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24. 굴원.가생열전 屈原.賈生列傳
미사 여구를 구사해 정치를 비판하고 비유를 들어 도의를 강조한 것이 굴원이 지은 <이소(離騷)>라는 시편(詩篇)이다. 그래서 제24에 <굴원.가생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굴원의 이름은 평(平)이다. 초나라 왕실과 동성(同姓)이고 회왕의 좌도(左徒: 諫官)로 있었다. 학식이 풍부하고 의지가 굳은 사람이며, 국가 흥망성쇠의 이치에 밝았고, 문사(文辭: 文章)에 숙달했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왕과 함께 국사를 의논해 명령을 내리고, 조정 밖으로 나서서는 빈객을 접대하고 제후를 응접했다. 왕은 그를 몹시 신임했다. 상관대부(上官大夫: 官名)인 근상이 그와 같은 서열로 왕의 총애를 다투었다. 근상은 속으로 굴원의 유능함을 미워했다. 회왕이 굴원을 시켜 법령을 기초하게 했다. 초안을 간신히 만들었을 즈음인데 근상이 그 초안을 빼앗으려 했다. 굴원이 내놓지 않았으므로 근상이 왕께 참소했다. [왕께서 굴원을 시켜 법령을 기초하게 한 것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도움을 주기 위해 보자고 했으나 내놓기는커녕 '내가 아니면 이런 법령을 만들 수 없다'며 자기 공로만 자랑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가 만든 법령이 문제가 될까 싶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왕은 근상의 참소만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굴원은 멀리했다. 굴원은 굴원 나름대로 원통했다. 고로 상서하려고 글을 지었다.
- 왕께서는 신하가 하는 말의 잘잘못을 가리지 못하시는 점과, 참소와 아첨에 귀가 어두워 사론(邪論)과 곡설(曲說)에 공정함이 손상되시는 것과, 공명 정대한 선비가 용납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하여 신은 깊은 근심 걱정과 시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소(離騷)>라는 글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소>의 뜻은 <이우(離憂)>이니 즉 근심되는 일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늘〔天〕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입니다. 사람이 궁하게 되면 근본을 되돌아보는 까닭에 지금 몹시 고통스럽고 피곤하여 하늘을 찾게 되고, 더구나 질병과 고통 속에 있으므로 부모를 부르게 되는 지경에 왔습니다. 저는 길을 바르게 걷고 행실을 곧게 하여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했으나 신을 참소하는 자가 있어 곤궁하게 되었습니다. 허위가 없는데도 의심을 받고 충성을 다했는데도 비방을 받았으니 어찌 원망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굴원은 생각이 바뀌어 왕께 글을 올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 때의 원망스런 마음 때문에 <이소>를 지은 것만은 분명하다. <국풍(國風: <詩經>의 篇名)>은 사랑을 노래했으나 음탕하질 않으며, <소아(小雅: <詩經>의 篇名)>는 원망과 비탄의 정서를 노래했으나 반역의 정신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소>는 위의 두 가지 내용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데, 위로는 제곡(五帝의 한 사람)을 칭송하고 아래로는 제의 환공을 논하였으며 중간에서는 은의 탕왕이나 주의 문왕을 서술한 듯하다. 이 작품은 당대의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 도덕의 숭고성을 천명하고 있으며 국가의 치란과 인간 관계의 조리를 밝힘에 있어 빠짐이 없을 것이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그의 수식은 미묘하여 그 뜻은 고결하고 행위는 청렴하여, 말수는 적으나 그 취지는 매우 크며 열거한 유례는 비근하지만 표현된 속뜻은 높고 깊다. 그 글의 뜻이 고결하기 때문에 인용된 사물들마저 향기로우며 그 행위가 청렴하기에 사후에라도 스스로가 더럽혀짐이 없었다. 진흙 가운데서 몸을 뒹굴다가 매미가 허물을 벗듯 진창 밖으로 나와 버리니 그의 몸은 한 점 더럽혀지지 않았다. 마치 일월(日月)과 빛을 다투는 사람이라 표현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굴원이 쫓겨난 뒤의 정세는 이러했다. 마침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려하고 있었다. 제나라가 초나라와 합종하고 있었으므로 진의 혜왕은 그것이 근심되었다. 그래서 진왕은 장의(張儀)를 속임수로 짐짓 후한 예물을 소지해 초나라로 보내어 초를 섬기게 했다. 장의는 초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제나라를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나라는 제나라와 합종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초나라가 제나라와 국교를 끊어 주신다면 제가 진왕에게 말해서 상.오의 땅 6백 리를 초나라에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믿어 주십시오.] 초왕은 몹시 기뻐하며 제나라와 국교를 끊어 버렸다. 한편 진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약속한 진의 땅 6백 리를 받아 오게 했다. 그러나 사자와 함께 진나라로 돌아온 장의의 대답은 엉뚱했다. [내가 언제 초왕에게 6백 리의 땅을 준다고 했소? 가서 다시 물어 보시오. 내가 약속한 땅은 6리요.] 초나라 사신은 분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귀국하여 초의 회왕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 [무어라고? 이런 사기꾼이 다 있나!] 초왕은 펄펄 뛰었다. 곧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렇지만 진나라로서는 처음부터 의도된 계략이었다. 단수(丹水)와 석수(淅水: 모두 河南省 河川)에서 초군을 크게 깨부수고, 목을 벤 군사만 해도 8만이었으며, 초의 장군 굴개(屈개)를 사로잡고 초의 한중(漢中 : 陜西省 南部에서 湖北省 북부에 이르는 땅)까지 정복해 버렸다. 초왕은 그래도 분을 참지 못했다. 이번에는 국내 병사를 총동원해서 진나라 깊숙한 남전(藍田: 陜西省)까지 쳐들어갔다. 그 때 위(魏)나라에서는 좋은 기회다 싶어 초의 등(鄧)을 진격해 들어갔다. 그쯤 되자 초나라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군사를 진나라에서 회군시켰다. 제나라에서도 초가 일방적으로 합종을 파기했으므로 진노하여 초나라를 구원하지 않아 그 곤궁함이란 말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에 진나라는 어떤 계략이 있었던지 초나라에 한중 땅을 갈라 초나라에 돌려 주겠다는 제의를 해 왔다. 그렇지만 초왕은 전쟁의 사단이 된 장의에 대한 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까짓 땅 필요 없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장의의 목 뿐이다!] 장의도 그 소문을 들었다. [보내 주십시오.] [그대를 죽일 거요.] [신에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장의는 진왕의 허락을 받아 초나라로 갔다. 장의는 후한 예물을 싸 가지고 가서 일단 초나라 정권을 농단하고 있는 근상을 구슬린 뒤 근상과 친한 초왕의 총희 정수(鄭袖)에게 부탁해 목숨을 돌봐 주도록 했다. 초의 회왕은 결국 장의를 죽이지 못하고 석방해 버렸다. 그 즈음이 중직에서 소외돼 있던 굴원이 제나라로 사신 갔다가 바로 귀환한 순간이었다. [장의를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반드시 초의 화근이 될 것인데 어째서 놓아 보냈습니까?] 뒤늦게 후회한 초의 회왕은 군사를 풀어 장의를 뒤쫓게 했으나 이미 그를 잡기에는 너무 늦었다. 초나라가 피폐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후국들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제후 연합국들이 초나라를 크게 짓밟고 장군 당말까지 죽였다. 뿐만 아니라 진왕은 초나라와 인척 관계에 있던 점을 이용했다. 회왕과 무관(武關: 陜西省 商縣 동쪽, 秦의 四關 중의 南關)에서 회맹하여 우호국으로 지내자는 연락을 보낸 것이다. 초의 회왕은 무관으로 가려했다. 그러자 굴원이 나서서 간곡하게 말렸다. [진나라는 범과 이리 같은 나라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칫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될지도 모릅니다. 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초 회왕의 막내 아들 자란(子蘭)이 반대하고 나섰다. [천하가 감시하고 있는데 설마 대왕의 신변에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진왕의 호의를 신용하고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되어서 초의 회왕은 마침내 진나라로 떠났다. 초왕이 무관을 넘어섰을 때였다. 진의 복병이 초왕의 귀로를 차단해 버렸다. 꼼짝없이 억류된 것이다. 진왕은 그런 상태로 초왕에게 땅을 베어 줄 것을 요구했다.분노한 초왕은 듣지 않고 몰래 조나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런데 조나라는 진나라가 두려워 초왕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어진 초왕은 다시 진나라로 들어갔다. 초의 회왕은 살아서 초나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결국은 진나라에서 죽어 유해로 귀국했다. 회왕의 장자인 경양왕이 초왕으로 즉위했다. 경양왕은 아우 자란을 영윤(令尹 : 楚의 宰相)으로 삼았다. 초나라 사람들은 회왕을 진에 가게 권해서 객사하게 만든 자란에 대해 몹시 질책하고 있었다. 자란에 대한 미운 마음은 굴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굴원은 소외되었지만 초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했다. 군주가 잘못을 깨닫고 국운이 다시 한 번 융창해지기를 바랐다. 그런 간절한 소망은 <이소> 가운데 세 차례나 노래되었다.
회왕을 끝내 정도로 돌아오게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역시 회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실상 군주란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현명하거나 불초하거나 관계없이 충신을 구해 자신을 돕게 하고 현명한 인물을 기용해 자신을 잘 보좌해 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계속 망하고 있으며 가문의 허물어짐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충신이 실상은 충신이 아니고 현자가 실상은 현자가 아닌 데에 있다 할 것이다. 회왕은 충신과 불충한 신하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안으로는 정수 같은 여자에게 현혹되었고, 밖으로는 장의 같은 자에게 기만당했으며, 굴원 같은 충신을 멀리하였고, 근상과 자란 같은 자를 신임하였다. 그리하여 초나라 군대는 꺾이고 6군의 땅을 뺏겼으며 자신은 객사함으로써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제대로 볼 줄 몰랐기 때문에 불러들인 화인 것이다. <역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우물들이 맑은데도 마시지 않으니 내 마음은 아프구나. 누가 맑은 물을 길어 주랴. 명군이 있어 길어 준다면 군신이 함께 복을 받을 것이어늘!
충신을 가려 낼 만한 왕의 현명이 없음을 통탄한 말이다. 자란은 굴원의 말인 것처럼 문제삼아 근상을 시켜 경양왕에게 굴원을 참소케 했다. 진노한 경양왕은 굴원을 즉시 귀양보냈다. 굴원은 양자강 가에 이르렀다. 굴원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졌고 얼굴은 초췌했으며 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야위었다. 그는 무슨 말인가로 탄식하면서 강가를 거닐었다. 어떤 어부가 굴원을 발견하고는 짐짓 물었다. [혹시 삼려대부(三閭大夫: 昭氏.屈氏.景氏 등의 왕족을 맡아 보던 官職. 굴원이 한 때 이 직책에 있었음)께서 아니신가요? 어쩐 일로 이토록 먼 데를 오셨습니까?]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청결하고, 온 세상이 모두 취했는데 나 혼자만 말짱 깨어 있었더니 추방합디다그려.] [아하, 그건 잘못됐구려. 대체로 성인(聖人)이란 사물에 집착 구애되지 않고 능히 세태의 추이에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흐리거든 그 탁류에 몸을 맡기고 세상 사람 모두가 취했거든 어찌 함께 마셔서 취하지 않았습니까? 보석같이 비상한 재능을 가지신 분이 굳이 추방을 자초하셨구려.] [나는 '머리를 새로 감은 자는 그 관의 먼지를 반드시 털어서 쓰고 목욕을 새로 한 자는 반드시 그 의복의 먼지를 털어서 입는다'고 들었소. 누가 깨끗한 몸에 더러운 때를 묻히겠소. 차라리 장강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뱃속으로 사라지는 게 낫지.] 굴원은 즉시 <회사(懷沙)의 부(賦: 모래를 품고 강물에 몸을 던지는 노래)>를 지었다.
생기 피는 초여름 수풀은 우거져 마음은 서럽고 발길은 바쁘네
강남으로 가는 길 산천은 아득하고 고요함은 천지에 한이 맺혀 그득하다
병든 몸 비통하여 고개 숙여 달래도 나 아직 한 번도 상도(常度) 아니 벗어났네
모난 나무 깎아 둥글게 만들지만 불변하는 법도야 바꿀 수 없는 것 먹줄 놓아 줄을 긋는다지만 군자의 뜻은 바꿀 수야 없지 명공(名工)의 솜씨가 없다면 누가 그것을 찬미하랴
검은 무늬 어둠 속에 있으니 청맹과니의 눈에는 무늬가 없고 이루(離婁: 옛날 눈 밝은 사람)가 가늘게 눈뜨니 그는 장님이라 흰 것을 검다고 한다
위의 것을 아래 것이라 한다 봉황이 새장 속에 산다 한다 닭과 꿩이 창공을 나른다 한다 옥과 돌을 뒤섞어서 한 되〔析〕로 헤아리니 아 나의 착한 뜻 알 수가 없지
등짐은 무겁고 수레는 그득하나 수렁에 빠져서 지나갈 수가 없네 보옥을 쥐고 품었으나 알 리 없는 촌개들이 짖네
인물을 헐뜯고 의심함은 범용한 자들의 짓거리라 치자 꾸미지 않은 문채(文采)가 질박하니
나의 이채(異彩)를 모르리 재목이 산처럼 쌓였어도 목수가 없으니 소용없고 인의(仁義)로 삼가 덕을 쌓아도 중화(重華: 舜) 못 만나니 쓰일 데가 없네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은 살기 좋던 옛날에도 무슨 까닭인지 함께 살지 않았으나 어차피 탕왕 우왕은 먼 옛 분이라 나로선 아득하여 따를 길이 없네
원한은 꾸짖고 분노를 삭이자 혼미한 세상에서 모범으로 살아있자 북지(北地)로 길을 향하니 어느 새 해는 저무네 시름도 슬픔도 풀어 가니 갈 길이 죽음밖에 없네
- 굴원은 끝맺는 노래〔亂〕에서 읊는다 -
도도히 흐르는 원수(沅水).상수(湘水)여 풀더미 뒤로 흘러 끝간 데를 모르겠네 노래는 슬프고 탄식은 길다 고결한 자질을 이해 못 하니 이토록 고독하고 적막했구나
백락(佰樂: 名馬 감별사)이 죽었으니 천리마도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 천명을 받으니 마음을 정해 가면 두렵지 않다
그래도 쌓인 애통함은 혼탁한 세상이 나를 이해 못함 때문인가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목숨을 아끼지는 않으리 그러나 세상에 분명히 고하니 나는 모범으로 살았노라
이리하여 굴원은 바위를 품에 안고 스스로 멱라(羅水의 合流點 북쪽)에 몸을 던져 죽었다. 굴원이 이미 죽은 후 초나라에는 송옥(宋玉).당록(唐勒).경차(景差) 같은 문사들이 있어 뛰어난 문장으로 부(賦)를 잘 지어 칭송을 받았다. 물론 굴원의 자유 분방한 표현을 본받는데 감히 굴원처럼 직간하는 비판 정신은 발휘하지 못했다. 그 뒤 초나라는 날로 쇠약해지더니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굴원이 멱라에 몸을 던진 이후 백여 년이 지나 한(漢)나라 시대에 가서 가생(賈生)이 태어났다. 그는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어 상수를 지날 때 글을 써서 강 속으로 던져 넣으며 굴원을 조문했다. 가생의 이름은 의(誼)라 하고,낙양(河南省)출신이다. 18세 때 벌써 <시경>을 암송하여 그 재능이 군(郡) 내에서 유명했다. 하남 태수 오정위(吳廷尉:吳는 姓, 廷尉는 最高裁判所 大臣)가 가생이 수재라는 소문을 듣고 문하로 불러들여 매우 총애했다. 그 때가 효문황제(孝文皇帝) 즉위 초〔B.C. 179〕였다. 황제가 보기에는 오정위의 통치 성적이 천하제일이었다. 더구나 오정위가 이사(李斯)와 같은 고향인 데다 오정위가 이사한테서 배운 바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하남에서 오정위를 불러들여 정위로 삼았던 것이다. 오정위로서는 황제께 인재를 자연스럽게 추천할 수 있었다. [문하에 가의라는 영특한 인재가 있습니다. 연소하긴 하나 제자 백가의 학문을 통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효문제는 가생을 불러 만나본 후 박사(博士) 벼슬에 임명했다. 박사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불과 20세 때였다. 칙령의 초안에 관해서 황제가 자문을 구할 때마다 대부분의 노선생(老先生)들은 속시원한 답변을 못했지만 가생은 막힘 없이 대답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가생이 명확하게 대답해 주었으므로 다른 박사들은 가생을 질투하지 않았고 가생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황제도 그런 가생을 흡족하게 생각했다. 계속 특진을 거듭 시켜 일 년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宮中顧問官)로 삼았다. 한나라가 이러나서 효문제에 이르기까지의 20년 동안은 천하가 태평하고 백성들은 안락했다. 이 때 가생은 역법(歷法)을 고치고 관복의 색깔을 바꾸고 제도를 정비하고 관명을 확정하고 예약을 일으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런 제도에 필료한 모범 문아을 자세히 기초했다. 색깔은 황색을 존중하고 숫자는 5를 기준으로 삼았으며 관직명을 창설하는 등 진나라 때 사용되던 법을 거의 개정했다. 그러나 황제는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법을 바꾸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생이 개정한 법령 중 `모든 열후들은 각자의 봉령으로 돌아가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발생했다. 황제는 뭇 신하들을 소집해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개정법을 시용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공경(公卿)의 지위에 가생을 앉힐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바꾸어서 논의해 보도록 유도했다. 뜻밖에도 강후(絳候: 周勃)나 관영(灌영)이나 동양후(東陽候: 張相如)나 풍경(馮敬) 등의 대신들 모두가 가생이 내놓은 법령들을 혐오했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가생을 비방했다. [낙양에서 온 저 젖비린내 나는 어린 선비가 미숙한 학문으로 그것을 과대 선전하여 오로지 권력을 전횡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령을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그의 개정령을 따랐다가 혹시 천하가 어지러워질까 싶어 그것이 두렵습니다. 아무쪼록 깊이 통찰하시기 바랍니다.] 황제는 대신들의 주장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래서 가생의 제의를 물리친 후 장사왕(張沙王)의 태부로 좌천시키고 말았다. 가생은 장사(長沙: 湖南省)로 부임 길에 올랐다. 그는 가는 도중에 장사라는 데가 지대가 낮은 습지라는 소리를 들었다. [습지대로 나를 보냄은 오래 살지 못하게 하려는 계략일 테지.] 가생은 장수할 수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몹시 우울했다. 더군다나 좌천되어 가는 길이었다. 상수(湘水)를 건너게 되었다. 가생은 그 때 굴원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문을 지었다.
공손히 명을 받들어 장사(長沙)에서 죄를 기다린다 얼핏 들으니 굴원 선생이 멱라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네
흐르는 상수(湘水)에 부탁하여 삼가 선생께 조의를 표한다 무도한 세상을 만나 잃은 목숨 애달픈지고 상서롭지 못한 때를 만나니
난봉(鸞鳳: 靈烏 즉 賢人, 君子)은 몸을 숨기고 올빼미〔惡烏, 小人〕가 활개를 치니 곧 어리석은 무리의 존귀 시절이라 아첨꾼은 뜻을 얻어 현성(賢聖)의 도는 역행하여 정의로운 길이 물구나무섰네
세상은 백이(伯夷)를 탐욕하다 하고 도척(盜척)을 청렴하다 하며 막야(莫야: 名劍)는 날이 무디고 납칼〔鉛刀〕을 날카롭다 하니 아아 선생은 뜻을 잃고 이유 없는 화를 당할 수밖에 구정(九鼎: 周室의 보배솥)은 옮겨 오지 않고 깨진 독이 보배가 되며 지친 소에게 수레를 끌리고 절름발이 나귀를 곁마〔駿馬〕로 삼으니 정작 준마(駿馬)는 두 귀를 늘어뜨리고 소금 수레나 끄는구나
장보(章甫: 殷의 冠)를 신발로 하니 오래 지탱할 리가 없지 아아 서러웠던 선생이여 홀로 그 재앙을 겪었음을
- 끝맺는 노래〔訊: 辭와 같음〕-
할 수 없지 나라에 아는 이 없으니 슬픔을 말할 데가 없네 그래서 봉황은 하늘 높이 물러가고 신용(神龍)은 깊은 물 속에 숨네
밝은 빛을 사양하여 왕개미 거머리 지렁이와 놀지 않고 성인이 탁세를 피함은 개와 양〔즉 鈍才〕과 같지 않음이라 고로 선생의 허물은 천하를 유력해 현군을 돕지 않고 하필 초도(楚都)만을 그리워했음이라
봉황은 천 길 높이 날았다가 덕이 빛나면 아래로 내려오고 소인들의 해괴함을 만나면 멀리 활개쳐서 날아가니 초(楚)나라 같은 작은 웅덩이는 배를 삼킬 만한 대어(大魚)를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 강호의 큰 고기는 땅강아지와 개미에게 침해를 받네.
가생이 장사왕의 태부가 된 지 3년째 되던 해에 한 마리의 부엉이가 가생의 관사로 날아 들어와 방 한 구석에 앉았다. [아, 때가 되었구나!] 초나라 사람들은 부엉이를 복(黑色이란 뜻, 匈色)이라 부른다. 가생은 습지대 장사에 좌천되어 있었으므로 미리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부엉이를 보자 어떤 예감을 느낀 것이다. 그는 사(辭)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정묘년(丁卯年: 孝文帝 6년) 사월 초여름 경자일(경子日) 저녁 무렵에 복 한 마리 의젓하게 내 집 방 한구석에 머무르다
괴이한 새이기에 그 까닭을 몰라 책을 펼쳐 점을 치니 '들새가 들어오니 주인은 나가리라' 그렇게 점괘는 말하더라 내 나가면 어디로 가나
복에게 묻노니 길하다면 말해 주고 흉하다면 그 재앙의 뜻을 말해 다오 더디 오느냐 빨리 오느냐
그 시기만이라도 알려 다오 복은 머리 들고 나래치며 탄식하니 인간의 말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고 다만 마음으로 그 뜻을 읽었네.
만물의 변화에는 쉼이 없는 것 흘러서 갔다가도 밀려서 되돌아오지 형(形)이 기(氣)로 변함이 매미 허물 벗음과 같으니 그 깊은 이치는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네
화는 복의 근원이며 복에는 또 화가 깃드네 근심과 기쁨이 한 집에 모이니 길흉은 장소를 같이하네
오(吳)는 강대하지만 부차(夫差)는 패했고 월나라는 회계(會稽)로 몰렸지만 구천(九踐)은 세상을 제패했네
이사(李斯)는 유세에 성공하지만 마침내 오형(五刑)을 입고 부열(傅說: 殷의 名宰相)은 죄수였지만 무정(武丁: 殷의 高宗)의 재산이 됐네
화와 복의 관계는 꼬아진 새끼와 무엇이 다르며 천명이라 헤아릴 수 없으니 누가 그 끝을 알까 물도 격하면 빨라지고 화살도 격하면 멀리 가니 만물은 회전하고 부딛치며 진동하고 변화하네
구름은 오르고 비는 내리고 서로 얽히고 설키는구나 조화옹(造化翁)이 만물을 창조하니 그 한계는 보이지 않고 천도(天道)는 헤아릴 길 없으니 더딤과 바름의 그 천명도 알 길이 없다.
천지는 화로(火爐)요 조화옹은 공인(工人)이다 음양은 탄(炭)이요 만물은 구리(銅)라 모이고 흩어지고 줄었다 늘어나니 어찌 세상에 불변의 법칙이 있겠나
천변만화(天變萬化)하니 처음부터 끝이 없네 홀연히 사람으로 태어났다 해도 삶에만 집착할 건 없고 사물로 변한다 해도 그것을 근심할 이유도 없다
작은 지혜는 자신이 만물이며 달인(達人)의 눈은 나와 만물이 다름이 없네
탐욕스런 자는 재물에 죽고 열사(烈士)는 명예에 죽으며 권세를 뽐내는 자 권력에 죽고 만인은 생명의 장구함만 구하네
이(利)와 가난에 쫓기는 자들은 날마다 동으로 서로 분주하나 물욕에 굽히지 않는 (대인(大人)은 한결같은 눈으로 만물의 변화를 보네
어리석은 선비는 죄수같이 부자유스런 세속에 묶이고 지인(至人)은 만물을 초월해 오직 도(道)와 함께 산다네
어리석은 사람은 미혹하여 적고 싫은 것이 가슴에 쌓이나 진인(眞人)은 염담(염淡) 적막하여 오직 도에만 사네 오로지 지혜를 버리고 형체를 무시해 존재에 초연하고 마음을 비우면 도와 함께 하늘을 날게 되고 흐름을 타다 보면 모래성에 머물겠지 몸을 자유롭게 천명에 맡기면 죽음도 나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삶이란 물에 뜬 것과 같고 죽음이란 쉬는 것과 같아라 심연처럼 담담하고 고요하여 매이지 않은 배처럼 자유로워라
삶으로써 삶을 귀히 여기지 않고 빈 마음으로 인생을 자적하리라 덕을 가진 자는 얽매임이 없나니 천명을 알아 근심치 않노라
가시덤불의 하찮은 아픔으로 굳이 크게 근심할 건 무언가
그로부터 1년 후 가생은 소환되어 황제를 뵈었다. 효문제는 방금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고기를 받고 정전(正殿)에 앉아 있었다. 항제는 제사 중에 귀신에 감응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가생에게 귀신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그래서 가생은 귀신의 정상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했다. 황제는 가생의 설명이 너무 흥미로워 날이 새는지도 몰랐다. [짐(朕)은 오랫동안 가 선생을 만나지 못하여 짐이 가 선생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소. 그러나 지금 보니 역시 짐은 그대에게 미치지 못하오.] 얼마 있지 않아 황제는 가생을 양(梁)의 회왕 유즙(劉즙)의 태부로 임명했다. 유즙은 효문제의 막내아들로 황제가 총애했으며 그갈 책을 좋아했으므로 가생을 그의 태부로 삼은 것이다. 효문제는 또 회남(淮南) 여왕(女王)의 네 아들을 열후(列侯)에 봉했는데 장차 이로 말미암아 환란이 생길 것이라고 가생은 간했다. [제후들 중에는 여러 군(郡)을 아울러 영유하는 자가 있는데 이는 기존의 제도에 어긋나므로 반드시 점차적으로 삭감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효문제는 가생의 충고를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몇 해가 지나서 양 회왕은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죽었다. 후사가 없었다. 가생은 태부로 있으면서도 그에게 아무 도움도 될 수 없었다는 자책감에 한 해 동안이나 슬피 울다가 역시 그도 뒤따라 죽었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효문제가 죽고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했다. 가생의 두 손자를 등용하여 군수로 삼았다. 그 중의 가가(賈嘉)는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가씨 가문의 계승자가 되었다. 가가는 나 사마천과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이다. 효소제(孝昭帝) 때 열후에 봉해지고 구경(九卿)이 되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소(離騷)> <천문(天問)> <초혼(招魂)> <애영(哀영)>〔모두<楚辭>의 篇名〕을 읽으며 나는 그 뜻을 생각하고 슬퍼진다. 때문에 내가 장사로 가서 굴원이 스스로 투신한 곳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그의 사람됨을 추상(追想)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생이 굴원을 조문한 글로 미루어 보아 굴원이 그만한 재주를 가지고 다른 제후들에게 유세했더라면 그를 용납하지 않을 나라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몰아 가서 생애를 끝마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복조부>를 읽으면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면서 또한 가벼이 보고 있다. 이런 그의 초탈한 경지를 엿보며 역시 망연 자실(茫然自失)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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