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23. 노중련.추양열전 魯仲連.鄒陽列傳
교묘한 궤변으로 진군(秦軍)에게 포위된 한단(한鄲)성의 위기를 해소시키고 작위도 봉록도 마다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그래서 제23에 <노중련.추양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노중련(魯仲連)은 제나라 사람이다. 기발한 책략은 무척 좋아하면서도 벼슬할 생각은 도무지 없었고 차라리 높은 절의를 지키며 살기를 바랐다. 노중련이 조나라에서 노닐고 있었다. 조나라 효성왕 때였는데, 진왕이 백기를 시켜 조나라 장평(長平 : 山西省)에서 40여만 명의 조군을 전사토록 했다. 진군은 여세를 몰아가서 동쪽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다. 조왕은 공포에 싸였다. 다른 제후들도 진이 두려워 구원군을 출동시키지 못했고, 위나라 안희왕이 장군 진비(晋鄙)를 시켜 조를 구원하게 했으나 역시 진군이 두려워 탕음(蕩陰:河南省)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 때 위나라 왕이 객장군(客將軍: 他國出身의 將軍) 신원연(新垣衍)을 시켜 몰래 한단으로 들어가 평원군을 통해 조왕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했다. [진나라가 갑자기 조나라를 포위한 까닭이 있습니다. 전날 제나라 민왕과 서로 부강함을 다투어 제(帝)가 되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두 나라 모두 제(帝)의 칭호는 못 쓰게 되었지만, 전날의 제나라는 점점 쇠약해졌고 오직 진나라만 우뚝 강대한 존재가 된 마당에 필시 제 칭호가 다시 탐이 난게 분명합니다. 진의 목적은 한단을 삼키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조나라에서 진의 소왕(昭王)에게 사자를 보내 제(帝)라 칭하기만 한다면 진왕은 기뻐서 반드시 군사를 돌릴 것입니다.] 평원군이 먼저 듣고 긴가민가하여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현자 노중련이 지금 조나라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평원군은 서둘러 노중련을 청해 들였다. [신원연의 말대로 진을 제(帝)라 칭해야 옳을까요?] [공께서는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승(勝: 平原君)이 어찌 감히 이 일에 대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는 바깥에서 40만 대군을 잃은 데다 지금 또 안으로도 한단까지 포위된 상태이니 생각조차 혼미하여 그 어떤 판단도 서지 않습니다.] [저는 당초에 공께서는 천하의 현명한 공자라 믿었는데 지금 만나 뵈니 전혀 그렇지가 못합니다. 우선 대량의 나그네 신원연이란 자는 지금디 있습니까?] [객사에 있습니다.] [이리로 불러 오지요.] 얼마 뒤에 신원연은 방으로 들어와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는 노중련 선생은 제나라의 고귀한 선비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 군주의 신하로 사신 임무만 지고 왔기 때문에 노 선생을 만나야 할 필요는 도무지 없지요.] 그 말을 들은 노중련은 반쯤 돌아앉아 대꾸가 없었다. 그러자 머쓱해진 신원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처럼 포위된 성중에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가 평원군에게 무언가를 구하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렇지만 노 선생의 풍모를 관찰해 본즉 노 선생만 평원군께 구하러 오지 않은 분인 듯합니다. 그런 처지에 선생께선 무슨 이유로 위험한 성중에 머물고 계십니까?] 그제서야 노중련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는 포초(鮑焦: 周代의 隱者, 濁世를 미워해 나무를 안고 죽었다)가 세상을 포용하면서 살지 않고 성급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그의 본심을 세상 사람들은 몰랐던 거지요. 나 역시 내 한 몸을 위해 죽을 생각은 도무지 없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적의 머리를 베어 오는 것을 가장 큰 공적으로 여기는 나라이며, 권모술수로 선비를 부려먹고 백성을 노예처럼 혹사시키는 나라입니다. 이런 진왕이 제멋대로 제(齊)가 되어 잘못된 정치를 천하에 편다면 저는 동해에 몸을 던져 죽겠습니다. 진왕의 백성이 되는 일은 참을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무슨 일로 저를 만나자고 하였습니까?] [제가 장군을 뵙자 한 것은 조나라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식으로 조나라를 돕는단 말입니까?] [위나라와 연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돕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나라와 초나라도 조를 돕게 되지요.] [그런데 위나라라면 저의 나라인데, 그 사정을 알고 있기에 묻습니다만 위나라를 어떤 식으로 움직여 조나라를 돕습니까?] [장군께선 위가 조를 돕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견해로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진나라가 제(帝)로 칭했을 때의 화를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일 뿐입니다.] [당시에 어떤 화가 있었기에 그러십니까?] [옛적 제나라 위왕(威王)은 인의(仁義)의 정치를 행하려고 천하 제후들을 이끌고 주(周)에 조회했습니다. 그러나 주 왕실이 빈곤한데다 쇠미했으므로 제나라말고는 아무도 참조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일 년쯤 뒤에 주의 열왕(烈王)이 붕어하자 제나라는 다른 제후들보다 늦게 문상하러 갔었지요. 그 때 주의 신왕(新王: 烈王의 太子, 安王)이 벌컥 화를 내어 제나라에 고하기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당하여 천자인 내가 돗자리에 앉아 상을 치르고 있는데 일개 동쪽의 제후인 네가 이제서야 문상왔는가? 이것은 참죄에 해당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니 제나라 위왕인들 어찌 발끈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어째! 종년의 자식놈 주제에!' 하고 되받아 쳤지요. 결국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쪽은 누구이겠습니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진나라가 제(帝)를 칭할 경우가 되면 제후들에 대한 요구는 주왕실의 그것보다 훨씬 심하고 아니꼬울 것이라는 얘깁니다.] [선생께서는 저 하인들이 하는 일을 보지 않았습니까. 열 사람의 하인이 한 사람의 주인을 시중들고 있지요. 그것이 주인보다 힘이 없고 지혜가 없어서 주인을 모십니까. 다만 주인이 두렵기 때문에 시중드는 것입니다.] [아아니, 그럼 위나라는 진나라의 하인입니까?] [그런 입장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진왕을 시켜 위왕을 삶아 젓을 담그게 하겠습니다.] [너무 심하십니다!] [옛날 구후(九侯).악후.주(周)의 문왕(文王)은 은(殷) 주왕(紂王)의 삼공(三公)이었습니다. 구후에게는 절색인 딸이 있어 그 딸을 주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도 주왕은 추녀를 자기에게 바쳤다 하여 구후를 소금에 절여 죽였습니다. 악후가 그런 사실에 강력하게 항의하자 주왕은 또 악후를 포를 떠서 죽였습니다. 문왕 역시 이 소식을 듣고 길게 탄식했기 때문에 주왕은 문왕을 유리(河南省)의 한 창고 속에 백일 동안이나 가두어 죽여버리려 했습니다. 동급의 제후 처지라면 모르되 진을 제(帝)로 칭하는 순간부터 위왕은 소금에 절여 죽고 포로 떠져 죽고 굶어 죽게 되는 처지에 빠진다는 얘기입니다.] 신원연은 대꾸를 못한 채 '끄응'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제나라 민왕이 노(魯)나라로 갈 적〔天子 잠칭 時期〕에 이유자(夷維子)가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 때 이유자는 노나라 사람에게 '그대들은 어떤 예우로 우리 군주를 대접하려 하는가'하고 물었더니, '우리는 십태뢰(十太牢: 10종류의 牛.羊.豕의 料理)를 차려서 당신의 인군을 대접할 작정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이유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떤 전례(典禮)를 근거로 그런 대접을 하려는가? 우리 군주는 바로 천자(天子)가 아니신가? 천자가 순행하면 제후는 궁전을 천자에게 양보하고 성문과 창고 열쇠를 내놓고 옷깃을 여미며 상을 들고 다니며 당하(堂下)에서 음식맛을 보고 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물러가 조정에서 정사를 듣는 것이다'고 소리쳤지요. 노나라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성문을 잠그고 가 버렸으므로 일행은 노나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할수 없이 민왕 일행은 설(薛: 小國名, 山東省) 땅으로 가기 위해 통로를 추(鄒: 小國名, 山東省)나라에서 빌리고자 했습니다.] 신원연은 여전히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아직은 자리를 박차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때에 추나라 왕이 죽었기 때문에 문상을 빙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유자는 태자에게 이렇게 명령했지요. '천자가 조문하는 것이니 주인은 반드시 관을 등지고 북면(北面)해 앉도록 하여 천자가 남면(南面)해서 조문할 수 있도록 해야 하오' 그랬더니 추나라 군신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와 같이 해야 한다면 차라리 우리가 칼로 배를 갈라 죽겠다'며 분노했지요. 결국 제나라 왕 일행은 추나라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추.노의 입장에서는 군주가 살아 있을 때 충분히 봉양하지 못하고 죽은 후에도 충분한 공양을 못 했으나 제나라가 천자의 예를 추.노에서 행하려 하자 그것만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쯤 신연원은 뜻모를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지금 진나라는 일만 대의 수레를 가진 제후국입니다. 위나라 역시 일만 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입니다. 두 나라 모두 만승(萬乘)의 나라로서 각각 왕이라 칭하는 명예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가 전투에서 한 번 싸워 이기는 것을 보고 즉시 진왕을 제(帝)로 섬기려 하니 이는 삼진(三晋: 韓.魏.趙, 여기서는 魏를 지칭)의 대신들이 오히려 노나라와 추나라의 노복들보다 못하다고 말하겠습니다. 게다가 진나라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제를 칭하게 되면 제후국들의 대신들을 제멋대로 갈아 치울 것입니다. 즉 불초하다 인정되는 자의 지위를 빼앗아 현명하다 생각되는 자에게 주고 미워하는 자의 자리를 탈취해 사랑하는 자에게 줄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자기들의 자녀와 처첩들을 제후의 비.희(妃.姬)로 삼게 하여 위나라 궁전에 살게 할 것이니 이쯤되면 위왕이 어떻게 편안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 때 신연원이 자리를 고쳐 잡으며 노중련에게 재배했다. [처음에 저는 선생을 범용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알고 보니 천하의 훌륭한 선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곳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는 진왕을 제(帝)로 칭하자는 말을 않겠습니다.] 진나라 장군은 이런 소문을 듣고 군대를 50리 밖으로 퇴각시켰다. 또한 다행히도 위나라 공자 무기(無忌)가 진비의 군사를 탈취해 조나라를 구원하고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이쯤 되자 진군은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고 말았다. 그 때 평원군이 노중련을 봉하고자 했으나 한사코 사양했으며 사자를 세 번이나 보냈지만 역시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평원군은 주연을 베풀어 노중련을 위로했다. 술이 거나해지자 평원군은 천금을 가지고 노중련 앞으로 가서 장수를 축복하고자 했다. 노중련은 웃으면서 말했다. [천하의 선비가 귀한 존재로 불려지는 것은 남을 위해 우환을 물리치고 분쟁을 풀어 주며 근심을 해결해 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는 까닭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선비도 장사꾼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평원군과 작별하고 길을 떠난 이후로 노중련은 종신토록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연나라 장군이 요성(齊邑, 山東省)을 점령했다. 그런데 요성의 어떤 자가 장군을 참소했는데 장군은 주살될 것이 두려워 감히 귀국하지 못하고 요성을 굳게 지켰다. 제나라 전단(田單)이 일 년 이상이나 요성을 공격했으나 사졸만 많이 죽인 채 요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 때 노중련이 편지를 만들어 화살에 묶어 성 안으로 쏘아 넣었다. 연의 장군이 그것을 펴 보았다.
- 저는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거슬러 행동해 이로움을 버리지 않으며, 용사는 죽음을 회피하여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며, 충신은 자신을 앞세워 군주를 뒤로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일시적인 분노 때문에 연왕의 수하에 훌륭한 신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돌아가지 않으니 이것은 군주에 대한 충성이 아니며, 자신은 요성을 잃고 죽음을 당하고도 제나라에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용기라 할 수가 없으며, 쌓았던 공은 허물어지고 명성은 사라져 후세에 공을 칭송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 말한 세 가지에 해당하는 자는 우선 군주가 신하로 삼지 않으며, 유세하는 선비는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고 용사는 죽음을 겁내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귀공께서는 삶과 죽음.영광과 오욕.부귀와 빈천.존귀와 비천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부디 잘 살피셔서 세속의 사람들과 같은 처신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체 이런 서신을 보낸 자가 누구냐?]
- 지금 초나라는 제나라 남양(南陽: 秦山의 남쪽)을 공격하고 위나라는 평육(平陸: 齊 西境의 邑, 山東省)을 공격하고 있으나 실상 제나라는 남쪽으로 향해 이들과 땅을 다툴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은 남양을 잃을 때의 손해는 그다지 크지 않고 요성을 포함한 제북(濟北: 濟水 북쪽)을 얻을 때의 큰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세밀한 계략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해 제나라를 구원하고 있으므로 위나라는 감히 동쪽을 향해 제나라를 공격하지 못하고 있으며, 제나라와 진나라가 연횡하고 있는 형편이므로 초나라의 형세는 몹시 위태로운 상태가 됩니다. 제나라는 남양을 버리고 평육을 단념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수 이북의 요성만은 반드시 차지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나라가 요성에서 결판을 내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어라고?]
- 한편 지금은 초.위의 군사가 제나라에서 퇴각하고 있으며 연나라의 구원군도 오지 않습니다. 천하의 어떤 나라도 제나라를 위협하지 않는 상황에서 제나라 전군이 공격하는 마당에 한 해 동안이나 시달린 요성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게다가 지금 연나라는 큰 혼란 속에서 군주와 신하가 어쩔 바를 몰라하며, 상하 모두가 미혹에 빠져 있습니다. 그대의 연나라 장수 율복은 십만 대군을 가지고도 다섯 번이나 외국에서 참패했으며, 만승의 나라이면서도 조나라에 포위당해 국토는 깎이고 군주는 곤액을 당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나라는 피폐해지고 재앙은 많은 까닭에 백성들은 마음 둘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럴 듯한 지적이긴 하나.......]
- 사실은 지금 귀공께서 피폐한 요성의 보잘것 없는 병력을 이끌고 제나라 전 병력과 대항하고 있으니 이는 묵적(墨翟: 宋나라를 위해 楚의 强軍을 막았음)의 수비에 비길 만 하겠으며, 인육을 먹고 사람 뼈를 연료로 하면서도 사졸들이 배반할 마음을 먹지 않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손빈의 용병에 비길 만큼 훌륭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지금 귀공의 능력은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귀공께 말씀드립니다만 전차와 무장병을 온전하게 거두어 연나라로 돌아가는 것만 못합니다. 공께서 복명해 가면 연왕은 몹시 기뻐할 것입니다. 귀공이 온전한 몸으로 귀국해 가면 사졸과 백성들이 부모를 만난 것처럼 기뻐할 것이며 공의 벗들도 팔을 흔들며 귀공의 업적을 세상에 호소하려 들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외로운 군주를 보필하여 뭇신하를 제어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유세하는 선비들을 개량하면 그대의 공명은 천하에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하나 믿을 수가 없다.]
- 그래도 의심하여 연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시면 세상을 피해 동쪽의 제나라로 가 보시지요. 제나라는 땅을 갈라 귀공의 봉지를 정해 줄 것이며 그 부유함은 도(陶)의 주공(朱公: 范려)이나 위(衛)의 공자 형(荊: 둘 다 巨富로 有名)과 비길 만하고 귀공의 자손은 대대로 고(孤: 제후의 자칭)라 칭하면서 제나라와 함께 오래 존영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의 두 가지 계책 모두 이름을 나타내며 실리를 두텁게 하는 방법입니다. 원컨대 귀공께서는 심사 숙고하여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제나라로 간다......?]
- 나는 또 '작은 절개에 구애되는 자는 큰 영예를 성취할 수 없고 작은 치욕을 미워하는 자는 큰 공을 세울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관이오(管夷吾: 管仲)는 환공(桓公)에게 화살을 쏘아 허리띠의 쇠고리를 맞추었으니 이는 반역의 죄이며, 공자 규(糾)를 버려 두고 자신은 죽지 못했으니 이는 비겁한 행위이며, 포승에 묶이고 차꼬를 차고 게다가 수갑까지 찼으니 이것은 치욕스런 일입니다. 이 같은 세 가지 행위를 한 자는 세상의 군주가 신하로 삼지 않으며 향리에서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지난날 관중이 옥에 갇힌 채 나오지 못하고 옥사하여 제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면 치욕에 찬 인간의 행위였다는 오명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노비라 할지라도 이같은 오명을 쓰게 되면 부끄러워할 것이어늘 하물며 보통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니 관중은 옥중에 묶여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하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며, 공자 규를 위해 죽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제나라의 위엄이 제후들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세 가지 행위의 과실을 범하고서도 환공을 오패의 첫번 째 인물로 만들었고 그의 명성은 천하에 드높았으며 그 빛은 이웃 나라에까지 환히 빛났습니다. 조말(曹沫)은 노(魯)나라 장군이 되어 세 번 제나라와 싸워 세 번 모두 패하고 잃어버린 노나라 영토가 5백 리 였습니다. 만약 조말이 뒷날을 도모하지 않고 제 목을 찔러 죽어 버리고 말았다면 패전하여 사로잡힌 장군이라는 오명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말은 세 번 패한 치욕을 참고 다시 노나라 군주와 뒷일을 도모했습니다. 그래서 제의 환공이 천하 제후를 소집하여 회맹했을 때, 조말은 단검 한 자루의 힘만 믿고 단상으로 올라 환공의 가슴을 겨누면서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목소리 역시 전혀 떨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단숨에 세 번 싸워 잃은 영토를 하루 아침에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제후들을 경악케 했으며 그의 위엄은 오나라와 월나라에까지 당당했습니다.
[결국 연나라로 돌아가야겠구나.]
- 이와 같이 예를 든 두 선비는 작은 치욕을 부끄러워하고 작은 절의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을 죽이면 후세가 없어지고 공명을 세울 수가 없으니 이는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하고 원통한 감정을 버리고 영원히 빛나는 명예를 세웠으며 분노와 감정에 사로잡힌 작은 절개를 버리고 만대에 미치는 공업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업적은 삼왕(三王)과 함께 길이 전하고 그 명성은 천자와 함께 무궁한 것입니다. 그러니 공께서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하여 꼭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변설은 나를 새로이 눈뜨게 하는구나!]
연의 장군은 노중련의 서신을 받아 읽으며 사흘 동안이나 울면서 갈등으로 밤낮을 지샜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연나라로 귀국하려니 이미 연왕과의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제나라에 항복할 생각을 해 보니 벌써 죽여 없앤 제나라 사람이 너무 많아 환영받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그럴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칼질하느니 차라리 내가 내 자신에게 칼질하겠다!]
그는 자살했다. 요성은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전단은 요성을 함락시킬 수가 있었다. 전단은 개선하여 제나라 왕에게 노중련의 업적을 소상히 보고했다. 그래서 제왕은 노중련에게 벼슬을 내리고자 했다. 그러자 노중련은 바닷가로 도망가 숨어 살았다.
[내가 부귀한 몸이 되어 남한테 굴욕스럽게 매여 살기보다는 차라리 빈천한 몸으로 세상을 향해 농지거리나 하면서 자유롭게 살겠다.]
추양(鄒陽)은 제나라 사람이다. 위나라 양(梁) 땅에 노닐면서 원래 오(吳)나라 사람인 장기부자(莊忌夫子: 莊은 姓, 忌는 名, 夫子는 字)와 회음(淮陰)땅의 매승(枚乘: 혹은 枚生)의 무리 등과 교제했다. 또 양승(羊勝)과 공손궤(公孫詭) 등과도 왕래했다. 그런데 양승 등이 추양의 재능을 질투하여 위의 효왕(孝王)에게 중상했다. 대노한 효왕이 그를 옥리에게 넘겨 장차 죽이고자 했다. 추양은 타국에서 나그네로 돌아다니다가 비록 중상으로 갇혔지만 분명히 죄인이라는 악명을 남기고 죽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옥중에서 위나라 왕에게 상서한 것이다.
- 제가 듣기로는 '충성된 자는 군주에게서 보상받지 않는 법이 없고, 신의를 지키는 자는 남에게서 의심받는 법이 없다'고 했기에 저 역시 항상 그런 인물임을 자처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자가 또 무슨 변명을 하려는 건가.]
- 옛날 형가(荊軻)가 연나라 태자 단(丹)의 의로움을 사모하여 단을 위해 진왕(秦王) 정(政)을 찔러 죽이려고 결심했을 때 그 정성은 하늘을 감동케 하여 흰 무지개〔武器를 상징〕가 해〔君主를 상징〕를 꿰뚫었는데도 태자 단은 형가가 가기 싫어서 미적거리는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위 선생(衛先生)이 진(秦)을 위하여 조나라 장평(長平: 山西省)의 승리를 틈타 아예 조나라를 없앨 묘책을 꾀했을 때 하늘은 역시 그 정성에 감동하여 태백성(太白星: 金星, 將軍을 상징함)이 묘성(昴星: 天文區分上 趙에 해당함)을 침범했으나 진의 소왕(昭王)은 아직도 위 선생을 의심했습니다. 형가와 위 선생의 정성은 천지를 움직이는 이변을 나타냈는데도 두 군주는 그들의 성실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저는 충성을 다하고 논의(論議)를 다하여 대왕께서 저를 이해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만 대왕 좌우의 신하들이 밝지 못해 끝내 저는 세상에서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형가나 위 선생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단과 소왕은 그들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과인을 설득시키려는 건가? 어디.......]
- 옛날 변화(卞和)가 초왕에게 보물을 바쳤지만 다리를 잘렸고, 이사(李斯)가 호해(胡亥: 秦의 二世皇帝)한테 충성을 다했는데도 그는 극형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기자(箕子)는 미친 척했고, 초의 접여(接與)는 세상을 피했으니, 이 모두 저런 환난을 맞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변화와 이사의 심정을 깊이 통찰하시고 초왕.호해처럼 중상하는 말을 듣지 마시어 제가 기자나 접여의 비웃음을 받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비간(比干)은 은의 주왕한테 심장을 해부당하고 오자서는 오왕 부차한테 말가죽 자루에 시체가 담겨져서 양자강에 던져졌다'고 들었습니다만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통찰하시어 조금은 저를 불쌍하게 여겨 주십시오.
[불쌍하게 여겨 달라고?]
- 속담에 '백발이 되도록 사귀었어도 새로 사귄 사람 같은 우정이 있고, 길거리에서 만나 수레를 잠깐 세워 놓고 얘기를 나눈 사람도 옛 친구처럼 깊은 우정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에서 온 것입니다. 옛날 번오기(樊於期)는 진에서 도망하여 연으로 갔습니다만 자기 머리를 형가에게 주어 태자 단이 진왕을 죽이려던 계획을 수행하도록 했고 왕사(王奢)는 제나라를 따라 위나라로 갔습니다만 성에 올라 자살함으로써 제나라를 퇴각시키고 위나라를 보존케 하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왕사와 번오기는 제와 진과 새로운 관계도 아니며 연과 위와도 오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두 나라〔秦.齊〕를 떠나 두 인군〔太子母.魏王〕을 위해 죽은 이유는 두 인군의 행위가 두 사람의 뜻에 맞았고 그 의(義)를 사모함이 무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소진(蘇秦)은 온 천하에 대하여 신의는 없었지만 연나라를 위하여 미생(尾生: 愛人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홍수가 났는데도 다리기둥을 붙들고 그 장소에서 죽었다는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과 같은 신의를 지켰으며, 백규(白圭)는 중산국의 장군으로 6개의 성읍을 잃은 패장이 되자 왕이 그를 죽이려 했으므로 위나라 문후(文侯)에게로 도망가 문후의 후대에 느끼는 바가 있어 위나라를 위해 중산국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참마음이 서로 통했기 때문입니다. 소진이 연의 재상이 되었을 때 연나라 사람 중에 소진을 중상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왕은 오히려 칼을 잡고 비방한 자를 꾸짖고 소진을 더욱 후대하여 결제(결제: 名馬名)의 고기를 소진에게 상으로 내렸습니다. 백규가 중산을 공격해 존귀하게 되자 역시 중산인이 백규를 위의 문후에게 비방했습니다. 그렇지만 문후는 오히려 백규를 후대하여 야광의 보물 구슬을 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두 군주와 두 신하는 심장을 터놓고 간을 꺼내 놓아도 좋을 정도로 서로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쯤이면 근거 없이 떠도는 말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인은 미녀이든 추녀이든 상관없이 궁중에 들어가기만 하면 질투를 받게 마련이고 선비라면 현자이든 우자이든 조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질투를 받게 마련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 옛날 사마희(司馬喜)는 다리 잘리는 형벌을 송나라에서 받았지만 중산국으로 가서는 재상이 됐습니다. 범수는 위나라에서 갈비가 부러지고 이빨이 꺾이는 형벌을 받았지만 드디어 진에서는 응후(應侯)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처음에 그렇게는 되지 않으리라는 형세의 계획을 믿고 붕당(朋黨) 간의 사정(私情)을 버리고 고독하게 자신의 위치를 고수했기 때문에 질투하는 사람들의 해를 면할 수갈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은(殷)의 신도적(申徒狄)은 주군을 간하다가 들어 주지 않자 자진해서 황하에 잠기고 주(周)의 서연(徐衍)은 난세를 미워해 돌을 지고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곧 세상에서 용납되지 못하더라도 정의를 지켜 조정에서 도당을 만들어 주군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백리해는 길에서 걸식을 하고 있었으나 진의 목공(목公)은 그에게 정권을 맡겼으며, 영척(영戚)은 수레 밑에서 소를 치고 있었으나 제의 환공은 그에게 국정을 맡겼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조정의 관직에 있으면서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 높이 등용된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마음으로 교감되고 행동이 서로 부합되어 아교나 옷〔漆〕보다 더 친밀해 형제라도 그들 사이를 떼어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니, 어찌 중인의 말 따위에 미혹되었겠습니까. 무릇 한 쪽의 말만 들으면 부정이 생기고 한 사람만 신임하면 난(亂)이 일어납니다. 옛날 노나라는 계손(季孫)씨의 말만 듣고 공자(孔子)를 축출하였고 송에서는 자한(子罕)의 계략만 믿고 묵적(墨翟)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공자나 묵적 같은 변설을 가지고도 참소나 아첨을 면할 수가 없어 노나라 송나라는 위태로워졌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부질없는 소리는 쇠를 녹이고 쌓이고 쌓인 중상 모략은 뼈를 녹게 만듭니다.
[그럴 듯하다!]
- 진나라는 서쪽 오랑캐 유여(由余)를 등용해 중국을 제패하였고 제나라는 월(越)의 몽(蒙)을 기용해 위왕(威王).선왕(宣王) 때의 강성함을 이룩했습니다. 이 두 나라가 풍속에 구애받고 세정에 이끌리며 편파적인 말의 속박을 받았겠습니까. 오직 공정하게 의견을 수렴하고 냉정하게 관찰함으로써 당대에 이름을 드날리던 군주였습니다. 그러니 의기가 투합되면 호족이나 오랑캐 사람이라도 형제가 됩니다. 유여나 몽이 바로 그렇습니다. 의기 투합이 되지 않으면 골육간이라도 축출하고 쓰지 않으니 요(堯) 임금의 아들 단주(丹朱), 순(舜) 임금의 아우 상(象), 주공단(周公旦)의 아우 관숙선(管叔鮮).관숙도(管叔度)가 바로 그렇습니다. 군주들이 참으로 제나라 진나라처럼 의로운 방법을 쓰고 송나라 노나라처럼 편파적인 시책을 물리친다면 오패(五覇)도 칭찬할 것이 못될 만큼 삼왕(三王)의 공업이란 것도 쉽사리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주나라 무왕은 깨달은 바가 있어 연나라 자지(子之) 같은 간신을 신임할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며 제나라 전상(田常) 같은 간신의 현명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은의 충신 비간의 후손을 봉(封)해 주고 은의 주왕이 배를 갈랐던 임산부의 무덤에 묘비를 세웠습니다. 그럼으로 그의 공적은 천하에 떨쳐졌는데 바로 선행을 갈망하는 마음이 끝이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또 진(晋)의 문공(文公)은 그의 원수였던 발제(勃제)와 친근하여 제후 중에서 패자가 되고 제의 환공은 그의 원수 관중을 등용하여 천하를 크게 바로잡았습니다. 그것은 두 인군이 참마음으로 원수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공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민말로 그들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의 심정을 바꿔 놓을 수는 없었겠지요.
[과인이 추양을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
- 그런데 진에서는 상앙(商앙)의 법을 채용해 동쪽으로 한.위를 약화시키는 등 그 군대의 강하기가 천하 제일이었으나 상앙은 끝내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습니다. 월나라는 대부 종(大夫 種)의 계략을 써서 강적인 오왕을 사로잡아 대륙을 제패했으나 끝내 대부 종은 주살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나라의 손숙오(孫叔敖)는 세 번 재상의 지위에서 물러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오릉(오陵, 楚地, 山東省)의 자중(子仲)은 삼공의 자리를 사양해 남의 채소밭에 물 주는 일을 하면서도 흡족해했습니다. 지금 만일 인군이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공 있는 사람에게 보답할 뜻을 품고 있으며, 마음을 털어 놓아 진정을 보이며, 자기를 희생하여 후덕을 베풀고, 끝내 남과 함께 곤궁하고 혹은 영달하며, 선비를 아낌없이 후대하면, 포악한 걸왕의 개라도 성왕인 요 임금을 보고 짖게 할 수 있으며, 도척(盜척)의 자객이라도 성인 허유를 살해하게 할 수가 있으니, 하물며 만승 천자의 권력을 가진 성왕의 경우에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니 형가(荊軻)가 연을 위하여 진왕을 죽이려다 실패해 그의 칠족(七族: 위로 曾祖에서 아래로 曾孫까지)이 몰살한 경우나, 오왕 합려가 왕자 경기(慶忌)를 죽이려 할 때 신하 요리(要離)가 왕자를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 처자를 오왕이 태워 죽이게 한 일들은 대왕을 위하여 거론할 것도 못됩니다.
[그러나 과인을 가르치고자 하는 자를 용서해도 되는 것인가.]
- 저는 '명월주(明月珠)나 야광벽(夜光璧) 같은 보석이 갑자기 자기 앞에 떨어지면 칼을 뽑아 들고 어둠을 노려본다고 합니다. 이유는 누군가가 자신을 시험해 보지 않나 하는 적개심 때문이랍니다. 구불구불 뒤틀린 나무 뿌리라도 만승 천자의 장식품이 되는 이유는 좌우 신하들이 그것에 조각을 하고 아름답게 갈고 닦기 때문이다.'라고 듣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수후(隨侯)의 주(珠: 隨侯가 뱀한테서 얻었다는 珠) 같은 보석을 얻었다 하더라도 원한은 맺을지언정 고맙다는 생각은 갖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재능과 인품을 미리 잘 소개하고 선전해 두면 썩은 나무 뿌리도 값진 물건이 되듯이 그 인상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어떤 곤궁한 선비가 가슴에 요.순의 정도(政道)를 품고 이윤(伊尹)과 관중의 변설을 가지고 용봉(龍逢: 夏의 忠臣)이나 비간(比干: 殷의 忠臣)의 뜻을 품고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려 해도 나무 뿌리를 조각해 군주에게 바치는 자처럼 추천하는 자가 없으니 결국 대왕께서도 저를 보시고 느닷없이 앞에 던져진 보석을 보듯 칼을 잡고 노려보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왕이 천하를 다스리려면 도공(陶工)이 녹로(녹로)를 굴려 뜻대로 그릇을 만들어 내듯이 마음대로 세속을 제어해야 하며 비속하고 문란한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며 대중의 부질없는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진의 시황제가 중서자(中庶子: 官名) 몽가(蒙嘉)의 말을 믿었다가 형가의 비수에 찔릴 뻔했습니다. 주의 문왕은 위수.경수 가로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태공망 여상을 얻어 그 힘으로 천하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시황제는 좌우 신하의 말만 믿었다가 죽을 뻔했으며 문왕은 직감적으로 여상을 등용하여 마침내 왕업을 이룩하였습니다.
[추양 자신이 인재라는 얘긴가?]
- 지금 주군께서는 아첨하는 언사에 탐닉되고 좌우의 신하에 견제되어 큰 뜻을 가진 선비를 마소처럼 대우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포초(鮑초)가 분노하여 부귀의 즐거움을 마다했던 이유가 됩니다. 신이 듣건대, '의관을 정제하고 조정에 들어간 사람은 이욕(利慾) 때문에 의로움을 더럽히지 않으며, 명예를 갈고 닦는 사람은 욕심 때문에 행실을 그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증자(曾子: 曾參)는 승모(勝母: 모친을 이긴다는 뜻)라는 이름의 고을에는 발을 들여 놓지 않았으며, 또 마을 이름이 조가(朝歌:殷의 紂王이 만든 淫樂名)라 하여 묵자(墨子: 墨翟)는 수레를 돌려 가 버렸습니다. 지금 식견이 풍부하고 원대한 포부를 지닌 인사들을 천하에서는 무거운 권력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아첨 좋아하는 좌우의 권신들이 군주의 근처에도 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이 된다면 선비들은 암혈(岩穴) 속에서 묻혀 살다 죽을 수밖에 없으며 즐겨 충성을 바치려고 궁중으로 가는 발걸음은 끊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을 상주한 추양을 어디 불러 보아라.]
그래서 추앙은 옥중에서 방면되었으며 마침내 효왕의 상객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노중련은 비록 그의 주장하는 취지가 대의(大義)에는 부합되지 않다 하더라도 무관무위(無官無位)의 처지에서 선비의 호탕함으로 자신의 뜻을 제후에게 펼쳤으니 그 점 훌륭하게 생각한다. 추양은 그 언사가 불손한 데가 있으나 상대를 설득함에 있어 사물을 비교하고 유례를 열거하는 데는 비상한 것이 많다. 역시 불요 불굴한 위인으로 평가되며 그렇기에 열전에 실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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