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2 - 김병총
33. 한신.노관열전
초와 한(漢)이 공(鞏)과 낙양 근방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한왕(韓王) 신(信)은 한(漢)을 위하여 영천(潁川)을 진압하고, 노관은 항우의 군량운송로를 차단했다. 그래서 제33에 <한신.노관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한왕(韓王) 신(信)은 본래 한(韓) 양왕(襄王)의 첩의 손자로, 키가 여덟 자 다섯 치나 되었다. 항량이 초의 후손인 양왕을 세웠을 즈음에는 연.제.조.위에는 전날의 왕을 다시 왕으로 봉할 수가 있었는데 오직 한(韓)만이 후사가 없었으므로 왕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韓)의 여러 공자들 중세서 물색하다가 횡양군(橫陽君) 성(成)을 만나 한왕(韓王)으로 삼을 수가 있었다. 그를 통해 한(韓)의 옛 땅을 진무.안정시키려 했다. 그런데 항량이 정도(定陶: 山東省)에서 패전해 죽자 성이 회왕에게로 달아났다.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양성(陽城: 河南省 登封縣)을 치고, 장량(張良)이 한(韓)의 사도(司徒)였다는 이유로 한의 옛 땅을 쳐서 항복받아 그 곳을 진무케 했다. 그 때 장량이 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신을 한(韓)의 장군으로 삼은 것이다. 신은 그의 병사들을 데리고 유방을 따라 무관(武關: 陝西省 商縣)으로 들어갔다. 또 유방이 서서 한왕(漢王)이 되자 신은 다시 그를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 그 때 신은 유방에게 말했다. "항우는 여러 장수들을 수도 가까운 땅의 왕으로 봉했으면서도 오직 대왕만은 홀로 오지로 가게 했으니 이건 누가 보아도 좌천입니다. 대왕의 병사들은 모두 산동 사람들입니다. 몹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이런 예기(銳氣)가 없어지기 전에 동쪽으로 나간다면 천하를 다툴 만합니다." 유방이 그 때 돌아가서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신을 한(韓)의 태위(太尉)로 삼아 옛 땅을 공략케 했다. 항우는 유방이 신을 시켜 옛 한(韓)의 땅을 공략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항우가 전날 오(吳)에 있을 때 알았던 오의 현령 정창(鄭昌)을 얼른 한왕(韓王)에 임명해 버렸다. 한(漢)의 2년이었다. 신이 한(韓)의 10여 개 성을 공략해 평정했다. 이 때 유방이 하남(河南)에 도착해 신과 함께 한왕 정창을 급습해 항복받았다. 그제서야 유방은 신을 세워 한왕(韓王)으로 삼았다. 신은 언제나 자기 군사를 이끌고 유방을 수종했다. 한의 3년이었다. 유방이 형양을 나가자 신이 주가(周苛)와 함께 형양을 대신 지켰다. 그 때 초의 습격을 받고 신은 초나라에 항복했다가 나중에 도망하여 다시 한(漢)으로 돌아갔다. 유방은 다시 그를 세워 한왕(韓王)으로 봉했다. 신은 다시 유방을 수중하다가 결국 항우를 격파하여 천하를 평정하는데 공헌했다. 한나라 5년 봄이었다. 고조 유방은 드디어 할부(割符)를 갈라 신을 정식으로 한왕(韓王)에 봉하고 영천(潁川: 河南省)에 도읍하게 했다. 이듬해 봄 고조는 신처럼 재능있고 용맹스런 인물이 북쪽으로는 공.낙에 가깝고 남으로는 원.섭에 붙어 있으며 동으로는 회양에 있어 일테면 사나운 군대들만 득실거리는 중심지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안쓰러워 봉읍을 옮겨 줄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고조는 조칙을 내려 신을 태원(太原) 일대의 왕으로 삼아 북쪽 오랑캐에 대비캐 하면서 진양(晋陽)에 도읍하게 했다. 얼마 후 신이 상주했다.
- 이 곳은 변경에 위치해 있어 흉노가 자주 침범합니다. 도읍 진양은 요새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다스리기가 불편합니다. 청컨대 마읍(馬邑 : 山西省)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고조는 옳다 생각하고 허락하자, 신은 곧 마읍으로 옮겨 갔다. 그 해 가을이었다. 흉노의 추장 묵특이 대대적인 작전으로 마읍을 에워쌌다. 신은 싸우느냐 화친하느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화친하기로 하고 사자를 흉노에 보냈다. 태원의 위급을 풍문으로 들은 고조는 급히 군대를 보내어 신을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신은 이미 흉노와 화친하고 있었으므로 구원병이 왔다 하여 흉노를 칠 수가 없었다. 고조는 흉노를 싫어한데다가 신이 또한 흉노에 밀사를 자주 보내 화친하고 있었으므로 두 마음을 품지 않았나 의심하여 사자를 파견해 신을 꾸짖었다. 신은 이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고조에게 용서를 빌더라도 이제는 주살될 것이 확실해졌다. 그래서 흉노와 힘을 합해 한(漢)을 치기로 약속하고 마읍을 가진 채 흉노에 항복한 뒤 태원을 공격했다. 한나라 7년이었다. 고조가 직접 출동해 동제(銅제: 山西省 沁縣)에서 신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의 부장(部將) 왕희(王喜)를 베자 신은 도망쳐 흉노로 들어갔다. 백토(白土: 섬西省 楡林縣) 출신인 신의 장수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 등이 이 때 조나라 후예인 조리(趙利)를 세워 조왕으로 삼고 신의 패잔병까지 긁어모았다. 그들은 신과 묵특과도 모의하여 한나라를 공격하기로 결론을 보았다. 그래서 흉노는 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에게 기병 1만을 주어 왕황 등과 함께 광무(廣武: 山西省 代縣)에 진치게 한 뒤 남하하여 진양에서 한군과 싸우게 했다. 그러나 오히려 흉노군이 크게 깨져서 이석(離石: 山西省 離石縣)까지 추격당하는 패배를 맛보았다. 흉노는 다시 누번(樓煩: 山西省 ?縣) 서북쪽에서 군사를 정비했다. 그 때 이번에는 한나라에서 거기장군(車騎將軍)이 왔으므로 흉노는 다시 쫓기어 북으로 달아났다. 한나라 군대는 승세를 탄 김에 북으로 치달아 올라갔으나 적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진양에 있던 고조는 사람을 시켜 묵특의 실정을 살펴 오라고 했다. "그자가 지금 어디에 있던가." "대(代)의 상곡(上谷: 山西省 代縣)에 숨었답니다." "쳐도 될까?" "해 볼 만합니다." 고조는 드디어 평성(平城: 山西省 雁門)에 도착했다. 고조가 백등산(白登山)으로 나아갔을 때였다. 느닷없이 나타난 흉노의 기병들에게 에워싸였다. 총공격해 오면 속절없이 죽게 되는 목숨이었다. "벗어날 방법이 없겠는가." 그 때 호군중위(護軍中尉) 진평(陳平)이 아룄다. "저의 가신인데 이 곳 출신으로 묵특의 정처(正妻) 연氏와 잘 아는 자가 있습니다. 그에게 선물을 주어 보내 연씨가 묵특을 달래게 하지요." "여부 있겠소." 후한 선물을 받은 연씨는 과연 묵특을 달랬다. "지금 우리가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거기서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양국의 군주가 서로 괴롭혀야 될 까닭도 없구요." 효과가 있었던지 흉노들이 공격을 해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포위망을 푼 것은 아니었다. 이레 만이었다. 백등산으로부터 짙은 안개가 내려왔다. 어떻게나 짙은 안개였던지 적은 물론이고 아군의 모습조차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진평이 말했다. "폐하, 포위망을 벗어나가는 절호의 기회인 듯합니다. 오랑캐들도 피흘리는 것을 원치 않는 듯하니 별다른 일은 없을 겁니다. 만일을 위해 강궁에 화살 두 개씩 장치해 바깥으로 향하게 하고 슬금슬금 빠져 나가 봅시다." 과연 흉노들의 저항은 없었다. "그토록 혼난 일은 처음이오." 고조가 평성으로 물러났을 때 마침 한의 구원병도 도착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의 싸움은 의미가 없다. 회군한다." 한나라 군사는 돌아갔다. 이후에도 신은 흉노를 위해 변경을 왕래하면서 자주 한을 공격했다. 한나라 10년이었다. 신은 왕항 등을 시켜 한의 진희(陳희)를 설득해 한나라에 모반하도록 했다. 그러나 성공은커녕 진희의 몸만 망치게 했다. 11년 봄이었다. 신은 삼합(三合: 山西省 陽高縣)에서 흉노의 기병과 함께 한에 저항했다. 이에 한에서는 시장군(柴將軍)에게 명해 그들을 치게 했다. 시장군은 우선 신에게 편지부터 보냈다.
- 폐하께서는 너그럽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한나라를 배반하고 도망친 어떤 제후라도 다시 귀순만 해 오면 반드시 본래의 지위와 칭호를 돌려드리는 분입니다. 이 점은 그대도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 더구나 그대는 일시 싸움에 져서 흉노에게로 도망쳐 갔을 뿐이지 대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걱정 마시고 하루 속히 한으로 돌아오십시오.
신이 시장군에게 답장을 썼다.
- 폐하께서는 저를 시골에서 뽑아 일으켜 남면하여 고(孤: 諸侯의 자칭)라 칭할 수 있게 해 주셨소. 그것은 나의 행운이었소. 그러나 나는 형양의 싸움에 져서 죽지 못하고 항우에게 사로잡혔으니 이것이 나의 첫번째 죄요. 오랑캐가 마읍을 공격해 왔을 때 나는 또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으니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죄요. 지금은 오히려 오랑캐를 위하여 병사를 이끌고 한나라 장군과 목숨을 다투게 되었으니 이것이 나의 또한 세 번째 죄인 것이오. 옛적 대부종과 범려는 한 가지 죄도 없이 죽었는데 나는 벌써 세 가지씩이나 죄를 저질렀소. 그러고도 세상에 살기를 바란다면 그건 마치 오자서가 오항 부차에게 죄를 짓고도 떠나지 않다가 피살된 까닭과 다름이 없소. 나는 산골짜기로 숨어 도망다니며 아침저녁으로 오랑캐들에게 구걸하며 지내오. 내가 한나라로 귀순할 생각을 갖는 것은 마치 앉은뱅이가 일어서기를 잊지 못하고 장님이 보기를 잊지 못하는 바와 다를 게 없소. 이런 처지이니 내가 한나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오."
"사정이 그렇다면......" 신이 도전해 왔다. 시장군은 할 수 없이 삼합을 포위해 공격하여 드디어 신의 목을 베었다. 신이 처음 흉노로 들어갈 때에는 태자 적(赤)과 함께 갔다. 퇴당성에 이르러 아들을 다시 얻었기에 이름을 퇴당(頹當)이라 했고, 태자 또한 아들을 낳았기에 영이라 이름지었다. 한의 효문제 14년에 퇴당과 영이 그 부하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한에서는 퇴당을 봉해 궁고후(弓高侯)로 삼고, 영을 양성후(襄城侯)로 삼았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 때 여러 장군들 중에서 궁고후의 공이 으뜸이었다. 궁고후는 그 지위를 아들에 전하여 손자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손자에게 아들이 없어 후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영의 손자는 불경죄로 후의 지위를 잃었다. 퇴당 첩복(妾腹)의 손자 한언(韓언)은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그 명성과 부귀가 당세에 빛났다. 그의 아우 열(說)은 다시 봉작되었으며 자주 장군으로 칭해졌다가 드디어 안도후(安道侯)가 되었다. 그 아들이 직위를 계승했으나 한 해쯤 뒤에 법에 저촉돼 죽었다. 다시 한 해쯤 뒤에 열의 손자 증(曾)이 용액후(龍액侯)가 되어 열의 뒤를 이었다.
노관은 풍(豊: 江蘇省) 땅의 사람으로, 고조와 같은 마을 사람이다. 노관의 부친 역시 고조의 부친인 태상황과 사이가 좋았다. 두 사람이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고조와 노관이 같은 날에 태어나자 마을 사람들이 경사라면서 양고기와 술을 가지고 가서 양가를 축복했다. 고조와 노관은 성인이 된 후에도 함께 글을 배우고 사이 역시 좋았다. 고조가 평민이었을 적에 죄를 짓고 행방을 감춘 적이 있었는데 노관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다. 고조가 패(沛)에서 처음으로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자 노관은 역시 빈객으로 종군해 한중까지 따라 들어가 장군이 되어 언제나 고조를 측근에서 모셨다. 동쪽으로 가서 항우를 칠 때에는 태위(太尉)로서 고조를 모셨다. 그는 유일하게 고조의 침실을 드나들 수 있도록 허용받은 사람이었다. 옷.음식 등의 상을 내릴 때에도 다른 신하들은 감히 노관과 같은 총애는 바랄 수가 없었다. 소하.조참 등이 특별한 예우를 받긴 했으나 노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노관은 봉작되어 장안후(長安侯)가 되었는데 장안은 옛날의 함양(咸陽:秦의 國都, 陝西省)이다. 한의 5년 겨울이었다. 고조가 항우를 격파한 뒤 노관을 별동대의 장군으로 삼았다. 그는 유가(劉賈)와 함께 임강왕(臨江王) 공위(共尉) 장도(장도)를 쳐서 항복받았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제후들 중에서 왕위에 오른 자는 일곱 명이었다. 노관 역시 왕으로 삼고 싶었지만 군신들이 불만을 품을까 보아 고조는 걱정한 나머지 그만두었다. 그런데 장도를 사로잡게 되어 여러 장군.재상.열후들에게 조칙을 내려 연왕으로 삼을 테니 공로 있는 자를 추천하도록 조칙을 내렸다. 군신들은 주군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태위 장안후 노관은 항상 폐하를 측근에서 모시며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노관의 공로가 가장 큽니다." 한의 5년 8월, 고조는 그제서야 노관을 영왕으로 세울 수가 있었다.
한의 11월 가을이었다. 진희가 대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직접 한단으로 가서 진희의 군을 쳤다. 연왕 노관도 물론 그 동북쪽을 쳤다. 진희는 다급했다. 왕황을 시켜 흉노에게 구원을 청해 오게 하였다. 그런 사정을 간파한 노관은 신하 장승(張勝)을 사신으로 흉노에 보내어 진희를 구원하지 못하게 '진희의 군사는 이미 격파되었다'고 말하게 했다. 그런데 장승이 흉노에 도착해 보니 전날의 연왕 장도의 아들 장연(張衍)이 거기로 도망해 와 있었다. 장연은 장승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연나라에서 중용되는 까닭은 오랑캐 사정에 밝기 때문이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오. 연나라가 그나마도 오래 존속되는 까닭은 제후들이 자주 반란해 천하의 승패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그대는 연을 위하여 진희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소. 글쎄, 진희가 멸망했다 칩시다. 그 다음에는 연나라 차례요. 연나라가 망하면 당신인들 별수 있겠소. 중용은커녕 한의 포로가 되고 말지." "그렇다면 어떤 계략이 좋겠소?" "연왕 노관에게 진언하시오." "어떻게?" "진희 공격의 속도를 늦추고 흉노와 화친하라 하시오." "그런 진언을 연왕이 들을 것 같소?" "이런 사태를 오래 끌게 되는 그만큼 연왕은 그 지위를 더욱 오래 보존할 수 있다고 설득하시오. 더구나 한나라에 급변이라도 생겼다고 가정해 보시오. 그로 인해 연나라는 더욱 편안해질 게 아니겠소." 장승은 장연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장승은 오히려 가만히 흉노로 하여금 진희를 도와 연나라를 치게 했다. 노관은 장승이 배반했다고 생각하여 고조에게 상서했다.
- 장승은 오랑캐와 공모해 연과 한을 배반하였습니다. 그자의 일족을 멸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바로 그 때 장승이 돌아왔다. "어찌 된 일이냐!" 노관은 호령부터 했다. 그러자 장승은 일의 자초지종과 자신이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동기와 배경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대 생각이 그럴 듯하다!" 그렇게 되어서 노관은 장승을 논죄할 근거를 잃어버렸으므로 그 가족들까지 탈출시켜 흉노의 간첩이 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범제(范齊)를 몰래 진희에게 보내어 싸우는 척하면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지 말자고 약속했다. 한의 12년이었다. 그런데 사태는 엉뚱하게 돌아갔다. 고조는 동쪽으로 가서 경포를 쳤다. 그러면서 번쾌를 시켜 대땅의 진희를 토벌하게 하여 목베어 죽였다. 진희의 부장(副將)이 투항하면서 실토한 것이다. "연왕 노관이 범제를 시켜서 진희에게 통하도록 계책을 꾸몄습니다." 고조는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사자를 보내어 노관을 소환해 보았다. 겁이 난 노관은 병이라 핑계대고 가지 않았다. 고조가 다시 벽양후 심이기(審이其)와 어사대부(御史大夫) 조요(趙堯)를 사자로 연왕을 맞으러 보냈다. 노관은 더욱 두려워져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버렸다. 숨어서는 자기의 총신에게 변명처럼 불평했다.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된 자는 나와 장사왕(長沙王)뿐이다. 지금 나도 위태롭다. 한나라는 지난해 봄에 회음후 한신을 멸족시키더니 여름에는 팽월을 베어 죽였다. 지금 주상께서는 병이 들어 모든 정사를 여후(呂后)에게 맡기고 있다. 그러니 이들 모든 사태는 여후의 계략 때문이다. 그 잔인한 여자는 성이 다른 왕과 대공을 세운 신하들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노관은 병을 핑계대고 더욱 가지 않았다. 노관의 좌우에 있던 신하들까지 심문당하지 않으려고 모조리 도망쳐 버렸다. 노관의 말이 누설되지 않을 턱이 없었다. 벽양후 심이기가 듣고 가서는 고조에게 자세히 아ㄹ다. "그런 불평까지 하던가. 그렇지만 그가 아직 배반했다고는 말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때에 흉노에서 항복해 온 자를 심문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장승이 도망하여 흉노에 와 있는데 연나라의 사신 신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아, 노관은 과연 배반했구나!" 고조는 탄식하며 병석에 누워 버렸다. 번쾌가 연나라를 응징하러 나갔다. 노관은 자신의 궁인(宮人)과 가속(家속)과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아직은 장성(長城) 아래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고조의 병이 나으면 죽을 각오로 들어가 사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4월에 고조가 붕어했다. 여후의 보복이 두려웠다. 결국 노관은 일행들을 이끌고 흉노 땅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흉노는 그를 동호(東湖)의 노왕(盧王)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관은 다른 오랑캐들로부터 자주 침략과 약탈을 당하는 괴로움을 겪자 더욱 한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 해쯤 지내다가 결국 오랑캐 땅에서 죽고 말았다. 고후(高后: 呂皇后) 때에 노관의 처자가 흉노에서 도망해 한나라에 투항했다. 고후가 병들어 있어서 만날 수는 없었다. 도성에 있는 연왕의 저택에 머물면서 고후가 쾌차하면 술잔치를 마련하여 뵈려고 기다렸으나 고후 역시 그대로 죽었다. 노관의 아내 또한 병들어 죽었다. 효경제 중원 6년이었다. 노관의 손자 타지(他之)가 동호왕으로서 투항했다. 한에서는 그를 봉하여 아곡후(亞谷侯)로 삼았다.
진희는 완구(山東省 荷澤縣) 사람이다. 그가 처음에 어떤 까닭으로 고조를 따라 다니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고조 7년 겨울이었다. 한왕 신(信)이 배반해 흉노로 들어가자 고조가 평성까지 신을 치러 나갔다. 성과 없이 귀국한 고조는 즉시 진희를 봉하여 열후로 삼았다. 진희는 그 때 조나라 상국이었는데 또한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와 대나라 변경의 군사를 감독하게 했으니 변경군사들은 모조리 진희에게 속하게 되었다. 언젠가 진희가 휴가를 얻어 돌아가는 길에 조나라로 들렀다. 그 때 조나라 재상 주창(周昌)이, 진희를 추종하는 빈객들의 수레가 천여 대를 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로 인해 한단의 숙사가 모두 만원이 돼버렸다. 주창은 빈객들이 무엇 때문에 진희를 따르는가 하고 유심히 살폈다. 진희는 포의(布衣)의 사귐같이 인간관계가 소탈하였고 자기 몸을 낮추어 빈객들을 높였다. "저것이 문제다. 저런 행동의 내면에는 어떤 의도가 있다!" 그렇게 짐작한 주창은 진희가 대 땅으로 돌아가자마자 곧 고조를 뵈러 갔다. "진희를 따르는 빈객들의 숫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호화롭기 또한 그지없습니다. 그 이유가 외지에서 오로지 혼자 마음대로 병권(兵權)을 휘둘렀기 때문에 그의 위세가 대단해진 것이 아닐까요. 혹시 변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고조는 덜컥 의심이 되었다. 그래서 몰래 사람을 보내어 진희의 비위사실을 조사케 했고 심지어 진희 빈객의 축재과정까지 탐문케 했다. 진희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더구나 법에 저촉되지 말라는 법도 없으리라 생각되자 더럭 겁이 났다. "그렇다면 나도 대비책을 세워야 되겠구나!" 진희는 가만히 사람을 보내어 왕황과 만구신과 내통해 두었다. 고조 10년 7월이었다. 고조의 부친 태상황(太上皇)이 별세했다. 그것을 핑계로 고조는 진희를 불렀다. 그러나 진희 역시 병을 핑계대며 내조하지 않았다. 9월에는 진희가 드디어 왕황 등과 함께 한을 배반하면서 스스로 대왕(代王)이 되고 조.대의 땅을 빼앗았다. 고조는 진희의 반란소식을 들었다. 친정하여 한단에 이르렀다. 반란에 가담했던 조나라.대나라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끌려나왔다. 고조가 직접 심문했다. "너희들은 본심에도 없으면서 진희가 치는 사기와 협박에 넘어갔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모두를 용서해 주겠다." 그러면서 고조는 진희가 차지하고 있는 땅의 변경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진희는 오래 가지 못한다. 나라를 남쪽인 장수에 의존하지도 않고 북쪽 한단도 지키지 못했다. 그가 대단한 일을 못할 것을 미리 짐작하겠구나......" 조의 재상 주창이 상산(常山: 河北省)의 군수와 군위(郡尉)를 처단하고자 고조에게 간했다. "무엇 때문에?" "상산의 25개 성읍 중에서 진희가 모반하자 저들은 20개 성이나 빼앗겼습니다." "애초부터 진희보다 힘이 모자라 성읍을 빼앗긴 게 아닌가." 고조는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상산군의 군수와 군위에 임명했다. 고조가 주창에게 물었다. "조나라의 장사(壯士)들 중에서 장군으로 삼을 만한 인물들은 혹시 없던가." "네 사람쯤 있긴 있습니다만......" "데려오라." 주창이 추천하는 네 사람이 고조 앞으로 인도되었다. 고조는 그들을 약간 깔보면서 물었다. "너희들이 감히 장군이 되겠다고?" "부끄럽습니다. 저희들은 멋모르고 황상(皇上) 앞으로 끌려왔을 뿐입니다." "어쨌든...... 잘 해 보겠느냐." "신명을 바치겠습니다." "좋다. 천호(千戶)에 봉하고 장군으로 삼겠다." 고조는 뜻밖의 전격적인 인사단행을 해 버렸다. 좌우 신하들이 불평했다. "폐하, 폐하를 따라 죽음을 무릅쓰고 촉땅과 한중까지 들어가 초나라를 정벌하고도 아직 논공행상을 충분히 못 해 준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아무 공로도 없는 이자들에게 봉읍을 주어 장군까지 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들이 알 바 아니오. 진희가 모반하자 한단 이북은 모조리 진희의 땅이 되었소. 짐이 천하에 격문을 띄워 병사를 요청했건만 아직까지도 달려온 자가 아무도 없소. 차제에 짐이 지금 믿을 수 있는 군사가 누구요. 오직 가까이 있는 한단 성중의 병사들뿐이오. 짐이 지금 4천 호를 아껴 무엇에 쓰겠소. 네 사람을 후하게 봉한 것은 조나라 자제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쓰기 위함이오." 그제서야 신하들이 감탄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고조는 다시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 진희 밑에 있는 장수들은 과연 어떤 자들이오?" "왕황과 만구신입니다." "아, 짐도 그자들을 잘 알고 있지. 예전에는 모두 장사꾼들이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천 금의 상을 걸고 그자들의 목을 사겠다. 격문을 붙여라." 11년 겨울 한군은 드디어 공격을 개시했다. 진희의 장수 후창(侯敞)을 곡역(曲逆: 河北省 完縣) 부근에서 베었다. 또한 장군 장춘(張春)을 요성(요城: 山東城)에서 격파하고 1만 여명의 목을 베었다. 태위 주발이 태원과 대나라로 쳐들어가서 평정했다. 12월에는 고조가 몸소 동원(東垣: 河北北省 正定縣)을 쳤지만 황복받지 못했다. 오히려 고조는 병사들로부터 심한 욕까지 얻어먹었다. 나중에 동원을 항복시키고 나서였다. 고조는 욕한 자들을 가려내어 목베고 주상에게 욕하는 자를 보고도 잠자코 있은 자들은 경형에 처했다. 동원의 이름을 고쳐 진정(眞正)이라 부르게 했다. 천 금의 상금이 탐이 난 왕황과 만구신의 부하들이 그들의 장군들을 산 채로 잡아 왔다. 이렇게 되어 진희의 군대는 마침내 패멸되었다. 고조가 낙양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대나라는 상산 북쪽에 있고 조나라는 상산 남쪽에 있어 대나라가 조나라까지 통치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들 항(후일의 孝文帝)을 대왕(代王)으로 세워 중도(中都:山西省 平遙縣)에 도읍하게 했다. 대.안문(안門)의 땅이 모두 대나라에 소속되었다. 고조 11년 겨울에 번쾌의 군대는 진희를 끝까지 추격해 영구(靈丘 : 山西省)에서 베어 죽였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신(信)과 노관은 원래가 조상 대대로 덕과 선을 쌓아 황후(王侯)가 된 것이 아니라 한때의 권모술수로 벼슬을 구하고 사기와 폭력으로 공을 이룬 자들이다. 그들은 한나라가 천하를 평정하는 초기에 만났으므로 땅을 갈라 남면(南面)하여 고(孤)라 칭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으로 강대해졌기로 경계를 받았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후원자로 의지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을 받았다. 그로 인해 조정과는 날로 멀어지고 스스로는 위태로움을 자초했다. 일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지모는 바닥나고 힘은 다했다. 마침내 흉노땅으로 도망쳤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진희는 양(梁) 땅의 사람이다. 젊었을 적에는 위의 공자 신릉군 무기를 칭찬하며 사모했다. 변경을 수호하는 장군이 되어 자유롭게 빈객을 초청하고 선비들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여 관심을 끌었으나 명성이 실력보다 지나쳐 주창에게 의심을 받았다. 조사해 보니 결국 잘못이 많이 드러났다. 진희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간사한 자의 진언을 받아들여 무도한 짓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아, 슬프다. 생각해 보면, 계략의 익고 설익음과 또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사람의 운명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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