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35. 번쾌.역상.등공.관영열전
성시(城市)를 공략하거나 야전(野戰)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와 보고하는 데는 번쾌와 역상이 가장 큰 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말에 채찍질하여 천군만마(千軍萬馬) 사이를 달렸을 뿐만 아니라 위기 때마다 이들이 한왕을 도왔으므로 그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제35에 <번.역.등.관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무양후(舞陽侯) 번쾌는 패(沛: 江蘇省 沛縣 동쪽) 사람이다. 개를 도살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으나 유방(劉邦: 漢高祖, 역시沛縣 사람)과 함께 숨어 살기도 했다. 그들 친구들 중의 누군가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번쾌는 처음 유방을 따라 풍(豊: 江蘇省 豊縣)에서 병사를 일으켜 패를 공격해 이 곳을 함락시켰다. 유방이 패공(沛公)이 되자 번쾌는 그의 가신(家臣)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호릉(胡陵: 山東省 魚台縣 東南)과 방여(方與: 魚台縣 북쪽) 공격에 앞장서고 돌아와서는 풍을 지키기에 충실했다. 또 사수군(泗水郡)을 관할하고 군감(郡監)의 군사를 풍의 성 근처에서 격파하기도 했다. 번쾌는 다시 동진했다. 패를 평정하고 사수군의 군수를 설(薛: 山東省 勝縣 서남)의 서족에서 격파하고 진의 장군 사마이(司馬尼: 漢書에는 尼)와 탕(湯: 江蘇省 탕山縣 동쪽)의 동쪽에서 싸워 적을 격퇴시키며 적의 수급 15개를 베었다. 그 공로로 작위 6급인 국대부(國大夫)를 받았다. 그는 언제나 유방을 따라다녔다. 유방이 복양에서 장한의 군사를 공격할 때 그는 제일 먼저 성 위로 올라 적의 수급 23개를 베었다. 그래서 작위 제7급인 열대부(列大夫)를 받았다. 그 이후에도 그는 계속 유방을 따라 성양(城陽: 山東省)을 공격할 때에도 솔선하여 성루에 제일 먼저 올라갔다. 그는 또 호유(河南省)를 함락시켰고, 이유(李有: 李斯의 아들)의 군대를 격파하면서는 16명의 수급을 베어 또 상간작(上間爵: 戰國時代의 작위)을 받았다.
그는 다시 유방을 따라 성무(成武: 河南省)에서 동군(東郡: 河北省)의 군수와 군위를 공격하였는데 이 전투에서도 수급 14개를 베고 11명을 포로로 잡아 제9급의 작위 오대부(五大夫)를 받았다. 그는 다시 유방을 따라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박(河南省)의 남쪽에서 군대를 출격시켜 하간(河間: 河北省)의 군수를 강리(강里: 城陽 부근의 邑)에서 격파했다. 그는 또 개봉(開封: 河南省)의 북쪽에서 조분(趙賁)의 군사를 치면서 맨먼저 성루에 올라 한 명의 후(侯)와 68개의 수급을 베었으며 27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공으로 경(卿)의 작위를 받았다. 다시 유방을 따라가 곡우(曲遇: 河南省)에서는 양웅(楊熊)의 군사를 때려부쉈다. 완릉(宛陵: 河南省)을 공격하면서도 역시 공격의 선봉에 서서 수급 8개를 베고 포로 44명을 잡아 그 공으로 현성군(賢成君)이라는 호를 받고 후에 봉해졌다. 그는 다시 장사(長社: 縣名, 河南省)와 환원(환轅: 關名, 河南省)을 치고 하진(河津)을 건너 동진하여 진나라 군사를 시(尸: 河南省)의 남쪽에서 쳤으며 주(河南省) 땅에서도 진군을 격파했다. 양성(陽城)의 동쪽에서는 남양군(南陽郡)의 태수인 기를 무찔렀다. 다시 동진하여 완성(宛城: 河南省 南陽郡)을 공격할 때에도 그는 역시 선봉에 섰으며, 서진하여 역(역: 河南省)에 이르러 적을 쫓아 수급 24개를 베고 40명의 포로를 잡아서 그 공으로 증봉되기도 했다. 또 무관(無關: 섬西省)을 치고 패상(覇上: 陝西省)에 이르러 도위(都尉) 한 명과 10개의 수급을 베고 포로 146명을 잡았으며 2천9백 명을 투항시켰다.
한편 항우는 희하(戱下: 섬西省 臨潼縣)에 포진한 뒤 유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유방은 백여 명의 수행원만 거느리고 항백(項伯)이 주선한 연회장으로 갔다. 유방 자신이 관문을 패쇄함으로써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았음을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항우의 모사 아부(亞父: 范增)가 유방을 죽이기 위해 항장(項莊)을 시켜 검무를 추게 했다. 그러나 위급한 순간마다 항백이 어깨로 유방을 가려 주어 위험을 모면케 했다. 실상 연회장에는 유방과 장량만 들어와 있었다. 장량이 살펴보니 아무래도 패공이 위험했다. 그래서 측간에 가는 척하고 나와 밖에 있던 번쾌에게 위급을 알렸다. 번쾌는 철퇴를 든 채로 군영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수비병들이 제지했지만 번쾌는 가볍게 그들을 밀어제친 뒤 연회장 안으로까지 들어가 장막 아래 버티고 섰다. 항우의 눈에 번쾌가 들어왔다. "저자는 누구요?" 장량이 대답했다. "패공의 참승(參乘) 번쾌입니다." "음, 힘이 대단할 것 같다." 항우는 그에게 큰 술잔에다 술을 가득 따라 주면서 돼지고기 어깨 한죽지를 내밀었다. "먹고 마시게." 번쾌는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칼을 쑥 뽑아 고기를 싹둑싹둑 잘라서는 삽시에 먹어치웠다. "더 마실 수 있겠는가." 항우가 놀라서 묻자 번쾌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죽음도 사양치 않거늘 어찌 한 말 술인들 사양하겠습니까." "호오, 그래!" "대왕께서는 미리 알아 두실 일이 있습니다. 저의 패공께서는 먼저 관중으로 들어와 함양을 평정하고는 패상으로 군대를 물려 노숙시키면서 대왕께서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소인배의 말만 들으시고 패공을 의심하고 계시니 저는 이런 일로 인하여 천하가 분열되고, 사람들이 대왕을 믿지 못할 분으로 생각할까 봐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항우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유방은 즉시 측간에 가는 척하고 밖으로 나오자 번쾌도 재빨리 따라나왔다. 유방은 군영을 벗어나자마자 타고 온 수레와 기병들을 그대로 둔 채 번쾌 등 네 명만 대동하고는 뒤쪽 산길을 더듬어 지름길을 찾아 패상의 한의 진영으로 도망쳤다. 유방 일행이 완전히 도망쳤을 시간이라고 짐작한 장량은 그제서야 정중하게 항우에게 사과했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하여 항우는 유방을 살해할 마음을 버렸다. 만일 그 날 번쾌가 연회장으로 돌입하지 않았더라면 유방이 몹시 위험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항우는 바로 다음 날 함양으로 입성했다. 입성하면서 함양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나중에 항우는 패공을 한왕(漢王)으로 삼았다. 한왕은 번쾌에게 열후(列侯)의 작위를 하사하고 임무후(臨武侯)라 호칭했다. 번쾌는 다시 낭중(郎中)의 직위로 자리를 옮겼고 한왕 유방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 한왕이 삼진(三秦)을 평정할 무렵에 번쾌는 한왕과 떨어져 있었다. 그 때 번쾌는 백수(白水: 甘肅省의 川名) 북쪽에서 서현(西縣: 甘肅省)의 현승(縣丞)을 공격했고, 옹(雍: 陝西省) 땅의 남쪽에서 옹왕인 장한의 경기병을 격파했다. 다시 번쾌는 한왕을 따라 옹의 태성(태城: 陝西省)을 칠 때 여전히 선봉장이 되어 성루에 제일 먼저 올라갔다. 호치(好치: 陝西省)에서 장한의 아들 장평(章平)을 칠 때에도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했으며 현령과 현승을 참하고 수급 11개를 베고 20명을 포로로 했다. 그 공으로 낭중기장(郎中騎將)에 임명되었다. 또 양(壤: 陝西省)의 동쪽에서 진나라 기병을 공격.격퇴시켜 그 공으로 장군에 임명되었고, 조분(趙賁)을 공격해 미.괴리(槐里).유중(柳中).함양(咸陽: 모두 陝西省)을 함락시켰다. 폐구(廢丘: 陝西省)에서 수공(水攻)을 할 때에도 번쾌의 공이 가장 컸다. 역양(역陽: 陝西省)에 이르러 한왕은 번쾌에게 두릉(杜陵: 長安 남쪽)의 번향(樊鄕)을 식읍으로 주었다. 번쾌는 다시 한왕을 따라 항우를 자조(煮棗: 山東省)에서 무찌르고, 왕무(王武).정처(程處)의 군사를 외황(外黃)에게 격파했으며, 주.노(魯).하구(瑕丘).설(薛: 모두 山東省) 지역을 공략했다. 나중에 한왕은 노.양의 땅을 항우에게 빼앗기며 팽성(彭城: 江蘇省)에서 격파되었는데, 그 때 번쾌는 형양으로 회군해 평음(平陰: 河南省)의 2천 호를 증봉받고 장군의 직위로서 광무(廣武: 榮陽 부근의 山名)를 고수했다. 그 일 년 뒤 항우는 군사를 이끌고 동진했다. 번쾌는 한왕을 따라 항우를 쳐서 양하(陽夏: 河南省)를 함락시키고 초나라 주장군(周將軍)의 병사 4천명을 포로로 했다. 번쾌는 또 진(陳: 河南省) 땅에서 항우를 포위해 크게 격파하고 호릉(胡陵)에서 초군을 도륙했다.
항우가 죽은 뒤 한왕은 황제에 즉위했다. 번쾌는 성을 철벽같이 잘 지켰고 싸울 때마다 큰 공을 세웠다 하여 8백 호(戶)의 식읍을 더 주었다. 그 뒤 번쾌는 고조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연왕 장도(臧도)를 토벌하였는데 그는 이 전투에서 장도를 사로잡고 연 땅도 평정했다. 또 한신이 모반하자 진(陳)에 이르러 한신을 체포하고 초 땅도 평정했다. 그래서 다시 열후의 작위를 받고 다른 제후들과 함께 할부를 나누어 자손 대대로 세습이 허락되었다. 식읍으로 무양(舞陽: 河南省) 땅을 받고 무양후로 호칭되었으며, 앞서 받은 땅은 돌려 주었다. 또 한왕 신이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했다. 이 전투에서 번쾌는 곽인(山西省)에서 운중(雲中: 山西省)에 이르는 지역을 강후(絳侯) 주발(周勃)등과 함께 평정해 그 공으로 1천5백 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이 토벌에 이어 진희.만구신의 군대를 공격해 양국(襄國: 河南省) 땅에서 전투를 벌인 뒤 박인(河北省)에서 격파했다. 이 때에도 그는 선봉으로 성을 올랐으며 청하(淸河).상산(常山: 모두 河北省) 등 27개 현을 항복받아 평정하는 한편 동원(東垣)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그 공로로 그는 좌승상이 되었다.
그 후 번쾌는 기무앙(기毋앙).윤반(尹潘)의 군대를 무종(無終).광창(廣昌: 모두 河北省) 등지에서 격파하고 호족(胡族)인 진희의 별동대장 왕황(王黃)의 군대를 대(代)의 남쪽에서 격파했다. 뒤이어 한왕 신의 군대를 삼합(參合: 山西省)에서 공격해 번쾌의 부장 시무(柴武)가 한왕 신을 베었다. 또 진희가 이끄는 흉노의 기병을 횡곡(橫谷: 代縣)에서 격파하고 장군 조기(趙旣)를 참하였고 대(代)의 승상 풍량(馮梁).태수 손분(孫奮).대장 왕황.장군 태복(太卜).태복(太僕) 해복(解福)등 10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여러 장군들과 힘을 합해 대국의 73개 향읍을 평정했다. 그 후 연왕 노관(盧관)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번쾌는 상국의 지위로 노관을 토벌해 승상 지(지)를 계(계)의 남쪽에서 격파해 연의 땅을 평정한 것이 무려 18현 51향읍이나 되었다. 그로 인해 그는 1천3백 호의 식읍이 추가되어 무양에는 5천4백 호의 식읍을 가지게 되었다. 번쾌는 고조를 따라 종군하면서 176의 수급을 베었고 286명을 포로로 잡 았다.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적을 부순 것이 7번, 함락시킨 성이 5개, 평정한 군이 6군(郡), 현이 52개, 포로로 잡은 적의 승상 1인, 장군 12명, 봉록 2천 석 이하 3백 석 이상의 관리가 11명이나 되었다.
번쾌의 아내는 여후(呂后)의 동생 여수(呂須)였다. 아들의 이름은 항(伉)이었다. 번쾌는 고조와 가장 친밀한 장군이었다. 경포(경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는 심한 우울병에 걸려 사람 만나기조차 싫어한 적이 있었다. 궁중 깊이 드러누워 수위에게 명해 군신들의 출입을 막아 버렸다. 그래서 황제의 조칙이 겁난 주발.관영 등 그 어떤 신하나 장군들도 감히 대궐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열흘이나 지났다. 참다못한 번쾌가 궁중 작은 문을 디밀고 거침없이 지쳐들어갔다. 그제서야 여러 대신들도 뒤따랐다. 고조는 환관의 무릎을 베고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번쾌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전날 폐하께서는 저희들과 함께 풍현과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평정하러 다니실 때에는 얼마나 기력이 왕성하셨습니까. 그런데 천하가 이미 평정된 지금은 어찌 그토록 피곤해 보이십니까. 정작 폐하의 병이 위중하시면 신하들의 근심 또한 그만큼 무겁습니다. 하온데 지금 폐하께서는 정사를 논의할 생각도 않으시고 일개 환관 하나만 상대하시다가 그대로 붕어하실 작정이었습니까. 설마 폐하께서도 진나라를 파멸시킨 저 환관 조고의 사례를 따르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고조는 멋쩍게 웃으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고조가 몹시 총애하던 신하 노관이 반란을 일으켰다. 총애했던 만큼 가슴이 아팠다. 고조는 번쾌를 시켜 상국의 신분으로 연왕 노관을 응징케 했다. 즈음에 고조는 아픈 마음만큼이나 실제로 병이 위중했다. 그런 경황 중에 어떤 신하가 번쾌를 중상했다. "번쾌는 여씨(呂氏) 일당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붕어하시는 날에는 번쾌는 즉시 군사를 끌고 와 조왕(趙王) 여의(如意)와 척부인(戚夫人: 척씨는 고조가 총애한 여인. 조왕 여의는 고조와 척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고조가 죽은 후 여후에 의해 모두 살해됐음) 일족을 살해할 것이라 합니다." 고조는 병중에서도 크게 노했다. 즉시 진평을 불러, 주발을 데리고 가서 번쾌와 장군직을 교체시키고 진중에서 번쾌를 가차없이 목베라고 명령했다. 진평은 여황후(呂皇后)의 세력이 두려웠다. 그래서 차마 번쾌를 참수하지는 못하고 일단 체포한 뒤 수레에 실어 장안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장안에 도착해 보니 고조는 벌써 붕어한 뒤였다. 여후는 번쾌를 즉시 석방했다. 물론 그의 작위와 봉읍도 그대로 회복시켰다. 번쾌는 효혜제(孝惠帝) 6년에 죽었다. 시호를 무후(武侯)라고 했다.
아들 항이 계승해 후가 되었다. 또한 항의 모친 여수는 임광후(臨光侯)가 되었다. 여수는 고후(高后: 呂太后) 시대에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므로 대신들은 모두 그녀를 두려워하였다. 번항이 번쾌를 대신해 후가 된 지 9년에 고후가 죽었다. 그러자 즉시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여씨 일족과 여수의 권속들을 주살했으며 번항 또한 함께 주살되었다. 그래서 무양후의 작위는 수개월 동안 단절되었다. 효문제가 즉위하자 황제는 다시 번쾌의 서자인 시인(市人)을 무양후로 삼고 본래의 작위와 봉읍을 회복시켰다. 시인이 후가 된 지 29년에 죽으니 시호를 황후(荒侯)라 했다. 아들 타광(他廣)이 대신 후가 되었다. 그 후 6년이 지나 무양후 집안의 사인(舍人)이 타광에게 죄를 지어 처벌받게 되었다. 이를 원망한 사인은 천자에게 무고했다.
- 황후(荒侯) 시인(市人)은 원래가 고자였기로 남자구실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시인은 자기 부인을 시켜 제 동생과 간통케 함으로써 타광을 낳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타광은 실은 황후의 아들이 아닙니다. 고로 황후를 대신하는 후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 안건은 조칙으로 담당관에게 넘겨졌다. 효경제 중원(中元) 6년. 타광의 후작위는 박탈당했고 타광은 서민이 되었으며 그의 봉국 역시 없어져 버렸다.
곡주후(曲周侯) 역상(역商)은 고양(高陽: 河南省 陳留縣 부근) 사람이다. 진승(陳勝)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역상은 젊은이들을 모아 부근의 지역을 닥치는 대로 공략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의 부하들을 얻었다.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나자 유방이 진류(陳留)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역상은 장수 몇 명과 4천 명의 군졸을 데리고 기(岐:陳留부근) 땅에서 유방에게 귀속했다. 역상은 유방을 따라 장사(長社: 河南省 長葛縣 서쪽)를 공격해 선봉에 섰던 공으로 작위를 받아 신성군(信成君)에 봉해졌다. 이어 유지(河南省 偃師縣 동쪽)를 공격하고 황하의 나루터를 차단해 진나라 군사를 낙양의 동쪽에서 격파했다. 또 유방을 따라 완(宛: 河南省 南陽縣)과 양(穰: 河南省 鄧縣)을 공략.함락시키는 등 17개 현을 평정했다. 게다가 별동대를 거느려 순관(旬關: 陝西省 洵陽縣 동쪽)을 공격해 한중(漢中)을 평정하기도 했다. 항우가 진을 멸망시킨 뒤 유방을 세워 한왕(漢王)으로 삼았다. 한왕은 역상에게 신성후(信成侯)의 작위를 하사하고 장군의 직위를 주어 농서(甘肅省)의 도위(都尉)로 일하게 했다. 그 뒤 역상은 독자적으로 별동대를 거느리고 북지(北地)와 상군(上郡:모두 陝西省)을 평정했으며, 언지(焉지: 甘肅省)에서는 옹(雍)의 장군을, 순읍(栒邑: 섬西省)에서는 장한의 별장 주류(周類)를, 이양(泥陽:甘肅省)에서는 소장(蘇장)의 군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무성(武成:섬서성)의 6천 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또 농서 도위로서 한왕을 따라가 항우를 공격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거야(鉅野: 山東省)로 출격해 종리매(鍾離昧)와 격전을 치르며 5개월 만에 승리해 양국(梁國) 상국의 인수를 받고 식읍 4천 호를 추가했다. 그는 양국의 상국 신분으로 장군이 되어 유방을 따라 2년 3개월 동안이나 항우를 쳤다. 또한 호릉(胡陵)을 공격해 취했다.
항우가 패전해 죽자 유방이 황제가 되었다. 그 해 가을에 연왕 장도가 모반했다. 역상은 장군의 신분으로 장도를 토벌했다. 용탈(龍脫:河北省)에서의 전투에서는 그가 선봉장이 되어 먼저 성루에 올라 적진을 혼란에 빠뜨렸고 역현(易縣: 河北省)에서 장도의 군사를 격파했다. 승진하여 우승상이 되고 열후의 작위를 받고 부절을 나누어 받아 대대로 세습이 허용되었다. 식읍으로 탁현(탁縣: 河北省)의 5천 호를 받았으며 탁후라 호했다. 우승상의 신분으로 또 상곡(上谷: 河北省의 都名)을 평정하고 대(代)를 공격해 그 공로로 조나라 상국의 인수를 받았다. 그는 다시 우승상 및 조의 상국으로 주발 등과 함께 대와 안문(雁門:山西省의 郡名)을 토벌해 대의 승상 정종(程縱)과 수상(守相: 승상補) 곽동(郭同) 및 장군 이하 6백 석 지위를 가진 관리 19명을 사로잡았다. 개선하여 장군으로서 태상황(太上皇)의 위장(衛將)으로 1년 7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 뒤 우승상 신분으로 진희를 토벌해 동원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고조를 따라 경포를 토벌했다. 이 토벌에서 진지 두 개를 격파함으로써 토벌을 가능케 했다. 그 공으로 곡주(曲周: 河北省)의 5천1백 호를 식읍으로 받고 앞서의 식읍을 돌려 주었다. 무려 역상이 별군을 이끌고 격파한 군사가 3개 군단, 항복받아 평정한 군(郡)이 6개, 현이 73개, 승상.수상(守相).대장이 각각 한 명씩, 소장(小將)이 두 명, 봉록 2천 석 이하 6백 석에 이르는 관리 19명을 사로잡았다. 역상은 효혜제를 섬기고 고후(高后) 때에는 신병으로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 그의 아들 역기는 자를 황(況)이라 했다. 여록(呂祿)과 친했다. 고후가 죽자 대신들은 여씨 일족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여록이 북군(北軍)을 장악하고 있는 장군이었기 때문에 태위(太尉) 주발조차 북군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역상의 아들 역기를 협박해서 여록을 유인해 나오도록 했다. 여록은 역기를 믿었기 때문에 멋모르고 진지를 벗어나와 강가에서 노닐었다. 장군이 없는 틈을 탄 주발이 재빨리 북군으로 들어가 병권을 탈취한 뒤 비로소 여씨 일족을 주멸할 수 있었다. "친구를 팔아 먹은 놈!" 천하 사람들은 역기를 그렇게 욕했다. 역상은 바로 그 해에 죽었으며 시호를 경후(景侯)라 했다. 아들인 역기가 작위를 계승해 후가 되었다.
효경제 전원(前元) 3년에 오.제.초.제나라 등이 동시에 모반했다. 효경제는 역기를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치게 했다. 그러나 10개월이 지나도록 조성(趙城)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뒤 유후(兪侯) 난포(난布)가 제나라를 평정한 뒤 돌아와서 역기를 도와 주었기 때문에 간신히 조나라 성을 함락시킬 수가 있었다. 조왕은 자살했으며 조나라는 없어졌다. 효경제 중원(中元) 2년이었다. 효경제의 왕황후(王皇后) 모친인 평원군(平原君)은 젊고 아름다왔다. "내 부인으로 취하고 싶다!" 역기의 말이 효경제의 귀로 들어갔다. 진노한 경제는 역기를 형리한테 넘겼고 역기가 평원군을 탈취하려 했던 사실이 입증되었다. 역기는 유죄가 인정되어 작위를 박탈당했다. 경제는 역상의 서자 역견(역堅)을 목후(목侯)에 봉하여 역씨의 후사를 잇도록 했다. 목정후(목靖侯)가 죽으니 아들 수성(遂成)이 강후(康侯)의 작위를 이었다. 수성이 죽자 아들 세종(世宗)이 회후(懷侯)의 작위를 이었다. 세종이 죽은 뒤에는 그 아들 종근(終根)이 작위를 계승했고 태상(太常)의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법에 저촉되어 그의 작위는 없어지고 말았다.
여음후(汝陰侯) 하후영(夏侯영)은 패(沛) 땅 사람이다. 그는 패현의 역사(驛舍)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사신이나 빈객들을 전송하고 빈 수레로 돌아올 때마다 사수(泗水) 가의 역정(驛亭)에 들렀다. 거기에는 친구 유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유쾌하게 떠들며 놀았다. 얼마 있지 않아 하후영은 패현의 말단 현리(縣吏)로 일하게 되었다. 유방과는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장난을 치다가 유방이 하후영에게 상처를 입혔다. 어떤 자가 유방을 고발했다. 당시 유방은 정장(亭長: 도적을 추적.포박하는 驛亭의 長)으로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다치게 할 경우 다른 사람들보다 엄한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를 어쩌지?" 유방이 걱정이 되어 물었다. "자네가 나한테 상처를 입힌 적이 없다고 말해라." 그래서 유방은 하후영을 다치게 한 적이 없다고 발뺌했다. 하후영 역시 이를 증언했다. 그럭저럭 사건이 흐지부지 넘어간다고 생각되었는데 그 판결이 번복되어 재심을 받게 되었다. 위증의 혐의가 짙어진 하후영은 옥에 갇혔다. 수백 대의 태형을 맞으면서도 하후영은 친구 유방을 끝내 감쌌다. 그럼으로써 그는 한 해 동안 옥살이를 했다. 세월이 흘렀다. 유방이 당초 도당들과 함께 봉기하여 패현을 공격하려 했을 때 하후영은 마침 패현의 영사(令史: 文書를 관장하는 官吏)로 있었다. 그는 이 때에도 유방을 위하여 내응했다. 그래서 유방은 단 하루 만에 패현을 항복시키고 패공(沛公)이 되었다. 유방은 하후영에게 즉시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주고 태복(太僕:車馬長官)에 임명했다.
유방을 따라 호릉(胡陵)을 공격할 때 하후영은 소하(蕭何)와 함께 사수(泗水)의 감사(監司) 평(平)을 항복시켰다. 평이 호릉을 가진 채로 항복해 왔기 때문에 하후영은 그 공로로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유방을 따라 탕의 동쪽에서 진나라 군사와 맞서 제양(濟陽:河南省)을 치고 호유(戶유)를 함락시키는 한편 옹구(雍丘: 河南省)부근에서 이유(李由)의 군사를 대패시켰다. 당시에 하후영은 속공 전차전을 벌여 빛나는 전공을 세웠으므로 집백(執帛: 楚의 작위)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는 또 태복의 신분으로 패공의 수레를 관장하면서 동아(東阿:山東省).복양(복陽) 성 아래에서 장한의 군대를 대파했다. 그 때에도 전차 속공전을 벌여 훌륭한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집규(執珪: 楚의 작위)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는 항상 패공의 수레를 직접 몰았다. 그는 개봉(開封)에서 조분(趙분)의 군사를, 곡우(曲遇)에서 양웅(楊熊)의 군사를 공격했다. 유방을 따라 전투에 참가해 68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8백50명의 사졸을 항복받아, 인(印)을 얻은 것만 한 궤(궤) 가득이었다. 다시 패공의 수레를 몰아 낙양 동쪽에서 진군을 공격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도 전차를 이용한 속도전으로 전공을 세워 작위와 봉토를 받았다. 그는 그제서야 등공이 되었다. 그는 다시 패공의 수레를 몰며 남양(南陽)을 공격해 남전(藍田).지양(芷陽: 모두 陝西省)에서 공격을 시작해 역시 전차 속공전으로 패상에까지 진격했다. 그 때 항우가 패상에 이르러 진나라를 멸하고 패공을 한왕에 봉했다. 한왕이 된 패공은 하후영을 열후의 작위에 임명하며 소평후(昭平侯)라 칭했다. 다시 하후영은 태복이 되어 한왕을 따라 촉.한으로 들어갔다. 유방이 촉.한에서 나와 삼진(三秦)의 땅을 평정할 때에도 하후영은 항상 곁에 있었다. 그런데 한군이 팽성에 이르렀을 때 항우군에게 대패했다. 유방은 위급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후영도 도망치는 도중 효혜(孝惠:後日의 孝惠帝)와 노원(魯元: 公主)을 발견했다. 두 아이를 얼른 수레에 실었다. "아이들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는다! 어서 수레 밖으로 떨어뜨리라니까!" 유방이 소리쳤으나 하후영은 듣지 않았다. 유방은 아이들을 발길질해 수레 밖으로 떨어뜨리려 했으나 하후영은 일방 수레를 몰면서 아이를 감싸며 대신 매를 맞았다. 유방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아이란 다시 낳으면 된다. 네놈이 내 말을 안 들어!" 유방은 칼을 빼어 하후영을 쳤다. 하후영 역시 칼을 빼어 유방의 칼을 끊임없이 막았다. 적에게 쫓기고 아이들을 감싸고 수레를 몰고 유방의 칼까지 상대하자니 하후영은 정신 없이 바빴다. 그러나 결국 옹구의 수풀 속으로 해서 모두가 무사하게 안전지대로 피신했다. 하후영은 효혜와 노원을 풍(豊)으로 데려갔다. 한왕 유방은 형양에 도착해서야 흩어진 군사를 수습할 수 있었다. 하후영에게는 기양(祈陽: 所在不明)을 식읍으로 주었다. 하후영은 다시 한왕의 수레를 몰아 항우를 추적해 진(陳)에 이르러 초를 평정하고 노(魯)에 이르렀다. 식읍으로 자지(玆氏: 山西省)를 더했다.
한왕이 황제로 즉위했다. 그 해 가을 연왕 장도가 모반했다. 하후영이 태복으로 종군해 장도를쳤다. 이듬해 고조를 따라 진(陳)에 이르러 초왕 한신을 체포했다. 하후영은 여음(汝陰: 安徽省)으로 식읍을 바꾸고 할부를 갈라받아 대대로 세습이 허용되었다. 태복으로서 고조를 따라 대(代)를 치고 무천(武泉).운중(雲中: 모두 山西省)에 이르렀다. 그 공으로 1천 호의 식읍을 더했다. 다시 고조를 따라 한왕(韓王) 신(信)의 군사인 흉노의 기병을 진양(晋陽)부근에서 공격해 크게 부쉈다. 그리고는 도주하는 적을 추적해 평성(平城:山西省)에 이르렀으나 흉노에게 포위되었다. 이레 동안 우군과는 단절되었다. 이에 계략을 생각해 낸 고조는 흉노족의 묵특(首領)의 왕비 연씨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자 고조가 탈출할 수 있도록 포위망의 한 귀퉁이를 열어 주었다. 고조가 포위망을 뚫어 말을 타고 내달리려 하는데 하후영이 말했다. "마침 안개도 자욱하니 흉노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빠져 나갑시다. 만일을 대비해 화살을 적들 쪽으로 겨누고서 말입니다." 그렇게 서행으로 고조를 보호하면서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고조는 이에 하후영에게 세양(細陽: 河南省)의 1천 호를 식읍으로 첨가시켜 주었다. 그 뒤 하후영은 여전히 태복의 신분으로 고조를 따라 구주산(句注山: 山西省 雁門山) 북쪽의 흉노 기병대를 공격해 대파했다. 그는 또 팽성의 남쪽에서도 흉노를 세 차례나 공격해 적진을 돌파하는 등 그 공로가 많았으므로 그가 빼앗은 읍의 5백 호를 식읍으로 더 받았다. 그는 또 태복의 신분으로 진희.경포의 군을 공격해 반란군을 토벌한 공으로 4천 호의 식읍을 추가했다. 이후 그의 식읍은 여음(汝陰)의 6천9백 호로 대체되었고 이전의 식읍은 반환했다. 하후영은 유방이 처음 패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언제나 태복이었다. 고조가 붕어할 때까지 태복으로 일했고 효혜제도 여전히 태복으로서 섬겼다. 효혜제와 고후는 하읍(下邑: 江蘇省) 부근에서 어린 효혜제와 노원 공주를 구해 준 은혜를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북쪽 대궐에서 가까운 거리에 저택을 하사하고 그 집 이름을 근아(近我: '우리와 가깝다'는 뜻)라 했다. 그만큼 하후영을 특별히 존중한 것을 의미한다. 효혜제도 붕어했다. 그 뒤에도 하후영은 여전한 태복의 지위로 고후를 섬겼다.
고후 역시 죽고 대왕(代王: 후일의 孝文帝)이 입도(入都)하자 하후영은 태복으로서 동모후(東牟侯)와 함께 청궁(淸宮: 天子가 노니는 궁전 이름)으로 들어가 소제(少帝: 漢의 四代皇帝 劉弘. 효혜제의 아들로 呂后가 황제로 세움. 여후 死後 대신들에 의해 살해됨)를 폐했다. 그런 후 천자의 수레를 몰아 대국(代國)의 경저(京저)로 가서 대왕을 맞아 대신들과 함께 효문 황제로 세웠다. 그런 후 그는 여전히 태복으로 있었다. 그로부터 8년 후에 하후영은 죽었다. 그의 시호는 문후(文侯)라 했다. 그의 아들 이후(夷侯) 조가 세습으로 섰으나 7년 만에 죽어 그의 아들인 공후(共侯) 사(賜)가 즉위했다. 그는 31년 만에 죽었다. 그의 아들 파(頗)는 효경제(孝景帝)의 황녀 평양 공주(平陽公主)와 결혼했으며 19년 동안 재위했는데, 파는 원정(元鼎) 2년에 그의 부친의 첩과 간통한 죄를 입고 자살했다. 그로써 그 봉국은 없어져 버렸다.
영음후(潁陰侯) 관영(灌영)은 수양(收養: 河南省 商邱縣)에서 비단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 무렵 유방이 패공이 되어 각지를 공략하다가 옹구(雍丘: 河南省 杞縣) 부근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편 진장 장한이 한량에게서 승리를 거두며 그를 죽였다. 따라서 패공도 회군하여 탕 땅에 군대를 포진할 수밖에 없었다. 관영은 바로 그 때부터 패공을 따르게 된다. 관영은 우선 중연(中涓:近待官)으로서 패공을 따라 성무(成武: 山東省 成武縣)에서 동군(東郡)의 위(尉)를 격파하고 강리(강里)에서 진군과 격전을 치렀다. 그 공으로 관영은 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관영은 그 뒤에 유방을 따라 박현의 남부와 개봉.곡우에서 진군을 맞아 용맹스럽게 싸웠으므로 곧 집백(執帛)의 작위를 받고 선릉군(宣陵君)의 호를 받았다. 그 뒤에 양무(陽武)의 서쪽으로 진군해 낙양에 이르기까지 진군을 시(尸)의 북쪽에서 격파하고 북쪽의 황하 나루터를 차단한 뒤 남쪽으로는 남양의 군수 기(기)를 양성의 동쪽에서 격파해 드디어 남양군을 평정했다. 그리고 서쪽의 무관에 입성하고 남전에서 격전을 벌인 뒤 패상에 이르렀다. 이에 관영은 집규(執珪)의 작위를 받고 창문군(昌文君)이라 호했다. 패공이 한왕이 되자 관영에게 낭중 벼슬을 주었다. 관영은 한왕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가자 시월에 중알자(中謁者: 中涓과 같은 직위.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관리)에 임명되었다. 즉시 한왕을 따라 되돌아나와서는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역양(역陽)을 함락시켰으며 색왕(塞王)을 항복시키고 그 땅을 평정했다.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했으나 아직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한왕을 따라 동진해 임진관(臨晋關: 섬西省)으로 나와 은왕(殷王)을 공격해 항복받고 그 땅을 평정했다. 항우의 장군 용저와 위(魏)의 재상 항타(項他)의 군을 정도(定陶)의 남쪽에서 공격해 격전 끝에 이를 격파했다. 관영은 이로써 열후의 작위를 받고 창문후(昌文侯)라 호했으며 두(杜)의 평향(平鄕)을 식읍으로 받았다. 관영은 또 중알자로서 한왕을 따라 탕에서 팽성까지의 땅을 함락시켰다. 팽성에 이르렀을 때 한왕은 항우로부터 공격당해 크게 격파되었다. 패주하여 서쪽으로 향하다가 관영이 돌아와 옹구에서 군을 재정비했다. 바로 그 때 진에서 항복해 온 장군 왕무(王武)와 위공(魏公)신도(申徒)가 반기를 들었으므로 관영은 한왕을 따라 이들을 토벌했다. 뒤따라 외황(外黃)을 항복시키고 서행하여 병사를 정비한 뒤 형양에 포진했다. 초의 기병이 대거 내습해 왔다. 이에 맞서기 위한 기병장을 물색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전날 진(秦)의 기사(騎士)였던 중천(重泉: 섬西省) 출신 이필(李必)과 낙갑(駱甲)을 추천했다. "그들이 지금은 교위(校尉)이지만 숙달된 기병이므로 기장(騎將)이 되기에는 손색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왕이 이들을 기장에 임명하려고 하자 오히려 이필과 낙갑이 나서서 말렸다. "저희들은 본래 진(秦)나라 백성입니다. 그러니 대왕의 군사들은 저희들을 믿지 않을 것이니 통솔이 어렵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대왕의 측근 중에서 말타기는 약간 서툴더라도 용맹스런 분을 기병장으로 내세우면 저희들이 받들기에 수월할 것 같습니다." 한왕은 옳다 생각하고, 젊기는 하지만 자주 용약 출전하여 전공을 많이 세운 관영을 중대부(中大夫)로 삼고 이필과 낙갑을 좌우 교위로 삼아 출전케 했다. 관영은 낭중(郎中: 親衛)의 기병들을 이끌고 형양 동쪽으로 나가 초의 기병들을 크게 부쉈다. 또 한왕의 비밀조직을 맡은 관영은 별동대를 이끌고 초군의 배후를 공격해 양무(陽武)에서 양읍(陽邑)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해 버렸다. 동시에 노성(盧成) 부근에서 항우의 부하장수 항관(項冠)을 격파하며 적의 우사마(右司馬)와 기장(騎將)을 목베었다. 또 자공(자公) 왕무(王武)를 연의 서쪽에서 무찌르고 누번(樓煩: 북방오랑캐로 騎射兵을 말함)의 장군 다섯 명, 연윤(連尹: 楚의 官名) 한 명을 베었다. 또 왕무의 별장 환영(桓영)도 백마(白馬: 河南省) 근처에서 베었다. 그 뒤 관영은 기병을 거느리고, 황하 남쪽을 건너 낙양으로 떠나는 한왕을 전송한 뒤 북쪽 한단으로 가서 상국 한신을 맞았다. 회군하여 오창(敖倉)에 이르렀을 때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된 것을 알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열후의 식읍으로 두(杜)의 평향(平鄕)을 받았다. 그리고 어사대부로서 조칙을 받아 낭중기병을 거느려 동진해서 상국인 한신에게 귀속했다. 역성(歷城)에서 제나라 군사를 깨뜨리면서 적의 거기장군(車騎將軍)화무상(華毋傷)과 장수 및 병졸 46명을 사로잡았다. 또한 임치성(臨치城)을 함락시키고 제나라 수상(守相) 전광(田光)을 생포하고 재상 전횡을 추격해 영.박(영.博)에 이르러 함락시키고 제장 전흡(田吸)을 천승(千乘:山東省)에서 격파하여 목베었다. 관영은 또 한신을 따라 고밀(高密: 山東省)에서 용저와 유공(留公)을 공격해 용저를 목자르고 우사마와 연윤과 누번의 장수 열명을 생포했다. 또 부장(副將) 주란(周蘭)도 사로잡았다. 제나라 땅이 평정되자 한신은 스스로 제나라 왕에 즉위했다. 한신은 관영을 시켜 초장 공고(公고)를 노(魯)의 북쪽에서 치게 해 이를 격파했다. 다시 관영을 남쪽으로 돌려 설군(薛郡)의 장(長)을 부수게 하여 기병장 한 명을 사로잡았다. 또 박양을 공격하고 전진하여 하상(下相: 江蘇省)과 그 동남의 동.취려(取慮).서(徐: 모두 安徽床)에 이르렀고 회수(淮水)를 건너 그 일대 성읍을 모조리 항복시켰으며 드디어 광릉(廣陵: 江蘇省)에 이르렀다. 그러자 항우가 항성(項聲).설공.담공(담公)을 시켜 회수 이북을 다시 평정했는데, 이에 관영이 다시 회수를 건너가 북쪽 하비(下비)에서 항성과 담공을 깨뜨리고 설공을 참했다. 평양(平陽: 山東省)에서는 초의 기병을 깨뜨리고 드디어 팽성을 항복시켜 주국(柱國: 官名)인 항타(項타)를 사로잡고 유(留).설.패.찬(찬).소(簫).상(相) 등을 항복시켰다. 또 고(苦).초(초)를 격멸했다.
한왕과 이향(이鄕: 苦縣)에서 합류한 관영은 진(陳) 부근에서 항우의 군대를 공격해 누번의 장군 두 명을 목베고 기병 8명을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관영은 2천5백 호의 식읍을 추가로 하사받게 되었다. 항우가 해하에서 패주하자 관영은 어사대부로서 조칙을 받고 수레와 별군으로 항우를 추격해 동성(東城: 安徽省)에 이르러 항우의 군대를 격멸했다. 거기서 항우가 자살하도록 궁지로 몰아넣었다. 함께 참가한 모두가 열후의 작위를 받았다. 관영은 이 전투에서 적의 좌우사마 각각 한 명과 병졸 1만2천명을 항복시키고 장군과 군리 모두를 포박했다. 또 동성과 역양을 함락시킨 뒤 양자강을 건너 오군(吳郡)의 군장을 격파하고 군수를 생포해 마침내 오(吳).예장(豫章).회계군을 평정했다. 회군할 때 회수 이북을 평정한 것만도 모두 52현에 달했다. 한왕이 황제로 즉위하자 관영에게 식읍 3천 호를 증봉했다. 그 해 가을 거기장군으로서 고조를 따라 연의 장도를 격파하였다. 이듬해 고조를 따라 진(陳)에 이르러 초왕 한신을 잡았다. 귀환하여 할부를 갈라 대대로 세습이 허용되었다. 영음(潁陰)의 2천5백 호를 식읍으로 받고 영음후라 호했다. 거기장군으로서 고조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을 공격해 마읍(馬邑: 山西省)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조칙을 받고 별군으로 누번(樓煩: 山西省) 이북의 6현을 항복시키고 대(代)의 좌상(左相: 官名)을 베었으며 흉노의 기병을 무천의 북쪽에서 격파했다. 다시 고조를 따라, 한왕 신의 편인 흉노의 기병을 진양 근처에서 공격해 백제(白題: 흉노의 種族名)의 장군 한 명을 베었다. 다시 조칙을 받고 연.제.조.양.초의 거기를 병합 통솔해 흉노의 기병을 사석(사石: 所在不明)에서 격파하고 평성에 이르러 흉노에게 포위되었다가 고조를 도와 탈출해 동원에 포진했다. 관영은 고조를 따라 진희를 토벌할 때 조칙을 받고 따로 곡역 부근에서 진희의 승상 후창(侯敞)을 격파했다. 별장 5명을 베었다. 곡역.노노(盧奴).상곡양(上曲陽).안국(安國).안평(安平: 모두 河北省)을 항복시키고 동원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경포가 모반하자 관영은 거기장군으로서 선발부대로 출격해 별장을 상(相)에서 격파하고 부장과 누번의 장수 3명을 베었다. 다시 진격하여 경포의 상주국(相柱國: 官名)의 부대와 대사마의 부대를 격파하고 다시 진격해 경포의 별장 비주(肥誅)를 무찔렀다. 좌사마 1명을 생포하고 적의 소장 10명을 베었다. 그런 후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회수 가에 이르렀다. 그 공으로 2천5백 호의 식읍을 추가했다. 경포가 격파된 후 귀환한 고조는 관영에게 영음의 5천 호를 식읍으로 정하여 주고 이전에 내린 식읍을 환수했다. 고조를 따라서 거둔 관영의 전공은 굉장했다. 2천 석의 관리 2명을 생포, 적군을 격파한 것이 16차례, 함락시킨 성이 46개, 평정한 나라가 1개국, 군(郡)이 2개, 현은 52개이며, 장군 2명, 주국과 상국이 각각 1명씩, 2천 석의 관리 10명을 생포한 것이 그것이다. 고조가 붕어하자 관영은 그대로의 열후 작위로서 효해제와 여태후를 섬겼다. 그런데 여태후가 죽자 여록 등이 조왕(趙王)으로서 자신이 장군이 되어 장안에 포진하고는 난을 일으키려 했다. 제(齊)의 애왕(哀王)이 이 소식을 듣고 병사를 동원해 장안으로 진격하면서 소리쳤다. "왕이 돼서는 안 될 인간을 주멸하러 간다" 상장군 여록 등이 이 소식을 듣고 관영을 대장으로 삼아 마주오는 제왕을 치게 했다. 관영은 군대를 이끌고 형양까지 갔다. 그러다 주발 등과 모의한 뒤 거기에 머물렀다. 낙양으로 돌아간 주발 등은 여씨 일족을 주살했다. 그러자 제왕도 병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고, 관영 역시 형양에서 돌아와 주발.진평 등과 의논해 대왕(代王)을 세워 효문 황제로 삼았다. 그래서 효문 황제는 관영에게 3천 호의 식읍을 증봉하고 황금 1천 근을 하사했다. 관영은 태위 벼슬에 임명되었다. 3년이 지나 주발이 승상을 면하고 봉국으로 떠나니 관영이 승상이 되었다. 이 해에 흉노가 북지.상군에 대거 침입했다. 황제는 승상 관영을 시켜 기병 8만 5천으로 흉노를 치게 했다. 흉노가 물러가자 이번에는 제북왕(濟北王)이 모반했다. 관영이 원정을 시도하자 황제는 관영의 노구를 생각해 조칙으로써 그의 원정길을 막았다. 그 후 한 해쯤 지나 승상 관영이 죽었다. 시호를 의후(懿侯)라 했다. 그의 아들 아(阿)가 평후(平侯)로 계승했다. 이는 28년 뒤에 죽고 그의 아들 강(彊)이 대를 이어 후가 되었으나 12년이 지나고 나서 죄를 지어 후작위가 끊어졌다. 2년 후 원광(元光) 3년 효무제(孝武帝)는 관영의 손자 현(賢)을 임여후(臨汝侯)에 봉하고 관씨의 후사를 계승케 했다. 그런데 8년이 지나서 관현이 뇌물을 받아 먹은 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봉국이 없어져 버렸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풍.패로 가서 소하.조참.번쾌.등공 등의 옛 집들을 구경하고 아직도 생존해 있는 노인들을 방문해 그들 평소의 행장기 같은 것들을 탐문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평판은 듣던 것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칼을 휘둘러 개를 도살하고 비단장사 따위나 할 적에는 고조의 뒤를 따라다님으로써 한나라 조정에 이름을 날리고 자손 대대로 그 여덕을 남길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는 번쾌의 후손 번타광(樊他廣)과 교분이 있었으므로 고조 공신들이 흥기할 무렵의 상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 때 그들의 활약상을 이상과 같이 들려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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