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16. 평원군.우경열전 平原君.虞卿列傳
조나라 평원군은 한나라 상당의 태수 풍정(馮亭)과 권모술수를 다투고, 초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일으켜 국도 한단을 진군의 포위에서 구출해 군주 조왕의 제후에 대한 명성을 회복시켰다. 그래서 제16에 <평원군.우경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평원군 조승(趙勝: 趙 武靈王의 아들이며 惠文王의 아우)은 조나라의 여러 공자(公子)들 중의 하나다. 여러 공자들 중에서 승이 가장 현명했다. 빈객을 좋아해 그의 집에는 수천 인이 모여들었다. 평원군은 조의 혜문왕(惠文王: B.C. 298-266 在位)과 효성왕(孝成王: B.C. 265-245 在位)의 재상이 되고 세 번이나 재상 자리를 떠났으나 세 차례 다시 재상 자리를 회복했고, 동무성(東武城: 河北省 淸河縣)에 봉해졌다.
평원군의 저택은 민가를 향한 이층집이었는데 바로 밑으로는 절름발이가 살고 있었다. 평원군의 애첩이 어느 날 아래를 내려다보다 말고 절뚝거리며 우물물을 긷고 있는 그를 보고 깔깔대고 웃었다. 화가 난 절름발이는 평원군의 집으로 쳐들어와서 항의했다. [듣건대, 나리께선 계집을 천히 여기시고 선비를 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그들이 천리를 마다 않고 문하에 모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불행하게도 병신이오나 그건 제 탓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리의 애첩까지 저를 보고 비웃는 실례를 범했사오니 그녀를 벌 주시옵소서.] [그래, 남의 불행을 보고 비웃었으니 그건 결례다. 그녀에게 벌을 주겠다.]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며칠 내로 그녀의 목을 자를 줄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속으론 뜨끔했으나 홧김에 그러는 줄 알고 밝게 웃으며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그래, 목을 자르겠으니 걱정 말고 돌아가거라.] 절름발이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평원군은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미친놈, 기껏 한 번 웃었다는 이유로 남의 애첩의 머리를 요구하다니.] 그 후로 한 해쯤 지나자 그토록 득실거리던 빈객과 사인(舍人: 家臣)의 반 이상이 문하로부터 떠나 버렸다. 평원군으로서는 괴이쩍은 일이라 마악 떠나려는 빈객 하나를 붙들고 물었다. [나로선 여러분을 대함에 있어 일찍이 결례한 적이 없기로 어찌하여 떠나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지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는 계집을 선비보다 더욱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무슨 얘기요?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공자께선 애첩의 목을 베겠다는 절름발이와의 약속을 어기셨고, 두 번째는 애첩을 신의보다 더욱 아까워하시니 이는 선비를 업신여김과 같습니다. 그래서 떠나려 합니다.] 평원군은 크게 뉘우치고 곧 애첩의 목을 베었으며 절름발이를 찾아가 옛일을 깊이 사과했다. 그러자 그의 문하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무렵 제에는 맹상군이 있었고 위(魏)에는 신릉군(信陵君), 초에는 춘신군(春申君)이 있어 뜻하는 바를 위해 서로 힘을 다투어 선비들을 후대했다.
진나라가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초와 합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초나라로 평원군이 가게 되었는데 문무의 덕을 겸비한 빈객 20명과 동행하기로 작정했다고 왕께 아뢰었다. [문사(文辭: 外交)의 교섭으로 성공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일이나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초왕을 협박하는 비상수단을 써서라도 합종을 맺고 돌아오겠습니다.]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얘기요?] [아닙니다. 제 문하의 의혈 식객 스무 명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평원군은 19명을 무사히 가려냈으나 나머지 한 자리에 대해서는 도무지 쓸 만한 인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 때 문하에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있었다. [공자, 일행에 저를 꼭 넣어 주십시오.] 돌아보니 모르는 얼굴이었다. [댁은 뉘시오?] [모수라 합니다.] [스무 명의 교섭단에 들 만큼의 어떤 재주라도 가졌소?] [데리고만 가 주십시오. 대단히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평원군은 속으로 웃고 나서 말했다. [그대는 나의 식객으로 계신 지 도대체 몇 해나 됐소이까?] [한 삼 년 됐습니다.] [삼 년씩이나! 무릇 세상의 현명한 선비란 주머니 속의 송곳끝처럼 금세 드러나는 법이요. 그런데도 그대는 내 문하에 삼 년 씩이나 계셨으면서도 나뿐만 아니라 좌우의 누구도 그대를 알지 못하니 결국 그대에게는 아무 재능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소.] [공자의 주머니 속에 바로 오늘 넣어 달라고 청원했을 뿐입니다. 진작 저를 주머니 속에 넣으셨더라면 송곳 끝만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나왔을 것입니다.] 마땅한 다른 인물도 없었던 데다 모수의 청원이 하도 완강했으므로 일행에 그냥 끼워 넣기로 했다. 그러나 초나라에 도착해서조차 아무도 모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평원군은 합종을 성공시키려고 모수를 뺀 몇 명씩의 대표단을 당상으로 끌고 올라가 열전을 벌였으나 며칠째 결론을 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초나라 합종 반대파들에 의해 협상은 완전한 결렬 위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잠자코 있던 모수가, 기진맥진해서 당하로 내려오는 일행들에게 슬며시 물었다. [오늘도 일은 틀린 것 같소?] 그제서야 모수의 존재를 의식한 다른 일행들이 여전히 조소와 경멸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며 대꾸했다. [완전 결렬이오.] [방법이 잘못됐으니 그렇겠지요.] [무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당상으로 올라가 보구려.] [가야지요.] [원 참, 우리가 번갈아 싸우고도 못 해 낸 일을......!] 대꾸도 않고, 모수는 장검을 허리에 찬 채 당상으로 급히 뛰어 오르며 협상 대표인 평원군에게 외쳤다. [합종의 결론은 이로우냐 해로우냐 딱 두 마디로 요약됩니다. 그토록 간단한 일을 가지고 며칠씩 걸려도 결론을 못 내리니 어찌된 겁니까!] [누구요?] [제 가신(家臣)입니다.] 초왕은 모수를 업신여기며 꾸짖었다. [어서 내려가! 네 주인과 대담하고 있는데 감히 네까짓 게 나서다니!] 초왕의 호통에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이번에는 장검을 휙 빼들며 소리질렀다. [대왕께서 저를 꾸짖음은 초나라의 병사 많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큰 착각이십니다. 지금 열 걸음 안에는 대왕과 저밖에 없습니다. 초나라 병사가 백만이면 무엇합니까. 그러니 대왕의 생명은 제 손안에 들어 있습니다.] [저놈이!] [그토록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제 주군을 대왕께서 무시하는 처사이옵니다. 은의 탕왕은 70리의 땅만 가지고도 천하의 왕이 되었고 주의 문왕은 백리의 땅만 가지고도 천하 제후들을 신하로 복종시켰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위세로 그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지 그의 사졸이 많아서가 결코 아닙니다. 지금 초의 땅은 사방 5천 리에 삼지창을 든 병사가 백만입니다. 대왕의 대업을 충분히 성취할 수 있는 대단한 자본입니다. 천하에 대적할 수 없는 강대함입니다.] [무엇을 말하자는 것이냐.] [진의 애송이 장군 백기(白起)는 불과 수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진나라와 싸운 일전(一戰)에 언.영을 공략하고 이전에 이릉(夷陵: 湖北省 宜易縣 동쪽)을 불사르고 삼전에 선대(先代: 頃襄王)왕의 능묘를 욕보였습니다. 이것은 초나라에게는 백 대가 지나가도 잊을 수 없는 통한의 과거가 아닙니까. 조에서도 초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기고 있거늘 도대체 진을 증오할 줄 모르는 초의 대왕께서는 어찌된 것이옵니까.] [......으음!] [합종하는 것은 초를 위함이지 조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용도 모르시면서 제 주군 앞에서 저를 꾸짖으시니 이 무슨 당치않은 일이십니까.] 한동안 당상에는 침묵이 흘렀다. 큰 신음을 내뱉은 뒤 초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옳소. 선생의 말씀대로요!] 모수는 틈을 주지 않고 물었다. [합종은 결정된 겁니까?] [결정했소.] [그러면 닭과 개와 말의 피(盟約時 天子는 牛馬의 피, 제후는 개.돼지피, 大夫 이하는 닭피를 사용했음)를 가져오게 하십시오.] 초왕은 측근에게 시켜 피가 든 동반(銅盤)을 받쳐들고 오게 했다. 동반이 날라져 오자 모수는 그것을 받아 초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마땅히 대왕께서 입술에 먼저 피를 바르십시오. 합종을 맹약하는 의식입니다. 다음은 저의 주군, 그 다음엔 제가 바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상(殿上)에서의 합종은 맹약되었다. 그런 의식이 완료되자 왼손에 동반을 들고 내려와 19명의 일행들을 불러 말했다. [그대들도 당하에서 이 피를 입에 바르라. 타인의 힘으로 일을 성취한 쓸모 없는 자들이긴 하지만 맹약의 증인들로서는 필요한 의식이다.] 평원군은 무사히 합종을 결정짓고 조나라로 귀국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나는 인물을 다시는 감정하지 않겠다. 내가 지금까지 선비의 관상을 보아 온 숫자는 적어도 일천을 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잘못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노라 자부해 왔다. 그런데 모 선생의 관상은 결정적으로 잘못 본 경우이다. 모 선생이 한 번 초에 가자 조나라를 구정(九鼎: 夏禹氏가 九州의 쇠를 모아 만든 큰 솥. 夏.殷.周 三代의 보물)이나 대려(大呂: 周室의 大鍾으로 天子의 尊位를 象徵)보다 무겁게 만들었다. 모 선생이 한 번 놀린 세 치 혀는 백만 명의 군사보다 강했다. 나는 감히 다시는 인물을 감정하지 않겠다.] 평원군은 드디어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극진히 모셨다.
조의 한단이 포위되었을 때 초의 춘신군이 병사를 이끌어 구원하러 왔고, 위의 신릉군도 군명(君命)이라 속이고 위장 진비(晋鄙)의 군대를 탈취해 조를 구원하러 왔다. 그러나 모든 구원조들이 조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한단이 함락 직전이었을 때 평원군은 뜻밖의 방문객을 맞았다. [한단은 풍전등화 같구려.] [......뉘시오?] [여관 관리인의 아들 이동(李同: 이름이 談인데 太史公 부친의 이름과 같기로 고친 듯하다)이라 합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러 왔소이까.] [급한 불을 끄러 왔습니다.] [그대가 불을?] [저로선 불난 곳을 알 뿐이지 끄는 일은 공자께서 직접하시어야 됩니다.] [어떻게 말이오?] [공자께선 조나라가 망하는 게 걱정스럽습니까.] [조가 망하면 포로가 되어 참형에 처해질 것인데 어찌 걱정이 아니 되겠소.] [저로선 공자께서 천하태평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슬슬 비꼬는 태도가 기분 나쁘고 아주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바쁘오. 할 얘기가 뭐요. 요점만 말하고 물러가시오.] [말씀드리리다. 한단의 백성들은 궁핍의 극치에 있습니다.] [적군이 핍박하니 나라가 황폐할 수밖에 없는 거요.] [말솜씨가 없으니 요점만 말씀드리고 물러가겠나이다. 한단의 백성은 땔감이 없어 죽은 사람의 뼈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식량이 없어 제 자식을 남의 자식과 맞바꾸어 삶아 먹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공자께선 당신의 후궁과 노비가 몇백이 되고 그들 모두가 좋은 쌀밥과 고기를 먹고 비단 옷으로 감싸고 앉아서 거들먹거리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음식은 남아 돌아 썩어서 버릴 지경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이구려.] [백성들은 굵은 베옷도 제대로 해 입지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쌀겨나 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합니다.] [.......] [무기는 다하여 나무를 깍아 창.화살을 만들어 쓰고 있는데 공자께선 종(鍾).경(磬) 같은 것으로 악기를 만들어 풍악을 즐기고 계십니다.] [.......] [진이 조를 깨뜨리는 날 이토록 호화로운 것들은 가지고 계신들 무엇에 소용되겠습니까. 조나라가 안전할 수만 있다면 이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계셔도 무방하겠지요.] [그래서 어쩌자는 얘기요?] [본부인 말고는 첩들을 사졸들 사이에 편입시키십시오.] [그건.......] [쌓아 두신 곡식과 소장하고 계신 모든 보석과 재물을 풀어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십시오.] [그런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겠소?] [적어도 구원군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 보겠소.] 워낙 다급하여 평원군은 이동이 시키는 대로 했다. 뜻밖에도 3천 명의 결사대가 형성되었다. 진나라 군사는 30리를 퇴각했고, 초.위의 군사들이 가까스로 도착해 진나라 군사들은 드디어 물러갔다. 이동은 결사대의 선봉에 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평원군은 슬피 울며 이동의 아버지를 이후(李侯)에 봉하여 이동의 충성스러움에 보답했다.
우경(虞卿)과 공손룡(公孫龍)이라는 선비가 평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지 공손룡이 말을 달려 평원군에게 갔다. [웬일이오?] [한 가지 공자께서 실수하는 일이 있삽기에 서둘러 말씀드리고자 달려왔습니다.] [내가 실수를?] [우경이 다녀갔습니까?] [다녀갔소.] [한단이 포위됐을 때 제후들이 달려와 진군을 물러가게 한 것이 공자의 공로이니 봉읍을 청하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까?] [분명히 우경은 그렇게 말했소.] [그런 충고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옳지 않을 건 또 뭐요?] [당치도 않은 생각이십니다. 대왕께서 공자를 조의 재상으로 등용하신 것이 공자보다 능력 있는 분이 조나라에 다시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일까요?] [글쎄요.......] [동무성(東武城)을 나누어서 공자께 봉한 것이 공께만 공훈이 있고 딴 사람에게는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고 생각지 않소.] [옳게 보셨습니다. 공자가 조왕의 친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전혀 공훈이 없다고는 말할 수가 없겠지요.] [그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공자께서 재상의 인수를 받을 때 스스로 무능하다 하여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봉읍을 대왕께서 증봉해 주시더라도 공께선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양하지 않더라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공이 있으니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지요.] [아니지요. 왕의 친척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는 얘깁니다.] [무슨 얘기요?] [우경의 건의가 나빴다는 말씀을 드릴 참이었습니다.] [글쎄, 그의 건의의 어디가 잘못됐다는 거요?] [우경은 두 개의 저울추를 쥐고 있습니다. 공께서 봉읍을 얻게 되면 그가 건의했기 때문에 일이 성사된 것으로 주장하여 공께 어떤 보수를 요구할 것이요, 실패하더라도 증봉을 청하도록 했다는 허명으로 공께 은혜를 입혔음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럴 듯하오. 허나, 왕의 친척이라고 해서 성(城)을 증봉받지 않는다면 공이 있어도 백성에게 내리는 봉읍 역시 의미가 없는 게 아니겠소.] [아닙니다. 문제는 공께 있습니다. 왕의 친척이다 아니다는 제쳐 놓더라도 상을 받는 일이 하등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되신다면 벌을 받는 경우에도 왕의 인척임을 배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말이 옳소.] 생각 끝에 평원군은 공손룡의 충고를 듣기로 했다.
평원군은 조의 효성왕 15년에 죽었다. 자손이 대신해 섰으나 후에 조나라와 동시에 멸망했다. 평원군은 평소에 공손룡을 후대했다. 공손룡은 견백동이(堅白同異)의 변(辯)을 잘했다. 추연이 조나라에 들러 지극한 도(道)란 과연 무엇인가를 설파하자 그제서야 평원군은 공손룡을 물리쳤다. 우경이 유세하는 선비로 짚신 신고 챙이 긴 삿갓을 쓰고 와서 조의 효성왕에게 유세했다. 한 번 알현하고 황금 백일(白鎰).백벽(百壁) 한 쌍을 받았고 두 번 알현해서 조의 상경(上卿)에 올랐다. 그래서 우경(虞는 封邑名: 河南省)이라 불렀다.
조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진나라와 싸우다가 대패하면서 한 사람의 도위(都尉: 部隊長)까지 잃었다. 조왕이 근심하여 장군 누창(樓昌)과 우경을 불렀다. [이겨야 되는 싸움에서 졌소. 이판사판으로 한 번 붙고 싶은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누창이 먼저 나섰다. [의미 없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차라리 강화하십시오.] 우경도 나섰다. [안 됩니다. 누창의 강화책은 싸워 보았자 우리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강화의 주도권은 어차피 진나라가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난감한 일이오.] [대왕께선 진나라가 조나라 군대를 철저히 깨부술 것 같습니까, 아니면 대충 집적거려 보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되십니까.] [전력투구할 것 같소.] [그렇다면 초.위에 보물을 보내어 우리 쪽으로 붙게 하십시오. 초.위는 응할 것입니다.] [무슨 계략이오?] [우리 사신이 초.위에 입국하면 진나라는 의심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의심을 해?] [혹시 합종을 하지 않나 하고 의심하게 되며 우리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야 강화가 가능하게 됩니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조왕은 우경의 건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평양군(平陽君)과 상의한 뒤 정주(鄭朱)를 강화 사신으로 진나라에 보냈다. 어느 날 조왕은 우경을 불러 조롱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진나라가 우리 사신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는데 이 점에 대해서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두고 보십시오. 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무어라고?] [천하제후의 축하시벌이 모조리 진나라에 가 있습니다. 진의 재상 응후는 정주를 대우하면서 그가 조나라의 강화 사절이라는 사실을 천하에 알릴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대우가 달라지는 게 무어 있겠소.] [우리가 진나라와 강화하는 바를 천하가 알게 되며 그럼으로써 조.위는 우리가 위급해지더라도 구원하지 않게 됩니다.] [조.위가 우리를 돕지 않는다고?] [진과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왜 우리를 돕겠습니까. 그런 약점을 알고 있는 진나라는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강화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 우경의 말이 맞았다. 진군은 진평에서 조군을 크게 깨뜨리고 한단이 포위당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진이 한단의 포위를 풀고 나서였다. 조왕은 조학을 시켜 진에게 6현을 할양하려는 강화 회담을 시도했다. 우경이 서둘러 입궐해 아뢰었다. [대왕, 진의 군대가 한단의 포위를 풀고 간 것은 지쳐서 돌아간 것일까요, 아니면 조나라가 예뻐서 그냥 돌아간 것일까요.] [지쳐서 돌아갔겠지.] [옳습니다. 진은 한단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6현을 진나라에 공짜로 주려 하십니까.] [경의 말이 옳소.] 그런 소식을 들은 조학이 다시 입궐했다. [대왕, 진나라가 다시 침공했을 때 우리의 힘이 부친다면 그 땐 어떻게 하시렵니까. 강화를 하려야 이미 늦습니다.] [6현을 미리 할양하자는 얘기요?] [한나라와 위나라를 보십시오. 그들은 진에 땅을 할애해서 침공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진을 잘 섬기기 때문입니다. 굳이 조나라에만 진이 침범하는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알겠소. 진에 6현을 바칩시다.] 우경이 다시 입궐해 왕께 아뢰었다. [강화하지 마십시오. 정 6현을 할양하실 생각이시라면 미리 내놓을 게 아니라 내년에 침공당했을 때 최후의 협상 조건으로 내놓아도 늦지 않습니다.] 조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을 때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누완(樓緩)이 돌아왔다. [진에게 땅을 주는 것과 주지 않는 것, 둘 중에서 어떤 게 상책인 것 같소?] 왕의 물음에 누완은 사양했다. [신으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사견(私見)이라도 있겠지.] [그렇다면 말씀드려 보지요. 공보문백(公甫文伯: 魯의 季康子의 從父兄弟)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그가 노나라에서 벼슬하다 죽으니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규방에서는 두 여자가 자살했습니다. 문백의 모친은 그 소식을 듣고 아들의 죽음에 대해 소리내어 울지 않았습니다.] [그건 왜 그렇소?] [문백의 유모가 아들의 죽음에 울지 않는 이유를 그 모친에게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자(孔子)는 현인이었는데 노나라에서 쫓겨날 때 다른 제자들은 그를 따라 떠났지만 문백만 쫓아가지 않았다. 그가 죽으니 두 여자가 동반자살했는데 이는 아들의 성품이 덕인(德人)에게는 박정하고 계집에게는 다정했던 것으로 짐작한다. 그래서 울지 않는다'라고 말했답니다. 이 말은 처첩의 입에서 나오면 질투가 되고 모친의 입에서 나오면 혐오가 됩니다.] [그런 일화를 무엇 때문에 얘기하고 있는 거요?] [말의 내용은 같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듣는 사람의 기분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은 지금 진나라로부터 방금 돌아왔습니다. 그쪽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처지에 땅을 베어 주라 말라 하는 바는 기회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사견을 묻지 않았겠소. 듣기 민망하더라도 벌을 주지 않을 테니 의견을 말해 보시오.] [그렇다면 땅을 주십시오.] 우경은 다시 입궐해 누완의 의견을 한사코 반대했고 누완은 다시 왕께 설득했다. [천하의 제후들이 진으로 몰려와 한결같이 선언한 내용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우리는 강자에게 붙어 약자를 누르겠다'였습니다. 진은 강하고 조는 약합니다. 진의 노여움을 사지 마시고 어서 땅을 베어 주십시오.] 우경이 다시 헐레벌떡 입궐했다. [굳이 조나라 땅을 할양할 생각이시라면 제(齊)에게 주십시오.] [제에게?] [제는 진의 심각한 원수입니다. 제는 조의 6현을 얻고 조에게 협력할 것입니다. 조.제 양국은 그로써 전날의 원한을 씻게 되며 두 나라의 합종을 두려워한 진나라가 오히려 조나라에 조공을 바쳐 올 것입니다. 우리는 한.위와 화친을 맺음으로써 진나라의 천하대세에 대한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입니다.] [좋소. 결정했소!] 조왕은 우경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우경의 판단이 옳았던지 우경이 제나라로부터 돌아오기도 전에 진에서는 진사 사절이 왔다. 그 소식을 듣고 누완은 멀리 도망쳐 버렸다. 우경은 공로로 성 하나를 봉읍으로 받았다. 얼마 후 위가 합종하자며 조나라로 사신이 왔는데 조왕은 우경과 상의하자고 했다. 입궐하는 길에 평원군에게도 의견을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위와 합종하는 게 유리하오.] 우경이 입궐하자마자 조왕이 먼저 실토했다. [위나라가 합종하자고 청해 왔소.] [위는 잘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인은 아직 허락하지 않았소.] [대왕께서도 잘못하고 계십니다.] [위도 잘못하고 과인도 잘못했다니, 도대체 무슨 뜻이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함께 일을 도모함에 있어 이익은 큰 나라에 있고 작은 나라는 그 화를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작은 나라인 위나라는 화를 자초하고 있으며 큰 나라인 조나라는 그 복을 스스로 원치 않고 있기에 둘 다 잘못이라고 아뢴 것입니다.] [그런 뜻이었구려. 그러면 합종이 유리하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우경은 조나라를 위해 오랜 봉사를 하다가 위제(魏齊)의 사건으로 만호후(萬戶侯)의 지위와 경상(卿相)의 인을 던져 버리고 위제와 함께 대량으로 도망가서 곤궁하게 지냈다. 위제는 위(魏)의 재상이었는데 진의 범수(范수)와는 원수지간이었다. 범수가 후일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위제의 목을 강력히 요구하자 친구인 조나라의 재상 우경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우경은 위제를 구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함께 대량(大梁: 魏都, 河南省)으로 달아났다가 위제는 자살하고 우경은 불우한 말년을 거기서 지냈다. 우경은 곤궁 속에서도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춘추(春秋)>에서 취하고 근세에서 관찰하며 <절의(節義)> <칭호(稱號)> <취마(취摩)> <정모(政謨)> 등을 지으니 여덟 편이었다. 그 내용은 국가의 득실을 비판한 것으로 세상에서는 <우씨춘추(虞氏春秋)>라 칭한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평원군은 혼탁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재사(才士)이다. 그러나 대국을 통찰하는 지혜까지는 없었다. 세속에 이욕(利慾)은 지혜를 가린다고 했듯이 평원군은 풍정(馮亭)의 간특한 말을 믿어 장평의 40만 대군을 사지에 빠뜨렸으며 수도 한단을 함몰시킬 뻔했다. 우경은 사태를 고려하여 사정을 참작해 조나라를 위한 교묘한 계략을 획책하였다. 위제의 역경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 부귀를 버리고 대량으로 달아나 곤궁함을 자취했다. 그것은 의(義)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경이 곤궁하지 않았더라면 걸작으로 그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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