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36. 장승상열전
한제국(漢帝國)이 비로소 안정을 얻었으나 아직도 국가 통치의 원칙은 명확하지 못했다. 장창(張蒼)은 주계관(主計官: 財務大臣)이 되어 도량형을 정비하고 음률(音律)과 역법(曆法)에 질서를 부여했다. 그래서 제36에 <장승상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장승상 창(蒼)은 양무(陽武: 河南省) 사람이다. 그는 책과 음률(音律)과 역법(曆法)을 몹시 좋아했다. 진나라 때에 어사(御史)가 되어 조정 내의 기둥 밑에 앉아 군주의 언행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었다. 그런 그가 죄를 짓고 도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방이 각지를 공략하면서 양무를 지나게 되었다. 그 때 장창은 유방의 빈객이 되어 남양(南陽: 河南省)을 공격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창은 다시 죄를 지었다. 법을 위반했으므로 참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는 옷을 벗고 형틀 앞에 엎드렸다. 장대한 신장인 데다가 기이하게도 그의 살갗이 호박처럼 하얗게 빛났다. "괴상한 놈이군......!" 왕릉(王陵)의 눈에 띄었다. 누가 보아도 베어 버리기에는 아까운 미장부(美丈夫)였다. "살려 줍시다." 왕릉이 진언했고 유방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때부터 장창은 유방의 사람이 되었다. 그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무관(武關: 陝西省, 秦의 南關)에 입성하고 함양(咸陽: 陝西省, 秦郡)에 이르렀다. 패공 유방이 한왕(漢王)에 오르게 되었다. 한중을 되돌아나와 삼진(三秦: 秦의 故地, 雍.塞.翟)을 평정했다. 즈음에 진여(陳餘)가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공격해 패주 시켰으므로 장이는 어쩔 수 없이 한왕한테로 귀순했다. 이 때 한에서는 장창을 상산(常山: 河北省)의 군수로 삼고 회음후 한신을 도와 조(趙)를 공격하게 했다. 장창이 진여를 생포했다. 조 땅이 평정되자 한왕은 장창을 대(代: 山西省.河北省에 걸친 一帶)의 재상으로 삼고 변경 흉노의 침입에 대비케 했다. 얼마 후 조나라 재상으로 자리를 옮겨 장이를 보필케 했다. 조왕 장이가 죽자 장창은 조왕 장오(張敖)의 재상이 되어 그를 보필했다. 얼마 후 다시 대(代)의 재상자리로 옮겼다. 연왕 장도(臧도)가 모반했다. 고조가 친정하자 장창은 대의 재상으로 장도를 쳤으며 그 때 공이 있었다. 한(漢)나라 6년에 장창은 봉을 받아 북평후(北平侯: 北平은 河北省)가 되어 식읍 1천2백 호를 받았다. 한으로 옮겨서 처음으로 주계관(主計官: 財務長官)이 되었다. 장창은 진대부터 방서(方書: 柱下史가 기록하는 文書)를 주관하는 어사였으므로 천하의 도서(圖書).재정(財政).호적에 밝아 익숙했고 또 산수.음률.역법에도 능통했다. 당시의 상국은 소하였다. 그래서 소하는 장창을 열후로서 재상의 관부(官府)에 있게 하면서 각 군현과 제후국의 회계업무를 주관.영도케 했다. 경포가 모반했다가 멸망하자 한에서는 황자 유장(劉長)을 회남왕(淮南王)으로 세우고 장창을 그 재상으로 임명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나서야 장창은 한으로 옮겨져 어사대부가 되었다.
주창(周昌)은 패(沛: 江蘇省) 사람이다. 그의 종형(從兄)이 주가(周苛)다. 주창은 진대 때 사수군(泗水郡: 江蘇省.安徽省에 걸친 일대)의 하급 서기였다. 그 때 유방이 패에서 봉기하여 사수군의 군수.군감을 격파하자 주창.주가는 군의 하급관리 신분으로 유방을 따랐다. 유방은 주창을 치지(幟志: 旗幟를 맡아 보는 官)로 삼고 주가를 빈객으로 삼았다. 그 뒤 두 사람이 패공을 따라 무관으로 들어가 진을 격파하고 패공이 한왕이 되자 주가는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고 주창은 중위(中尉)가 되었다. 한왕 4년에 초군이 형양에서 한왕을 포위하자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다. 그 때 한왕이 형양성을 탈출하면서 주가를 시켜 형양성을 굳게 지키도록 하였다. 주가는 형양성을 지킬 힘이 없었다. 결국 초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러나 항우는 주가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초의 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그 때 주가는 오히려 항우를 꾸짖었다. "나더러 항복을 하라고? 네놈이야말로 속히 한왕한테로 달려가 항복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곧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항우는 격노했다. 그래서 주가를 삶아 죽였다. 유방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했다. 그래서 주가의 아우 주창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주창은 늘 한왕을 따라다니며 항우 격파에 온 정성을 쏟았다. 6년에 주창은 소하.조참 등과 함께 봉을 받았다. 분음후(汾陰侯)에 봉하여지고 주가의 아들 주성(周成)은 절개 지키고 죽은 부친 덕으로 봉을 받아 고경후(高景侯)가 되었다. 주창은 사람됨이 그의 형처럼 기개가 있었다. 누구에게든 거침없이 직언했다. 그런 탓으로 소하.조참 등도 주창 앞에서는 어려워했다. 언젠가 주창이 고조가 휴식하고 있을 때 입궁하여 상주하려고 했다. 한데, 때마침 고조는 총희인 척희(戚姬)를 껴안은 채 즐기고 있었다. 헛기침을 한 주창은 슬며시 돌아나왔다. 멋쩍어진 고조가 뒤쫓아 달려나와 채신머리없이 주창의 목을 타고 올라앉으며 물었다. "말하라. 내가 어떤 군주냐." 얼마쯤 유방을 업고 걸어가다가 주창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개새끼다." 실제로는 걸(桀).주(紂)와 같은 폭군을 빗대어 한 말이었다. 유방은 대충 넘어갔다. 고조는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여의(如意)를 세워서 태자를 삼으려 했다. 그러나 모든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고조는 듣지 않았다. 그런 고조가 나름대로 주창을 용서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주창이 말더듬이였기 때문이다. 주창이 아무리 강경발언을 해도 그가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대충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날도 고조는 태자를 폐하고 척희의 아들 여의를 태자로 세우려는 안건을 조정에서 거론했을 때였다. "아 아 아 아니됩니다. 저 저 저는 말은 못 해도 기 기 기필코 옳지 않다는 것만은 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려 하시려 해도 저는 기 기 기필코 바 바 반대합니다." 엄숙한 제안이었으나 주창의 말솜씨 때문에 고조는 웃어 넘어갔다. 여황후가 정전의 동실(東室)에서 귀를 기울이고 듣다가 주창이 퇴출하는 것을 기다려 말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태자는 폐출되었습니다." "그 그 그렇더라도 저는 황후 때문에 폐 폐 폐하께 드린 말씀이 아 아 아니었습니다." 척후의 아들 여의는 겨우 열 살이었다. 고조는 자신이 죽은 후 여의가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조요(趙堯)라는 인물이 있었다. 젊은 나이로 부새어사(符璽御史:割符.玉璽를 담당하는 어사대부의 屬官)라는 직책에 있었다. 무척 머리가 영리했다. 조나라 사람 방여공(方與公)이 어사대부 주창에게 처음 조요를 추천할 때에 이렇게 말했다. "아직 어리지만 대단히 영리한 인물입니다. 반드시 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그대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창은 나름대로 자신의 아래에 있는 조요에 대해 평가하고있는 점이 있었다. "죽간(竹簡)에 글이나 새기는 아이가 무엇을 알겠소." 얼마 지나지 않아 영리한 조요가 고조를 모시는 직책에 있게 되었다. 즈음의 고조는 마음이 불편했다. 혼자 중얼거리며 투덜댔다. 그렇지만 아무도 고조가 무엇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영리한 조요는 그것을 알았다. "폐하께서 요즘 불편하신 이유를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무어라고?" "조왕(趙王) 여의께선 연소하시고 여황후와 척부인께서는 사이가 좋지 않으시지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폐하께서 아무리 근심하셔도 그건 소용이 없습니다." "실은 그렇다. 그래서 짐은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방법이 딱 한 가지가 있지요." "무어?" "재상.군신.장군들이 꺼리는 신하가 누구지요?" "글쎄?" "한 분밖에 아니 계십니다. 어사대부 주창 어른이십니다." "그렇지."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주창에게 조왕 여의를 부탁하지 않습니까?" "아아, 짐이 그걸 몰랐었구나!" 고조는 펄쩍 뛰면서 기뻐했다. 그래서 어느 날 고조는 주창을 가만히 불렀다. "조왕 여의한테로 가서 재상이 되어 주시오." 주창이 생각한 뒤에 울면서 말했다. "싫습니다." "공을 어지럽게 하는 사실인 것은 짐도 잘 아오. 물론 이것은 좌천이오. 그렇지만 방법이 이것밖에 없지 않겠소." "가지요. 그렇지만 폐하께서 붕어하신 뒤에 저는 죽습니다." "......억지로라도 가 주시오." 고조가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는 데야 주창인들 별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창은 조나라로 떠났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고조는 나름대로 조처를 취했다. 어사대부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누구를 앉힐까 근심하는 척했다. "누가 알맞을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조요가 좋겠지." 역시 대꾸하는 대신들이 없었다. 조요는 나름대로 진희를 치는 데 공이 있었기로 식읍도 내리고 강읍후(江邑侯)에 봉함한 바도 있었다. "조요를 어사대부에 명한다." 얼마 있지 않아 고조가 붕어했다. 여후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척후의 아들 여의를 죽일 작정이었다. "조왕 여의를 들라 하오!" 여후는 사신을 파견해 여의를 소환했다. "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주창이 간했다. "과인이 어찌 아니 가겠소." "병이라 청탁하십시오." 그래서 사신을 세 번씩이나 그냥 되돌려 보냈다. 여후는 이번에는 주창을 꾸짖었다.
- 그대가 무어길래 조왕을 보내지 않소! 내가 척씨를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는 모른단 말이오? - 그래서 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 좋소. 조왕 대신 그대를 소환하니 서둘러 오시오.
주창은 운명인 것을 알았다. "함께 가십시다." "피할 길이 없겠소?" "인간은 한번밖에 죽지 않습니다." 주창은 조왕과 함께 장안으로 왔다. 조왕 여의는 한 달쯤 후에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주창은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로부터 3년 뒤에 죽었다.
그로부터 5년 뒤였다. "조왕 여의의 자리를 굳게 안정시키려한 계략을 누가 세운 줄 아십니까?" "그런 자가 있었소?" 어떤 자가 여후에게 일러바쳤을 때 여후는 발칵 되물었다. "조요입니다." "아, 그자가!" 여후는 조요에게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워 어사대부에서 면직시켰다. 광아후(廣阿侯) 임오(任敖)가 차기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임오는 전날 패(沛) 땅의 옥리(獄吏)였다. 그렇지만 유방과는 무척 사이가 좋았다. 유방이 죄를 입고 도망쳐 버리자 관가에서는 유방의 처 여후를 대신 옥에 가두었다. 그 때 여후를 담당한 옥리가 그녀를 몹시 거칠게 다루었다. "가만히 다루게." "네가 뭔데!" "글쎄, 그렇게 하라니까." "이 자씩이!" "뭐야!" 임오는 동료 옥리를 실컷 패 주었다. 그런 후 도망쳐서 숨어 버렸다. 즈음에 유방이 봉기했다. 임오는 빈객으로서 유방을 추종했다. 어사(御使)가 되어 풍(豊: 江蘇省) 땅을 지켰다. 2년 후 유방이 한왕이 되어 동진해 항우를 공격할 때 임오는 상당(上黨:山西省)의 군수로 있었다. 진희가 모반했을 때도 임오는 상당을 견고하게 지켜 그 공으로 봉을 받고 광아후가 되었으며 1천8백 호의 식읍을 영유했다. 여후 시대에는 어사대부가 되었는데 3년 만에 파면되었다. 임오 대신 평양후(平陽侯) 조줄(曹줄)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그렇지만 조줄은 여후가 죽자 여록 등을 죽이는데 협조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대신들에 의해 쫓겨났다. 그러고 나서 회남왕의 재상 장창이 어사대부로 대체되었다. 장창은 주발 등과 함께 대왕(代王)을 효문 황제로 추대했다. 효문 황제 4년에 승상 관영이 죽고 장창이 승상이 되었다.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효문 황제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에 천하가 비로소 안정을 얻기 시작했는데 장군과 재상.공경(公卿)등이 모두가 군인에게서 나왔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회계 담당관 장창이 대신이 된 것은 처음인 셈이었다. 어쨌든 장창이 주계관(主計官: 財務長官)일 때 음률과 역법이 정리 개정되었다. 고조가 처음으로 진을 격파하고 패수가에 이르러 포진한 것이 10월이며, 과거의 진대에서는 본시 10월을 세수(歲首: 年始)로 삼았기 때문에 한에서도 이 제도는 고치지 않았다. 장창은 목.화.토.금.수의 5행(五行)의 덕(德)의 운행을 추측해 한(漢)이 수덕(水德)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구습대로 물을 상징하는 흑색을 존중했다. 그는 또 12율(律)의 관악기를 불어 음악을 정리해 궁(宮).상(商).각(角).치.우(羽)의 5성(聲)으로 조율했다. 대소경중(大小輕重)의 비례에 따라 법률(法律)을 제정하고 제반 공장(工匠)의 편의를 도와 천하의 공산품에 일정한 도(度).량(量).형(衡)의 기준을 마련했다. 그가 승상이 됨으로써 이것이 성취되었다. 그래서 한왕조의 음률과 역법을 논하는 자는 장창을 기본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장창은 원래 독서를 좋아해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통달하지 않은 학문이 없었으나 그 중에서도 음률과 역법이 가장 밝았다. 장창은 왕릉(王陵)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안국후(安國侯) 왕릉에 대하여서는 장창이 존귀하게 된 이후에도 항상 부친처럼 모셨다. 왕릉이 죽은 후에 장창이 승상의 자리에 올랐으나 열흘마다 휴일(休日: 漢制에는 10일마다 百官의 洗沐을 위한 휴가가 있었음)에는 반드시 왕릉의 부인에게 선물을 사 가지고 가서 문안인사를 드렸다. 장창이 승상이 된지 10여 년이 지나서였다. 노(魯)나라 사람 공손신(公孫臣)이 글을 올렸다. - 한왕조(漢王朝)는 수덕(水德)의 시대가 아닙니다. 분명히 토덕(土德)의 시대에 해당합니다. 토덕의 색깔은 황색이며 그 징조로서 황룡(黃龍)이 나타날 것입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이 문제를 심의해 보도록 승상 장창에게 권했다. 그렇지만 장창이 수덕의 시대라고 주창한 바 있었다. 그래서 그 조칙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성기(成紀: 甘肅省)에서 과연 황룡이 나타났다. "장승상, 어째서 그 문제를 가지고 심의하지 않았소!" 효문 황제가 따졌다. 황제는 즉시 공손신을 불러 박사(博士)로 삼고 토덕의 시대에 해당하는 역법(曆法)과 제도를 기초하게 했다. 그런 후 개원(改元)하여 그 해를 원년(元年)이라 했다. 장창은 그 일로 인하여 기가 죽어 병과 늙음을 구실로 조정으로 출근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얼마 전 장창이 어떤 인물을 중직에 추천했는데 인간이 간특한 데다가 부정한 이득을 탐하다 발견 되었으므로 그를 추천한 장창이 또한 질책받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정작 장창은 병이 생겼다. 그래서 장창은 승상이 된지 15년만에 면직되었다. 장창은 효경제(孝景帝) 즉위 5년 전에 죽었다. 시호를 문후(文侯)라 했고 아들 장강(張康)이 대신하여 후(侯)가 되었다. 그러나 그도 8년 뒤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아들 장류(張類)가 대신 후가 되었다. 그런데 그도 8년 뒤에 어떤 제후의 상례(喪禮)에 참가했다가 곧바로 조정에 출석했다. 그것은 불경죄에 해당되었다. 그는 그 일로 봉국을 뺏겼으며 장씨의 나라는 없어지고 말았다. 원래 장창의 부친은 신장이 5척(五尺: 曲尺으로 4尺여)도 채 못 되었는데 웬일인지 장창은 신장이 8척여(八尺余: 曲尺으로 6尺여)나 되었다. 장창의 아들 또한 키가 컸으나 손자 장류는 6척(六尺: 曲尺으로 5척 미만)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키 큰 장씨들만 후의 작위에 올랐다는 평판이었다. 장창이 승상의 자리에서 면직된 후에는 이빨이 모조리 빠져 버렸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모유를 먹일 수밖에 없었는데, 유모는 반드시 젊은 여자들이라야 했다. 그의 집에는 처첩이 수백 명이었다. 여자에 대한 기호가 까다로왔던 장창은 한번 임신한 경험이 있는 여자와 두 번 다시 잠자리를 같이 하지않았다. 장창은 백여 세를 살고서 죽었다.
승상 신도가(申屠嘉)는 양(梁)나라 사람이다. 강노(强弩)를 쏘는 용사로서 재관(材官: 武官의 총칭)의 자격으로 유방을 따라 항우를 치다가 대장(隊長)이 되었다. 경포의 군사를 격파하고 나서는 도위(都尉)가 되었다. 효혜제 때에 회양(淮陽: 河南省)의 군수가 되었다. 효문제 원년에는, 옛적 고조를 따라 종군한 2천 석 이상의 봉록을 받던 관리들은 모두 관내후(關內侯: 函谷關內의 諸侯라는 뜻. 封地없이 俸祿만을받았다.)로 삼고 그 중에서 24명에게는 식읍을 내려 주었다. 그 때 신도가도 5백 호의 식읍을 받은 것이다. 장창이 승상이 된 후 신도가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어사대부가 되었다. 장창이 승상의 자리에서 면직이 될 즈음이었다. 효문제는 황후의 동생 두광국(竇廣國)을 승상으로 몹시 삼고 싶어했다. 두광국은 현명하고 덕행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광국에게 사적인 정으로 등용했다고 생각할까 봐 그것이 두렵구나." 황제는 친인척을 등용했다는 소문을 겁내어 결국 두광국을 등용하지는 못했다. 고조 시대의 대신들은 모두 죽고 없었다. 그 외에는 승상에 앉힐 마땅한 적임자도 없었다. 효문제는 고심 끝에 어사대부 신도가를 승상의 자리에 앉히고 종전의 식읍은 그대로 하여 고안후(故安侯)로 삼았다. 신도가는 사람됨이 청렴 강직했다. 사사로운 청탁 따위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 무렵 태중대부(太中大夫) 등통(鄧通)은 남색(男色)의 상대로 황제의 대단한 총애를 입고 있었다. 은상(恩賞)이나 하사금품이 집 안에 거만으로 쌓여 있었다. 효문제가 등통의 집에서 주연을 즐길 만큼 그를 총애했다. 즈음에 승상 신도가가 입조했다. 그랬는데 등통이 황제의 곁에 바짝 붙어서서 승상에 대한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주청드릴 일을 모두 끝마친 신도가는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신하를 총애하시어 그를 부귀하게 만드시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총애를 믿고 결례하여 조정의 기강을 흐트러뜨리려는 행위까지 용서해선 안 됩니다." 황제는 승상이 등통을 두고 하는 말인지를 알아챘다. "그대가 참아 주오. 짐이 그를 사랑하고 있지 않소. 다시는 공식석상에 내보내지 않겠소." 신도가는 그 정도에서 조정으로부터 퇴출했다. 승상부로 돌아오자 신도가는 곧 등통을 소환하는 공문을 띄웠다. 승상부로 곧 출두하라는 명령서였다. 그러나 등통은 두려워서 승상부로 가지 않고 입조하여 효문제에게 호소했다. "승상이 소신을 죽이려 합니다!" 효문제는 잠깐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걱정 말고 그대는 그저 가기만 해라. 짐이 곧 그대를 구출할 테니." 그래서 등통은 승상부에 이르러 관을 벗고 맨발인 채로 머리를 조아려 사죄했다. 그렇지만 신도가는 못 들은 채 앉아 꾸짖기만 했다. "한나라의 조정은 고황제[高祖]의 조정이다. 네깟 놈이 뭔데, 일개 말단 신하가 전상으로 올라가 감히 희롱을 해! 이것은 대단한 불경죄다.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이 무언지를 아는가. 참수에 해당한다. 형리들은 즉각 저놈을 참수해라!" 등통은 대경실색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끊임없이 땅에 찧으며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 사죄행위가 얼마나 격렬했던지 등통의 머리통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즈음에 효문제는 승상이 등통에게 충분히 고통을 주었으리라 생각하고 그제야 사자에게 부월을 주어 보내 등통을 구원케 했다.
- 짐이 귀여워하는 신하이니 그를 용서하기 바라오.
등통이 그대로 입조해 울면서 황제에게 아룄다. "승상이 저를 거의 죽일 뻔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효문제는 그 때만큼은 등통의 호소를 못 들은 척해 버렸다. 효문제는 신도가가 승상이 된 지 5년 만에 붕어하고 뒤를 이어 효경제가 위에 올랐다. 경제 3년이었다. 조착(조錯: 혹은 조조로 읽음)이 내사(內史)가 되었다. 총애를 받았으며 존귀한 신분이 되어 정무를 전단했다. 그의 주청에 의해 제반 법령들이 변경되었다. 제후들을 귀양 보내고 봉토를 몰수했으며 형벌을 가했고 모욕 주었다. 승상 신도가의 의견은 조착에게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던 차였다. 조착이 내사가 되자 자기 집의 대문이 동쪽으로 통해 나 있어 궁중 출입에 불편했다. 그래서 또 하나의 문을 남쪽으로 뚫은 것이다. 남쪽에는 태상황(太上皇: 天子 父의 존칭. 여기서는 孝文帝)의 묘 바깥 담을 뚫고 지나도록 되어 있었다. 법에 의하면 참죄에 해당되었다. "옳거니! 기회가 왔다! 황제께 주청해 놈을 베리라!" 신도가가 울분을 미리 발설한 것이 잘못인지도 몰랐다. 조착의 빈객 하나가 우연히 그 소문을 듣고 조착에게 귀띔했다. 조착은 덜컥 겁이 났다. 밤을 다투어 입궁해 황제를 뵙고 목숨을 구걸했다. 다음 날 아침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신도가는 입궁해 황제께 아룄다. "......이리하니 조착을 주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알고 있소. 조착이 문을 낸 장소는 종묘가 아니고 바깥 담이오. 본시 타궁(他宮: <漢書>에는 冗宮으로 돼 있다. 즉 특별한 역할이 없는 宮)인 내사부가 묘의 내부에 있기로 불편하겠다 싶어 짐의 허락으로 남쪽을 뚫어라 했소. 조착에게 잘못이 없소." 신도가는 통탄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퇴출한 신도가는 곁의 장사(長史: 丞相 輔佐官)에게 한탄했다. "법에 의해서 조착을 미리 베어 버리고 주청할 것을 먼저 주청하여 조착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 통탄스럽다!" 신도가는 관사로 돌아왔다. 그 일로 인해 병을 앓다가 결국 피를 토하고 죽었다. 시호를 절후(節侯)라 했다. 아들인 공후(共侯) 신도멸(申屠蔑)이 그 작위를 이어받았다. 신도멸은 3년 만에 죽고 대신 그의 아들 신도거병(申屠去病)이 작위를 계승해 31년 만에 죽었다. 다시 그의 아들 신도유(申屠臾)가 그 작위를 계승하다가 그로부터 6년 뒤에 구강(九江)의 태수가 되었는데, 그는 전임태수로부터 선물과 송별연을 받고 죄를 범한 것이 되어 후의 작위를 상실했다. 그의 봉국도 없어졌다. 신도가의 사후 효경제 시대에는 개봉후(開封侯) 도청(陶靑)과 도후(桃侯) 유함(劉含)이 승상이 되었다. 효무제(孝武帝)는 때에 이르러서는 백지후(柏至侯) 허창(許昌).평극후(平棘侯) 설택(薛澤).무강후(武彊侯) 장청적(蔣靑翟).고릉후(高陵侯) 조주(趙周) 등이 승상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열후의 자격으로 부친의 뒤를 이어 청렴 신중하기는 하였으나 특별한 정치적 업적이나 능력을 발휘한 승상은 아무도 없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장창은 학문 전반과 음률과 역법에 통달한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가의(賈誼).공손신 등의 역법.복색(服色)에 관한 진언을 물리치고 또한 경전(經典)에 명시된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오로지 진나라가 사용하던 전욱력(顚頊曆)에만 의지하려 들었으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주창은 소박 강직한 인물이다. 임오는 과거의 여후에 대한 은공으로 중용된 사람이다. 신도가는 강곡하고 절조를 지켰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학문이나 경륜을 펼 만한 지식이 없었기로 소하.조참.진평 등의 재상과는 그 등급이 비교가 안 된다. 이하의 기록은 한(漢)의 서소손(緖小孫)이 추보(追補)했다.
효무제(孝武帝) 시대에는 많은 승상들이 있었으나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 그들의 품행과 기거(起居) 혹은 행장기(行狀記)의 기록 역시 없다. 그래서 우선 정화(征和: 孝武帝 시대의 年號, B.C. 92년)이후의 승상에 대해서만 기술하고자 한다. 정화 시대의 첫머리에 우선 장릉(長陵: 陝西省) 사람 차승상(車丞相:田千秋)이 나오는데 그가 죽은 후 위승상(韋丞相)이 대신한다. 이름은 현(賢)이며 노(魯)나라 사람이다. 그는 독학으로 공부하여 글씨 쓰는 관리로부터 출발해 대홍로(官名)라는 고위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어느 날 관상가가 위현을 보고 예언했다. "그대는 틀림없이 승상의 지위에 오를 것입니다." 위현은 기뻐하며 아들 넷이 있는데 그들의 관상도 보아 줄 것을 청했다. 관상가는 장남의 관상을 보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차남의 차례가 되었다. 이름이 현성(玄成)이었다. "귀상(貴相)입니다. 반드시 열후의 봉을 받을 것입니다." 위현이 되물었다. "내가 만약 승상이 되면 반드시 장남이 봉을 받을 것인데 하필 차남이란 말이오" "모르겠습니다. 다만 관상에는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훗날 위현은 예언대로 승상이 되었다. 병사한 뒤, 장남은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부친이 작위를 세습받지 못했다. 결국 차남인 현성을 세우라고 명했다. 그렇지만 현성은 형님 때문에 작위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일부러 미친 척하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장남이 작위를 받을 줄 알았다. "그래도 안 된다. 차남 현성에게 작위를 주어라!" 어쩔 수 없이 작위는 현성에게로 돌아갔다. 봉국을 양보했다는 이유로 명성만 얻었다. 그런데 그 뒤에 마차가 아니라 그냥 말을 타고 종묘에 들어가는 불경죄를 범함으로써 현성은 일등급의 작위가 떨어져 관대후가 되었다. 열후의 지위는 잃었지만 식읍은 종전의 그대로 허용되었다. 위(韋)승상이 죽은 후 위(魏)승상이 대를 이었다. 위(魏)승상은 제음(濟陰: 山東省) 사람이다. 역시 말단 서기에서 승상으로까지 승진한 인물이다. 무예를 좋아해 모든 관리들에게 검을 차도록 했다. 그리고 검을 찬 사람만이 자신에게 와서 상주하도록 허락했다. 만일 검을 차지 않은 사람이 와서 상주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의 것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검을 차야 상주가 허락되었다. 당시 경조(京兆: 國都인 長安을 3區로 나눈 것 중의 하나)의 윤(尹:市長)인 조광한(趙廣漢)이 죄를 범했기로 위승상이 상주해 면직되도록 했다. 일이 다급해진 조광한은 중간에 사람을 넣어 죄를 면죄해 주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깐깐한 위승상이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대로 죄를 주기로 작정했다. 조광한은 더욱 위급해졌다. 반드시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때문에 백방으로 방법을 짜내었다. 그러다 보니 위승상의 부인이 시비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옳지 됐다. 이것으로 위승상의 목을 치는 것쯤은 간단하다!" 조광한은 황제께 주청하기 전에 완전무결하게 위승상을 올가미에 채우기 위해 하급관리를 시켜 철저히 조사토록 명했다. 그랬더니 조광한의 관리들이 위승상의 죽은 시비의 남편 노비를 볼기치며 아내가 누구에 의해 죽은지를 실토하도록 닦달했다. "그렇지만 제 아내를 죽인 것은 승상의 부인이 아니고 스스로 목을 매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황제는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승상의 속관 번연수(繁延壽)가 황제에게 사실을 고했다. "경조의 윤 조광한은 승상을 협박해 승상부인이 노비를 살해했다고 무고했습니다." "무어라고?" "형리를 시켜 알아본즉 승상의 집을 포위해 그 노비를 협박해 승상의 죄 있음을 강요시켰습니다. 소신은 이것이 무도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노했다. 오히려 조광한의 죄과를 알아보라 했더니 기사(騎士)를 마음대로 파면시켰던 일이 들통났다. 그래서 경조 윤은 허리를 잘리우는 형벌에 처하여졌다.
한편 승상이 속관인 진평 등의 사람을 시켜 중상서(中尙書: 天子의 近待)를 탄핵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필시 승상이 협박하는 일을 혼자 도맡아 관련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사게 된 사건이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큰 불경죄에 해당되어 목을 잘리우는 범죄에 해당되는 행위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고위직 장사(長史) 관직 이하는 모조리 사형에 처해지든가 궁형에 처해져야 옳았다. 그렇지만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넘어간 듯했다. 물론 사형당하고 궁형에 처해진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위승상은 그 일 때문에 병이 났다. 더러운 꼴 보기 전에 그는 행운아였기 때문인지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죽었다. 그 작위는 아들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그런데 그 아들도 말을 타고 종묘를 침범함으로 해서 불경죄를 범했다. 그래서 한 등급 작위를 낮추라는 조칙에 의해 관내후로 강등되었다. 열후의 작위는 삭탈당했지만 자신의 식읍은 역시 보유할 수 있었다. 위승상이 죽자 어사대부 병길(병吉)이 승상을 대신했다.
승상 병길은 노(魯)나라 사람이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고 법령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사대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효선제(孝宣帝) 때에 지난날의 연고(宣帝가 탄생한 지 수개월만에 위태자(衛太子) 사건에 연좌되었으나 병길이 선제를 보호했음)로 열후에 봉해진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그래서 열후에 봉하여지고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병길은 정사에 밝고 대국(大局)을 보는 눈이 있었다.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후세에서도 칭송을 받았다. 어쨌든 그는 승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병사했다. 그의 아들 이름이 현(顯)이다. 그는 아비의 작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그의 아들 또한 멋모르고 말을 탄 채 종묘로 들어갔기 때문에 불경죄에 해당되어 한 등급 작위가 깎였다. 그렇지만 식읍은 그대로였다.
현은 착실한 관리가 되어 태복(太僕: 天子의 車馬를 주관하는 官)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관리의 자리에 있으면서 문란한 사건을 저지른 데다 그의 아들이 간특한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로 인해 그들은 서민이 되었다. 병승상이 죽고 황(黃)승상이 대신되었다. 즈음의 장안에 전문(田文)이라는 굉장한 관상가가 있었다. 위(韋)승상, 위(魏)승상, 병승상 등이 모두 미천했을 때 한꺼번에 주막에 모인 적이 있었다. 그 때 우연히 주막으로 들린 전문이 그들 세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두고 보십시오. 세 분 모두 재상의 관상이십니다!" "걱정 마슈. 술값은 내가 낼 테니." 세 사람 모두 웃어넘겼다. 그렇지만 전문의 예언이 맞아 세 사람 모두 차례대로 재상이 되었다. 황승상 즉 황패(黃覇)는 회양(淮陽: 河南省) 사람이다. 홀로 공부하여 영천군(潁川郡: 河南省) 태수가 된 사람이다. 그는 백성들을 다스릴 때 반드시 예(禮)와 의(義)를 기본으로 하였다. 예와 의는 상반되는 개념일 수도 있었지만 거기에 묘미가 있었다. 일테면 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무차별 처벌하는 게 아니라 풍자로 깨우쳐 주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을 취했다[原文에는 自殺케 했다로 되어 있으나 앞뒤 문맥으로 보아 타당하지 않다]. 그것이 황승상의 교화 방법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큰 실효를 거두었다. 그로 인해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효선제가 조칙을 내렸다. - 영천 태수 황패는 조령(詔令)을 선양하여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길에 떨어진 물건 하나조차 함부로 가져가지 않게 교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남녀간의 예절을 지킴에 있어 스스로 엄격하였으며, 그렇기에 그가 다스리는 군내의 옥중에는 중죄를 저지른 죄수 하나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 관내후의 작위와 황금 백 근을 하사하노라. 그런 후 그를 불러 경조 윤으로 임명했다가 나중에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가 승상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예의로써 다스렸다. 그 역시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병으로 죽었다. 그의 아들이 그의 작위를 계승했고 결국은 열후가 되었다. 황승상이 죽자 어사대부 우정국(于定國)이 승상을 대신했다. 우승상은 <정위전(廷尉傳)>에서 이미 서술된 바 있거니와 (우정국이 선제시에 정위가 된 것은 사실이나 <史記>에는 그의 傳이 없다) <장정위전(張廷尉傳)>에 더욱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史記>의 張釋之의 傳은 있으나 우정국에 관한 기사가 없는 게 안타깝다). 우승상이 죽은 뒤 어사대부 위현성이 그 자리를 이었다.
승상 위현성은 앞에서 말한 위(韋)승상의 아들이다. 그는 부친의 뒤를 이었으나 열후의 지위를 잃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시경(詩經)><서경(書經)>에 특히 밝았다. 관리가 되면서는 위위(衛尉: 近衛軍의 將)에 올랐고 얼마후 태자대부(太子大傅: 太子의 保育長)가 되었다. 어사대부 설광덕(薛廣德)이 면직되자 그는 곧바로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우(于)승상이 또한 의원면직되자 위현성은 뜻밖에도 승상이 되었다. 그로 인해 본래의 식읍을 받아 부양후(扶陽侯)가 되었다. 몇 년 뒤 그는 병사했다. 그가 죽었을 때 효원제(孝元帝)가 장례에 친림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애정이 두터웠었다. 그의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아 후대에 이르렀다. 위승상 현승은 뒤에 그의 정치가 지나치게 관대하여 세속의 흐름을 따랐다는 악평을 들었다. 일테면 아첨을 잘해 무사히 자리를 지켰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일찍이 관상가는 예언했다. "열후가 되어 부친을 대신할 것입니다. 나중에 잠시 이것을 잃을 것이나 다시 승상이 될 것입니다." 부자(父子)가 승상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은 찬미하고 있으나 이것이 결코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운명일 뿐이다. 위승상이 죽고 나자 어사대부 광형(匡衡)이 그 뒤를 잇는다.
승상 광형은 동해(東海: 山東省) 사람이다. 역시 독서를 좋아했고 박사로부터 <시경(詩經)>을 배웠다. 그렇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해 겨우 머슴살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재주 또한 열등하여 여러 번 관리등용 시험에 응시했으나 여덟 번이나 낙방했다. 아홉 번째에 겨우 병과(丙科: 及第에 甲.乙.丙이 있음)에 합격했다. 그렇지만 경서(經書)에는 합격하지 못했으므로 경학(經學)에 환히 눈이 띌 때까지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그런 상태로 평원군(平原郡: 山東省)의 문학졸사(文學卒史: 官名)에 보직되었다. 머리 나쁜 관리로 이력이 났으니 한동안 군내에서는 아무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사(御史)가 우연히 그를 불러들였다. 백 석의 봉록을 받는 낭(郎)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그를 박사에 임명했다. 얼마 후 태자소부(太子小傅: 太子太傅의 보좌관)가 되어 나중에 효원제가 되는 태자를 섬겼다. 효원제는 원래 <시경>을 좋아했다. 그래서 광형을 광록훈(光祿勳:官名)으로 자리를 옮겨 대궐 안에 머무르게 했다. 황제가 그를 스승으로 삼아 강의를 들으니 좌우 대신들도 그의 강의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강하던 관원들이 광형의 강의를 듣고 보니 그 내용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그들은 광형을 대단한 인물로 존중하게 되었다. 마침 어사대부 정홍(鄭弘)이 어떤 사건에 연좌되어 면직되자 광형은 졸지에 어사대부가 되었다. 한 해쯤 뒤에 위(韋)승상이 죽었으므로 광형이 비로소 승상이 되었다. 그는 낙안후(樂安侯)에 봉해졌다. 그는 10년 동안 한번도 장안의 성문을 떠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빠른 기간 동안에 승상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어찌 그가 시운(時運)을 잘 만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선비들이 초급관리로 시작해 마침내 후에 봉해지는 경우란 대단히 적다고 생각된다. 즈음에 어사대부가 되는 일도 드물지만 일단 어사대부에서 관직을 끝으로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쯤 되면 어사대부 다음의 자리가 승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승상이 죽기를 마음 속으로 바라게 된다. 그렇대서 소원대로 된 적은 한번도 없을 것이다. 어떤 자는 상대를 모함해 그 자리를 대신하려 했던 적도 있다. 오랫동안 어사대부의 자리에 있으면서 승상이 되는 차례를 기다린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그들은 승상이 못 되었는가 하면, 어사대부 자리에 앉은 지 며칠 못 된 사람이 졸지에 승상이 된 사람 또한 있다. 이런 것들을 두고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흥의 경우가 그런 운명적 성격을 잘 표현해 준다. 그는 어사대부로 수 년간 자리를 지켰지만 결국은 승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광형은 어사대부가 된 지 한 해가 못 되어[앞에서는 1년여] 위승상이 죽었으므로 그는 승상이 되었다. 그래서 직위란 지략과 간교함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다. 현성(賢聖)의 재주를 가지고도 안 되는 일은 끝내 안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