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34. 전담열전
제후들이 초왕 항우를 모조리 배반했을 때 그중에서 오직 제(齊)의 전횡(田橫)만이 항우를 도와 성양(城陽)에서 접전했다. 유방은 그 틈을 타서 팽성(彭城)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제34에 <전담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전담(田담)은 적(狄: 山東省) 땅 사람이다. 본래 제나라 왕인 전씨(田氏)의 일족이다. 전담의 종제(從弟) 전영(田榮)과 그 아우 전횡(田橫) 등 형제 모두가 호걸들인 데다가 강력한 종족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진섭(陳涉)이 처음 봉기하여 초나라 왕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진섭은 주시(周市: 一名은 주불)를 시켜 위나라 땅을 공략 평정케 했다. 그런데 주시는 적 땅에까지 이르렀다. 그러고는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에 일단 치중하고 있었다. 한편 적 땅의 전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성중의 젊은이들 수백을 거느린 전담은 노예 몇 명을 결박하고서 적현(狄縣)의 현령을 뵈러 갔다. "반란군들을 잡아 왔습니다. 이 자들의 처리를 여쭙고자 하오니 현령을 뵙게 해 주시오." 그래서 전담은 현령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담은 현령을 보자마자 쳐 죽였다. 그리고는 적현의 토호와 관리와 유력한 젊은 이들을 모아 놓고 선언했다. "제후들은 지금 모두 진나라에 반기를 들어 스스로 왕이 되었다. 우리 제나라도 자립해야 한다. 제나라는 옛날 주대(周代) 때부터 세워진 나라로 전씨가 왕이었다. 내가 바로 전씨다. 왕이 되는 것은 마땅하다." 그래서 전담은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었다. 그런 후 주시의 진지로 찾아갔다. "이 땅에서는 그대 같은 자가 필요 없다. 제나라는 제나라 사람들이 지킨다. 즉시 그대는 물러가라. 어서 퇴각하지 않으면 두들겨 엎겠다!" 그래서 주시의 군사들은 물러갔다. 전담은 곧 군사를 이끌고 동진하여 제나라 땅을 경략.평정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진나라 장군 장한(章한)이 임제(臨濟: 河南省)에서 위왕 구(咎)를 포위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위구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전담은 곧 군사를 동원해 가서 위나라를 구원했다. 그러나 장한은 물러간 것이 아니었다. 심야를 틈타 병사들의 입에 재갈을 물린 뒤에 소리 없이 접근해서는 제.위의 군사를 급습했다. 전담은 임제성 밑에서 죽고 말았다. 전담의 아우 전영(田榮)은 패잔병들을 거두어 동아(東阿: 山東省)로 달아났다. 제나라 사람들은 전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날의 제나라 왕 건(建)의 동생 전가(田假)를 내세워 제왕으로 삼았다. 전각(田角)으로 재상을 삼고 전간(田間)을 장군으로 삼아 제후의 군사를 방위케 했다. 전영이 동아로 달아나자 장한이 뒤쫓아가서 전영을 포위했다. 항량은 전영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동아 성 아래에서 장한의 군대를 격파했다. 장한은 서쪽으로 도망쳤는데 항량은 계속 그를 추격해 갔다.
한편 전영은 제나라가 전가를 왕으로 세운 사실에 분개했다. 그래서 군대를 끌고 와서 제왕 전가를 추방했다. 전가는 초나라로 도망하고 재상 전각은 조나라로 도망했으며 전간은 앞서 구원을 청하러 조로 갔다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전영은 그제서야 전담의 아들 전시(田市)를 세워 제왕으로 삼고 자신은 재상이 되었으며 전횡을 장군 자리에 앉게 했다. 벌써부터 항량은 장한을 추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한의 군대가 더욱 강성해짐으로 해서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량은 조나라와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 함께 군사를 몰아 장한을 치자고 제의했다. 이에, 정권을 전담하던 제의 재상 전영이 이런 답신을 보냈다.
- 초에서는 전가를 죽이고 조에서 전각과 전간을 죽여 준다면 즉시 출병하겠소.
그러자 초의 회왕(懷王)은 이런 회답을 보냈다.
- 전가는 맹방의 왕이었소. 곤궁하여 내게로 왔는데 어찌 그를 죽이겠소. 그것은 의롭지 못하오.
조나라에서도 역시 전각과 전간을 죽이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 하여 전영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전영은 다시 초나라와 조나라에 서신을 띄웠다.
- 독사가 손을 물면 손을 자르고 발을 물면 발을 자르오. 그것은 물린 부위를 자르지 않으면 몸 전체를 해치기 때문이오. 초나라와 조나라에 가 있는 전가.전각.전간의 존재는 그대들 두 나라에 있어 수족과 같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그런데도 그들을 죽이지 않는 이유가 뭐요. 두고 보시오. 그들 세 사람으로 인해 독사에 물린 몸처럼 우리들 모두가 해를 입을 거요.
그렇지만 초나라와 조나라에서는 끝내 전영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제나라 역시 화를 내며 출병하지 않았다. 장한은 과연 항량을 패배시키면서 죽였다. 초군은 동쪽으로 도망쳤다. 장한은 황하를 건너 거록(鉅鹿: 河北省)에서 조군을 포위했다. 급히 달려온 항우가 조나라를 구원하긴 했으나 항우는 저번의 일로 전영을 원망하게 되었다. 항우는 조나라를 구원하며 장한을 항복시킨 뒤 서쪽으로 향해 함양을 무찔러 진(秦)나라를 멸망시켰다. 제후왕을 세우게 되었을 때 항우는 제나라 왕 전시를 교동(膠東)의 왕으로 바꾸어 즉묵(卽墨: 山東省)에 도읍하게 했다. 제나라 장군 전도(田都)는 항우와 함께 조나라를 구원했고 또 같이 관중으로 들어갔으므로 항우에 의해 제왕이 되어 임치(臨淄: 山東省, 齊의 故鄕)에 도읍하게 되었다. 또 제나라 원래의 왕인 건(建)의 손자에 전안(田安)이 있었다. 항우가 황하를 건너 조를 구원할 때 전안은 나름대로 제북(濟北)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킨 뒤 군사를 끌고 와 항우에게 투항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항우는 전안을 제북왕에 임명해 박양(博陽: 山東省)에 도읍하게 되었다. 전영은 항량의 뜻을 따르지 않은데다 초.조를 도와 진을 칠 것을 마다했으므로 왕이 되지 못했다. 또 조나라 장군인 진여(陳餘)도 제 직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역시 왕에 봉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항우를 원망했다. 항우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제후들도 각각 자기의 봉국(封國)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전영은 진여를 조나라에서 반기를 들도록 하는 한편 자신도 군대를 일으켜 전도를 공격했다. 전도는 견디지 못하고 초나라로 도망쳤다. 전영은 제나라 왕 전시를 교동의 즉묵으로 가지 말도록 만류했다. 그랬더니 전시의 근신들이 반대했다. "항우는 강포한 인간입니다. 교동으로 가셔야지요. 만일 가라는 봉국으로 가지 않으셨다간 왕께선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전시는 너무 불안하여 가만히 도망쳐서 봉국인 교동으로 갔다. 분노한 전영이 즉시 전시를 추격했다. 결국 전시는 즉묵에서 전영의 칼에 죽었다. 전영은 돌아오는 길에 제북왕인 전안까지 공격해서 그를 죽였다. 이리하여 전영은 자립하여 제나라 왕이 되면서 삼제(三齊:膠東.齊.濟北)의 땅을 모조리 병합했다. 항우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다. 즉시 북진하여 제를 치니 제왕 전영은 대패하여 평원(平原: 山東省)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평원 사람이 전영을 잡아 죽였다. 항우는 제나라 성곽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통과하는 곳의 주민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즉시 초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전영의 아우 전횡이 제의 패잔병들 수만 명을 수습해 성양(城陽:山東省)에서 항우의 군사를 반격했다.
한편 유방은 제후의 군사를 이끌고 초군을 격파한 뒤 팽성으로 들어갔다. 이 소식에 접한 항우는 당황했다. 어쩔 수 없이 제나라를 버리고 팽성의 유방을 공격했다. 여기서 항우는 유방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였으며 두 나라는 형양을 사이에 두고 첨예하게 대치했다. 이로 인해 전횡은 쉽사리 제의 성읍들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전횡은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내세워 제왕으로 삼았으며, 자신은 재상이 되어 국정을 전단했다. 전광이 제나라를 평정한 지 3년 만이었다. 한왕은 역생을 제나라로 보내 항복을 설득하도록 했다. 전횡은 역생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여기고 역하(歷下: 山東省 歷城)의 군대를 해산했다. 그런데도 한나라 장군 한신은 군사를 동진시켜 제나라를 공격했다. 당초에 제나라는 화무상(華無傷)과 전해(田解)로 하여금 역하에 진치고 한나라 군사를 방어하고 있었으나 한나라 사자가 왔으므로 방비를 중지한 채 마음놓고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괴통의 계략을 채택한 한신은 조.연을 평정하고 평원진(平原津: 山東省)에서 황하를 급히 건너 제의 역하 군사들을 무차별 살상한 뒤 그대로 임치로 입성했던 것이다. 제왕 전광과 재상 전횡은 놀라기도 하고 분노하여 역생이 속였다고 단정하고 가마솥에다 삶아 죽였다. 그런 후 제왕 전광은 동쪽 고밀(高密:山東省)로 재상 전횡은 박양(博陽)으로, 수비담당 재상 전광(田光)은 성양 땅으로, 장군 전기(田旣)는 각각 달아나 교동에 진을 쳤다. 초에서는 용저를 시켜 제를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한신은 조참과 함께 고밀에서 용저를 격파해 죽인 뒤 전광을 사로잡았다. 한편 한나라 장군 관영은 전광(田光)을 추격해 사로잡고 박양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횡은 제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립해 왕이 되어 되돌아와서 관영을 쳤다.
관영은 전횡의 군사를 영(山東省)에서 크게 깨뜨리니 전횡은 양(梁:魏)으로 도주해 팽월에게 귀순했다. 이 무렵 팽월은 양 땅에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며 때로는 한을 위해, 때로는 초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한신은 용저를 죽인 뒤, 조참을 시켜 군사를 교동으로 급파해 전기를 죽였다. 또 관영을 시켜 재상 전흡(田吸)을 천승(千乘: 山東省)에서 격파해 죽였다. 이렇게 해서 한신은 제를 평정하고 자립하여 가왕(假王)이 되라는 허락을 받았다. 그로부터 한 해쯤 지나 한이 항우를 멸망시키고 한왕이 황제가 되었다.팽월은 위나라 왕에 임명됐다. 전횡은 발붙일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무리 5백여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섬에 숨어 살고 있었다. 누군가가 고조에게 이런 건의를 했다. "원래 제나라는 전횡의 형제들이 평정했습니다. 제나라의 많은 현인(賢人)들이 전횡을 따라 지금 섬에 숨어 살고 있는데 그대로 방치해 두면 언젠가는 커다란 두통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죄를 용서하고 그를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아예 죽여 버리십시오." 고조는 생각한 뒤에 전횡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전횡을 불렀다. 그렇지만 전횡은 사절하는 편지를 썼다.
- 신은 폐하의 사신 역생을 삶아 죽였습니다. 지금 그의 아우 역상이 한나라의 현명한 장수라 하니 신은 그것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조칙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서인(庶人)이 되어 바다의 섬이나 지키며 살도록 해 주십시오.
사자가 귀환하여 전횡의 편지를 고조에게 전했다. 그랬더니 고조는 위위(衛尉: 近衛軍司領官)인 역상에게 엄숙한 조칙을 내렸다.
- 제나라 왕 전횡이 곧 이 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 때 그의 부하나 가족이나 말(馬)이나 따르는 사람에 대하여 불손하거나 불안케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일족을 멸할 것이다.
고조는 다시 사신에게 부절(符節: 使信의 證明)을 주어 역상에게 조칙을 내린 상황을 전횡에게 상세히 설명한 후, 이같이 전하도록 했다. "전횡이 온다면 크게는 왕을 삼고 작게라도 후(侯)로 삼을 뿐이다. 만약 오지 않으면 군사를 보내 주살할 것이다." 전횡은 깊이 생각한 후에 빈객 두 사람과 함께 낙양으로 역마를 타고 떠났다. 낙양에서 30리쯤 떨어진 시향(尸鄕: 河南省)에 도착했을 때 전횡은 황제의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하가 천자를 알현하는데 이대로 갈 수는 없소이다. 목욕을 하고자 하니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그러면서 역참으로 들어갔다. 전횡은 함께 간 두 빈객을 가까이 불러 말했다. "나 전횡은 처음 한왕과 함께 꼭 같이 남면(南面)하여 함께 고(孤)라 칭했소. 그러나 지금 한왕은 천자가 되고 전횡은 패망한 포로가 되어 북면(北面)해 그를 섬겨야 하니 치욕스런 마음 금할 수가 없소. 게다가 나는 한 사람을 삶아 죽였는데 죽은 그의 아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같은 군주를 섬겨야 하오. 그 사람이 설사 천자의 조칙이 두려워 나한테 감히 내색은 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스스로의 부끄러움이야 어쩔 수 없는 게 아니겠소. 지금 폐하께서 나를 보고자 하시는 뜻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하고 한번쯤 불러 보시는 일에 불과하오. 지금 폐하께서는 여기서 30리 거리인 낙양에 계시오. 내 머리를 베어 달려간다 해도 조금도 부패한 상태는 아닐 것이오." 그렇게 말한 후 전횡은 드디어 목을 찔러 죽었다. 빈객이 그의 머리를 가지고 사자를 따라 달려가서 고조에게 올렸다. 고조는 몹시 놀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무리도 아니다! 무위무관의 서민에서 몸을 일으켜 형제 셋 모두가 번갈아 왕이 되었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겠는가!" 고조는 전횡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는 두 빈객에게는 도위(都尉) 벼슬을 주었다. 병사 2천을 동원해 왕자(王者)의 예식을 갖추어 전횡을 매장했다. 그러나 장례가 끝나자마자 두 사람의 빈객은 전횡의 무덤 곁에 구덩이를 판 뒤 스스로 목을 찔러 거기에 떨어져 죽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고조는 더욱 크게 놀라며 전횡의 빈객들조차 현명한 인사들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횡의 다른 빈객들 오백여 명이 섬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자를 파견해 모셔 오게 했다. 사신이 섬에 이르러 전횡의 죽음을 알렸다. 그러자 그들 빈객들 역시 모두다 자살해 버렸다. 그제서야 고조는 전횡 형제가 선비들의 마음을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괴통의 묘책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제나라를 어지럽히고 회음후 한신을 교만하게 만들었으며 결국은 한신도 전횡도 모두 망치게 했다. 괴통의 변론은 종횡자재(縱橫自在)하여 전국시대의 권모술수를 논한 것이 81편이나 된다. 괴통은 제나라 사람 안기생(安期生)과 친했다. 안기생은 한때 항우를 섬기길 원했으나 항우는 그의 책략을 쓰지 못했다. 훗날 항우가 이 두 사람을 봉하려고 했으나 모두 마다하고 도망쳐 버렸다. 전횡의 절개는 참으로 고고하여 빈객들조차 그 절의를 사모해 따라 죽으니 참으로 그는 지극히 현명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를 열전에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제나라에는 계책에 능한 자가 없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하여 이토록 훌륭한 사람을 두고 아무도 장구지책(長久之策)을 세우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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