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20. 악의열전 樂毅列傳
자기의 계략을 실행해 5개 국의 군대를 연합하였고, 약소한 연(燕)을 위해 강한 제나라에게 원수를 갚아 그 선군(先君)의 치욕을 씻었다. 그래서 제20에 <악의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악의(樂毅)의 선조 중에 악양(樂羊)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악양은 위(魏)나라 문후(文侯: B.C. 424-387 在位)의 장군이 되어 중산국을 정벌했다. 그래서 문후는 악양을 영수(靈壽: 中山國의 地名, 河南省)에 봉했다. 악양이 죽자 영수에 장사지냈으므로 자연히 후손들은 영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중산국이 나라를 회복했지만 조나라 무령왕(武靈王) 때에 다시 조나라가 중산을 멸망시켰다. 바로 이 무렵, 악씨의 후손 중에 악의가 있었다. 악의는 현명했고 특히 병법(兵法)을 좋아했다. 조나라에서 그를 등용했으나 무령왕이 사구(沙邱)의 난으로 죽자 조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다. 그 당시 연(燕)나라에서는 자지(子之)의 난(亂: 자지는 연왕 快의 재상. 연왕 쾌가 어리석어 국정을 자지에게 일임하자 나라는 크게 혼란했다. 이런 틈을 타 제나라 민왕이 연나라를 크게 깨뜨리고 쾌를 죽였으며 자지는 젓을 담갔다)이 일어나고 이 틈에 제가 연을 깨뜨렸으며, 연의 소왕은 제나라를 원망해 복수할 것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연나라는 약소국인데다 대륙 구석으로 치우쳐 있어 그 힘으로는 제나라를 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연왕은 우선 몸을 낮추어 겸손한 태도로 인재를 불러 모았다. 그 중의 한 선비가 곽외(郭외)였다. 이 때 악의가 위나라 소왕의 사자가 되어 연나라로 갔다. 연왕은 악의를 최고의 빈객으로 대우했다. 이에 악의는 아경(亞卿: 上卿 다음 가는 大臣)에 올랐다. 그 무렵 제의 민왕은 강대해져서 남쪽으로 초나라 재상 당말을 중구(重邱: 山東省 聊城縣)에서 깨뜨리고, 서쪽으로 삼진(三晋: 韓.魏.趙)을 관진(觀津)에서 꺾었다. 그런 후 삼진과 힘을 합해 진(秦)을 쳤다. 또한 조나라를 도와 중산국을 멸망시켰으며 송나라도 격파해 천여 리의 영토를 넓혔다. 진나라 소왕과 우열을 다투듯 일시적으로 제(帝)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많은 제후들이 진을 배반하고 제나라에 기울자 제의 민왕은 더욱더 기고만장해졌다. 한편 제나라는 연일 계속되는 침략의 부담 때문에 백성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 때 연의 소왕이 제나라를 칠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악의가 말했다.
[그것은 힘든 일입니다.] [어째서?] [일찍이 제나라는 패업을 성취한 환공의 여광이 남아 있으며 토지는 광대하고 인구는 많습니다. 연나라 단독의 힘으로는 어렵고 굳이 대왕께서 제나라를 치고 싶으시면 조나라 초나라 위나라와 연합해 공동으로 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세 나라를 돌며 동맹을 맺고 오시오.]
그렇게 되어서 악의는 조의 혜문왕(惠文王) 등과 또한 초.위와도 동맹했다. 그런 합종에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교만하고 난폭한 제의 민왕을 제후들이 몹시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의 소왕은 국내 병력을 총동원했다. 악의를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했으며, 조의 혜문왕도 상국(相國)의 인(印)을 악의에게 주었다. 이에 악의는 조.초.한.위.연의 연합 군사를 끌고 제나라를 쳐서 제수(濟水) 서쪽〔山東省〕에서 크게 이겼다. 제후의 군사들이 모두 회군한 뒤에도 악의는 연나라 군사만을 이끌고 제의 임치〔齊都, 山東省〕에 육박했다. 제의 민왕은 제수 서쪽에서 패해 거(거: 山東省)로 도망가 틀어 박혔다. 악의는 정복한 제나라 땅을 순시하며 정령(政令)을 내렸다. 임치로 진입해서는 제의 보물과 재화와 제기(祭器) 등을 탈취해서는 속속 연나라로 보냈다. 연의 소왕은 몹시 기뻐하며 몸소 제수 가까이까지 나가 군사들을 위로하고 상을 주었으며 잔치를 베풀었다. 악의를 창국(昌國)에 봉해 창국군(昌國君)이라 불렀다. 연의 소왕은 전리품을 거두어 연으로 돌아가면서 악의에게 아직 항복하지 않은 제나라 성읍을 치도록 명령했다. 악의가 제나라에 머물며 정령을 내리고 70여 개의 성을 탈취하기를 어언 5년, 그러나 거와 즉묵(卽墨)만은 항복 받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연의 소왕이 죽었다. 그의 아들이 연의 혜왕(惠王: B.C. 278-272在位)이 되었다. 그러나 혜왕은 태자 때부터 악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파직시키려 하고 있었다. 제나라 전단(田單)이 그런 기미를 눈치챘다. 이에 간첩을 풀어 연나라로 보내 이런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제나라 성읍으로 항복하지 않은 곳은 딱 두 곳뿐이다. 그것은 악의가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끌면서 제나라에 머물다가 왕이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혜왕은 악의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그런 소문을 듣자 덜컥 불안해졌다. [악의를 그냥 둔다는 것은 위태롭다. 불러서 죄를 뒤집어씌워야 겠어.] 연의 혜왕은 전격적으로 악의를 장군직에서 파면시켜 버렸다. 대신 기겁을 장군으로 보내며 악의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악의는 귀국하면 주살될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서쪽으로 도망쳐 조나라에 항복했다.
조나라에서는 악의를 관직에 봉하고 망제군(望諸君)이라 칭하여 우대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연나라와 제나라를 위협했다. 군략가 악의가 파면된 것을 안 제나라 전단은 기겁의 군대에게 싸움을 걸었다. 궤계(詭計)로써 연군을 속여 즉묵성 아래서 기겁의 군대를 대파하고 북쪽 황하까지 추격하면서 잃었던 제의 성읍을 모조리 회복했다. 그래서 양왕(襄王)을 거 땅에서 맞아 임치로 되돌아갔다. 연의 혜왕은 뒤늦게 후회했다. 악의를 기겁과 교체한 때문으로 군사가 격파되고 장군을 잃고 제의 땅을 잃게 되었다. 또한 연나라가 피폐한 틈을 노려 조나라가 악의를 기용해 연을 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혜왕은 사신을 시켜 악의에게 달래는 서신을 보냈다.
- 선왕(先王: 昭王)께서는 나라 전체를 장군에게 맡겼었소. 그만큼 장군을 신임했기 때문이며, 또한 장군이 연나라를 위하여 제를 격파하고 선왕의 원수를 갚았을 때 천하에서 장군에 대하여 떨지 않는 자가 없었소. 과인이 어찌 감히 장군의 공로를 하루인들 잊었겠소. 때마침 선왕이 군신들을 버려 둔 채 붕어하시자 좌우 군신들이 새로 즉위한 과인의 판단력을 그르치게 했소. 사실 과인이 장군과 기겁을 교대한 것은 장군이 오랫동안 전쟁터를 돌며 더위와 비바람에 시달리는 것을 안타까워 잠시 귀국해 휴식을 취하도록 하려 했던 조처였소. 그런데 장군은 그 조처를 오해해 연을 버리고 조나라에 귀복해 버렸소. 장군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결단을 내린 일은 좋았을지 모르나 선왕께서 장군을 후대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악의는 연의 혜왕이 보낸 편지를 읽은 뒤 사신을 통해 답신을 보냈다.
- 제가 재능이 없는 탓으로 왕명을 받들어 모시어 좌우 근신들의 뜻을 따르지 못한 채 선왕의 명철하심에 손상을 입히고 족하(足下: 王)의 높으신 덕에 해를 끼칠까 염려되어 조나라로 도망쳐 왔습니다. 지금 족하는 사신을 보내 제게 죄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선왕께서 저를 총애하신 본래의 이유를 살피지 못하고 또 제 선왕을 섬긴 본래의 뜻을 명백히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서면으로나마 대답해 드리는 바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 저는 '현성(賢聖)한 군주는 친근하다는 이유로 봉록을 내리지 않으며, 공로가 많은 자에게만 상을 주고 능히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만 그 관직에 있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고로 사람의 재능을 통찰해 관직을 주는 분은 대업을 성취하는 군주이며, 군주의 행위를 정당하게 논평해 임금을 섬기는 자는 공명을 세우는 선비입니다. 제가 가만히 선왕의 거동을 관찰해 본 결과, 세속의 군주보다 높은 뜻을 지니고 계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자로서의 부절(符節)을 위나라에서 빌려 가지고 연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선왕께선 저를 잘못 발탁하여 빈객 가운데 끼게 하고 뭇신하들의 위에 서게 하며, 일족과 상의함이 없이 아경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제가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만 한편 왕명을 받들고 가르침을 받아 들인다면 다행히 일을 대과 없이 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대왕의 명령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귀국하겠다는 얘긴가 오지 않겠다는 뜻인가?]
- 신왕께서는 제게 명하기를 '과인은 제나라에 대한 원한과 노여움이 크다. 그래서 연나라 국력의 미미함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제를 치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찍이 제나라는 환공이 성취한 패업의 여광이 남아 있으며, 전쟁에 크게 승리한 경험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제를 치시려면 천하 제후와 동맹하여 이를 도모하십시오. 게다가 회수 이북의 옛 송나라 땅은 초나라 위나라가 얻고 싶어하는 땅이며, 조나라까지 동조하여 4개국이 동맹하여 제를 공격하면 크게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옳다고 생각하신 선왕께서는 부절을 마련해 저를 사신으로 보내시어 기어코 군사를 일으키게 만드셨고 또 제를 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실이 있었던가?]
- 하늘의 도움과 선왕의 위광(威光)에 힘입어 하북의 조나라.위나라가 선왕을 따라 제수 가에 모였습니다. 연합군은 명을 받들어 제나라 군대를 대패시켰습니다. 복장을 가볍게 차린 정예병이 먼저 적군을 추격해 가서 드디어 제나라 수도 임치에 이르렀더니 제왕은 겨우 몸만 빠져 나가 거 땅으로 피신했습니다. 한편 제나라의 주옥.재보.전차.무기.진기(珍器) 등의 전리품들을 거두어 모조리 연으로 옮겨 보냈습니다. 제나라에서 가져온 기물은 영대(寧臺 : 燕의 臺名)에 진열하고 대려(大呂: 齊의 種名)는 원영(元영: 燕의 宮名)로 돌아오고, 계구(계丘: 燕都, 河北省, 현 北京)에는 제의 민수(민水: 山東省 萊蕪縣 북동) 가에서 생산하는 대숲이 이식되었습니다. 오백(五伯: 五覇)이라도 선왕보다 더 큰 업적을 세운 분은 없습니다. 만족해하신 선왕께서는 땅을 갈라 저를 봉하여 소국(小國)의 제후에 비길 만한 지위로 오르게 했습니다.
[듣고 보니 악의의 공적은 컸구나.]
- 저는 '현성한 군주는 그 대업이 손상됨이 없이 사서(史書)에 기록되고, 선견지명을 가진 선비가 공명을 이루면 역시 손상됨이 없이 후세에 칭송된다'고 들었습니다. 선왕께서는 보복으로 원한을 씻고, 만승의 강국 제나라를 평정했으며, 8백 년 동안이나 축적해 놓았던 제나라 보물들을 삽시에 거두어들이고, 붕어하신다 하여도 생전의 가르침이 쇠하지 않도록 국사를 담당할 신하가 그 법령을 정비해 적(嫡).서(庶)의 분수를 지키게 했으며, 이런 가르침을 백성에서 노예에까지도 미치게 하여 후세의 교훈이 되게 한 것은 모두 선왕의 덕망 때문이었습니다.
[선왕의 공업을 내가 훼손시켰구나.]
- 저는 또 '시작을 잘한다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시작이 훌륭하다 해서 반드시 끝맺음도 훌륭한 것은 아니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오자서의 의견이 오왕 합려에게 청허되어 초의 국도 영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런데 오왕의 아들 부차는 자서의 의견이 그르다 하여 오히려 죽음까지 내리고 그 시체를 말가죽에 싸서 양자강에 띄웠습니다. 부차는 선왕의 정책을 답습만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서의 시체를 양자강에 가라앉히고도 후회할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서 역시 두 군주의 기량이 같지 않다는 것을 재빨리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양자강에 시신이 빠지는 처지가 되도록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죽음을 모면하고 공을 세워서 선왕의 업적을 밝히는 것이 신하된 자로서의 최상책인 듯하며, 참언과 오욕스런 비방을 받았다 하여 선왕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일은 크게 두려워하여야 할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예측하지 못했던 죄를 입은 신이 요행히 조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침으로써 앞서 범한 죄를 요행으로 면해 보려는 것 같은 행위는 도의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다행이야.]
- 저는 또 '군자는 절교는 할망정 상대의 단점을 말하지는 않으며,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결백을 표명하여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비록 무능하나 자주 군자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다만 왕께서 좌우 군신들의 의견만 경청하신 나머지 저의 행위를 자세히 살피시지 못하게 되시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실례인 줄 알면서도 감히 이 글을 올리는 바입니다.
연의 혜왕은 악의를 해칠 생각을 가졌던 점을 깊이 후회했다. 악의는 즉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연왕은 악의의 아들 악간(樂間)을 창국군(昌國君)에 봉했다. 악의는 그 후 조와 연 사이를 왕래하면서 연나라와도 다시 친했다. 연.조 두 나라에서는 동시에 그를 객경으로 삼았다.
악의는 조나라에서 죽었다. 악간이 연에 거주한 것이 30여 년이나 되었다. 연왕 희(喜: B.C. 254-222 在位)가 재상 율복(栗腹)의 계략을 받아들여 조나라를 치자고 했다. 창국군 악간이 간언했다.
[조나라는 사방의 적국과 싸워 온 경험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싸워도 이길 수가 없으며, 이제까지의 선린으로 보아 쳐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연왕은 악간의 충고를 듣지 않고 지체 없이 조나라를 공격해 들어갔다. 조나라에서는 장군 염파(廉頗)를 시켜 연에 맞서게 했다. 염파는 율복의 군사를 호(河北省 柏鄕縣 북쪽)에서 맞아 대패시키면서 율복과 악승(樂乘)을 사로잡았다. 악승은 악간의 친족이었다. 상황이 난처해지자 악간은 슬며시 조나라로 달아났다. 드디어 조나라가 연을 포위하니 연나라는 땅을 갈라 준 끝에 가까스로 강화할 수 있었다. 연왕은 악간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으나 아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대신 연왕은 조나라에 가 있는 악간에게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냈다.
- 은의 주왕 때의 기자(箕子)는 자신의 의견을 들어 주지 않더라도 왕의 뜻을 거슬려 가면서까지 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소. 상용(商容)도 주왕을 간하며 목적 달성은커녕 몸만 욕을 당했으나 그래도 주왕이 마음을 돌릴 것을 소원했소. 그러나 국정이 어지러워지고 민심이 이반하며 죄수가 멋대로 탈옥하는 사정에 이르자 두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은퇴한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데도 주왕이 걸왕과 같은 폭군이라는 악명을 얻었으나 앞의 두 사람은 충신이며 그 명예로운 이름을 잃지 않았소. 아다시피 그들은 나라를 근심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오.그런데 지금 과인은 어리석긴 하나 주왕과 같이 포악하진 않고, 연나라 백성이 비록 문란하긴 하나 은나라 백성만큼 심하지는 않소. 한 집안에 분쟁이 있으면 서로 성의를 다해 노력해 화합을 모색해야 하거늘 그대는 마치 이웃에다 불평을 선전하는 것처럼 과인을 간하지도 않고 이웃 나라인 조로 도망쳐 가 버리니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닌 듯하오.
그러나 악간과 악승은 연왕이 애초 계략을 듣지 않고 충언을 마다한 사실만 원망하면서 끝내 조나라에 머물고 말았다. 조나라는 악승을 봉하여 무양군(武襄君)으로 삼았다. 그 이듬해에 악승과 염파가 조나라를 위하여 연나라를 포위했다. 놀란 연나라가 후한 예물로 조나라에 조공해 왔으므로 그제서야 조는 포위를 풀어 주었다. 그 5년 후에 조나라의 효성왕이 죽었다. 조의 양왕(襄王 : 悼襄王)이 서자 염파를 대신해 악승을 장군으로 삼았다. 이에 화가 난 염파는 악승을 습격하니 악승은 대패하여 달아나고, 염파 역시 조나라에 머물 수가 없어 위나라로 망명해 들어갔다. 그 16년 후에 진나라는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다시 20여 년 뒤에 고제(高帝: 漢의 高祖, 劉邦)가 옛적 조나라 땅을 지나가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근신에게 물었다.
[악의에게 후손이라도 있었던가?] [악숙(樂叔)이라는 자가 살고 있습니다.] [악의와 어떤 관계냐?] [손자입니다.] [불러 오너라. 현자(賢者)의 자손이다.]
그래서 악숙이 고제에게 불려 왔다. 고제는 악숙을 악향(樂鄕: 河北省 부근)에 봉하고 화성군(華成君)이라 불렀다. 또한 악씨의 일족 중에는 악하공(樂瑕公)과 악신공(樂臣公)이 있었는데, 조나라가 진에 멸망되려 할 때 제나라 고밀(高密: 山東省)로 망명했었다. 특히 악신공은 황제(黃帝).노자(老子)의 학문에 능통하여 제나라에서는 명성이 높은 현사(賢師)로 칭송되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일찍이 제의 괴통(괴通: 漢楚抗爭時의 說客)과 주보언(主父偃: 漢初의 策士)은 악의가 연왕에게 회답한 글을 읽을 때마다 읽기를 멈추고 울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한다. 악신공은 황제.노자의 학문을 배웠다. 그 학문의 조사(祖師)는 하상장인(河上丈人)이라는 인물인데 그의 내력은 알 수 없다. 하상장인은 안기생(安期生)을 가르치고, 안기생은 모흡공(毛翕公)을 가르치고, 악신공은 합공을 가르쳤고, 합공은 제나라 고밀(高密).교서(膠西)에서 그 학문을 전수해 조상국(曺相國: 曺參)의 스승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