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17. 위공자열전 魏公子列傳
부귀한 몸으로서 빈천한 선비들에게 겸손했고 현명하고 유능한 인물이면서도 못난 사람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은 오직 신릉군(信陵君)만이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17에 <위공자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위나라 공자 무기(無忌)는 위 소왕(昭王)의 막내아들이며 위나라 안희왕(B.C. 276-243 在位)의 배다른 아우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자 왕은 공자(公子)를 신릉군에 봉했다. 그 즈음에 범수(范수)가 위에서 망명해 진의 재상으로 있었다. 그는 위에 대한 원한으로 자주 진군을 출동시켜 대량(大梁)을 포위하고 화양(華陽) 부근의 위군을 깨뜨려 위장 망묘(芒卯)를 패주시켰다. 안희왕과 신릉군은 이런 사태를 두고 근심하고 있었다. 위공자 신릉군은 사람됨이 인자하고 겸손했다. 현명하거나 불초하거나를 가리지 않고 겸양으로 교제하며 자신이 부귀하다 하여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방 수천 리에서 선비들이 삼천씩이나 모여드니 인근 제후국들은 위공자의 명망이두려워 감히 군사를 출동시키지 못하고 있음이 어언 십 년이었다. 어느 날 공자는 왕과 쌍륙(雙六)을 놀고 있었다. 병사 하나가 뛰어들어 황급히 고했다. [북방 국경으로부터 봉화가 전해졌습니다!] [무어라고?] 왕은 화들짝 놀랐다. [조나라 군대가 내습해 방금 국경선을 돌파하려 한다는 신호인 듯 싶습니다.] [야단났구나! 어서 대신들을 소집해 위급에 대처해야지!] 왕이 수선을 피우는데도 위공자는 꿈쩍도 않고 앉아 있었다. [신릉군은 걱정도 아니 되오!] 왕은 역정을 내었다. [전연 걱정하실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이 쳐들어왔는데도 걱정이 아니 되다니!] [침공이 아닙니다. 조나라 왕의 사냥 행차일 뿐입니다.] [설마!] 얼마 후 다른 병사가 들어와 아뢰었다. [조군의 침공이 아니라는 전달이 뒤따라 도착했습니다. 왕의 사냥 행차였답니다.] 위왕은 대경실색했다. [공자, 그대는 그런 사실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소!] [그야 간단하지요. 그 정도 적의 움직임쯤이야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알 수 있지요.] [그게......!] [신의 식객 중에 조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소상히 보고해 주는 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 놀라시고 노시던 쌍륙이나 계속하시지요.]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위왕은 공자의 현명함과 능력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로 인해 공자에게는 국정을 더더욱 맡길 수가 없었다.
후영이라는 나이 칠순의 숨은 선비가 있었다. 그는 이문(夷門: 東門)의 문지기였다. 공자가 그의 현명함을 듣고 후한 예물을 준비해 가서 빈객으로 초청하려 했다. [스스로 몸을 닦아 행실을 바로 하며 수십 년을 지내왔습니다. 제가 곤궁하다 하여 새삼스레 공자의 재물을 받다니요. 사양하겠습니다. 그 대신.......] 후영은 공자가 비워 둔 수레의 상석(上席)인 왼쪽으로 스스럼없이 올라탔다. [제 친구가 저잣거리의 푸줏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주해(朱亥)라는 친구인데 쓸 만합니다. 곧장 만나러 가시지요.] 공자는 말고삐를 더욱 공손하게 잡아 후영의 제의대로 시장으로 말을 몰았다. 그런데 후영은 공자를 무시하고 말에서 내려 주해와 오랫동안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오히려 공자의 시종들이 공자의 온화한 안색을 살피며 욕들을 했다. [도대체 저 문지기 늙은이와 개백정이 뭐가 대단해서 주인님은 저토록 겸손을 떠는가.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저 방약무인한 태도를 짓뭉개고 싶다만.......] [글쎄 말일세. 지금 집에서는 장군과 재상과 왕족과 빈객들이 잔칫상 앞에서 술잔을 들고자 주인이 돌아오기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래도 공자는 모른 척 말고삐를 잡고 있었다. 후영이 한참 후에 공자 옆으로 돌아왔다. 미안해하는 태도가 전연 없었다. 공자의 집으로 왔을 때는 이미 잔치 자리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그제서야 후영은 공자 앞으로 와서 축수한 뒤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제가 저지른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새삼스레 무얼.......] 공자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그러시다면 낮의 저의 무례를 용서받은 것으로 알겠습니다.] [한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주해라는 푸줏간 주인과 주고받는 얘기를 얼핏 엿들으니 대단한 내용이 아닌 것 같습디다. 그러함에도 바쁜 저의 마차를 굳이 막아 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지요?] [공자님을 시험해 본 것이었습니다. 어떤 인품이신가 하고요.] [시험을?] [저는 이문의 문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수레와 말을 이끌고 수많은 눈들이 보고 있는 곳으로 친히 왕림해 주셨습니다.] [대단한 수고도 아닌 걸 가지고.......] [그렇지 않습니다. 범인으로는 감히 행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누추한 시장 바닥으로 모셔가서 그것도 오랫동안 서 계시게 했습니다. 다른 분들 같으면 화를 내곤 그냥 돌아갔을 겁니다.] [현명한 선비를 모시려면 그 정도의 괴로움쯤 마다해서는 안 되지요.] [보잘 것 없는 장터의 많은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그 자들은 저와 주해가 누구인 줄 알며, 마차 위에 서 계신 분이 누구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을 테지요.] [그것은 공자님의 명예를 높여 드리기 위해서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명예를 높이다니요?] [저자의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를 보고서는 소인배라 수군거렸고 공자님은 성인이시라며 더욱 공손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니 공자님의 명예를 더욱 높여 드린 겁니다.]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저의 명성을 높여 주신 선비님의 깊은 심중은 헤아릴 길이 없소이다.] [차제에 한 가지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부탁이십니까?] [낮에 들렀던 푸줏간이 생각나십니까?] [주인이 주해라 하셨던가요?] [그는 현자(賢者)입니다. 백정이라고 해서 예사로 보셔선 아니됩니다.] [빈객으로 모실 테니 소개시켜 주시지요.] [세상이 그를 알아 주지 않지만 주해는 오히려 자신의 무명(無名)을 즐기며 살고 있기로 굳이 세상으로 나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가서 간절히 부탁해 보지요.] [성격이 다소 괴팍해서 공자님께 무례하게 굴지도 모릅니다.] 후영의 권고도 있고 해서 공자는 여러 차례 주해를 찾아갔다. 그러나 주해는 공자의 빈객이 되어 주기는커녕 말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내 부덕의 소치일 따름이다.] 공자는 괴이쩍게 생각하며 항상 빈 수레로 돌아오곤 했다.
위나라 안희왕 2년에 진나라 소왕이 조나라 장평의 군대를 격파하고 한단을 포위해 들어왔다. 하필 조나라 혜문왕의 아우인 평원군의 부인이 공자의 누이였다. 평원군은 위나라 왕과 공자에게 편지를 띄워 조나라를 구원해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 이에 위나라 왕은 장군 진비(晋鄙)에게 십만 대군을 주어 조나라를 구원케 했다. 이를 알게 된 진나라 왕은 위나라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협박했다. [잘 들으시오. 우리로선 국력을 기울여 조나라를 공격해 이제 내일 아침이나 저녁쯤이면 조의 항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소. 차제에 무엇 때문에 위나라가 나서서 우리 앞길을 막는단 말이오. 대왕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만일 조나라를 구원하는 나라가 있다면 조나라를 친 후 반드시 구원해 준 나라로 군대를 돌려서 쑥밭을 만들어 놓고 말겠다고 하셨소이다.] 위왕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진나라 사자의 위협에 놀라 진비의 진격을 멈추게 한 뒤 업(업) 땅에서 누벽(壘壁)을 쌓고 기다리게 했다. [조나라를 구원하는 척하고 관망만 하고 있거라. 양쪽의 전세를 가늠하고 있다가 결정할 일이다.] 그것이 위왕의 전략이었다. 조나라는 풍전등화였다. 그렇게 되자 매제인 평원군은 처남인 위공자에게 관개(冠蓋: 네 필의 말이 끄는 높은 벼슬아치의 수레)를 보내어 책망하고 애소했다.
- 제가 위공자의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은 공자께서 숭고한 의리를 가지신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남의 곤궁함을 보시고 재빠른 구원의 손길이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한단은 지금 당장 진나라에 항복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자를 수찰 보내어 이 쪽의 위급을 알렸는데도 구원군이 도착하지 않으니 도대체 어찌 된 영문입니까. 위공자의 드높은 명예와 의리는 어찌되었습니까. 이대로 조나라가 망하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설사 공자께서 위나라를 가볍게 여겨 진나라에 항복하도록 둔다 하더라도 공자의 누이의 처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이가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위공자는 다급했다. 위왕을 설득하러 갔다. [조나라가 망하면 위나라도 위험합니다.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조나라를 구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위왕은 요지부동이었다. [남의 나라 도와 주려다가 내 나라 망하는 꼴을 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소. 게다가 나라가 위태로운데 여인 하나쯤 희생되는 게 무어가 그리 대수요. 나는 진나라가 두려워 공자의 요청을 들어 줄 수가 없단 말이오.] 왕궁을 물러나오며 위공자는 비장한 음성으로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나 혼자 살기 위하여 조나라의 멸망을 외면할 수는 없다. 나의 의지에 찬성하는 빈객들이 적어도 몇 명은 있을 것이다. 원군은 될 수 없더라도 수레 몇 대 몰아가서 진나라에 대항해 싸우다 죽을 일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명예와 의리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거늘.......] 위공자가 단신 구원병으로 출진한다는 소문은 삽시에 퍼졌다. 밤이 되었을 때 후영이 가만히 찾아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공자께선 혼자 싸우러 나가신다죠.]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왕께선 허락을 내려 주시질 않고 저로선 의리를 지켜야 하며.......] [진정 공자께선 진나라 군대에 부딪치려 하십니까?] [옥쇄(玉碎)하는 길만이 저를 지키는 길인 줄 압니다.] [그건 마치 굶주린 범에게 고기를 던져 주는 것과 같은 행동이실 텐데요.] [도무지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해야겠지요.] [공자께서 선비를 우대하신다는 명성은 천하에 다 퍼져 있습니다. 이제야말로 대우받아 온 선비가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 [무릇 전쟁터에서는 선비가 필요 없지요.] [아닙니다. 기책(奇策)은 선비가 마련하는 법입니다.] [누가 기책을 마련해 주겠다고 하던가요?] [저를 우대해 주시고 무례조차 괘념치 않으시던 공자님을 위해 제가 묘책을 하나 선사하겠습니다.] [묘책이 있겠습니까?] [장군 진비의 병부(兵符)가 대왕의 침실 안에 간수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사실입니다. 그렇대서 그게 묘책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지금 왕의 총애를 가장 확실히 받고 있는 여인이 여희(如姬)라고 들었는데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희만이 대왕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므로 의심받지 않고 마음대로 왕의 침실을 드나들 수가 있습니다. 여희만이 그 병부를 훔쳐낼 수가 있지요.] [병부를 훔친다...... 여희가 들어 줄 턱이 있겠습니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자께선 잊으셨군요. 여희에게 은혜를 끼치신 일을.] [제가요?] [여희의 아비가 사소한 시비 끝에 어떤 불한당놈한테 피살되었지요.] [그랬던가요?] [원수를 갚아 줄 사람을 삼 년씩이나 찾고 있었지만 아무도 여희의 원수를 갚아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대왕께서도 여희의 탄원을 무심코 들어 넘겨 버리셨으니까요.] [그토록 원통한 일이.......] [그런데 기어코 대신 원수를 갚아 주는 인물이 나타났었지요.] [그가 누구입니까?] [선한 일을 하시고도 한사코 잊으셨습니까? 바로 공자께서 하신 일입니다.] [제가요?] [여희가 공자님을 찾아가서 울부짖으며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자 공자께서는 흔쾌히 여희의 소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 불한당의 죄를 물어 목을 베었습니다. 기억이 나시는지요?] [듣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구려.] [공자님을 위해서라면 여희는 틀림없이 목숨이라도 바칠 것입니다.] [설마.......] [가만히 불러 부탁을 해 보십시오. 반드시 병부를 훔쳐 줄 것입니다.] [사태가 다급해 여희에게 부탁은 해 보겠습니다만...... 만일 병부를 얻는다고 가정했을 때는 어떻게 하지요?] [곧장 가셔서 진비의 군대를 탈취하십시오. 북으로는 조나라를 구원하고 서쪽으로는 진의 군대를 몰아내니 이는 오패(五覇)가 세웠던 공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위왕을 위해서는 충신이고 조나라에 대해서는 대공을 세운 격이 되나 위왕을 배반하는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찌했건 일이 다급하니 주신 가르침대로 해 보겠습니다.] 후영이 일러준 대로 위공자가 여희를 불러 부탁하자 과연 병부(兵符: 군사가 움직일 때 신중히 하기 위하여 왕과 병군을 맡은 지방관 사이에 미리 나누어 가지는 신표)를 훔쳐다 주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공자님께 은혜 갚을 길이 없어 몹시 가슴 답답해하였는데 이제는 한을 풀었습니다. 부디 하시는 일이 성공하기만 바랄 뿐입니다.] 여희는 울면서 절을 올렸다. 공자가 길을 떠나려 하자 후영이 찾아와 다시 말했다. [장수가 변방에서 적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에는 군주의 명령이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야 그렇게 하는 것이 나라에 이롭기 때문이겠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진비가 공자께서 내민 병부를 자신의 것과 맞추어 보고 꼭 맞아 떨어진다 해도 진비가 공자님께 군사를 양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 땐 어떻게 하지요?] [진비가 대왕에게 사실의 진위를 재차 묻게 될 경우 공자님의 처지는 몹시 위태롭게 됩니다.] [좋은 방책이 없겠습니까?] [진비를 죽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진비를! 그는 충성스럽고 호방한 백전노장이요. 그런 인물을 내 어찌 죽이겠소!] [공자께서는 지금 일을 성사시키시려 하는 겁니까 아니면 일이 뒤틀리게 하시려고 작정한 겁니까? 제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공자님과 가실 인물 하나를 점찍어 두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개백정 주해를 아실 겁니다. 철퇴를 귀신같이 쓰는 천하장사입니다.] [글쎄요. 전날 제가 여러 번 찾아가 빈객으로 모셔 오려 했으나 문전 박대하기 일쑤였는데, 과연 이런 위험한 일에 함께 가 주실까요?] [분명히 가 줄 겁니다. 자질구레한 예절 같은 것은 신경 안 쓰는 괴짜이지만 내심은 의사(義士)입니다.] [그럼 가서 부탁해 보겠습니다.] [부디 잘 다녀오십시오. 저도 마땅히 공자님과 동행해야 될 것이로되 몸이 늙어 오히려 방해만 될 것입니다. 그 대신 공자님께서 떠나신 날짜를 헤아려 진비의 진중에 도착할 때쯤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제 목을 스스로 벰으로써 험지의 동행을 대신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주해는 과연 후영의 말대로 위공자와 동행하는 일을 흔쾌히 승락했다. 드디어 둘은 진비의 진중에 도착했다. [군사를 내게 넘기라 했소.] 공자는 반쪽의 병부를 진비에게 내밀었다. 진비는 병부를 받아 제것과 맞추어 보더니 딱 맞아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많이 수상스런 생각이 드는군요.] [무엇이 수상하오?] [저는 지금 십만이라는 대병을 거느리고 최전선에 배치돼 있습니다.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는 몸인데 공자께서 수레 한 대를 달랑 타고 오셔서 병권을 넘겨 달라 하시니.......] [그럼, 병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얘기요?] [너무나 중차대한 일을 대왕의 칙서도 없이 한 마디 말씀으로 임무 교대를 요구하시니 수상쩍을 수밖에요. 진중에서는 대왕의 명령도 듣지 않을 수가 있지요. 다시 확인해 볼 때까지는 병권을 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말이 많다!] 옆에 섰던 주해가 감춰 온 마흔 근짜리 철퇴를 휘둘러 진비의 머리를 사정없이 깨뜨려 버렸다. 진중이 어수선해지자 공자는 병영에 명령을 내걸었다.
- 부자(父子)가 함께 군영으로 소집돼 온 자가 있거든 아버지된 자는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고, 형제가 있는 경우에는 형이 즉시 귀국할 것이며, 외아들이라면 곧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공양하라.
위공자는 나머지 8만 명의 대군을 질타해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진군은 한단의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조나라 왕과 평원군은 몸소 전선까지 나아가 공자를 맞이했다. 그 때 평원군은 동개를 등에 지고 초라하게 옆에 시립(侍立)해 있었고, 조왕은 크게 두 번 절한 후 말했다. [천하의 현인으로서 자고로 위공자를 따를 만한 의인(義人)은 아무도 없소이다.] 한단성으로 든 지 얼마 있지 않아 위공자가 주둔군에 합류할 즈음 해서 과연 후영이 북쪽을 향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과연 의인이다!] 위공자는 사후 수습을 해야 했다. 죽은 진비의 수하 장수를 불러 명했다. [그대들은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공자께서는?] [나는 귀국할 수가 없소. 생각해 보시오. 나는 진비의 병부를 훔쳐내어 왕의 명령을 사칭해 군사를 움직였고 왕의 충신 진비까지 죽였소. 비록 결과는 좋았다 하나 조나라에는 공훈이 있되 위나라에는 역적이오.] [그럼 저희들끼리만 귀국하겠습니다. 공자께서는 부디 자중하십시오.] 위나라 군대를 돌아가게 한 뒤 공자는 자신의 빈객들과 함께 조나라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왕께서 노발대발하고 계시다 하니 귀국할 수도 없고 이 곳에 머물자니 무료하기만 하고.......] 위공자의 한탄이 조왕의 귀로 들어갔다. 평원군과 상의할 수밖에 없었다. [조나라의 은인을 저토록 홀대해서는 안 될 것 같소. 그 은공을 무엇으로 보상하지요?] [다섯 개쯤의 성읍(城邑)을 내주어 위공자의 것으로 봉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거 괜찮은 생각이오. 그렇게 합시다.] 위공자는 그 소식을 듣고 내심 기뻐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은공이 있는 자에게 봉작이 없을 수가 없지!] 주해가 그 소리를 듣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무지 말이 없던 주해의 행동이라 위공자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언잖은 표정을 지으시오?] [자, 들어 보시오. 이 불초 주해가 죽음을 겁내지 않고 공자님을 수행해 온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대개 일에는 결코 잊어선 안 되는 일이 있고 절대로 잊지 않아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 잘못 행한 게 있소?] [누군가가 공자께 덕을 베풀었다면 그것이야말로 공자께선 잊어선 안 될 일이고 만일 공자께서 누군가에게 덕을 베풀었다면 그야말로 잊어 버려야 되는 일입니다.] [그건.......] [조나라가 5개 성으로 공자께 봉한다고 했을 때 공자께서는 교만한 마음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셨습니다.] [봉읍을 받아서 안 될 일이라도 있겠소?] [되묻겠습니다. 공자께선 조나라의 봉읍 때문에 생명을 건 이 일을 감행했습니까.] [일에는 마땅히 보상이 따라야 하거늘.......] [공자께서는 우선 위왕의 명령을 사칭하여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위에 대해서는 반역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천하의 현인들은 아무도 공자의 반역을 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의로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조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조나라를 위한 공훈을 내세우고 조나라로부터 봉읍을 받아 보십시오. 의로움은 없어지고 탐욕만 남게 됩니다.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대의 말씀이 옳소. 내가 잘못 생각하였소.]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조왕은 계단을 청소하고 공자를 맞아 귀빈 대접을 하며, 최고의 예우가 되는 서쪽 계단을 오르도록 했다. 만일 서쪽 계단을 밟아 오르기만 하면 봉읍을 받겠다는 의미가 되는 터였다. 그러나 위공자는 굳이 사양하며 한사코 동쪽 계단을 통해 당으로 올랐다. 뿐만 아니라 위공자는 조왕의 의중을 미리 읽고 있었으므로 봉읍을 내리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했다. [제게 지나친 예우를 하실 생각일랑 마십시오. 분명히 저는 고국 위나라에 대해서는 반역을 저지른 몸입니다. 조나라에 대한 은공 역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진나라의 침공을 막은 일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공훈이 아니라 의(義) 때문입니다. 제가 만일 봉읍이라도 받았다간 두고 보십시오. 천하가 저의 탐욕을 간파하고는 웃을 것입니다.] 조왕은 밤이 깊을 때까지 술심부름을 하면서도 차마 다섯 성을 바치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위공자의 명성은 그로 인해 더욱 높아지고 많은 빈객들이 그의 당하로 모여들었다. 조왕은 호(호: 河北省 柏鄕邑, 趙邑) 땅을 주어 공자를 시중드는 읍으로 삼게 했다.
한편 위나라로부터는 뜻밖에도 신릉(信陵: 河南省 寧陵縣, 魏邑)의 땅을 위공자에게 봉해 주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이는 필시 나를 끌어들여 죽이려는 유인책이다. 속을 내가 아니지.......] 끝내 위공자는 조나라에 눌러앉았다. 어느 날 주해가 말했다. [가까운 곳에 모공(毛公)이라는 처사와 설공(薛公)이라는 처사가 살고 있는데 모두 현인들입니다. 만나 보시지요.] [그들은 어떤 사람이오?] [현인은 함부로 얼굴을 내놓지 않지요. 모공은 도박꾼들과 친하며 설공은 술꾼과 친해 작부에 얹혀 산답니다.] [알 만하오. 후영이 장돌뱅이였고 주해가 개백정이었지만 천하의 현인이었던 것처럼.] 위공자를 따라 주해도 모처럼 웃었다. 공자가 어렵게 어렵게 모공과 설해를 만나 교우를 시작하자 그들이 크게 마음에 들어 몹시 흡족해했다. 그 때문에 공자는 술판과 도박판에서 소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행적이 평원군의 귀로 들어갔다. 위공자의 누이인 그의 아내에게 평원군은 언짢은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여보시오, 부인. 그대 남동생 위공자 말이오. 내가 듣기론 천하에 맞수가 없을 정도의 현인이라 들었는데 실상은 형편없는 인물인 듯하오.] [왜 그러시는지요....... 제 동생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친구를 보면 그의 인품을 안다고 했소. 그대 동생은 도박꾼과 술장수 따위와 교류를 한다니 말이오. 혹시 당신 동생이 망령든 것 아니오?] [그런 행동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그를 만나 단단히 타이르겠습니다.] 누이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은 위공자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님, 평원군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저는 누님께 작별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평소에 저는 평원군이 현명한 인물이라고 들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의인이라고 모두들 말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멀리서 평원군을 존경했으며, 위왕을 배반하면서까지 그를 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의 명성이 허명임을 알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사람 사귀는 것을 보면 압니다. 그는 현명한 선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 있고 부귀한 인물들하고만 교류하더군요. 심지어 저의 옳은 교류를 부끄럽게 여겨 비방하시니 차제에 오히려 제가 평원군과의 교류를 끊겠습니다.] 부인은 곧장 위공자의 말을 평원군에게 전했다. [무어? 오히려 내 충고를 비방하더라고?] 처남 매부 사이에 오고 간 설전의 내용들이 사방에 알려졌다. 그 때부터 천하의 선비들은 더욱 위공자의 문하로 모여들었고 심지어 평원군의 빈객들 중 반 이상이 위공자의 문하로 옮겨가 버렸다. [처남, 아니 위공자. 내가 잘못했소. 이렇게 관을 벗고 사죄하겠소. 제발 떠나지는 말아 주오!] 그러나 한 번 떠난 인심은 좀처럼 되찾을 길이 없었다. 위공자가 조나라에 머문 지 그럭저럭 10년이 되었다. 천하의 정세도 어지럽게 뒤바뀌고 있었다. 진나라는 위명을 떨치는 위공자가 조나라에 있으므로 감히 그쪽은 치지 못하고 군대를 동진시켜 끊임없이 위나라를 공격했다. [큰일이다! 공자의 명성이 그토록 무거운 줄 몰랐다. 신릉군으로 봉했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니 이를 어이할꼬. 진나라의 공격을 막으려면 어서 공자가 돌아와야 될 텐데.......] 위왕은 사신들을 계속 보내어 공자의 귀국을 간청했다. [천만에! 나는 귀국하지 않겠다. 내가 귀국하는 날 전날의 배신을 빌미삼아 즉각 처형할 것이다. 여보게들, 만일 내 집으로 위나라 사신을 들어놓으려거든 죽음을 각오해야 될 것이야. 뿐만 아니라 내게 위나라로 돌아가기를 권하는 자도 같은 인간으로 치부하겠다.] 위공자의 단언이 하도 서슬이 퍼랬으므로 귀국 권유자가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 때 모공과 설공이 찾아들었다. [위공자께서는 어째서 서둘러 귀국하지 않으시지요?] 뜻밖의 질타에 공자는 어리둥절해졌다. [저더러 사지(死地)로 돌아가란 말씀이오?] [의롭게 죽을 자리를 가리기 때문에 그는 의인이오.] [무슨 뜻이오?] [공자께서 지금 천하에 이름이 높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르겠소.] [조나라에서 존중받는 이유는 또 나변(那邊)에 있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실 참이오?] [공자의 명성이 높은 것은 배후에 위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위나라가 위급한데도 공자께서는 귀국을 미루고 계시니 하도 답답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건.......] [만일 진나라가 대량을 공격하고 선왕의 종묘라도 파괴해 버린다면 공자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위국의 병부를 뺏어 조나라를 도울 적에는 두렵지 않으셨습니까? 의인은 죽을 자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의인이며 그 때문에 천하에 이름이 드높은 것입니다.] 공자는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내가 어리석었소. 서둘러 귀국하겠소이다.] 마차를 몰아 위나라로 돌아가면서도 공자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 죽음의 명분을 알고 있으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위나라 왕은 공자를 보자 우선 울음부터 터뜨렸다. [오오, 공자. 과연 돌아와 주었구려. 전날은 내가 잘못했소. 천하에 부끄러움이 없는 그대의 의로움은 생각 못 하고 작은 배신만 섭섭해 했구려. 자, 어서 상장군(上將軍)의 인을 받으시구려.] 공자는 모공과 설공의 귀국 충고를 속으로 한없이 고마워하고 있었다. 위나라 안희왕 30년 때였다. 공자는 제후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자신이 상장군이 되었음을 알렸다. [위공자는 천하의 의사(義士)이시다. 어서 군대를 보내어 그를 도와야 한다!] 공자는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하외(河外: 黃河의 서쪽)로 나가 진장 몽오(夢오)를 패주시켰다. 승승장구한 위공자는 진나라 대군을 추격해 드디어 함곡관에 이르렀다. 그 때 이후로 진군은 함곡관을 감히 나올 수가 없었다. 그 무렵에 공자의 위세는 천하에 떨쳐 제후의 빈객 중에서 공자에게 병법을 바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묶어 위공자 병법(魏公子 兵法)이라 스스로 이름지었다. 진왕은 위공자가 존재하는 한 함곡관 밖으로 진격할 수가 없었으므로 공자의 손에 죽은 진비의 빈객 하나를 매수했다. [금 십만 근을 풀어 줄 터이니 어떻게 하든 위왕과 공자 사이를 이간시켜라.] 빈객은 부지런히 공자에 대한 좋지 않은 헛소문을 퍼뜨려 드디어 왕의 귀에도 공자를 의식하게 하는 말이 들어갔다. [대왕, 요상스런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무언고?] [공자께서는 10년 간이나 조나라에 망명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거기서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계략을?] [그는 지금 위국의 상장군이며 제후의 장군들 역시 그의 휘하에 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 [제후들은 오로지 위의 공자 말씀만을 듣지 대왕의 말씀은 듣지 않습니다.] [설마.......] [공자의 명성만을 알고 대왕의 존재는 안중에 없습니다. 공자께선 이런 때를 이용해 남면(南面)하여 왕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럴 리가.......] [제후들도 공자의 위세나 인품을 존경하여 힘을 합쳐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까지 있습니다.] [모략이 아니겠소?] [부디 누군가의 모함이기를 바라지만 우환은 그 싹이 자라기 전에 제거하는 게 옳다는 말도 있습니다. 최소한의 조치로 그의 병권이라도 빼앗아 버리십시오.] 위왕이 긴가민가하여 망설이고 있을 때 진나라에서는 축하 사절을 보내 왔다. [현명하신 공자께서 왕으로 등극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가지 예물을 가지고 축하하러 왔습니다.] 이쯤 되자 위왕도 공자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뭇거려선 안 되겠다. 그의 대장인을 뺏어 버려야지.] 그렇게 되어 상장군은 교체되었다. 공자는 중상 모략에 의해 대장군에서 떨어진 사실을 감지하고 이후로는 신병을 구실로 왕이 불러도 입조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공자는 빈객들과 더불어 인심을 한탄해 밤낮으로 통음하며 여색에 탐닉했다. 그렇게 살아가기를 4년, 그의 몸이 지탱될 리가 없었다. 마침내 공자는 술병으로 세상을 등진다. 바로 그 해에 위의 안희왕도 죽었다. 진나라는 위공자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즉시 몽오를 시켜 위나라를 공격했다. 20여 개 성을 함락시킨 몽오는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그 후로 진나라는 위나라를 잠식해 들어가서 18년 뒤 위의 가왕(假王)을 사로잡고 대량을 도륙했다. 한(漢)의 고조 유방이 아직 어리고 미천할 때 공자의 현명함에 대하여 자주 들었다. 그 때문인지 천자의 위에 오르면서도 대량을 지나칠 적마다 공자를 위해 언제나 제사를 지냈다. 고조 12년에는 경포(경布)를 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섯 집의 묘지기를 두고 대대로 공자의 제사를 해마다 사철 받들게 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천하의 공자들 중에는 많은 선비와 즐겨 교유한 이들이 많다. 그러나 위공자의 명성이 제후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던 것은 이유가 있다. 신릉군은 초목이나 저잣거리에 숨어 살거나 떠도는 은자나 현자와 교유하고 그 신분이 낮고 비천한 이들과 만나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실천에 옮겼다. 그들과의 만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그의 명성은 결코 허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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