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31. 경포열전
경포는 회남(淮南) 땅을 가진 채 초왕(楚王) 항우를 배반하고 한왕에게 귀속했다. 한(漢)은 또 대사마(大司馬) 주은(周殷)을 얻어 해하(垓下)에서 드디어 항우를 격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31에 <경포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경포는 육(六: 安徽省 북쪽) 출신이다. 성(姓)은 영씨(英氏)이며, 진대(秦代) 때에는 서민이었다. 소년 시절 어떤 관상가가 그의 인상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참 이상한 관상이오. 분명히 왕(王)이 될 얼굴인데 반드시 형벌을 받은 다음이라야 될 것이오." "그럼 됐소. 형벌이야 어떻든 왕만 되면 좋소." 세월이 흘렀다. 장년이 된 그는 법에 저촉되어 얼굴에 먹물을 들이는 경형(墨刑이라고도 함. 周나라의 六刑은, 경.의( 코 자르기).월(발꿈치자르기).宮(궁: 거세).대벽(죽임)이다)을 받고 말았다. 그때 영포는 웃으며 말했다. "두고 보게. 이제 나는 형벌을 받았으니 왕이 될 걸세. 어떤 관상가가 그렇게 점쳤거든." "미친놈이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떠벌리는 그를 비웃었다. 어쨌든 그때부터 그의 이름은 경포가 되었다. 경포는 형 판결을 받고 여산(麗山: 驪山, 陝西省 臨潼縣 南東, 秦始皇陵 造營工事場)으로 끌려갔다. 거기에는 형도(刑徒)들이 수십만 명이나 있었다. 경포는 그들 형도들 중에서도 우두머리 호걸들과 교제했다. 그러다가 수백 명의 무리들을 꾀어 양자강 부근으로 도망쳤다. 거기서 떼도둑질을 하고 살았다. 즈음에 진승(陳勝: 陳涉의 本名)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경포는 즉시 파군을 찾아갔다. 진(秦)나라를 배반하게 만든 뒤 병사 수천 명을 얻었다. 그 때 파군은 경포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딸까지 주어 사위로 삼았다. 한편 진나라 장군 장한(章한)이 진승을 멸망시켜 버리고, 여신(呂臣)의 군사까지 격파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경포는 형세판단을 한 뒤 병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청파(淸波: 河南省 息縣 북쪽)에서 진나라 좌우교위(左右校尉)를 격파한 뒤 다시 동쪽으로 나아갔다. 항량(項梁: 項羽의 叔父)이 강동(江東)의 회계 땅을 평정하고 양자강을 건너 서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항씨가 대대로 초나라 장군이었다는 이유로 진영(陳영)의 군대가 항량 휘하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은 뒤 경포는 옳은 판단이라 생각되어 자신도 군사를 끌고 가서 항량 휘하로 들어갔다. 그때 포장군(蒲將軍)도 합세했다. 항량은 회수를 건너 서쪽으로 전진하여 진나라 장군 경구(景駒)와 진가(秦嘉) 등을 공격했다. 싸울 때마다 항상 일등 공훈자는 경포였다. 항량이 설(薛: 山東省 薛城) 땅에 이르러 진승이 패사(敗死)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초의 회왕(懷王)을 옹립했다. 항량은 무신군(武信君)이라는 호를 받았고 경포는 당양군(當陽君)이라 했다.
항량이 정도(定陶: 山東省 定陶縣)에서 패사함으로써 부득이 회왕은 팽성(彭城)으로 천도했다. 경포 역시 팽성으로 돌아와 일단 수비에 치중했다. 이 때 진나라가 조(趙)나라를 포위 공격하자 조나라에서는 초나라로 사자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해 왔다. 회왕은 곧 송의(宋義)를 상장(上將)으로, 범증(范增)을 말장(末將)으로, 항우를 차장(次將)으로, 경포와 포장군을 부장(部將)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송의의 군사전략에 불만을 품은 항우가 황하변에서 송의를 죽여 버렸다. 회왕도 두려워 항우를 상장군으로 삼았다. 항우는 경포를 선봉장으로 삼아 황하를 건너 진을 치게 했다. 경포가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항우는 그제서야 전군을 몰아 황하를 건넜다. 경포를 뒤따른 항우 군사는 마침내 진나라 군사를 깨뜨리고 장한 등의 항복을 받았다. 초나라 군사는 항상 승리했기 때문에 제후들 중에서 그 공이 으뜸이었다. 특히 경포가 소수병력으로 진의 대군을 격파한 까닭에 제후의 군사 모두가 초나라에 복속하게 된 것이다. 항우는 서쪽으로 군사를 몰아 신안(新安: 河南省 新安縣 서쪽)에 이르렀다. 경포를 시켜 한밤중에 장한의 군사를 급습했다. 20여만 명이 항복했는데, 항우는 장차 이들의 이반을 우려해 구덩이를 파서 모조리 생매장해 죽였다. 함곡관에 이르자 진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역시 경포가 선봉이었다. "돌아가도 함곡관을 넘어서는 것이 목적이다." 경포의 군사는 사잇길로 해서 관문을 넘어섰다. 그 때를 계기로 진군을 철저하게 때려부쉈다. 여세를 몰아 항우는 결국 함양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항우는 경포를 구강왕(九江王)으로 삼고 육(六)에 도읍하게 했다. 관상가의 예언대로 경포는 왕이 된 것이다. 한(漢)나라 원년 4월이었다. 제후들이 항우의 휘하에서 떠나 각각 자신들의 영국(領國)으로 물러갔다. 항우는 회왕을 세워 의제(義帝)라 한 뒤 장사(長沙: 湖南省 長沙市)로 천도케 했다. 그런 다음 경포를 시켜 감쪽같이 의제를 습격케 했다. 일단 의제는 몸을 피했으나 그 해 8월 경포의 장수가 침현(湖南省)까지 추격해 가서 기어코 의제를 죽였다. 한나라 2년이었다.
제나라 왕 전영(田榮)이 초나라를 배반했으므로 항우는 제를 치기 위해 구강국(九江國)에서 군사를 징발하려 했다. 그런데 구강왕 경포는 병이라 핑계대고 대신 부장(部將)에게 군사 수천 명만 주어 보냈다. 항우는 떨떠름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초나라가 팽성에서 한군에 의해 깨어질 때에도 경포는 다시 병을 핑계대면서 도우러 오지 않았다. "이놈 보게......!" 항우는 그런 일들로 해서 경포를 원망했다. 사자를 보내 달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며 소환하려 했으나 경포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혹시 배반하겠다는 것일까?" 실상 경포는 항우가 두려워서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간단히 결박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항우도 경포를 응징하지 못하는 이유가, 북쪽으로 제나라와 조나라가 걱정스럽고 서쪽으로는 한나라가 두통거리였기 때문이다. 결국 아군이 될 만한 자는 구강왕 경포밖에 없었으며, 또한 경포의 재능을 높이 샀으므로 아직도 그를 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 3년이었다. 유방이 초를 쳤으나 특히 팽성 전투에서 밀려 양(梁) 땅에서 우(虞 : 河南省 虞城)까지 퇴각하게 되었다. 유방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런 자들과 천하 일을 도모하기엔 너무도 부실하군......" 알자(謁子: 官名)인 수하(수何)가 그 소리를 엿들었다. "대왕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혼자서 탄식해 본 소리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회남(淮南: 九江)으로 가서 초를 배반토록 경포를 설득해 올 자가 없겠는가 하는 뜻이었소.항우가 몇 달 동안만이라도 제(齊)나라에 머물도록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천하를 얻는 일이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을 텐데." "경포를 빼내 오면 항왕은 제나라에 갇히겠습니다. 제가 사신으로 갔다 오지요." "그대가!" 그래서 수하는 단 스무 명의 일행만 데리고 회남으로 갔다. 구강에 이르러서는 태재(太宰: 王의 食事를 주관하는 官)의 집에서 묵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흘이 지나도 도무지 구강왕을 뵐 수가 없으니." "짬이 없으시답니다." "왕께서 저를 만나 주시지 않는 까닭은 틀림없이 초나라는 강하고 한나라는 약하다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점은 사실이 아니던가요." "그래서 제가 사신으로 온 것입니다. 일단 왕을 뵙게만 해 주십시오. 제 말을 들으시고 옳다고 생각되시면 기뻐하실 것이고, 만일 제 말이 틀렸다 싶어 역정을 내실 때는 저희 스무 명이 회남 시장바닥에서 처형되어도 좋습니다. 그로 인해 왕께서 한나라를 편들지 않고 초나라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뜻이 천명되므로 또한 한왕은 몹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런 모험을 감수해 보시겠소?" 그렇게 되어서 수하는 경포를 간신히 만날 수가 있었다. "한왕께서는 저를 시켜 삼가 대왕의 측근에게 편지를 드리게 했습니다. 하온데,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은 대왕께서 초나라와는 어떤 친분으로 지내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구강왕 경포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과인은 북향하여 초를 섬기는 몸이오." "대왕께서 항왕과 같은 제후의 신분에 계시면서도 북향해 항왕을 섬기는 것은 초나라가 강대하여 그에게 나라를 의탁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항왕은 제나라를 칠 때 몸소 성을 쌓기 위해 사졸들에 섞여 판자와 공이[杵]를 짊어진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대왕께서도 그 때 회남의 병사를 모조리 동원해 초군의 선봉이 되었어야 마땅하거늘 겨우 군사 4천을 보내는 무례를 저지르시고도 북면하여 초를 섬긴다고 말씀하고 계시니 섬기는 자의 도리가 이래도 되겠습니까?" "그건......" "게다가 한왕(漢王)이 팽성에서 싸울 때 항왕(項王)이 제나라에서 출동하기 전에 마땅히 대왕께서 먼저 회수를 건너 회남 병사들을 동원해 팽성 아래에서 회전했어야 하였거늘 겨우 1만 명의 군사를 데려와 그나마도 회수를 한 명도 건너가게 하지도 않은 채 팔짱만 끼고 어느 쪽이 이기는가 방관만 하셨다니 국가를 위탁한 사람의 태도가 그래도 괜찮다는 말씀입니까." "으음......!" "대왕께서는 지금 '신하'라는 빈 이름만 가지고 초를 섬기며 또한 초에 의지하려 하고 계십니다. 저로서는 그런 대왕의 태도를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 그러면서도 대왕께서 초를 배반하지 못하는 것은 한나라가 약하다고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겠소." "물론 초군은 강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천하가 초나라에 불의의 오명을 씌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왜 그렇소?" "맹약을 저버리고 의제(義帝)를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초왕은 전승에 도취해 자신의 강함만 자신하고 있습니다. 한편 한왕은 제후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성고(成고)와 형양(滎陽)을 지키면서 촉.한(漢: 陝西省 남부)의 군량미를 날라오고 물길을 깊이 파 누벽(壘壁)을 견고히 하며 군사를 나누어 변경 요새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군이 제에서 초로 돌아가려면 중간에 있는 양(梁: 팽월이 지배함) 땅을 넘어 8, 9백 리 적진을 깊숙이 가로질러 가야 되기 때문에 갈 길이 다급해 싸울래야 싸울 수도 없습니다. 성을 치려 해도 힘이 있을 턱이 없지요. 또 노약병을 차출해 천 리 밖에서 군량미를 운반해 와야 되는데 어디 그것이 가능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설사 초군이 무사히 형양과 성고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한군이 굳게 지켜 움직이지 않으면 초군은 전진도 후퇴도 포위를 풀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초군의 강함은 허장성세란 얘기요?" "그렇습니다. 더구나 초가 설사 한군을 무찌른다 해도 다른 제후들이 자신들에게 미칠 화를 생각하여 모조리 앞다투어 한나라를 도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천하의 적병을 불러들이는 형세가 되는 꼴이지요." "그러니까 초나라가 한나라만 못하다는 결론이겠구먼." "그것은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선 안전한 한나라 편을 들지 않고 자진하여 멸망의 길로 치닿는 초를 편드시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회남의 병력으로 초를 멸망시키기에는 충분치 못하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묘책이 있겠소?" "대왕께서 초에 반역만 해 주신다면 항왕은 꼼짝없이 제나라에 머물게 되지요. 그가 수개월만 제에 머물면 그 동안 한나라는 천하를 얻어 버립니다. 만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그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인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청컨대 제가 대왕을 모시고 한나라로 귀순하게 해 주십시오. 한왕께선 반드시 땅을 갈라 회남은 말할 것도 없고 더욱 많은 땅에 대왕을 봉할 것입니다. 한왕께선 삼가 저를 시켜 이런 우계(愚計)를 대왕께 드리도록 서둘러 보내셨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기던 경포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대의 말을 따르겠소." 경포는 남몰래 초를 배반하고 한의 편을 들기로 허락을 했지만 아직은 이 일을 입 밖으로 누설치 않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초의 사자가 회남왕에게로 달려들어왔다. "회남왕께선 서둘러 출병해 주십시오. 항왕께서 몹시 고달프십니다!" 수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초의 사자보다 윗자리로 가 앉으며 소리질렀다. "이미 늦었소. 구강왕께선 이미 한나라로 귀속하셨소." 경포는 깜짝 놀랐다. "그게 사실이오?" 초의 사자가 눈을 빤히 떴다. 경포가 대꾸를 못 하고 있자, 수하가 얼른 나섰다. "일은 이미 그렇게 결정되었습니다." 초의 사자가 낙심하여 자리를 뜨고 나서였다. 수하가 경포에게 재빨리 말했다. "어서 초의 사자를 죽여 돌려보내지 마시고 서둘러 한나라로 가서 협력하십시오." "일은 이미 벌어졌소. 그대의 가르침대로 군사를 일으켜 초를 칠 뿐이오!" 이래서 경포는 초의 사자를 죽이고 곧이어 군사를 일으켜 초를 공격했다. 초에서는 대경실색했다. "경포마저!" 항우는 다급한 대로 항성(項聲)과 용저(龍저)를 내보내 회남을 치게 하고, 자신은 하읍(下邑: 江蘇省 탕山縣 동쪽)을 치러 나갔다. 수개월 동안의 접전이 있은 후 용저가 회남을 쳐서 경포군을 격파했다. 경포는 군사를 거두어 한나라로 달아나려 했다. "안 됩니다. 눈에 띄게 도망치는 건 위험합니다. 그럴 줄 알고 초왕이 지금 추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수하의 만류로 경포는 마침내 다른 길로 해서 단둘이 한나라로 귀속했다. 경포가 한에 이르니 유방은 때마침 의자에 걸터앉아 궁인들에게 발을 씻게 하고 있었다. 경포는 크게 분개했다. "이토록 오만불손한 인간이 있나! 감히 나를 이렇게 홀대하다니, 잘못 찾아든 것 같다. 모두가 내 탓이니 자살하는 길을 찾을 밖에!" 상심하며, 퇴출해 객사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경포는 깜짝 놀랐다. 대접의 호화롭기가 이만저만이아니었다. 방장(房帳)과 의복과 음식과 시종들까지 한왕의 그것에 조금도 처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경포는 기뻐하며 감격했다. 유방이 오만불손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경포의 거만함을 꺾기 위해서였다. 분에 넘치는 대우 역시 경포를 감복케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경포는 사람을 풀어 가만히 구강으로 잠입시켰다. 그쪽의 사정을 탐지해 오라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초의 항백(項伯)이 구강의 병사를 수중에 넣은 뒤 경포의 처자식을 모조리 도륙하고 난 뒤였다. 그 대신 경포의 빈객들과 총신(寵臣) 등 수천 명의 무리들이 한나라로 귀순해 왔다. 유방은 경포에게 더욱 많은 군사를 나누어 준 뒤 회남왕의 자리를 돌려 주었다. 경포는 북쪽으로 오르면서 군사를 더욱 불려 가며 성고에 이르렀다. 한의 4년 7개월이었다. 회남왕 경포는 항우를 공격했다. 한나라 5년에는 유세하는 자를 시켜 구강에 들여보내 여러 고을을 되찾게 했다. 6년에는 유가(劉賈)와 함께 직접 구강으로 들어가 초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설득해 초를 배반케 했다. 경포는 곧 구강의 총병력을 동원하여 한나라와 함께 초를 쳐서 결국 해하(垓下)에서 크게 깨뜨렸다. 항우가 자살하자 곧바로 천하는 평정되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술잔치가 벌어졌다. 수하가 자신의 논공이 없음을 한탄하자 유방이 이를 듣고 소리쳤다. "썩은 선비가 천하를 얻을 때 무슨 공훈을 이루었다고 그렇게 불평이냐!" 수하도 지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말했다. "폐하께서 병사를 이끌어 팽성을 쳤으나 보람이 없었고, 항우는 아직 제나라를 떠나지 않았을 때라, 보병 5만과 기병 5천으로 회남을 점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폐하께선 저를 시켜 수행원 20명과 함께 회남으로 사신가게 했습니다. 저는 거기 가서 영포를 얻어 왔고,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소원이 성취되셨습니다. 결국 폐하의 보병 5만과 기병 5천보다 저의 공적이 더 컸습니다. 그런 저를 보시고 썩은 선비라 하시다니요." "그랬었지. 짐이 다시 그대의 공적을 점검해 보겠소." 수하는 즉시 호군중위(護軍中尉)에 임명되었다. 일등공신 경포는 할부(割符)를 갈라 받아 회남왕이 되어 육에 도읍했다. 구강(九江).여강(廬江).형산(衡山).예장(豫章: 모두 安徽.江西省에서 湖北省 東部에 걸치는 일대) 등이 모두 경포의 영지였다. 한의 7년에 회남왕은 진(陳: 河南省 淮陽)으로 한왕에게 입조하였고, 8년에는 낙양으로 입조했으며, 9년에는 장안(長安)으로 입조했다. 11년에는 고후(高后)가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을 주살했다. 이 일로 인해 경포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여름에는 양왕(梁王) 팽월이 주살되었다. 때마침 사냥하러 나가려던 경포는 조정에서 보낸 소금절인 팽월의 시체를 보면서 더욱 심한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이번에는 내 차례란 말인가!" 경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만히 군사를 재배치했다. 경포가 몹시 사랑하는 총희(寵姬)라 몸이 아파 의원에게 갔다. 의원의 저택은 중대부(中大夫) 비혁(비赫)의 저택문과 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총희는 자주 의원 문을 들락거렸다. 비혁은 한때 경포의 시중이었으므로 총희와는 안면이 있었다. 그녀를 구슬리면 더욱 출세하겠다 싶어 총희에게 많은 선물을 보낸 뒤 의원으로 갈 때마다 그녀를 수종했다. 비혁은 의원 저택에서 의원과 총희와 어울려 술을 함께 마실 만큼 친해졌다. 총희는 비혁을 왕께 추천해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왕을 모시고 하찮은 말 끝에 슬며시 비혁의 말을 꺼냈다. "그분은 관인장자(寬仁長者)인 듯합니다." "무엇이! 너 그자를 어떻게 아느냐!" 경포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신경이 날카로울 때라 총희의 부탁도 심상치 않게 들렸다. "너 그자와 간통했지!" 총희는 아무리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해도 경포는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비혁이 벌받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것이 두려워 비혁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무어라고! 그렇다면 그자의 밀통사실은 더욱 확실하다!" 왕은 더더욱 화가 나서 비혁을 체포해 오도록 했다. 비혁은 이를 미리 알고 도망쳤다. 마차를 몰아 장안으로 향해 쏜살같이 달아났다. "하필 장안이란 말이냐. 어서 뒤쫓아가서 그놈을 냉큼 붙들어 오너라!" 군사들이 비혁을 추적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비혁은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상주했다.
- 영포에게 모반의 낌새가 있습니다. 큰일이 터지기 전에 붙잡아 주멸하십시오.
고조(高祖)가 상주문(相奏文)을 읽은 뒤 상국(相國) 소하(蕭何)를 불러 물었다. "이것을 어떻게 보오." "영포가 모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럴 이유가 도무지 없거든요." "그럴까." "아마 영포에게 원한을 품은 부질없는 무고(誣告)인 듯합니다. 일단 비혁을 가두어 두고 사람을 시켜 은밀히 회남왕을 조사하시지요." 한편 경포는 비혁이 죄를 짓고 도망해 가서 반란을 상주한 사실을 알았다. 더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사를 재배치해 한나라에 모반한다는 기밀을 비혁이 누설한 것으로 눈치챘다. 더군다나 한의 조사단이 와서 반란을 수사한다고 법석을 떠니 경포로선 이제 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길은 단 하나!" 우선 비혁의 일족을 몰살해 버렸다. 한편 경포가 모반했다는 보고서가 장안으로 올라왔다. 고조는 비혁을 곧 석방해 장군으로 삼았다. 고조는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은 뒤 물어 보았다.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혈기왕성한 장수들이라 대답은 한결같았다. "총공격해서 붙잡아 그놈을 묻어 죽일 뿐입니다. 일을 벌인들 제까짓 게 뭐 어쩌겠습니까." 여음후(汝陰侯) 등공(등公)은 침착한 사람이었다. "폐하, 영포가 그토록 만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우선 그의 반역 이유를 자세히 안 뒤에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등공은 우선 전날 초나라 영윤(令尹: 宰相)으로 있던 설공(薛公)을 불러 물어 보았다. "영포의 반란은 어찌된 셈이오?" "영포의 반란은 당연한 것이지요." "아니, 당연하다니요. 주상께서는 땅을 크게 갈라 영포를 왕으로 삼았으며 작위를 나누어 존귀한 직위에 두었고, 남면(南面)하여선 만승대국(萬乘大國)의 왕이 되게 했는데 무슨 이유로 반란이란 말이오?" "주상께서는 작년에 팽월을 죽였고, 재작년에는 한신을 죽었습니다. 영포는 그들과 꼭 같은 대공을 세운 장수입니다. 이번에는 자기가 죽게 되는 차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불안에 떨고 있느니 차라리 모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겠지요." 등공이 그 말을 고조에게 모두 아뢴 뒤 이렇게 덧붙였다. "어떻습니까? 설공을 직접 불러 대책을 물어 보심이. 저의 빈객으로 와 있습니다." 그러자 고조는 설공을 즉시 불러 물어 보았다. "영포는 앞으로 어떤 식으로 반란을 획책할 것 같소?" "세 가지 계략 중의 하나를 쓸 것입니다." "세 가지 계략?" "영포가 만일 상계(上計)를 쓴다면 산동(山東: 戰國 六國의 故地) 땅은 이미 영포의 것이 됩니다." "그 상계란 어떤 것이오?" "영포가 동쪽으로 나가 오(吳)나라를 취하고 서쪽으로 돌아 초를 점령하고 제를 병합한 뒤 노(魯)를 공략하며 연(燕)과 조(趙)에게 격문을 전달해 그 영토를 고수하면 산동의 땅은 한나라의 소유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중계(中計)는 무어요?" "만일 영포가 중계를 쓴다면 싸움의 승패는 예측할 수 없게 됩니다. 즉, 동쪽으로 나아가 오를 공략하고 서쪽으로 돌아 초를 점령한 뒤 한(韓)을 병합하고 위(魏)를 점령해 오창(敖倉: 河南省 成皐縣 北西)의 곡창을 끼고 성고의 입구를 막아 버리면 승패의 운수를 헤아리기 어렵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계(下計)는 또 어떤 것이오?" "만일 영포가 하계를 쓴다면 폐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쉬실 수가 있습니다. 즉, 동쪽으로 나가 오를 공략한 뒤 서진하여 하채(下蔡)를 점령해 중점적인 방위부대를 월(越: 浙江省)로 돌리고 자신은 장사(長沙)로 돌아간다면 폐하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자의 취향으로 보아 삼계 중 어떤 것을 쓸 것 같으오?" "하계를 씁니다." "아니, 상계 중계 모두 버리고 하필 하계를 택하다니." "영포는 본시 여산의 형도(刑徒)입니다. 자신이 만승대국의 군주가 되긴 했으나 백성 만대를 위해서 거병한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 개인을 위해서 이룬 공적일 뿐입니다. 그런 인품이라 하계를 쓸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럴 듯하다." 고조는 곧 설공을 천호후(千戶侯)에 봉했다. 황자(皇子) 유장(劉長)을 짐짓 회남왕으로 삼은 뒤, 고조는 몸소 병사를 이끌고 경포를 치러 나갔다. 경포는 자신만만해했다. 처음에 그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장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소리쳤다. "유방 그 늙은이는 이제 기력이 다해 싸울 능력이 없어. 그러니 보잘 것 없는 장수를 내보낼 거야. 사실 말이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한신과 팽월이 아니었겠나. 그렇지만 그들 모두가 이제는 죽었으니 나를 맞설 만한 인물이 있을 수가 없지." 그래서 자신 있게 모반을 감행한 경포였다. 설공이 추측했던 대로 경포는 동진하여 형(荊: 吳의 땅)을 쳤다. 형왕 유가(劉賈)가 패주하여 부릉(富陵: 安徽省 肝?縣 北東)에서 죽었다. 경포는 형의 군사를 모조리 탈취해 회수를 건너 이번에도 과연 초를 공격했다. 초에서도 군사를 동원해 서(徐)와 동(동: 安徽省 泗縣 南東과 北西) 사이에 포진했다. 그런데 초군은 군대를 세 쪽으로 나누어 서로 급할 때 구원케 하는 이상한 진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걱정이 된 부관이 초의 장군에게 간했다. "영포는 본래 용병에 밝아 그 이름만 들어도 군사들이 겁을 집어먹습니다. 또 병법에는 '제후가 자기 영지 내에서 싸우는 것을 산지(散地: 逃散의 땅, <孫子> <九地篇>에 있는 말로, 兵士들이 자기 生地에서 싸우면 故鄕에 미련을 두어 사방으로 흩어져 패망하게 된다는 뜻)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처지에 우리 군대가 셋으로 나뉘었으니 한쪽만 격파되어도 두 편대의 군사들이 도망갈까 두렵습니다. 결코 서로 구원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초의 장군은 부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경포는 과연 초의 1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아니나다를까 나머지 두 편대는 싸워 보지도 않고 도산(逃散)했다. 경포는 승승장구로 서진하여 고조의 군사와 기(安徽省 宿縣 남쪽)의 서쪽 회추(會추)에서 드디어 만났다. 고조가 바라보니 경포의 군사는 매우 정예로워 보였다. 용성(庸城: 宿縣 서쪽)으로 진지를 옮겨 누벽을 축조하고 경포의 군사를 바라보았다. "음...... 항우가 즐겨 쓰던 진법이로구나. 그렇다면 이제 너는 졌다!" 고조는 그를 우대했던 그만큼 경포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멀리 바라보면서 경포에게 소리질렀다. "무엇이 부족해서 모반까지 했느냐!" "황제가 되고 싶었다.!" 고조는 노하여 경포를 심하게 꾸짖는 것을 신호로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경포의 군사가 패주했다. 회수를 건너 한군에 여러 번 도전했지만 번번이 패했다. 백여 명의 군사만 거느린 경포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경포는 본시 파군(파君: 파陽의 城主 吳芮)의 딸과 결혼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예의 아들 장사왕(長沙王) 오신(吳臣)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쪽으로 갔던 터였다. "한왕이 들이닥치면 이쪽도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 월나라로 도망쳐서 뒷일을 도모합시다." 오신은 경포를 꾀어 파양(파陽)으로 데려갔다. 경포는 그를 믿고 멋모르고 따라갔다. 경포가 자향(玆鄕)의 시골 농가에 숨어 있다가 그 곳 사람들에 의해 죽었다. 경포를 멸한 고조는 황자 유장을 세워 회남왕으로 삼고 비혁을 기사후(期思侯)에 봉했으며, 여러 장수들이 공적으로 봉을 받은 자가 많았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경포 즉 영포는 그 조상어 <춘추>에 보이는 대로 '초(楚)가 영(英).육(六)을 멸하다'의 바로 그 영씨(英氏)로 고요(皐요)의 후예로 생각된다. 몸에 형벌을 받고도 어찌 그렇게 갑작스런 성공을 했을까. 항우가 구덩이에 묻어 죽인 사람이 천만 명이 넘는데 그럴 때마다 항상 그 포악한일을 직접 해치운 자는 영포다. 그만큼 제후 중에서 공적 또한 제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왕은 될 수 있었지만 자신도 역시 세상의 정당한 살육은 면치 못했다. 또한 화근의 시작은 총희에게서 일어났고 질투는 우환을 낳고 끝내 그 때문에 나라까지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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