 설 땅으로 갔다. 설땅은 이미 초군에게 항복한 뒤였다. 항량이 설 땅으로 왔으므로 숙손통은 항량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항량이 정도(定陶: 山東省)에서 패했으므로 이번에는 초의 회왕을 따랐다. 그러던차 회왕이 의제(義帝) 칭호를 받고 장사(長沙)로 옮아가 버렸으므로 숙손통은 잔류하여 항우를 섬겼다.
한의 2년이었다. 한왕이 5인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입성하자 이번에는 숙손통은 한왕에게 항복해 버렸다. 한왕이 또 패전해 서쪽으로 퇴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때부터 한왕을 따르기로 하고 그를 섬겼다. 숙손통은 원래 유복(儒服)을 입고 있었는데 한왕이 그것을 싫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 옷을 즉시 초풍(楚風)의 짧은 옷으로 바꿔 입었더니 한왕도 좋아했다. 숙손통은 한왕에게 항복할 때 수하에 백여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왕은 숙손통에게 부탁해 수하의 인물들 중에서 재능있는 자를 추천하라고 했다. 그러나 숙손통은 제자를 한 명도 한왕에게 추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자들 대신 과거에 떼도둑이었거나 힘깨나 쓰는 자들만 추천했다. 제자들이 불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만을 따르고 섬기다가 다행히 한나라에 항복하게 됐지만 선생님께선 도무지 저희들을 추천해 주시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고작 쓰잘데없는 도둑놈들과 사기꾼들만 추천하고 계시니 말씀입니다." "모르는 소리 말아라. 돌과 화살만으로 천하를 다투고 있는 이 때에는 너희들의 재능은 소용이 없다. 적장의 목을 베고 적의 깃발을 훔쳐 내오는 인물이 훨씬 이롭다. 그래서 그런 전사들만 추천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좀더 기다려라. 내가 너희들을 잊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깊은 뜻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한왕은 숙손통에게 박사관의 벼슬을 주고 직사군(稷嗣君)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한나라 5년이었다. 천하가 통일되어, 제후들은 한왕을 높여 정도에서 황제 위에 오르게 했다. 숙손통이 황제의 취임의식과 칭호 등을 마련했다. 고조는 진조의 번거로운 의례를 모조리 폐지하고 법령을 간이하게 고치도록 했다. 그런데 뭇 신하들이 술에 취해 턱없이 큰 목소리로 전공(戰功)을 다투고, 칼을 빼어 궁중의 기둥을 치는 등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게 무슨 나라 꼴인가! 무뢰배들의 집단이지!" 고조도 불평했다. 이를 눈치챈 숙손통이 즉시 황제에게 말했다. "대체로 유자란 진취하는 데는 도움이 못 되나 이룬 것을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신이 제자들과 함께 노(魯)나라 학자들과 더불어 조정의식을 제정코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어렵지 않겠소?" "쉽게 하겠습니다. 예전 5제(五帝)는 서로 다른 음악을 사용했고, 삼왕(三王)은 같은 예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예라는 것은 시대와 인정에 따라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은.주의 예는 전대(前代)의 것을 근거로 증감한 것을 알 수 있고, 주(周)는 은(殷)의 예에 근거를 두고 증감한 것을 알 수 있다'고 공자(孔子)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논어<위정편(爲政篇)>>). 그것은 전대의 예의를 되풀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는 고대의 예(禮)를 근거로 하고 진대(秦代)의 예의도 섞어서 새로운 것을 완성하고자 합니다." "시험삼아 한번 해 보시오. 무엇보다 내가 쉽게 알고 행할 수 있는 범위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 보시오." 이에 숙손통은 노나라로 가서 유명학자 30명을 초빙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두 사람은 거절했다. "귀공이 섬긴 군주는 그럭저럭 열 사람에 가깝소. 그들 군주에게 아첨해 귀하게 쓰여졌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소. 이제 천하가 겨우 안정되어 사자(死者)는 아직도 매장되지 못하고 부상자는 여전히 일어서지 못하고 있소. 이런 처지에 새 왕조를 위해 예악(禮樂)을 일으키려 하니 가소롭기 그지없소. 예악을 일으키는 데는 그 왕조가 덕을 쌓아 백 년이 지난 뒤에라야 스스로 일어나는 거요. 우리는 귀공께서 하려는 시도가 전통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에 동참할 수가 없소. 그냥 돌아가시오." 숙손통은 그들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참으로 한심하고 비루한 유생이구려. 그건 옛적 얘기요. 시대의 변천이란 걸 그대들은 모르고 있소." 숙손통은 30여 명의 유생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돌아왔다. 황제의 측근 중에서 학문하는 자들과 숙손통의 제자 백여 명이 궁중 예의를 만드는 데 합세했다. 예법이 만들어지자 이번에는 실제로 해 보았다. 야외로 나가 참 억새를 묶은 금줄[線체]에 석차(席次) 표지를 적어 두르고 한 달 동안이나 예식의 예행연습을 거듭했다. 어지간히 연습이 되었다고 생각한 숙손통는 그제서야 고조에게 권했다. "시험삼아 폐하께서도 보실 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소?" 친림해 예식의 진행을 모두 보고 난 고조는 흡족한 듯 말했다. "장중한 느낌이 들 뿐만 아니라 우선 쉬워서 좋소. 저 정도라면 짐도 쉽사리 할 수 있겠소." 이번에는 뭇 신하들에게 예의를 익히게 했다.
맹렬한 연습이 끝난 10월 연시(年始)의 달에 첫 조회(朝會)가 있었다. 한의 7년, 때맞추어 장락궁(長樂宮)이 완성되었다. 제후와 뭇 신하들이 모두 10월에 입조했다. 의식은 날이 밝기 전에 알자(謁者: 義禮執行官)가 식전(式典)을 주관해 참례자들을 인도하여 차례로 궁정문을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궁정 내부에는 전차.기병.보졸이 위관을 갖추어 무기를 들고 서 있고 수많은 기치가 전후좌우에서 펄럭거린다. 전령이 소리친다. "뛰어서 가라!" 그러자 일체의 참례자들이 발걸음을 빨리한다. 궁전 아래에는 낭중(郎中: 侍從)들이 각 계단마다 수백 명씩 양쪽으로 늘어선다. 공신과 열후들과 여러 군사 관계의 장수들이 서열에 따라 서쪽에 늘어서서 동쪽을 바라본다. 문관은 승상 이하 역시 서열에 따라 동쪽에 늘어서서 서쪽을 바라본다. 대행(大行: 빈객을 관장하는 대신)이 9계급(公.侯.伯.子.男.孤.卿.大夫.士)을 배치하여 상의(上意)가 하달되게 하고 하의(下意)가 상달되도록 한다. 드디어 황제가 봉연(鳳輦: 사람이 끄는 수레)을 타고 침궁에서 나오는데 백관들은 치(幟)를 받들어 정숙한다. 다음에는 제후와 제왕 이하 봉록 6백 석 관료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인도되어 어전에 나아가 하례를 올린다. 제후.제왕 이하의 신하들도 두려워 떨지 않거나 숙연한 공경심을 드러내지 않는 자가 없다. 이런 하례가 끝나면 큰 주연석이 베풀어진다. 마구잡이로 먹고 마시는 술자리가 아니다. 일단은 모든 자들이 꿇어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서열에 따라 일어나서 황제에게 축수한다. 술잔이 아홉 차례 돌아 알자의 정지 구령소리가 나면 하례식은 끝난다. "주연은 이것으로 파한다!" 그 동안 어사(御史)들은 법을 엄히 집행하여 예법대로 행동하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끌고 나간다. 조의(朝儀)가 끝나고 다시 주연이 벌어지지만 감히 누구 한 사람 떠들거나 무례하게 구는 자는 없는 것이다. 예식에 압도돼 버린 것이다. 그제서야 고조는 감회를 말했다. "짐은 오늘에사 황제가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노라!" 숙손통에게 태상(太常: 禮法.祭祀를 주관하는 大臣) 벼슬을 주고 황금 5백 근[약 128킬로그램]을 하사했다. 숙손통은 이 기회에 소청했다. "저를 따라 고생한 제자들이 많습니다. 의례 역시 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 함께 일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에게도 관위(官位)를 내려 주십시오." "오, 잊을 뻔했구려." 그래서 그들 모두에게 낭관(郎官) 벼슬을 주었다. 숙손통은 퇴출하자마자 제자들에게 벼슬이 내렸음을 알리고 5백 근의 황금을 풀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자들은 모두 기뻤다. "숙손 선생은 참으로 성인(聖人)이시다. 당세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다!"
한의 9년이었다. 고조가 숙손통을 황태자의 태부(太傅: 輔育官)로 삼았다. 한나라 12년이었는데, 고조가 황태자를 폐하고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황태자로 갈아 치우려고 했다. 숙손통이 가만 있지 않았다. "옛적 진(晋)의 헌공은 여희(驪姬)에 빠져 태자를 폐하고 그녀의 아들 해제(奚齊)를 태자로 세웠다가 그로 인해 진나라는 수십년 동안이나 난을 겪어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또 진(秦)의 시황제는 장자 부소(扶蘇)를 일찌감치 황태자를 정해 두지 않았던 탓에 환관 조고(趙高)에게 말자 호해(胡亥)를 속임수로 황태자로 세우는 틈을 주어 결국 조상의 제사를 끊게 하는 불행을 당했습니다. 물론 폐하께서 몸소 보아 오신 일입니다. 지금의 태자께서는 인효(仁孝)하시다는 것을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또한 폐하와 동고동락하신 조강지처 여황후(呂皇后)의 자식입니다. 폐하께선 무슨 명분으로 여황후를 배신하겠습니까? 이제 폐하께서 정작 적자를 폐하시고 소자(小子: 如意)를 태자로 세우시려거든 먼저 저를 주살하시어 목에서 흐르는 피로 대지를 적셔 주십시오." "아, 그만두오. 농담일 뿐이오." "농담이라니요. 황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한 번 흔들리면 천하가 진동합니다. 어찌 천하대사를 가지고 농담을 하십니까!" "아아, 알았소. 그대의 말대로 하겠소." 그 후, 고조가 동원공(東園公)을 비롯한 이른바 팔순의 고덕(高德)한 은자(隱者)들이 자신이 초대할 때는 오지 않다가 장량(張良)이 초청한 객으로 황태자를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황태자의 유덕함을 깨닫고 황태자를 갈아 치우겠다는 생각을 싹 없애 버렸다. 고조가 붕어하고 효혜제(孝惠帝)가 즉위했다. 혜제는 숙손통에게 말했다. "선제(先帝)의 능묘를 모시는 예법에 대하여 그대 말고는 아무도 익히 아는 신하가 없소." 그래서 그를 태부에서 다시 태상으로 전임시켜 종묘의 의례를 제정케 했다. 결국 한나라의 여러 의례(儀禮)법들이 점차로 제정된 것은 모조리 숙손통이 태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논저(論著)된 것이다. 효혜제는 궁정 동쪽의 어머니 여태후가 있는 장락궁을 자주 방문해 그때마다 통행이 금지돼 백성들에게 큰 불편을 주게 되었으므로 따로 복도(復道: 길 위의 길)를 건설키로 했다. 공사는 곧 무고(武庫)의 남쪽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복도의 위치가 문제되었다. 숙손통은 공무를 상주한 뒤 기회를 엿보아 호혜제에게 간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복도를 축조하십니까?" "기왕에 그대가 아는 바와 같소." "궁중에 있는 고조의 침묘에 소장된 고조 생전의 의관(衣冠)이 매달 한 번씩 고묘(高廟: 高祖의 宗廟, 長安 가東에 있음)로 운반되고 있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소." "고조의 묘는 한제국(漢帝國)의 시조를 모신 곳입니다. 어떻게 후세의 자손이 종묘로 가는 길 위를 지나갈 수가 있지요?" "무어요? 그렇다면 복도가 종묘 위로 지나가고 있다는 말이오! 이거 야단났구려! 서둘러서 헐어 버리시오!" "군주에게 있어 잘못된 행위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복도 착공은 백성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이것을 허물어 버리면 곧 군주에게 잘못된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소?" "폐하께서 위수(渭水) 북쪽에다 다시 고조의 능묘를 만들고 고조의 의관을 거기로 매달 운반하십시오." "궁여지책이겠구려." "아닙니다. 종묘를 더욱 넓게 또 많이 만드는 일은 대효(大孝)의 근본이니까요." 황제는 즉시 관계관에게 조칙을 내려 신묘를 조영케 했다.
효혜제가 어느 봄날 이궁(離宮)으로 출유(出遊)했을 때였다. 그때 숙손통이 말했다. "옛적 의례에는 봄에 종묘에 과일을 드리는 예가 있었습니다. 방금 버찌가 한창 익어 드릴 만합니다." 황제가 그 의견을 받아들여 버찌를 따서 종묘에 바쳤다. 여러 가지 과일을 종묘에 바치는 일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옛말에 '천금의 털옷은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털로 만들 수 없으며, 높은 누각의 서까래는 한 개 나뭇가지로 되는 것이 아니며, 하.은.주 3대의 융성은 지혜로운 한두 사람의 머리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라고 되어 있다. 참으로 그러하다. 고조는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했으니 그의 모계(謨計)와 용병술은 더할 나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경이 짐수레의 대열에서 뛰쳐나와 천도(遷都)를 역설해 만세의 평안을 가져온 것을 보면 지혜란 역시 한 사람의 전유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숙손통은 세상에서 잘 쓰여질 것을 원해 제 임무를 찾아 내어 예의를 제정하고, 자신의 진퇴도 시세의 변화에 맞추어 드디어 그는 한왕조 유가(儒家)의 대종(大宗)이 되었다. '참으로 바른 것은 굽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며, 도(道)라는 것은 원래가 꾸불꾸불한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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